2016년 1월 1일.



[오늘의 음악] 다시, 시작


 송구영신(送舊迎新). 오래된 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는다는 의미다. 오늘이야말로 그런 날이다. 낡은 해를 버리고 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2015’라는 미래적인 숫자의 조합이 이제야 좀 익숙해질 법 한데, 벌써 2016년이 다가왔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진부하다. 매년 그런 표현을 안 들어본 때가 없는 것 같다. 365일이라는 긴 시간에 많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올 한 해는, 참 다사다난했다.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습격당했다. 롯데가에서는 분쟁이 있었다. 성완종 게이트로 정권의 부정부패가 드러났지만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가 1주기를 맞았다. 메르스가 대유행했지만 정부는 철저하게 무능했다. 국정원이 해킹 프로그램을 구매해 내국인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드러나고, 국정원 직원이 자살했지만, 밝혀진 것은 없었다. 민중총궐기가 열렸지만 정부는 국민의 소리를 무시했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으로 민중을 폭력 진압했다.


 서부전선에서 지뢰가 폭발하고 포격이 벌어졌지만 정부는 피해 장병에게 보상금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고 청문회를 열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지침이 발표됐다. 국회법 파동과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도 빼놓을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내분을 겪었다. 정부가 노동개편에 고삐를 당겼다. 대통령이 국민을 IS에 비유했다. 마지막까지 시끄러웠다. ‘위안부’ 협상이 책임있는 배상 없이 타결되었다. 여야가 선거구 협상에 실패하며 온 나라의 지역구가 무효화됐다.


 나는 2015년 처음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했고, 대학교에 들어왔다. 개인적으로도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은 한 해였다. 많이 배우기도 했고, 무엇보다 많은 글을 쓴 한 해였다.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 대학교 1학년이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 세상이다. 웃으며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언젠가부터 ‘새해’라는 것에 대한 실감이 사라지는 것 같다. 그것이 단지 시간이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졌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화가 많아진 것 같다. 비웃음과 헛웃음을 제외하고는 웃음 지을 기회가 많지 않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된다. 또 한 번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 한 해가 될 것 같다. 결코 기대감에 가득차거나, 희망을 품어보거나 하지 않는다. 절망감이나 처절함과 같은 마음도 없다. 이제는 무뎌진 것 같다. 평범함이 사치라는 것을 너무도 빨리 알아버리는 세상이다.


 어쨌든 새로이 시작되는 한 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란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복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별로 기분 좋은 한 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갈수록 ‘당연한 것들’이 많이들 사라지는 것 같다.


 아무튼 다시 새로 시작되는 한 해도 서로를 붙들고 열심히 버텨 보기로 하자. 때로는 찌질하게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일에 웃음을 터트리고, 때로는 감정을 꽁꽁 숨기기도 하고. 늘 그렇듯 늘 그런 한 해로 서로를 붙잡고 버텨 보자.


 한 해를 보내기 위한 ‘망년회’라는 모임을 많은 사람들이 갖는다. 지난 한 해를 잊어버린다는 의미다. 그래도 너무 많이 잊어버리지는 말기로 하자. 고마워해야 할 일, 미안해야 할 일, 기뻐해야 할 일, 분노해야 할 일. 너무 많이 잊어버리지는 말기로 하자.


 오늘의 음악, N.EX.T의 ‘힘을 내!’로 골랐다.





[오늘의 역사] 중미 관계


 1979년 1월 1일, 중국과 미국이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중미 관계의 역사는 중국이 아직 청나라라는 전제군주제 국가를 유지하고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1700년대 중반부터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의 상인들이 중국 항로 개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84년 2월, ‘중국황제호’라는 배가 중국 무역을 위해 최초로 뉴욕항을 떠났다. 이 배는 8월에 광둥 항에 입항했다. 이 배는 미국에서 모피, 인삼 등을 가져가 중국에서 차,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하며 큰 이익을 봤다. 그러면서 미국 상인들은 중국을 상대로 한 무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중미 무역이 상당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미국은 이후 중국에 진출한 다른 열강과 마찬가지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중국은 미국을 외교 우방으로 대우했으며, 상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사실 중국 내에서 외국인들의 지위가 안정적이지는 못했지만, 미국 상인들은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해 냈다.


 이후 미국은 청나라에 영향력을 가하는 열강으로 성장했다. 태평천국운동이나 아편 전쟁, 의화단 운동 등에서도 미국은 서양 연합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열강으로서의 지위를 얻어냈다. 이권 침탈에도 적극적으로 동조했고, 다양한 권한을 가져가게 되었다. 왕샤 조약 등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 치외법권 등을 인정받기도 했다.


▲ 왕샤 조약이 체결된 마카오 관음당.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은 지방에서 다양한 군벌들이 자신만의 정권을 수립하며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졌다. 다만 중국을 지배하는 공식적인 정부는 쑨원이 세운 ‘중화민국’이라는 정부였고, 미국은 중화민국과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중화민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군벌들을 몰아내고 중국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 일본의 침략 등으로 중국의 정국은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졌다.


 중화민국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미국 역시 두 차례 모두 연합군으로 참전했기에, 양측은 시간이 지날수록 상당한 신뢰감을 쌓고 강력한 우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국이 일본에 대적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기에, 미국과 중화민국은 같은 전선을 공유하며 일본에 대응하기도 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 중국은 일본은 몰아냈다만 이번에는 내분에 휩싸였다.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힘을 합쳤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한 번 분열해 싸움에 접어든 것이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국공 내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권의 맹주였던 미국이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전쟁에서 누구를 지지했는지는 뻔한 일이다. 미국은 비공식적으로 국민당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미국의 의지와는 다르게 국공 내전에서는 공산당이 승리했다.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낸 공산당이, 병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던 국민당에게 기적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미국이 지지하던 국민당은 타이완 섬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했고, 공산당은 중국 본토에 남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식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고, 중화민국과만 외교를 계속했다. 특히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공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냉전의 기류가 조금씩 풀리면서 이들의 관계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1971년 미국의 탁구 선수단이 미국을 방문한 ‘핑퐁 외교’부터 관계가 달라졌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며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 마오쩌둥을 만난 닉슨.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과 국교를 맺은 국가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 모두와 국교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결국 UN은 중화민국을 UN에서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받아들였으며, 미국도 1979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관계를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 이제는 G2라는 이름으로 세계 양강이 되어버린 국가들이다. 이 둘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1979년 1월 1일, 공산주의권의 중국과 자본주의권의 미국이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양측 사이에 다리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 ‘다리’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점이다.





참고 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15년 12월 31일.



[오늘의 음악] 마지막


 벌써 1년 가까이 왔다. “마지막의 시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오늘의 음악]이 벌써 시간을 지나고 지나 “마지막의 마지막”이라고 할 법한 날을 맞았다. 이제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글이 쌓여 있다.


 열 달 동안 글에 치여 살았다. 아침에 한 편, 새벽에 한 편. 생각보다 쓰는 시간은 오래 걸렸다. 아침과 새벽에 일정이 있으니 가운데 낮 시간은 조금 비어 있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어찌어찌 지나가다 보면 그게 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고 뭐 그런 건 아니더라.


 뭐 그렇다고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않을 마음은 없다. 신년이니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지만, 그래도 이런 애매한 포지션이 늘 내 역할인 것을 뭐 어쩌겠나. 또 고민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후회하겠지만, 늘 그런 게 나의 역할이었던 것을 뭐 어쩌겠나.


 아무튼 오늘은 2015년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그리고 다시, 2016년을 시작하는 날이다. 마지막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잊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다시 새로운 시작을 맞는 오늘의 음악, 신해철의 ‘절망에 관하여’로 골랐다.





[오늘의 역사] 예종


 1496년 12월 31일, 조선 8대 국왕 예종이 족질로 숨을 거뒀다.


 ‘예종’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없다. 없는 게 맞다. 예종은 인종에 이어서 조선시대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에 속한다. 고로 기억나는 게 없어야 맞다. 사극 등의 방송과 역사서에서도 세조에서 성종, 연산군으로 넘어가는 데 끼어 있는 군주일 뿐이다. 주목받지 못하는 군주다.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막상 예종이 가진 정치적 역량은 꽤나 괜찮았던 듯 보인다. 예종 시기에 가장 중요하게 떠올랐던 문제는 ‘구(舊)공신 청산’ 문제였다.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던 ‘계유정난’ 때 공신으로 책봉됐던 이들의 힘이 강해지며, 왕권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종은 세자 때부터 이런 정세에 눈을 뜨고 있었다.


 특히나 계유정난 공신들은 왕을 바꾸는 정변을 한 번 일으켜본 인물들 아닌가. 예종 입장에선 그들을 편하게 놔둘 수 없었다. 우선 가장 먼저 예종은 구공신들이 선왕의 묘호로 올린 ‘신종’이라는 묘호를 거부하고 자신이 구상한 ‘세조’라는 묘호의 선택을 강행한다.


 상징적 의미인 묘호를 강행 채택한 것만으로 그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남이의 옥사라고 할 수 있겠다. 세조의 곁에서 대표적으로 빠르게 출세한 인물이 바로 ‘남이’였는데, 바로 그 남이를 일단 병조판서에서 좌천시킨 후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고문 끝에 죽였다.


 신권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이와 같은 일 말고도 그는 내치에도 힘썼다. 병영에 딸려 있는 작은 국가 소유의 땅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정치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또 한 가지, 예종의 업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국대전의 완성이라 할 수 있겠다. 세조 자신이 경국대전 집필을 지시하긴 했지만 뒤로 갈수록 경국대전의 집필은 지지부진하고 있었는데, 이의 나머지 부분 집필을 명령하고 완성시킨 사람이 예조였다. 물론 예조 대에 완성은 됐지만 그의 급사로 공표가 미뤄졌고, 후대인 성종 때에 공표되면서 경국대전의 완성은 성종으로 기록되게 되었지만 말이다.


▲ 경국대전.



 이후 예종은 죽기 전날까지 멀쩡하다가 하루 만에 족질로 사망한다. 족질이라는 것은 발에 난 종기를 말한다. 조선 시대 대부분의 왕이 종기로 죽었으니 그리 이례적인 사인은 아니지만, 워낙 젊은 나이와 갑자기 일어난 죽음에, 한명회가 그를 죽였다는 설도 제기되기는 한다. 근거가 없는 음모론일 뿐이니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다.


 예조의 업적과 태도를 잘 보면 엄격하고 원칙주의적인 군주였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세조는 신하들과 자주 어울리고 벗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예조는 굳이 신하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나쁘게 말하면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죽이고 사소한 부분에 집착하던 왕이지만, 또 좋게 말하면 직관이 있고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부분을 보는 천재형 군주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래저래 신하들에게 인기가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만, 가끔 그가 지배하는 조선의 모습은 어땠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그것이 부질없는 상상일지라도 말이다.






참고 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15년 12월 30일.



[오늘의 음악] 뒤돌아보다


 연말이 다가오니 TV에서는 시상식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연예대상이니, 연기대상이니 하는데 어떻게 매년 서로 스케줄이 겹치지도 않는지 비슷한 사람들이 나와서 상을 받아 가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상을 받는 이들은 또 즐거운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안고서는 시상식장을 나선다. 하지만 또 그만큼 상을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카메라는 언제나 상을 받은 이들만을 비추는 모양이니 후자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지 못하겠다.


 뭐 그런데 딱히 연말 시상식이 아니더라도 연말은 언제나 모든 것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한 해를 돌아보다 보면 누군가는 웃으며 자리를 뜨기도 하고, 누군가는 울며 자리를 뜨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또 언제나 한 해를 돌아보다 보면 우는 때도 있고 웃는 때도 있는 법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다만 울든 웃든 추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낸 한 해가 내게도 생겼다는 것. 언제나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 않던가.


 또다시 다가오는 내일이 있다. 그리고 그 내일들이 모여 또다시 다가오는 내년이 있다. 삼백 예순 다섯 번의 날이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2016년을 돌아보며 앉아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떤 일들을 회상하고 있을 것인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것. 오늘의 음악은 여행스케치의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로 준비했다.





[오늘의 역사] 호세 리살


 1896년 12월 30일,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호세 리살이 처형당했다.


 호세 프로타시오 리살 메르카도 이 알론소 레알론다 (1861.6.19 ~ 1896.12.30)



 호세 리살은 1861년 6월 19일, 에스파냐가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던 시절, 필리핀의 칼람바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호세 리살은 특별한 총명함을 보였고, 성장한 이후에는 의사가 되기 위해 에스파냐로의 유학길에 오른다.


 호세 리살이 처음으로 유명세를 탄 것은 유학을 하던 도시인 마드리드에서 발표한 소설 때문이었다. <놀리 미 탕그레>라는 이 소설에서 그는 에스파냐의 식민지 차별 정책과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소설은 당시 자유주의적 사상에 물들어가던 에스파냐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호평을 받고 유명해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에스파냐 사회에서는 자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 여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에스파냐 정국은 호세의 서적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했고, 호세 리살에게는 추방령을 내렸다. 호세 리살은 이에 따라 모국 필리핀으로 쫓겨났다.


 결국 에스파냐 당국의 추방령에 따라 그는 의사의 꿈을 접고 모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신 돌아온 호세 리살은, 다시 한 번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그것은 조국 필리핀을 해방시키려는 열망이었다. 그는 곧 필리핀 민족동맹을 결성해 에스파냐의 식민지 통치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호세 리살은 필리핀 민중이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에 의해 노예 상태에 놓여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의 저서와 활동을 통해 필리핀 민중은 식민 지배의 현실에 대해서 점차 깨닫기 시작했고, 민족의 자각과 해방의 기운은 점점 드높아져 갔다.


 이후 1892년 그는 필리핀 독립 운동의 지도 기구격이 되는 ‘필리핀 연맹’을 결성한다. 하지만 이내 에스파냐 정부는 그의 독립 운동을 주시하게 되고, 그는 필리핀을 다스리는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섬으로 유배되었다.


 필리핀 독립운동도 역시 우리 독립 운동처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많았다. 누구는 비폭력을 주장했고, 누구는 폭력 혁명에 의한 직접 투쟁을 주장했고, 누구는 자치론을 주장했으며 누구는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자치론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조금 덧붙이기로 하자.


 호세 리살은 비폭력을 주장한 운동가였다. 그의 행동이 완전히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모르겠지만, ‘카티푸난’이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어 무장 봉기를 일으킨 필리핀의 또 다른 독립운동가 ‘안드레스 보나파시오’와 같은 노선은 분명 아니었다.


 폭력 혁명을 주장한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하지만 호세 리살을 체포한 총독부는 그가 마치 모든 무장 독립 운동가의 배후인 듯 몰아갔다. 결국 수감된 호세 리살은 1896년, 에스파냐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필리핀 혁명’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같은 해 12월 30일, 마닐라 시내에서 공개 총살형을 당해 숨을 거둔다.


 그의 죽음은 필리핀 독립 운동의 한 불씨가 되었다. 이후 반 에스파냐 운동과 반미 운동의 선봉에 섰던 독립운동가 에밀리오 아기날도나, 이후 독립하는 필리핀의 헌법 초안을 작성해 ‘혁명의 뇌’라 불리는 독립운동가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경우에도 그의 죽음을 보고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럼 이제는 아까 얘기했던 자치론에 대해서 이야기해봐야겠다. 호세 리살도 필리핀의 에스파냐로부터의 자치론을 주장했던 독립 운동가 중 하나다. 우리 역사에는 이광수가 대표적으로 자치론을 주장한 이로 꼽힌다. 하지만 호세 리살은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꼽히고, 이광수는 변절의 아이콘으로 꼽힌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과연 둘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누가 민중을 바라봤고, 누가 자신만을 바라봤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호세 리살의 자치론은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에스파냐로부터 일정 정도부터 자치권을 얻어내고, 그렇게 점차 환경을 개선해 나가자는 생각. 그것은 어쩌면 이대로 민중이 버텨내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절박함의 발로였다.


 하지만 이광수는 달랐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을 뿐,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의 이후 행보만 봐도 충분하다. 우리 역사에서 민중을 위해 자치를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자치론이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는 것은 일단 논외로 치기로 하자. 굳이 따지자면 이건 호세 리살과 이광수 모두가 간과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을 간과한 동기는 둘 사이의 차이가 있으라리고 생각한다.


 외국의 독립운동 사례를 보면 볼수록, 우리 독립운동 사례를 연구하면 할수록 무언가 독립운동에 대한 철학이 정립되어야 함을 느낀다. 반 에스파냐 운동과 반미 운동의 선봉에 섰지만 이후 미국에 협조하자고 주장하고 일본에 협조해 수감 생활까지 겪은 아기날도는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 이후 독립한 혁명 정부는 아기날도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했다.


 폭력 혁명과 비폭력 혁명, 자치론과 완전 독립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두고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그 철학에 대한 논의가 분명 필요하다. 일제는 무조건 나쁘고 독립운동가가 어떤 일을 했든지 정당화된다고 가르친다면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역사와 국가는 중태에 빠지지 않을까.






참고 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15년 12월 29일.



[오늘의 음악] 지나간 것


 요즘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잘 나간다고 한다. 케이블 드라마가 잘 되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응답하라’ 시리즈의 성공을 보면 조금 놀라운 감이 있다. 배경이 되는 시대는 1997년, 1994년, 1988년. 30년도 되지 않은 시점의 이야기들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역사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엄연한 역사극이다. 다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때의 역사를 다루는 시대극일 뿐이겠지.


 “사는 기쁨의 절반이 추억”이라는 말은 언젠가도 한 번 인용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사는 기쁨의 절반은 추억이고, 나머지 절반은 경험이겠지. 경험은 곧 추억이 되는 거겠고, 시간이 지날수록 추억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겠지.


 경험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이 아주 작은 일상의 경험이든, 혹은 여행이나 사랑과 같은 아주 중대한 경험이든, 관계없이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을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추억을 곱씹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도 결코 두렵지는 않다. 많은 경험을 쌓았다는 성취감을 그런 방식으로 향유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언젠가 어두운 방에 앉아 흘러가는 음악과 함께 과거를 되짚는 것도 꿈꿀 만한 미래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래도 괜찮은 과거였다”는 생각이 들 때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성공을 보며, 추억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게 된다. 나야 1997년이나 1994년, 1988년의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떤 과거를 떠올리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곤 한다. 10년쯤 뒤라면 나도 비슷한 무게의 과거를 회상할 수 있을까.


 오늘의 음악, 들국화의 ‘걱정말아요 그대’로 골랐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겠지.





[오늘의 역사] 이구


 1931년 대한제국의 황태손이었던 이구가 탄생했다.


 여기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 채야 맞다.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1910년 한일병탄조약으로 그 끝을 맞았다. 그런데 1931년 태어난 ‘이구’라는 사람이 어떻게 왕세자의 자리를 가질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든다.


 이구와 부인 줄리안 여사



 그렇게 되면 일본이 경술국치 이후에 대한제국 황가를 대우했는지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일제는 경술국치 이후 황실 일원에게 ‘왕공족’이라는 신분을 부여한다. 왕공족은 일본의 황족에 준하는 신분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황가의 일원은 그 계통에 따라 자신들을 ‘황태자’ ‘황태손’ ‘황사손’ 등의 호칭으로 칭했고, 이를 일제에서도 ‘이왕세자’ ‘이왕세손’ 등의 명칭으로 부르며 이들이 계보를 잇는 것을 허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 순종 황제에 의해 황태자로 선정된 이는 흔히 ‘영친왕’이라 부르는 의민태자다. 1910년 대한제국이 몰락하고,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된 뒤에도 이왕가의 형식적 수장은 순종이었다. 순종이 1926년 사망한 이후에는 의민태자가 형식적 수장의 역할을 맡아, 해방을 넘어 1970년까지 이왕가를 이끌었다.


 의민태자 이은은 일본 제국 육군 중장의 자리까지 올랐고, 일본인인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이에 따라 이은의 조카인 이구가 대한제국의 황실 수장이 되어 1970년부터 대한제국 황실을 이끌었다. 이구는 미국에서 줄리아 멀록이라는 여성과 가족의 반대를 이기고 결혼했다.


 이구는 해방 이후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시도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구는 일본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역시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다시 이구의 조카인 이원을 이구의 양자로 입적시켜 2005년 이구가 사망한 이후 그 계통을 잇게 하고 있다.


 2006년부터는 이 계통과 다르게 이구와 남매간인 이해원을 문화대한제국 여황으로 추대하고 대한제국의 황실을 복원하자는 운동을 벌이는 ‘대한제국 황족회’라는 단체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원



 망국의 후손들이다. 그 행보가 조금이라도 상식적이면 이해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망한 뒤, 그 황가와 후손들이 택한 길은 너무나도 당연한 친일의 길이었고, 민족적 자존심과 국가적 위상을 짓밟을 대로 짓밟고선 해방이 되자 외치는 것이 황실의 권위다.


 국가를 망조로 이끈 황실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비판할 의도는 없다. 그것은 이미 죽은 그들 선조의 몫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대한제국의 멸망에 대해 일말도 자신 선조들의 책임이라고 느끼지 않는 듯한 권위주의적 태도를 가졌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문화대한제국 여황”이라 칭하는 이해원이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마지막 꿈이 경복궁에 들어가 관광객을 맞으며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것을 본 적이 있다. 황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받으려면 존경받을만한 행동을 하시라. 여전히 당신들이 황족과 황실을 운운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아직 경술국치 이후 황실의 행동이 어떠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일 뿐이다.


 전제 군주제를 스스로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도입한 부탄의 왕실이 떠오른다. 너무 큰 기대였을까, 이 나라에서 모두의 존경과 존중을 받을만 한 상징적 인물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참고 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15년 12월 28일.



[오늘의 음악] 새로운 것


 어제는 갑자기 메일로 ‘다급한 일’이라여 메일이 왔다. 놀라서 열어보니 어떤 사이트의 운영자가 내 글을 표절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체 이 작은 블로그에까지 들어와서 표절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웠다.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니 완전히 가져다 베낀 것은 아니고, 내 글을 주로 참고해 글을 썼는데 출처 명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비공개 카페라고 하니 들어가서 확인해볼 수는 없었지만, 안에서 적당히 처리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다만 다음부터는 출처 표기를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고만 의사를 전달했다.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참 양질의 정보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이 블로그였을지, 그게 놀라웠다. 거기에 완전히 똑같지도 않은 글을 어떻게 찾아서 나에게 알려 줬는지, 그런 일에 수고해 주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과연 내 글을 가져가는 게 잘못된 일인지, 문득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나는 대체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나의 글도 에세이 부분이나 구성은 내가 직접 하지만, 주된 내용은 다른 사람이 연구한 내용을 참조해서 가져오는 게 대부분이다. 물론 참조문헌 표시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은 없다. 누군가가 나의 글을 참조해 글을 썼다는 이야기에 별로 놀라거나 불쾌하지 않았던 것은, 그게 사람들이 글을 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참조문헌을 기입하는 것도,  인터넷 글쓰기에서는 일일이 기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관례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 전달을 하는 것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베껴온 것도 아닌데 ‘참조문헌을 표시하지 않았다’며 일일이 비판할 수 없다는 현실도 존재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만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글이 ‘새롭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글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최대한 밝히려고 노력하는 것이 글쓴이가 가진 책무이리라, 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나는 ‘나의 글’을 쓰지만, 그것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남의 것’을 어디서 어떻게 빌려왔는지 밝히려고 하고,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해내려고 노력한다.


 다만 사람들이, 그런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노력은 해 주었으면 하는 단순한 바람이다.


 오늘의 음악, 유니크의 ‘Born to Fight’로 골랐다.





[오늘의 역사] 류샤오보


 1955년 12월 28일, 류샤오보가 탄생했다.


 류샤오보는 중국 지린 성 창춘에서 태어났다. 지린 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했고, 이후 베이징 사범대학에서 중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문예창작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학자가 되기 위한 길을 충실하게 밟고 있었다.


 당시 그는 상당히 촉망받는 학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작가로서도 또 학자로서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스위스와 미국으로 넘어가 중국 철학과 중국 문화에 대해 교수 자격으로 강의를 할 정도였다. 그는 학자로서 상당히 괜찮은 길을 가고 있었다.


 류샤오보는 1989년에도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연구원 자격으로 체류하고 있었다. 문제는 당시 중국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중국의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들의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천안문 사태’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 중국 천안문 항쟁.



 류샤오보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저항이 벌어지고, 이들이 천안문 광장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자마자 중국으로 급거 귀국했다. 류샤오보는 천안문 광장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고, 시위대 대표로 중국 정부와의 협상에 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 정부는 천안문 광장에 모인 시위대를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다.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사망자가 나왔고, 류샤오보는 학살의 피해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학살의 목격자가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인권 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류샤오보는 단식 투쟁을 벌이며 천안문 사태의 진상 조사를 요구했고, 전공을 살려 각종 집필 활동을 개시했다. 주로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내용이었다. 그는 가장 투쟁적인 활동가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그런 그를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천안문 사태 직후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감옥 생활을 맞는다. 20개월 동안의 구속 생활이었다.


 구속에서 풀려난 뒤에도 그는 반체제 인권운동을 계속했고, 1996년에는 천안문 사태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노동 개조형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다시 세 번째 감옥 생활에 들어갔다.


▲ 류샤오보 (刘晓波, 1955.12.28 ~ )



 그는 출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권 운동에 투신했다. 2008년에는 중국의 반체제 학자, 법률가, 기자 등 303명을 규합해 ‘08 헌장’이라는 것을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의 민주와 개혁을 요구하고, 새로운 정당을 창당해 중국 공산당에 대항하자는 의미로 발표된 헌장이었다. 물론 중국 당국은 이를 내란 선동으로 규정했고, 그는 국가 권력 전복 선동 혐의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네 번째 수감 생활에 들어갔다. 2009년부터 수감되었던 그는 현재까지도 중국 랴오닝 성 진저우 시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류샤오보는 이미 중국 민주화의 상징이 되어버렸기에 중국 당국은 그를 죽이지도, 석방하지도 못하고 그저 가둬두고만 있는 상황이다.


 다만 그가 감옥에 있던 사이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010년, 노벨 평화상의 수상자로 류샤오보가 선정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노벨 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항의했지만, 중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 수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결국 감옥에 있는 류샤오보 본인은 물론, 류샤오보의 모든 가족과 친적, 측근 인권운동가 수백 명을 무더기로 출국 금지 조치했다. 류샤오보의 노벨 평화상 대리수상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노벨 위원회 측에서는 타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 인권운동가를 통해 대리 수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 빈 의자에 노벨 평화상 메달을 수여했다. 이는 나치 독일 시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국 정부는 이에 항의해 ‘공자 평화상’이라는 상을 만들어 노벨 평화상에 대항하겠다는 의지를 표했다. 2010년에 초대 공자 평화상 수상자로는 대만의 롄전 전 부총통이 선정되었지만, 롄잔은 이를 거부했다. 2011년에는 2대 공자 평화상 수상자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을 선정했지만, 푸틴은 이를 무시했다. 중국은 중국에 유학 온 러시아 유학생 한 명을 섭외해 대리 수상을 시켰다. 결국 2회 만에 이 상은 초라하게 폐지되었다.


 이후 중국은 2012년에 모옌이 노벨 문학상을 받자, 류샤오보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이 모옌이 중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고 발표했다. 사실 ‘가오싱젠’이라는 중국인 작가가 앞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었지만, 그는 반체제적인 소설을 썼다가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 시민권을 획득한 상황이었기에 중국인으로 보지 않았다. 모옌이 반체제 인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중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의 인권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중국은 그를 은폐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중국 인권 운동의 심장으로 남아 있다. 오늘의 마지막 부분은, 류샤오보가 참석하지 못한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서 노벨상 위원회장이 했던 연설의 일부로 갈음하겠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국가도, 국가 내부의 주류 집단도 무제한적인 권력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인권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권력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제연합의 모든 회원국이 따라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전 세계적인 선언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 중국의 헌법조차도 기본적인 인권을 인정합니다. 중국 헌법 35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민들은 연설, 언론,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보장받는다'라고 규정합니다. 41조는 시민들에게 국가기관을 비판하거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류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고,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류는 석방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이작 뉴턴은 생전에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긴 세월동안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서 우리에게 자유를 이끌어낸 수많은 이들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많은 이들이 돈을 세면서 눈앞의 국익만을 좇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다시금 우리 모두를 위해 싸워준 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류샤오보의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류의 시각이야말로 결국에는 중국을 굳건하게 다질 것입니다.”





참고 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15년 12월 27일.



[오늘의 음악] 여행


 어린 시절, 소풍 가는 전날 밤 잠을 설치던 기억까지는 꼭 되짚어 돌아가지 않아도 좋다. 언제나 여행의 전날 밤은 설레기 마련이다. 아주 짧은 여행이라도 그렇고, 돌아오지 않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라도 그렇다. 잠을 설치는 정도를 넘어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결국 해 뜨는 것까지 보고야 마는 사람도 있고, 마음 편히 일찍 잠들었다가 일찌감치 일어나 해 뜨는 것을 보는 사람도 있다. 여행의 종류도, 그리고 설렘의 종류도 사람마다 가지각색이다.


 나는 여행 가는 일을 즐긴다. 뭐 사실 아침에 일어나 그 귀찮음을 떨쳐버리는 게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서울에 올라온 뒤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을 즐기게 됐다. 궁궐대모험을 떠나기도 하고, 참배대모험을 기획하기도 한다.


 아까 잠을 설치는 사람도 있고, 일찍 잠들었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나는 어떤 종류냐면, 반반이다. 늦게 잠들고선 일찍 일어난다. 밤에는 글을 써야 하니 늦게 자게 되고, 아침에는 일찍 나가야 하니 일찍 일어나게 된다. 피곤함만 더해간다.


 하지만 그 피곤함 속에서도 묻어나오는 무언가가 있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 하늘과 푸르게 요동치는 하늘 사이를 가로지르는 황금빛 경계, 그리고 그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저 해 뜨고 해 지는 매일의 일상이라는 듯 가로지르고 있는 한 무리의 구름. 아무 것도 아닌데 경이롭다.


 설렘까지 느껴지지는 않는다. 뻔하디 뻔한 사람들과 가는 뻔하고 뻔한 여행, 기대할 거리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오늘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낸 것은 그 ‘뻔하디 뻔한 사람’이 내겐 너무도 소중한 사람인 이유일까.


 당신은 어느 누구와 어떤 여행을 떠나는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어느 유명한 광고 카피도 있다지만, 뭐 또 딱히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면 어떤가. 세상 전체가 여행이고 살아있는 모두가 여행 중인데.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저기 직선으로 반듯이 그어진 구름은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인가.


 오늘의 음악, 김동률의 ‘출발’이다.





[오늘의 역사] 유신


 1972년 12월 27일, 유신 헌법이 최종적으로 제정되어 효력이 발생되기 시작하였다.


 유신 헌법을 발표하는 청와대 당시 김성진 대변인


 유신 헌법의 배경부터 살펴보자. 1960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후, 그는 1963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67년에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3선 출마를 제한하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1969년 3선 출마 가능으로 바꾸는 ‘3선 개헌’을 강행했다. 장기집권을 막기 위한 대통령제의 관례인 3선 제한을 파괴한 것이다. 결국 헌법은 개정되었고, 박정희는 1971년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 돌입한다.


 그렇게 치러진 제 7대 대통령 선거.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맞붙은 이는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였다. 당시 43세의 김대중은 ‘40대 기수론’을 이끌고 나와 경선에서 김영삼에 역전승을 거두고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인물이었다. 국민의 여론은 더 이상 박정희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박정희는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선거전을 펼쳤고,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용할 수 있는 권력을 최대한 이용했다. 물론, 이 표현에는 ‘부정선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언론에 대한 통제는 독재 정권의 당연한 수순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다.


 박정희 후보는 “여러분께 다시는 나를 찍어달라고 하지 않겠다.”는 말로 호소했다. 3선 개헌은 있었지만 4선에 출마하지는 않을 거라는 의도였다. 이에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 후보가 헌법을 고쳐 총통이 되려 한다.”고 맞붙었다.


 선거 결과는 박빙이었다. 박정희 후보가 53.2%, 김대중 후보가 45.2%. 표차는 백만 표도 나지 않았다. 백만 표, 박정희 입장에서는 등골이 서늘했을 것이다. 만약 공정한 언론기반 위에서, 공작과 지역감정 조장 없이 정치를 했다면 대한민국의 7대 대통령은 김대중으로 기록되었을지 모른다.


 다음 선거는, 이라는 생각까지 이르렀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아찔했을지 모르겠다. 잠깐만, 다음 선거? 박정희 대통령은 스스로 4선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 이행 뭐 그러거 없었다. 결국 선거에서는 질 것 같고, 정권은 잡아야 하겠고. 그러다보니 당연히 민주주의를 무시하며 만들어진,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헌법, 유신 헌법이 탄생하게 된다. 사람들은 “다시는 나를 찍어달라고 하지 않겠다”는 박정희의 예언과 “총통이 되려 한다”는 김대중의 예언이 모두 맞았다며 자조했다.


 유신 헌법은 한태연, 갈봉근과 같은 헌법학자들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들은 당시 이 헌법을 자신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안에 자신이 만들었다고 서명을 강요당한 방식이었다고 변명한다. 이들의 변명을 모두 믿을 수는 없겠지만, 아마 당시 유신 헌법을 만든 주역은 당시 공안검사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김기춘일 것으로 추정한다. 스스로도 별 부정은 하지 않고 있고.


 유신 헌법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결국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동시에 모든 정당과 정치인의 정치 활동을 중단시켰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었고, 계엄사령부는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모두 금지하고, 언론ㆍ출판ㆍ방송ㆍ보도가 사전 검열을 받도록 했다. 전국의 대학교에는 모두 휴교령이 떨어졌다.


 국회가 해산되었으니, 대통령 특별선언에 따라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 헌법은 열흘 뒤인 10월 27일 의결되었다. 11월 21일 국민 투표에 부쳐져 투표율 91.9%에 찬성 91.5%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통과되었고, 12월 27일 최종적으로 헌법이 공표되고 시행되었다.


 물론 유신 헌법이 그렇다고 절차적 정당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애초에 ‘대통령 특별선언’이라는 것이 헌법적 근거가 없는데다가, 일단 국민의 지지를 받아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야당이 있는 국회를 해산했다는 것은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1월 21일 국민 투표가 있었고, 논란이 지속되자 다음 해 재신임 투표를 벌였지만 결과는 모두 찬성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진정 국민의 의견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비상계엄으로 당장 군인들이 경찰을 대신해 치안을 담당하고 있고, 국민의 기본권마저 제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론은 검열된 보도만을 내보냈고, 애초에 정치활동 자체가 금지돼서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내용 측면에서도 그 정당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치해 대통령에 대한 간접 선거를 실시했다. 간접 선거가 민주적인 체제 하에서 잘 운용되어도 부작용이 많은데, 독재 체제에서는 어땠겠는가. 국민 하나하나는 포섭할 수 없어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몇 백 정도는 손쉽게 포섭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장은 대통령 박정희가 맡았다.


 국회의원 3분의 1은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의 추천을 거부하면? 찬성할 때까지 다시 투표한다. 대통령에게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해, 초헌법적 권력이 대통령에게 부여됐다. 실제 이 긴급조치를 박정희는 9호까지 발령했다. 국회 해산권과 법관 전부에 대한 임명권과 파면권을 대통령에게 주어 3권 위에 대통령이 군림하게 되었다.


 유신 헌법 치하에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던 수많은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혹은 ‘합헌적으로’ 탄압당했다. 대표적인 사건인 ‘김대중 납치 사건’의 피해자였던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유신의 최루탄 속을 거닐던 이들은 여전히 정치계에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유신의 뒤뜰을 거닐던 이는 대통령이 되었고, 유신 헌법을 만들었던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실장이 되었다. 시대는 과연 어디까지 퇴보할 수 있는가. 유신 헌법이 발효되었던 날, 우리가 역사 앞에 참회하는 마음으로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 밀려날 것인가.






참고 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15년 12월 26일.



[오늘의 음악] 다음날


 성탄절이 끝났다. 아직 세계 저편에서는 끝난 것 같지 않다만, 어쨌든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날은 26일, 여기선 성탄절을 이미 한참 전에 떠나보냈다.


 온 세계를 축제의 분위기로 몰고 가는 성탄절이다. 아직도 성탄절이 축제의 날이 아닌 곳도 많지만, 그래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 종교와 관련 없이 성탄절은 언제나 축제의 날이다.


 그리고 그 성탄절의 다음날.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던 축제의 다음날. 캐롤은 잦아들고 거리의 사람은 줄어들고 성탄 트리는 불이 꺼진다. 그렇게 점점, 우리는 올해의 크리스마스를 잊어가고,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축제의 다음날, 쓸쓸해진 거리를 보면서 우리가 느껴야할 것은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단지 쓸쓸한 분위기를 떨치려 어제를 잊으려 한다거나, 기억만으로 남은 어제를 추억하며 다시 기억만으로 남을 내일을 기다린다거나, 그런 게 아닌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새벽에 잠에 취해 쓰러졌다가 일어나 보면 아무렇지 않게 축제는 끝이 나 있다. 시끌시끌했던 거리는 어느새 조용한 적막이 지배하고 있다. 모두들 마치 어제가 없었다는 듯 움직인다. 마치 꿈에서 깬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축제는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놀이’ 속에서만 창조는 싹튼다. 놀이와 휴식으로 가득한 축제의 한복판에서 언제나 세상을 바꿀 가능성이 잉태된다.


 당신의 축제는 어떠했는가. 당신은 축제의 중심에 서서 어떤 창조를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 축제라는 꿈에서 깨어난 오늘, 얼마나 많은 것을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


 축제 속에서 창조만을 생각하고 있으면 머리 아프다. 그리고 창조에 대한 압박감 속에서는 절대 창조는 움트지 않는다. “’창의력이 중요하다’에 밑줄 그어”하는 교육 아래선 누구도 창조가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축제는 그저 즐기면 된다. 다만 그 놀이를 창조로 승화시키는 것은 오늘의 몫, 축제가 끝난 오늘부터의 몫이다. 당신은 어떤 창조를 만들어 내겠는가.


 잠에서 깼지만 꿈만큼은 생생하다. 그리고 그 꿈을 근거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오늘의 음악, 윤시윤의 ‘잠이 깨면’으로 준비했다.





[오늘의 역사] 소비에트 연방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최고 회의를 통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이 자진 해산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국기



 [오늘의 역사]가 언제나 그렇듯 소련의 역사 전반을 상세하게 다뤄줄 수는 없다. 간략하게 러시아 제국의 멸망과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 발전과 해체의 과정까지 스피디하게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러시아 제정이 무너지고 최초의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하기까지는 두 차례의 혁명이 필요했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라는 이 두 번의 혁명을 묶어서 “러시아 혁명”이라 통칭한다.


 19세기 말엽, 서유럽에서는 이미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 한참이 경과한 때였고, 서유럽은 한창 산업혁명으로 이룩한 부를 누리고 있을 때였다. 중세적 봉건제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빈부의 격차로 온 나라가 발전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노동자를 짓밟고 선 자본가들의 발전만은 눈부셨다.


 하지만 러시아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러시아는 여전히 농업을 중심 산업으로 하는 봉건제 국가였고, 농민들의 삶은 영국의 노동자들만큼이나 힘겨웠다. 그러던 중 러시아에 사회주의가 점점 유입되면서 농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결국 이들이 모여서 대규모의 시위를 벌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황제의 학살,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오히려 반정부 인식이 더 극렬해졌고, 결국 정부는 굴복하고 개선책을 발표해 여러 개혁을 벌였다.


 하지만 농민과 노동자의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면서 물가가 폭등하자 1917년, 민중을 중심으로 시위가 벌여졌고, 이에 군인들이 가담하면서 혁명으로 이어졌다. 러시아 제정을 무너뜨린 이 혁명을 “2월 혁명”이라고 한다.


 다만 이 ‘2월’이라는 게 러시아가 당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을 기준으로 한 2월이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3월이다. 그래서 이 혁명은 “3월 혁명”이라고도 불린다. 일단 프랑스에 2월 혁명이 큰 게 하나 있었다보니 구분하기 위해서 오히려 3월 혁명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부르주아 혁명”이라 규정하며 정권을 잡기를 거부했고, 결국 러시아 민중운동의 다른 한 축이었던 자유주의자들이 모여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하지만 이내 임시정부는 국민들의 요구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국민들이 가장 큰 목소리로 요구했던 1차 세계대전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국민들 속에선 ‘소비에트’라 부르던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들의 지지가 확산되어갔다.


 점차 세력을 넓히며 임시정부를 위협하던 볼셰비키들은 결국 1917년 10월 25일 국가의 요충지를 점령해 임시정부의 지도력을 사실상 마비시킨 뒤, 다음날 임시정부의 각료들이 모여 있던 “겨울 궁전”을 점령해 혁명의 끝을 고했다. 10월 혁명, 2월 혁명과 같은 이유로 11월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이 혁명으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한다.


 가장 먼저 집권을 했던 이는 10월 혁명을 이끌던 레닌이었다. 혁명 이후 공산주의파 적군(赤軍)과 왕당파 백군(白軍)이 싸웠던 러시아 내전에서 성공적으로 승리한 뒤 그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소비에트 대회를 열어 1922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벨로루시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통합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우리가 말하는 “소련”을 완성한다.


 레닌이 1924년 죽은 뒤 집권한 이는 스탈린이었다. 그는 1928년부터 경제 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러시아 경제를 부흥시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반대파를 추방하고 숙청하기도 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만 일단 넘어가 주기로 하자.


 스탈린은 2차 대전이 터지고 처음에는 독소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전쟁에서 발을 빼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소련도 히틀러의 침공을 계기로 전쟁에 참여했고, 1945년 8월 8일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는 일본에도 선전포고를 했다. 결국 어쨌든 승전국에 포함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함께 냉전 체제를 이끌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 집권한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철권통치를 비판하고 격하하면서 독재 정책을 누그러뜨렸으나 경찰 통치는 여전히 건재했다.


 1960년대 들어서 흐루쇼프 체제가 안정되자 그는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끈다. 하지만 중국은 흐루쇼프의 노선에 반대를 표했다. 결국 농업 정책의 실패와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의 양보 등이 문제가 되어 그는 1964년 실각했다. 이 실각에는 당시 팽배했던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것과, 자본주의 세계와 공존을 모색했던 그의 정책에 대한 충격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Nikita Sergeevich Khruschyov, 1984.4.15 ~ 1971.9.11)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정권을 잡았으나 국민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1968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벌어진 “프라하의 봄” 사건이었다. 소련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1982년에는 브레즈네프가 죽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정권을 잡았으나 1984년 사망하면서 콘스탄틴 체르넨코에게 정권이 넘어갔다. 하지만 그도 1985년 사망했고, 정권은 고르바초프에게 돌아갔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경기 침체를 타파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개혁ㆍ개방 정책을 펼쳤으며, “글라스노스트”라 불리는 정보 공개ㆍ개방 정책을 펼쳤다. 부패한 정치체제에 대한 개혁도 이어져서, 1990년에는 이제까지의 공산당 1당 독재 체제를 청산하고 복수 정당제와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이후 소련의 영향을 받은 동유럽에서도 민주화 열풍이 불었고, 소련의 위성 국가에서 연이어 혁명이 터졌다. 대부분 피를 거의 흘리지 않고 민주화를 이루어냈고, 루마니아에서는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즉결 처형당하는 등 유혈 혁명으로 민주화를 이루었다.


 결국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로 냉전은 사실상 종식을 고했고, 1989년 몰타 회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냉전이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후 옐친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고르바초프의 권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1991년,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을 비판하는 쿠데타가 벌어졌다. 고르바초프에 반대하던 지도자 대부분이 참여한 대형 쿠데타였으나 민중들은 이 쿠데타에 대한 민간 저항을 시작하는 등,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쿠데타 지도부는 옐친을 체포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정부 측의 반격이 시작되며 지도부는 체포되었다. 쿠데타 과정에서 자리에서 내려왔던 고르바초프는 다시 서기장에 복귀했으나 권력은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혼란의 과정에서 각국은 독립을 선언하였고, 결국 1991년 소비에트 최고 회의의 결정으로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었다.


 크렘린 대궁전의 소련 붕괴 전후.

소련의 국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러시아어 약칭인 CCCP가 러시아의 국장 5개로 바뀌었다.



 생각해 보면 지구 육지의 6분의 1을 지배했던 이들의 역사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생소하다. 우리는 대체 어떤 이들의 역사를 배우고 있었던 것인지 의문이다. 러시아는 그나마 낫다. 세계 3대 종교로 불리는 이슬람의 역사에 우리는 완전히 무지하다.


 유럽 중심의 세계사, 미국 중심의 세계사가 벌여온 아픔은 이다지도 크다. 보이지 않는 곳, 보지 못한 곳에 집중하는 역사를 우리는 언제쯤 마주할 수 있을까.







참고 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15년 12월 25일.



[오늘의 음악]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지 무려 2015년이나 지났다.


 사실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나라가 세계적으로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당장 기독교권 바깥으로 나가면 챙기는 나라가 많지 않을 거고, 옆 나라 일본만 해도 크리스마스를 챙기기는 하지만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사실 크리스마스를 ‘세계인의 명절’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크리스마스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세계인들도 수없이 많다. 게다가, 크리스마스만큼 유래가 불분명한 명절도 없다.


 당장 역사적으로는 예수가 탄생한 것도 1년 12월 25일로 잡지 않는다. 탄생 연도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많고, 12월 25일이라는 날짜는 기원후 300년대에 이르러서여 확정된 날짜다. 원래 12월 25일은 동지를 즈음해 로마인들이 전통적으로 태양신을 숭배하는 축제를 벌이는 기간이었다. 이것이 기독교 전통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통상적인 주장이다.


 게다가 모든 교회가 12월 25일을 축일로 잡지는 않는다. 동방정교회는 전통적인 율리우스력에 따라, 1월 7일을 크리스마스로 여기고 명절을 지낸다. 말하자면 ‘크리스마스’라는 명절의 뿌리나 근본을 찾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다. 적어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날 한시를 기해 누군가의 탄생을 축하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을 말이다. 설령 그것이 그 사람의 정확한 탄생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 사실만으로 충분히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탄생을 축복하는 그 사람이, 2천 년이나 전에 로마의 변방에 나타난 급진적인 사회 개혁 운동가라는 점, 그리고 그 사람이 결정적으로 설파한 교리가 ‘사랑’에 있다는 점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아직도 그를 축복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라는 이름이 비극의 씨앗이 된 적도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 전쟁 아래에서 피를 흘렸고, 심지어 그 속에는 같은 기독교도끼리 교리를 두고 싸운 일도 많았다. 사실 기독교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라, 아직도 종교 전쟁은 이어지고 있으며, 기독교를 믿는 종교인들이 현대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하지만 나는 오늘까지 그런 복잡한 생각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수천 년 전 광야에 나타나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사회의 개혁과 실천적 종교를 논하다 폭력으로 스러진 어느 위대한 개혁가의 탄생을 축하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것이 설령 그가 태어난 날과 다르다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모으는 일이 중요하리라 믿는다.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정신이 힘을 얻는 시대를 꿈꾼다. 오늘의 음악, 들국화의 ‘또 다시 크리스마스’로 골랐다.





[오늘의 역사] 독립협회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해산됐다.


 독립협회의 역사는 독립신문에서부터 시작된다. 1896년 서재필이 귀국하며 <독립신문>이라는 근대적 형태의 신문을 만들었고, 국내외의 사정을 민중들에게 전달하는 일에 치중한다. 하지만 이내 서재필은 민중들이 국내외의 사정을 알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며 ‘독립협회’라는단체를 만들 것을 건의한다.


 관청과 조정을 향해 민중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관이라는 아이디어에 많은 지식인들이 달려들었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남궁억, 안창호 등이 참여했으며, 이완용이나 박정양 등 당시 정부 고위 관료들도 결정에 협조했다. 1896년 7월 2일, 한성에서 독립협회가 탄생했다. 초대 회장은 이완용이 맡았다.


 초기의 독립협회는 지식인들과 관료들의 사교 클럽 형식이었다. 대부분 지식인들이나 고위 관료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주로 시사 토론을 하며 협회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점점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독립협회 안으로 끌어들이게 됐고, 일반 백성들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백정과 노비의 참여를 놓고서는 논쟁이 오갔지만 결국 이들도 독립협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독립협회가 처음으로 역점을 뒀던 사업은 독립문을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당초 청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이라는 문을 세워 독립 정신을 고취하자는 것이었다. 자금은 국민 성금으로 모금했고, 운동은 성공해 독립협회는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독립문을 만들었다.


▲ 독립협회가 만든 상징, 독립문.



 이후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민권 운동을 이어나갔다. 우선 독립협회는 민중들이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도록 토론회와 연설회를 꾸준히 열어 계몽 운동에 힘썼다. 한성에서 시작한 연설회는 나중에는 전국 각지로 퍼져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각 지방 관료들의 부패나 뇌물 수수, 이를 대가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상인들의 밀무역을 감시하는 일에도 독립협회는 앞장섰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던 고종에게 궁궐로 돌아오라고 호소해 환궁하게 만든 것도 독립협회의 공이었다. 하지만 민중들이 힘을 얻으면 얻을수록 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고, 이를 즈음해 초기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많은 정부 관료들이 독립협회를 탈퇴하게 된다.


 이후 서재필이 회장직을 이었고, 이때부터 독립협회는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라는 집회를 열어 토론과 연설을 통해 민중들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점차 독립협회를 위험요소로 여긴 정부 관료와 황실의 공격이 이어졌고, 서재필은 암살 위협까지 받으며 조선을 떠났다. 이후 독립협회는 윤치호와 이상재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윤치호.



 이후 독립협회의 역할은 토론회와 연설회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독립협회는 이후 만민공동회를 주재하지 않았지만 민중들이 자체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조직했고, 각지에서 토론과 연설이 이어졌다. 이들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은 점점 거세졌다.


 1898년 10월에는 역사적인 사건도 있었다.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주관했는데, 이날 만민공동회에는 1만 가까운 인파가 몰렸다. 당시 한반도의 전체 인구가 2천만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특히 여기에는 정부 관료들도 공식적으로 참여해 민중의 목소리를 직접 정책에 입안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독립협회는 ‘헌의 6조’라는 6개의 결의안을 만들어 고종에게 올렸으며, 이는 긍정적으로 검토되었다. 특히 헌의 6조에는 의회를 설치하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고, 대한제국을 전제군주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고종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추진했다.


▲ 독립협회의 법인 도장.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당장 11월 2일 ‘중추원 관제’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유명무실했던 기구 중추원을 대폭 개혁해 대한제국 최초의 의회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중추원 의원 50명 중 25명은 정부에서 추천하고, 나머지 25명은 민간에서 추천한다. 다만 민간 추천 위원 25명은 직접 선거가 어려우니, 독립협회 안에서 투표를 통해 뽑도록 만들었다.


 한반도에 헌법이 들어서고 의회정치가 들어설 수 있는 순간이었다. 선거 예정일은 11월 5일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수구파들은 고종에게 “독립협회가 군주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하려고 한다”는 익명의 탄원서를 올렸다. 고종은 이 탄원서를 믿었다.


 결국 선거 직전 새벽,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린다. 이상재를 비롯한 간부 17명이 체포되었고 회장 윤치호는 간신히 몸을 피했다. 관민공동회에 참석했던 간부들도 해임당하고 그 자리에는 조병식, 박제순, 민영기 등이 앉았다. 조병식은 익명의 탄원서를 낸 본인이었으며, 박제순은 후일 을사오적이 되고, 민영기는 을사늑약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이내 전향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까지 지내는 인물이다.


 날이 밝았지만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 민중들은 집회를 열고 정부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상인들도 이에 대다수 호응해 장사를 접고 집회에 나섰다. 정부는 하는 수 없이 11월 10일, 체포된 간부 전원을 석방했지만 끝내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독립협회의 이름하에 모인 민중들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황국협회’라는 단체를 이용해 독립협회와 충돌시켰으며, 황국협회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테러행위를 자행했다. 분노한 민중들은 정부 대신들의 집을 습격하는 등의 행동을 벌였고, 정부는 폭력을 벌인 참가자들을 엄벌하겠다며 독립협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하지만 협회는 쉬이 해산되지 않았다. 결국 고종은 1898년 12월 25일, 군대를 동원해 집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영구히 불법화했다. 한반도 최초의 시민운동으로 꼽히는 독립협회의 활동은 이렇게 종료되었다.


 어째 모양새가 지금과 비슷하다. 민중들, 폭력집회, 강제 해산, 간부 체포, 소요죄 등등. 물론 독립협회의 활동이 언제나 긍정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독립협회 지도부는 마지막까지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했으며, 외세의 자원 침탈에 대해서도 명확한 인식을 가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금 모자라더라도,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그들이 민중들의 가장 큰 희망일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진 못했지만, 독립협회는 당대의 한국을 구해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카드였다. 그리고 그 문턱에서 고종은 독립협회를 좌절시켰다.


 독립협회는 결국 의회를 세우지 못했다. 그들이 성공했더라면 지금의 역사가 조금은 달랐을까. 가정법은 없다. 현실만 있다. 어쩐지 1898년과 닮아 있는 2015년, 우리에게도 현실만이 있다.





참고 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15년 12월 24일.



[오늘의 음악] 새벽의 사색


 생각의 깊이가 가장 깊어지는 시간은 언제인가. 당신이 가장 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시간은 언제인가.


 내게는 그런 시간이 대부분 새벽 시간이다. [월화수목금토일]의 내용을 정하는 것도 웬만하면 그 시간대에 거의 다 이루어진다. 그 때 콘티를 잡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글을 쓰는 경우도 있고, 그 때 즉석에서 글을 써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실 잠들기 전 밤의 시간은 내게 아주 중요하다.


 음악을 들으면서 침대에 누워 잠들 듯한 기분으로 눈을 뜨고서는 천장을 바라보고 그려가는 생각의 지도는 모든 글의 원천이 된다. 또 그 시간만큼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 없다. 가장 잘 느껴지는 음악과 가장 잘 진행되는 글의 구상은 그 시간의 사색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낮에 읽었던 책, 낮에 봤던 영화와 그것들을 겪으며 했던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새벽 사색이 하는 역할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에 낮에 읽은 책과 자료들을 밤에 복기하면서 생각을 정리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솔직히 그 정도로 체계적으로까지는 정리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흉내를 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무렇게나 진행되는 생각의 끈에서 어느 하나를 잡고 따라가다 보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나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또 그렇게 되라고 놔두는 식의 대책 없는 사색을 조금 하다 보면 잠에 빠진다.


 그래서인지 내게 “잘 자라”는 인사는 대단히 어색하다. 잠이 들어 있어 봐야 꿈꾸는 것 말고 딱히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피곤할 테니 편안히 쉬어라”라는 의미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는 것 같기는 하다만 나는 딱히 깊이 잠을 잔다거나 잠을 많이 잔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편이 아니라 그 인사에는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또 “Good night”하는 인사는 다르다. “좋은 밤이 되라”니, 잠드는 이의 사색조차 좋은, 그런 밤이 되라는 의미의 인사 같은 느낌이다. 물론 “잘 자라”고 인사하는 사람이나 “굿 나잇”하고 인사하는 사람이나 그 감정에 별반 차이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같은 것이라면 영어를 쓰는 것 보다는 우리말로 하는 게 더 잘 전해지기도 하고.


 어차피 내 마음대로의 해석이니 요즘은 “잘 자라”는 말도 혼자서 확대해석하기도 한다. “자다”라는 말에는 잠에 들고 꿈을 꾸고 몸을 회복하다가 잠을 깨는 단순한 행동 뿐 아니라 잠들기 전의 사색과 아침의 상쾌한 기분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해석이다.


 남들 편하게 하는 말에 왜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조차 나는 새벽 사색의 결과라고 하겠다. 원래 그 때가 되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생각을 이어나가기 마련이다.


 당신에게도 나의 새벽과 같은 시간이 있는가?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 나는 가장 어둡고 조용해지는 새벽을 선호하지만 당신은 또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이 시간은 아닐 테니까.


 오늘의 음악, C-Clown의 “Good Night”으로 준비했다. “굿모닝 혹은 굿나잇”이라 말하던 쥬드 프라이데이의 인사가 떠오른다.






[오늘의 역사] 서정주


 2000년 12월 24일, 미당 서정주가 향년 86세로 숨을 거뒀다.


 미당 서정주 (1915.5.18 ~ 2000.12.24)


 그의 시 <자화상>을 보면 그는 그렇게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낸 것 같지는 않다.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시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스스로의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이 시에서는 스스로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의 아버지는 고등교육을 마친 지식인이었으며 대지주 김성수 집안의 마름으로 일했다. 뭐 굳이 따지고 들자면 ‘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일제강점기 마름의 지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종’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김성수가 친일파기는 했다만 소작인들에게도 예의를 잘 차렸던 사람이라, 그의 집안은 결코 무시받거나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다.


 서정주는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문단의 3대 천재로 불렸으나 이후 이름을 “다쓰시로 시즈오”로 창씨개명하고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한다.


 그의 친일 행각은 <마쓰이 오장 송가>라는 작품에서 대표적으로 잘 드러난다. 일제의 가미카제 특공대로 목숨을 바쳤던 “마쓰이 오장”에게 바치는 헌시였다. 마쓰이 오장은 조선 출신으로 일본군에 입대한 전형적인 친일 군인이다. 조선 출신으로 혈서까지 쓰고 일본군에 입대했던 분이 어딘가 또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한 것 같지만 손이 미끄러져서 사진이 들어갔는데 그냥 놔두기로 한다.


 서정주는 과거 친일 행각에 대해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는 말을 남겼다. 사과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정주가 잘못한 일은 친일 행각뿐이 아니다. 서정주는 독재 정권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 이 경력은 전두환 독재 당시 정점을 찍는다. 전두환의 호 ‘일해’를 지어준 사람이 애초에 서정주였고, 전두환이 처음 대통령에 뽑힐 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 지지연설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축시”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해 헌사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는 학생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고, 이 때문에 운동권과 문단의 깨어있는 작가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그의 호인 ‘미당(未堂)’을 조롱해 ‘말당(末堂’이라 불리기도 했다.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나, 고은 시인의 경우에도 미당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조정래 작가는 서정주의 제자였다. 하지만 그는 이후 “그의 친일 행각과 친군부 행위에 대해 수십 년을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평했다. 서정주 생전에 그는 서정주에게 친일과 친군부 행각에 대해 말을 꺼낸 적이 있으나, 서정주는 해명은커녕 화를 냈다고 전해진다.


 시인 고은은 처음에는 서정주와 친밀한 사이였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서정주가 본격적으로 친독재 행각을 벌이자 둘의 사이는 멀어졌다. 1983년 어느 문인회에서 서정주가 고은 시인을 초청하자 고은 시인이 “선생님 세상 떠나가시면 오겠습니다”라고 말한 사건은 유명하다.


 독재정권에 날선 비판을 이어갔던 조지훈과는 대조되는 행보다. 대부분의 문인들은 새해가 되면 더 선배인 서정주보다 조지훈을 먼저 찾아 문안 인사를 했다고 한다. 서정주는 이에 대해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다. 하지만 여전히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서정주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심지어 <마쓰이 오장 송가>에서도 표현주의적 특성만 본다면 뛰어난 구절을 몇 발견할 수 있다. <화사>나 <맥하>와 같은 시를 본다면 이런 면은 더더욱 부정하기 힘들다.


 서정주의 시적 능력과 일제 강점기와 독재 시기의 강력했던 물리력을 언급하며 서정주에 대해 동정하는 여론도 존재한다. 서정주는 일제 말엽 친일로 변절한 이후였음에도 <행진곡>이라는 작품이 후일 민족주의적 열망을 부추겼다는 이후로 1944년 수감돼 해방 뒤에야 풀려난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친일 행각과 친독재 행각을 모두 덮을 수는 없다. 어떤 일이 있었든, 얼마나 좋은 시를 남겼든 그것에 대한 평가와 친일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이루어져야 한다. 서정주는 분명한 친일파였고, 그도 그것은 인정했다.


 당시의 강력했던 탄압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있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이건 그 “탄압”이 사라진 뒤의 행각을 봐야 한다. 하지만 서정주는 어떠한 종류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몇 언급한 것은 눈에 띄지만 대부분 언급된 친일 행각에 대해서는 화를 내기 일쑤였다.



 서정주가 <매일신보>에 쓴 <마쓰이 오장 송가>



 그의 친군부 행각도 이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겠다. 그는 1987년 독재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어떠한 종류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친독재 행보를 지적한 이들에게도 화만 내고 해명하지 않았다.


 서정주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친일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혈관에 친일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통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참회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서정주 정도면 양반이다. 소송을 거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이 사회가 어디까지 나아가느냐는 이 사회가 과거사를 얼마나 현명하게 처리하느냐에 있다. 누구도 사과와 참회는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 사회에서, 과거사의 적폐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가 사회 발전의 핵심이다.


 물론 친일의 피와 독재 본당의 피와 남로당의 피까지 한 번에 이어받으시고는 “구국의 결단”이니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느니 하다가 대선 때 돼서야 “민혁당”에 대해 사과하신 대통령님 밑에서 기대할 바는 아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청와대에 쌓아뒀던 돈 6억 원은 언제쯤 사회 환원 하실 것인지나 궁금해하면 그만이다.






참고 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15년 12월 23일.



[오늘의 음악] 마지막


 모든 마지막이라는 것은 스산하다. 모든 끝나는 것은 그 씁쓸한 뒷맛을 안고 간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었든, 나쁜 기억이었든 모든 마무리는 그리움을 안고 간다. 술만 들어가면 군대 얘기를 그리운 듯 말하는 아저씨들을 떠올려 보면 더 명쾌해진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래서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는 저 뒤 창밖에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이 더 눈에 띌 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구름은 태양을 서서히 잠식한다. 서서히 잦아들어가는 태양의 빛. 마지막처럼 스산하다.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다. 누구의 탓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저 누구의 탓도 아닌 채로, 아니면 모두의 탓인 채로 접점이라는 것은 마지막을 맞이한다.


 방학을 하고 학교를 떠나던 고3의 마지막 날이 떠오른다. 졸업식 하루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학교에 나오게 되는 마지막 날.


 11월 12일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13일 수능이 있기 하루 전, 고등학교에서 학생으로 보내는 삶은 여기서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에도 물론 학교에 나갈 것이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학생이 아니라 백수가 되어 있는 기분일 거라고.


 그런데 막상 한 달이 넘게 지나고 마지막에 이르자 그게 그렇지가 않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수능이 끝난 다음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교복은 한 번도 입지 않았지만 가장 학생다운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고3으로 사는 1년 동안 배운 것보다 더 재미있고 더 유용하고 더 가치 있는 것을 배웠던 것 같다.


 누군가 그랬었다. “학교 교육은 죽었다”고. 나의 생각도 그의 생각과 같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학교 교육은 아직 죽지 않았다. 고3 수능이 끝나고 잉여롭게 지내는 한 달이 아직 살아있다면 학교 교육은 아직 살아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농담이 아닌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진담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학교에서 잉여롭게 보내는 시간만큼 좋은 시간은 내겐 없었다는 것이다. 원하는 책을 읽고 원하는 글을 쓰고 원하는 일을 하는 시간만큼 좋은 시간을 학교는 이제까지 나에게 허락해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막상 수능이 끝나니 지루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지루함을 떨쳐버릴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인지마저 철저하게 배웠던 시간이었다. 삶을 가장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학교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백수’의 시간이었고, 정식으로 보장되는 잉여로움의 시간이었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모양이다. 주제에 안 맞는 잡소리가 길었다.


 마지막은 언제나 좋은 기억으로. 고등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한 달. 그것은 내게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런 면에 대해서라면 이 교육현실의 유일한 돌파구는 이 한 달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마지막 하루, 짐을 싸기 바빠야 하는 때에 괜히 노트북을 켜 들고서 나는 그 시간에도 글을 썼었다. 이제까지와 똑같이.


 오늘의 음악, ABBA의 "When all is said and done"으로 골랐다. 음악은 영화 <맘마 미아>의 OST로 사용된 메릴 스트립과 피어스 브로스넌이 부른 버전이다. 그 스산한 마무리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부르는 노래다.





[오늘의 역사]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12월 23일,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랐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1889)



 광기와 불행한 삶을 안은 예술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네덜란드에서 출생한 빈센트 빌럼 반 고흐는 사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형이 한 명 있었다. 형의 이름도 똑같은 ‘빈센트 빌럼 반 고흐’였던 탓에 고흐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의 삶을 “형 대신으로 사는 삶”이라고 인식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런 지점이 고흐의 광기를 유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고흐의 가정은 어린 시절부터 별로 유복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지만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겨우 자리를 잡은 정도였고, 심지어 그 작은 지역조차 개신교보다 가톨릭의 영향력이 더 강한 곳이라 집안은 별 볼일 없었다.


 그래도 딱히 부족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 어릴 적부터 교육은 충실히 받았다. 기숙학교에 들어가 불어, 영어, 독일어를 모국어인 네덜란드어처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배웠다. 하지만 이내 1868년, 고흐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왜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마 정신적 문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집에서 지내다가 고흐는 곧 그림 판매상으로 일하는 큰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일을 돕게 된다. 당시에는 고흐가 꽤나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해서, 후일 작가로서 활동할 때 자신을 도와주는 동생인 테오에게, 이때는 오히려 고흐가 도움을 줄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뒤 고흐는 이 화랑 일을 그만둔다. 일단은 손님과 자주 언쟁을 벌인 탓에 해고된 것이었다. 하지만 실은 고흐 스스로도 졸작을 적당한 말로 속여서 비싼 값에 팔아넘기는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꿈꿨던 화랑 일은 훌륭한 작가를 키우고 작품을 보호하는 역할이었는데 말이다.


 또한 그는 사회 소외 계층에게 상당히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비싼 그림을 매매하며 엘리트 계층만 상대하는 직업에도 염증을 느꼈다고 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무시하고 그림이나 속여 파는 것이 더 이상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화랑에서 나간 뒤 고흐는 성직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이때가 1877년, 스물넷이라는 너무 늦은 나이었음에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한 아버지는 결국 그를 암스테르담으로 보내 목사 시험을 준비하도록 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찾아온 정신적 문제와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목사 시험에는 결국 합격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실은 고흐가 일부러 목사 시험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흐는 가난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 목사의 길을 선택했는데, 정작 시험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은 쓸모없는 교리 논쟁이었던 것이다.


 실례로 시험 준비 도중에 고흐는 가정교사에게 별 문제 없는 스스로의 라틴어가 부족하다고 주장했었다. 후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차마 신학대가 바리세인 양성소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 내가 그깟 라틴어 갖고 애먹을 리가 있니?”라는 문구가 남아 있다.


 결국 목사 일에서도 이리저리 밀려난 고흐는 그림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비참한 현실을 그림으로 그리겠다 결심한 것이다. 이것이 1880년, 27살 때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예술이었고, 그림 실력은 있었으나 화풍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던 그였다. 그림 매매상으로 잘 나가기 시작한 동생 테오는 편지를 통해 당시 유행하는 화충이나 화조를 설명해 주었으나, 그림을 글로 설명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국 고흐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화풍을 따라가는 데 대단히 뒤처지고 말았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이런 특성이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드는 데는 일조했다.


 정착지를 옮겨가며 예술에 전념하던 그는 ‘아를’이라는 도시에 미술가들의 공동체를 세울 구상을 한다. 이 구상을 여러 예술가들에게 전했으나 동의한 것은 폴 고갱 정도였다. 결국 둘은 테오의 지원으로 공동생활을 시작하지만, 너무도 다른 성격과 고흐의 정서적 불안에 다툼이 잦았다.


 결국 이 갈등이 폭발한 것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라는 작품을 고갱이 그리면서였다. 고흐의 초상화는 뚜렷한 눈을 특징으로 하지만, 고갱의 초상화는 그렇지 않았다. 이전부터 둘 사이에 관점의 차이로 갈등이 많았던 상황에서, 고흐는 자신의 눈을 멍청하게 그린 고갱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폴 고갱, 1888)



 이런 긴장이 이어지다가 결국 1888년 12월 23일, 정신병 발작을 일으킨 고흐는 면도칼을 들고 고갱을 찌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고갱에게 다가가서는 그저 노려보기만 하다가 방을 나갔고, 그 뒤에 그는 그 면도칼로 자신의 귓불을 잘라냈다.


 고흐가 하필이면 귀를 잘라낸 이유는, 그가 귀를 자르기 얼마 전에 그렸던 <아를 투우장의 관중>을 통해 분석이 가능하다. 투우 경기에서는 승리의 표시로 소의 귀를 자르는데, 고흐가 어쩌면 고갱와의 갈등과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승리했다는 표상을 얻기 위해 자신의 귀를 자른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다.


 귀를 자르고 나서 그린 자화상



 아무튼 어떤 이유에서였던지 간에, 이 사건 이후 고갱과의 공동생활은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끝났다. 고흐는 곧 요양원과 병원을 자주 드나들게 된다. 마지막으로 파리에서 가까운 오베르의 요양원에 들어간 고흐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고흐는 권총을 쏜 후에 즉사하지 않고 근처 여관으로 옮겨졌다. “난 왜 이렇게 잘하는 것이 없지? 스스로에게 총을 발사하는 것마저 실패하다니”라고 테오에게 말하고는, “고통은 영원하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1890년 7월의 일이다. 향년 37세였다.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고흐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 테오는 몇 달 되지 않아 1891년 2월 숨을 거둔다. 향년 34세였다.


 가장 약자의 곁에 선 화가, 그렇기에 가장 빈곤한 삶을 살았던 화가. 그의 작품은 이제는 수억 원을 호가하며 부자들의 곁에서만 머문다. 세상이 고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복수의 형태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주류를 따르지 않고 도태되었던 고흐에게.


 고흐의 작품이 수억 원을 호가하는 것을 보고는 “고흐가 살아서 저 돈을 만질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고흐는 과연 자신의 미술이 상류층의 기호 식품으로 섭취되는 현실에 만족했을까. 그가 뛰쳐나온 화상이나 목사와 같은 현실에.


 죽어서까지 불행한 화가, 고흐. 결국 그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의 이름을 수억 원의 가격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로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여기 써 놓은 아주 짧은 삶이라도 말이다. 끝까지 약자의 현실을 말하고 싶었던 그를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해바라기 (빈센트 반 고흐, 1888)



 별이 빛나는 밤에 (빈센트 반 고흐, 1889)



 밤의 카페 테라스 (빈센트 반 고흐, 1888)




 까마귀가 나는 밀밭 (빈센트 반 고흐, 1890, 유작)








참고 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조회수 확인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