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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시대

메갈리아와 ‘폭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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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우한 시대다.


 인터넷만 접속하면 온갖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논쟁이 쓰나미처럼 눈에 들어온다. 논쟁의 맥락을 따라가다가도 피로감이 겹쳐 창을 닫는 일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무지와 광기의 힘이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시대다.


 어느 성우는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쓰여진 티셔츠를 인증했다가 배역에서 교체당했다. 해당 게임사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반대 진영의 사람들은 게임사를 비판한 이들의 이름을 적은 ‘살생부’를 제작했다. 성우를 옹호했던 많은 이들이 SNS 활동을 중단했다. 결국 이 움직임은 웹툰시장에 대한 규제를 주장하는 ‘예스컷’ 운동으로까지 확장됐다.


 핵심과 맥락을 잃은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결국 반목과 분쟁이 사태의 전부를 정의해버리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논쟁은 그 자체로 이 사회에 무언가를 남긴다. 때로 무가치해 보이고 불필요해 보여도, 사회 전체로선 그것이 성장의 과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된, 하지만 해결되지는 않은 이 상황에서, 나 역시 목소리를 얹을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논쟁의 배경이 되는 사상은 하나다. 페미니즘.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은 대단히 명징하고 상식적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페미니즘’을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라고 정의하고 있다.


 “성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 이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이 견해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페미니즘만큼 모든 이들이 동의할 수 있으면서도 논쟁적인 단어를 찾기는 어려울 정도다.


 사회의 상식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떤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지점까지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문제가 됐을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인터넷 공간 위에서 무한한 논쟁이 반복되고 있는가.




 이 배경에는 ‘메갈리아’가 있다. DC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 시작된 이 사이트는, 인터넷상의 모든 과격 급진 페미니즘을 선동하는 사이트로 묘사된다. 때로는 마치 모든 페미니스트들을, 심지어는 이 사이트가 만들어지기 전에 활동한 페미니스트까지도 조종하는 암흑권력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사실 정작 ‘메갈리아’ 내부에서는 사이트가 망해가고 있다는 의견이 대다수인데도 말이다.


 이제는 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메갈리아’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런 이미지를 얻었을까. 핵심은 ‘미러링’이다. 남성들이 여성들을 향해 일상적으로 벌이던 성적 차별 혹은 대상화를, 여성들이 남성들을 향해 돌려주겠다는 것이 이 사이트의 활동 방식이다.




 사실 이 ‘미러링’은 당장 듣기에도 문제가 많은 방식의 운동이다. 당장 누군가가 자신을 폭행했다고 해서, 자신이 그를 폭행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범죄를 저지른다면, 사법당국과 행정당국의 도움을 받아 범죄를 멈추는 것이 ‘제도적이고’ ‘문명적인’ 방식이다.


 ‘미러링’이라는 방식이 옳다고 해도, 그 과정의 폭력성은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단순한 ‘미러링’의 수준을 넘어서는, 정도가 지나친 남성에 대한 비하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를 비판하기 위해 이용하는 근거 중 하나다. 이런 수준의 폭력성은 상대방에게 비판의 여지를 주는 것을 넘어, 도덕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방식이다.


 ‘미러링’의 대상으로 ‘일간베스트 저장소 (이하 ‘일베’)’를 선택한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일베는 주로 남성들이 여성에 대한 비하와 성적 대상화를 쏟아내던 공간이기도 했지만, 사회 대다수 대중으로부터 비상식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던 사이트이기도 했다.


 ‘미러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다수의 남성들이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지나치던 지점을 꼬집어서 남성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은 자신이 일상적으로 벌이던 일이 누군가에겐 상처였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일베는 남성을 포함한 대다수 사회대중으로부터 외면받던 사이트였다. 누구도 일베를 ‘일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메갈리아가 일베를 미러링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부터, 핀트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당장 메갈리아에서 ‘미러링’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는 일베식 말투를 봐도 그렇다. “~노”로 끝마치는 말이나, “이기야”와 같은 단어는 일베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기 위해 사용되던 말이다. 이런 말투의 미러링은 사회대중을 메갈리아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만든다. 고인에 대한 모욕을 미러링하면, 그건 미러링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모욕으로 남을 뿐이다.


 이런 폭력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성소수자, 특히 남성 성소수자에 대한 문제였다. 메갈리아 안에서는 한때 “남성 성소수자도 한국 남성이므로, 이들의 신상을 공개해 사회에서 매장시키자”는 움직임이 일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곧 운영진에 의해 차단당했고, 밀려난 이들은 ‘워마드(WOMAD)’라는 새로운 사이트를 만들었다.


 성소수자에 대한 신상 공개는 흔히 ‘아웃팅’이라고 불리는 범죄 행위다.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차별과 폭력을 그대로 또 다른 약자에게 가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만들어진 ‘워마드’가 현재로선 ‘메갈리아’보다 더 활동적인 사이트가 되었다는 사실은 일종의 코미디에 가깝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미러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지나친 폭력성. 메갈리아가 지닌 문제는 이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메갈리아가 남성에 대한 폭력을 저질렀으니 문제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면 되는 것일까? 그 결론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산술적으로 평등한 판결을 내리기란 쉽다. “성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아주 간명하고 상식적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하면 그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를, 그들은 알려주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와, 그 무지가 가지고 있는 패권과 수없이 다퉈야 했던 이들의 삶을 보고도, 무책임하게 그런 말을 던질 수 있을까.





 커뮤니티 사이트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물론 ‘여론’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하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전부 똑같을 수는 없다. 메갈리아에 접속한 어떤 사람은 온건하고 평화적인 방법을 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식을 원할 수 있다. 때로는 범죄적인 방식을 옹호하는 사람도 등장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문제적 발언이 등장할 수도 있다. 때로 여론이 이에 동조할 수도 있다. 도를 넘은 비하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 용인될 수도 있다. 그렇게 폭력성이 발현될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사이트 외부의 사람들은, 해당 글이나 발언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아웃팅 범죄나 특정인에 대한 명예훼손 등 범죄적 행위를 제외한다면, 그것을 단순히 “모든 폭력은 나쁘다”라는 결론으로 이끌 수 있을까. 물론 모든 폭력은 나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라면, 그 유아기적 발상에 갇혀 다른 해석의 여지를 두지 못한다면, 이 사회가 성장할 여지도 거기서 끝나고 만다.




 메갈리아는 폭력적이다. 하지만 이 결론에 갇히지 말고, 눈을 돌려 사회의 현실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여성에 대해 폭력적이다. 메갈리아보다 더 폭력적이다. 메갈리아의 폭력은 저항이다. 사회 전체가 벌이는 폭력에 대한, 아주 일말의 저항이다.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단순히 일베와 같은 특정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혐오발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거대한 구조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 회사,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에 고정하려는 사회 분위기,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여성의 노동 환경, 박탈되는 여성의 승진 기회.


 당장 국회의원 숫자만 놓고 보자. 300명 중 여성 의원은 51명이다. 비례대표는 여성과 남성이 절반씩 들어가도록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심지어 17%라는 여성의원 비율은 역대 최고 수치다.


 이 폭력적인 사회를 아무렇지 않게 묵시하면서, 메갈리아가 벌이는 폭력만을 못견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폭력은 나쁘다. 이 단순한 정의를 왜 이 사회에 적용시키지 않고, 메갈리아라는 소수 집단에게만 적용시키는가.


 누군가가 개인에게 벌이는 범죄 행위는, 사법당국과 행정당국의 도움을 받아 처벌하는 것이 ‘문명적이고’ ‘제도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성적 차별과 대상화에 관해서라면 비문명적이고 야만적이다. 제대로 된 처벌 규정과 제재 방법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 야만적인 사회보다, 저항하는 개인에 주목하는 비열함의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메갈리아의 전략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성평등 실현을 위해 폭력적인 방식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그들이 폭력적이지 않았다면 함께 싸워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것은 가증스럽다. 페미니스트들은 이제까지 수백 년에 걸쳐 그 ‘폭력적이지 않은 투쟁’을 병행해 왔다. 그들과 함께한 이들이 얼마나 됐던가.


 폭력적인 전략으로 ‘잠재적 우군’을 놓치지 말라는 충고 아닌 충고는 또 얼마나 우스운가. 그 잠재적 우군은 얼마나 잠재적이기에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도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는가. 지금 당장에도 폭력적이지 않게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은 많다. 언제 한 번이라도 그들과 연대해본 일 있었는가.


 여성에 대한 혐오범죄가 벌어질 때,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사회에서 도태당할 때, 심지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낙태하는 제노사이드가 벌어질 때, “페미니즘이 싫다”며 IS에 가담하는 청년이 등장했을 때. 그 ‘잠재적 우군’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들은 잠재적 우군인가, 잠재적 적군인가.




 이것은 하나의 전략이다. 거대한 폭력에 맞서기 위한 작은 폭력이다. 물론 그 과정과 별개로 존재하는, 아웃팅과 같은 대응적이지 않은 폭력은 반드시 제재되어야 한다. 하지만 메갈리아를 정의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폭력이 아니다. 거대한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한 저항이 메갈리아를 정의한다.


 이 전략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 역시 이 전략에 크게 동의하는 편은 아니다. 대다수가 사회의 현실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당연시하는 상황에서, 대중을 ‘기분 나쁘게’ 하는 방식의 운동, 대중에게 ‘설명해야’하는 방식의 운동은 그 정의로움와 무관하게, 성공의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폭력을 아무런 고찰 없이 단순히 “폭력적인 것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이는 핵심과 맥락을 잃은 비판일 뿐이다. 내가 허락해야만 페미니즘인 것이 아니다. 이들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으로 페미니즘과 연대해도 좋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 없이 손가락 끝으로만 “모든 폭력은 나쁘다”고 말하는 일은 오히려 메갈리아 이상으로 폭력적이다.




 또한 메갈리아가 이 사회에서 해낸 역할에 대해서도 부정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를 통해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차별과 대상화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그랬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으로 살고 있는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해 일말도 짐작하지 못했다. “너는 여자니까”와 “너는 남자니까”를 아주 당연하게 믿고 자랐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수많은 압박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지냈다.


 아니, 어쩌면 나의 의도적 외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여자가 아니었더라면”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여성들의 대화를 듣고도 모른척 한 나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포기한 꿈과 희망과 열정에 대해 아무런 고찰을 하지 못한 나였다.


 여성에 대한 뿌리깊은 혐오가 나에게도 있었다.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으며, ‘인간’의 기본형으로 ‘남성’을 당연하게도 생각했다. 성 역할의 구분과 성별의 구분을 당연시하며 살아갔다. 남성과 여성 모두가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을 바꿔준 것이 메갈리아였다.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수많은 불쾌한 일들과 억울한 일들, 고통스러운 일들과 힘든 일들. 심지어 ‘소라넷’과 같은 범죄행위가 아주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메갈리아가 아니라면 몰랐을 것이다.




 메갈리아는, 나를 포함해 사회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자각시켰다. 아마 메갈리아를 통해 날개를 편 ‘미러링’과 각종 ‘폭력적’인 페미니즘은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을 자각시킬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메갈리아의 전략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메갈리아가 사회적으로 절대악의 상징처럼 되어버려도, 그렇다면 메갈리아는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메갈리아’에서 나오는 말들에 대해 불쾌하고 짜증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에 불쾌한 우리는, 과연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고 살았는가? 여성에 대해 남성이 일상적으로 던지는 말들을, 그 대상이 남성이 되었다는 이유로 불쾌하게 느낀 것은 아닌가?


 메갈리아가 던지는 의문은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수와 과한 폭력성이 있었더라도, 메갈리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메갈리아를 ‘여자 일베’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일베’에 접속하지 않을 뿐 ‘일베성’을 뿌리깊게 품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메갈리아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혹은 메갈리아와 관련된 물건을 인증했다는 이유로,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앗아가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일베적’인 이들이 아닌가.




 민중총궐기에 나온 시민들을 향해 “왜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하냐”며 비판하던 이들이 있었다. 결국 실제로 국가의 폭력에 의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칠십줄 노인에 대해서 이들은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당장 지금의 일만은 아니다. 민주화운동에 대해, 독립운동에 대해, 그리고 이전의 수많은 민권운동과 자유주의 운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 “폭력성”을 비판했다.


 쉬운 말이다. “목적은 옳았지만 과정이 옳지 않았어.”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폭력을 기반으로 확보된 자유를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폭력적인’ 과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메갈리아의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문이다.


 자유, 정의, 평등, 우애. 당연해보이는 모든 가치의 저 깊은 곳에는, 언제나 피의 냄새가 서려 있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만드는 오늘이다. 불우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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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외부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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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요즘 딱 두 군데만 뜨거운 것 같다. ‘성주’와 ‘종편’이 그 두 곳이다.


 지난 13일, 사드(THAAD)의 배치 지역이 최종 공개됐다. 성주군이었다. 국방부는 설명단을 파견했지만 군민들의 저항은 거셌다. 국무총리가 직접 내려가 사태의 진정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더욱 거센 반발만을 불러일으켰다. 총리는 6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발길이 묶여 움직이지 못했다.




 거센 저항이 이어지는 사이, 종편은 이 저항에 ‘외부세력’이 침투해 있다는 투의 보도를 지속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민주시민언론연합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7월 15일에서 21일까지 TV조선은 시사토크쇼와 뉴스 프로그램의 66.7%를 사드 관련 내용에 할애했다. 같은 기간 채널A는 79.2%를 할애했다. 거의 대부분의 방송이 사드 관련 내용으로 채워진 것이다.


 이들은 주로 사드 관련 집회의 ‘외부세력 개입’에 방점을 찍었다. ‘전문 시위꾼’이 사드 관련 집회에 개입하고 있고, 이들의 주도로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성주 군민들의 상경 집회에 관해서는 “서울로 올라오시는 순간 여러분들의 순수성은 자칫 잘못하면 이용당하기 십상”이라며, 외부세력 개입에 대한 섣부른 걱정을 섞기도 했다.


 오보도 상당 부분 섞여 있었다. TV조선 <박종진 라이브>는 ‘외부세력 개입’을 말하며 화면에 문규현 신부의 얼굴을 띄웠다. “문규현 신부 등 일행, 또 시민단체 시위 주도?”라는 자막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당일 문규현 신부는 서울 ‘평화통일을 여는 사람들’ 사무실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채널A <김승련의 뉴스 TOP10>에서는 외부세력을 향해 “직업적 혁명투사”라며, “과거 세월호 사건이라든가 광우병 사건 때 극렬시위를 해서 경찰병력들 죽이고 했던 사람들 있”다는 발언이 나왔다. 세월호 시위와 광우병 시위 과정에서 사망한 경찰은 한 명도 없었다. 명백한 허위사실이었다.


 손솔 민중연합당 공동대표가 성주에서 목격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하지만 손 대표는 당시 서울의 당사에 머물러 있었다. 오보였다. “친중, 친북적 부분에서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라는 전형적인 종북몰이도 이어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이제까지 우리 나라를 뒤덮었던 수많은 이슈들 가운데, 우리가 ‘외부세력’이 아니었던 경우는 얼마나 될까.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했던 사람 중, 당사자였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찬성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직접 해당 역사교과서로 공부를 해야 할 학생들이나, 국정 역사교과서에 왜곡되어 등장할 인물이 아니라면 딱히 당사자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밀양 송전탑 논란 때는 어땠는가. 송전탑이 건설되든 건설되지 않든,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별다른 고충 없이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모두 밀양 송전탑 건설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통합진보당 해산은 어땠을까. 당장 통합진보당 당원은 10만 정도였다.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든 해산되지 않든, 나머지 사람들은 사실 별다른 피해 없이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해 한 마디씩 의견을 얹었다. 당장 통합진보당 해산을 끝없이 추동한 사람들이 종편의 패널들 아니었던가.




 ‘외부세력’이라는 논의는 대단히 소모적이다. 우리는 모두 외부세력이다. 다른 사람의 일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래서 연대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존재하길 바라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었다. 내가 아는 그 누구도 그 참사에서 사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는 끔찍한 비극이었으며, 우리 모두가 추모하고 슬퍼해야 할 일이다. 수습의 과정에서 나타난 무능에 분노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게 어떻게 내 일처럼 생각이 되냐”는 것은 나향욱 전 기획관이 “민중은 개, 돼지”라는 말과 함께 꺼낸 말이기도 했다.


 연대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다른 사람의 일을 나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 다른 사람의 일에 함께 공감하고 분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핵심 가치다.




 우리는 모두 외부세력이다. 동시에 우리는 모두 외부세력이 아니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은 곧 우리의 일이다.


 우리가 직접 국정 역사교과서로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역사교과서로 공부한 아이들이 사회의 중추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분명 그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당장 송전탑 피해 지역에 살지 않더라도, 언젠가 우리가 그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 제대로 된 설득과 보상 없이 무작정 토건 사업만을 추진하려고 할 때, 누구도 저항하지 않는 선례를 만든다면 그 다음 피해는 바로 우리의 몫이다.


 통합진보당 당원이 아니었더라도, 정부의 주도로 어떤 정당을 해산할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협이 되기 십상이다. 당 지도부 몇 사람의 행위로 당 전체를 해산할 수 있는 판례를 만들었을 때, 과연 우리가 지지하는 다른 정당이 무사하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세월호에서 죽은 것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의 비극이다. 언젠가 나 역시 바다에서 구출되지 못하고 죽어간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할 권리를 방기한다면, 우리 모두가 그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사드의 성주군 배치도 마찬가지다. 사드가 아무런 합의와 대화 없이 성주에 배치되었을 때, 피해시설의 다음 입지가 우리의 집 앞일 가능성을 누가 배제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사드의 피해자들이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사드의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그들과 연대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단순한 원리다.




 설령 ‘전문 시위꾼’이 등장했다고 해도 그렇다.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허용한다. 어떤 시민이 현장마다 찾아다니며 집회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가 어떤 범법 행위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어떤 정치인이 어떤 방법으로 정치를 하든, 그것이 도덕적인 선을 넘지 않는 범위라면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바는 아니다. 문재인 전 대표가 네팔에 가든, 안철수 전 대표가 사퇴를 하든 관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나라에는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직업이 있습니다. 시위전문가라는 직업입니다.” TV조선 <김광일의 신통방통>에서 김광일 진행자가 한 말이다. ‘직업’이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종사하는 일을 말한다. 집회에 갔던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받았는가. 어떤 이익을 취했는가.


 ‘전문 시위꾼’이라면 일당 2만원의 어버이연합이지, 성주에 모인 시민들은 아니다. 그들이 시위를 통해 금전적인 이익을 취했다는 증거가 드러나기 전엔 분명 그렇다.




 우리는 모두 ‘외부세력’이다. 외부세력이라는 이유로 시위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모두 이 사회에 대해 일정 정도의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책임감과 의무감이 ‘집회와 결사’라는, 헌법이 보장하는 방식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모두 당사자들이다. 같은 국가와 사회의 틀 안에서,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당사자들이다. 우리의 권리를 위해 광장으로 나서는 것에, 거리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연대와 공감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시위 현장에 나가는 시민들을 단순히 ‘외부 세력’과 ‘전문 시위꾼’이라는 말로 매도할 수는 없다. ‘외부 세력’과 ‘전문 시위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그들이 누리고 있는 표현과 집회의 자유가, 민주주의 사회의 유지를 위한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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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권리와 의무의 양날개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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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저도 무수한 비난과 저항을 받고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대통령이 흔들리면 나라가 불안해진다.”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와 국민을 지켜내기 위해 해야할 것은 최선을 다해 지켜낼 것이다.”


 “소명의 시간까지 의로운 일에는 비난을 피해가지 마시고, 고난을 벗 삼아 당당히 소신을 지켜 가시기 바란다.”




 지난 21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했던 발언이다.



 청와대는 요즈음 안팎으로 시끄러울 것 같다. 그 안의 분위기를 알 수 없으니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정국에 분위기가 좋을 수 없다.


 우선 사드(THAAD) 문제가 있다. 갑작스럽게 발표된 사드 배치에 중국이 발끈했고, 역시나 갑작스럽게 발표된 배치 지역에 성주 주민들이 발끈했다. 수 차례 정상회담을 가지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중국. 그리고 지난 대선 박근혜 대통령에게 86%의 표를 몰아줬던 성주. 이 미묘한 관계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문제도 있다. 구속된 진경준 검사장과 유사한 비리가 우 수석에게서 포착되고 있다. 단순한 비리를 넘어, 정부 권력기관 도처에 ‘우병우 사단’이 포진해 있어 ‘문고리 권력’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새누리당 안의 갈등도 빼놓을 수 없다. 친박 핵심 인사였던 윤상현, 최경환 의원이 지난 총선 공천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었다는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공개됐다. 친박계 전체가 큰 타격을 입었다. 다가오는 전당대회에선 비박계의 낙승이 예견된다. 박근혜 대통령의 계산도 복잡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꺼낸 발언이었다. “대통령이 흔들리면 나라가 불안해진다.”


 흔들릴 것 같은 상황에서, 흔들려야 마땅한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흔들리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대통령이 흔들리면 나라가 불안해지는 것일까.




 대통령은 국민 다수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다.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임된 사람이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51.6%라는 지지율을 등에 업고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박근혜 대통령 선출 당시, 투표율은 아주 오랜만에 반등해 75%를 넘겼다.


 유권자의 4분의 3이 투표한 선거에서, 절반 이상의 지지를 업고 당선된 대통령. 이 과정에서 어떤 부정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전임 대통령과 비교해 보면 훨씬 명확해진다. 대통령직선제 실시 이래로, 과반수 득표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이 유일하다. 노태우 대통령은 36%라는 초라한 지지율로 당선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위와의 격차를 20% 넘게 벌리는 놀라운 결과를 냈지만, 투표율은 60%선에 그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투표율과 지지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당선자였다.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을 선택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끌어갈 국정을 신뢰했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권리가 있다. 본인이 원하는 방식대로 국정을 이끌어나가고, 때로 그것이 반대와 비판에 부딪히더라도 소신껏 국가를 이끌어나갈 권리가 있다.


 탄핵 소추나 국민투표와 같은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대통령의 권한 행사가 제한되지 않는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권한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51.6%의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바로 그 권한을 제공했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가 가지고 있는 무게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고, 사드를 배치하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다가 마지막에는 “고심 끝에 해체”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잦은 해외 순방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국회를 무시하는 태도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얼마든지 비판을 할 수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집회를 할 수 있다. 국민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박근혜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리도 있다. 법률이 제한하는 범위 안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국가를 이끌어나갈 권리가 대통령에겐 있다. 헌법과 법률이 규정하는 선, 그 선 안의 일은 국민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게 위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 선을 넘지 않는 한, 자유로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을 지닌다. 따라서 사드 배치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다. 물론 헌법상 필요한 사안이라면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대통령은 행정 각부에 대한 통솔권을 지닌다. 따라서 특정 조직을 해체하고 개편할 수 있다.


 대통령은 정부의 수반이다. 따라서 교과서의 발행 체제를 개편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한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해외를 순방할 수도 있다.


 대통령은 법률에 대한 거부권을 가진다. 따라서 국회에서 제출한 법을 폐기할 수 있다. 국회가 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헌법에 규정된 바에 따라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받으면 된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거부권은 무력화된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권한을 임의로 박탈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한 표의 가치가 소중한 것이고, 그렇기에 유권자의 책임이 중대한 것이다.


 대통령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때로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의 뜻을 표하더라도,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절차에 따른 규제가 아니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소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대통령이 흔들리면 나라가 불안해진다. 정당한 절차를 따르지 않은 의견이 대통령을 함부로 흔들면, 원칙이 설 땅이 사라진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자리가 무거운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자리가 무거운 것은 꼭 그 자리가 가지고 있는 권리 때문만은 아니다. 대통령은 그 권리만큼이나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다.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선임된 대통령은, 민주주의적 원칙을 수호할 의무를 진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식장에서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선언했으며, 그 헌법은 첫머리부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선언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무엇인가. 합의와 설득이다. 대화와 소통이다. 언급했듯 박근혜 대통령은 원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 때로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안이라도, 대통령의 권한 안에서 밀어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대화와 소통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이 져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몇 번이나 기자회견을 했는가? 그 중에 연출되지 않은, 기자들의 ‘자유로운’ 질문을 받은 것은 몇 번이나 되는가? 국민들의 의견을 직접 듣겠다고 시도한 일은 있는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인 국민은 어떻게 대우했는가. 공권력의 진압 과정에서 쓰러져 중태에 빠진 농민은 기억이나 하고 있는가. 국가의 부재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 있는가. 소통과 합의의 기술이 없다면, 대통령은 차치하고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적 개인으로서부터 자격 미달이다.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는 것 역시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다. 헌법 66조는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사례도 많다. 개성공단 폐쇄가 대표적이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은, 개성공단의 가동 중지를 위해서는 통일부 장관이 관계 행정기관장과 협의해서 결정해야 하고, 반드시 청문을 실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개성공단 가동 중지는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으며, 청문도 실시되지 않았다.


 지난 총선 때는 대구를 포함한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실상 지원유세에 나섰던 박근혜 대통령이다. 7.30 재보궐 선거 당시에는 나경원 후보에게 “꼭 승리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선거 개입은 선거법을 넘어 헌법 위반 사항이며, 탄핵까지 가능한 사안이다. 박근혜 대통령 본인도 이 사안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소추한 바 있지 않았던가.




 대통령이 국회를 무시하고 있다는 지점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국회의원 한사람 한사람은 헌법상 권리와 의무가 보장되어 있는 헌법기관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행정권을 통솔하며, 국회가 통솔하고 있는 입법권과는 완전히 별개의 권력이다. 삼권분립의 원칙은 민주주의 국가 운영의 기초다. 대통령은 국회를 존중하고 협력하며 국가를 운영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는 이러한 기초적인 내용도 잘 포착되지 않는다. 국회법 파동, 유승민 원내대표 축출, 직권상정을 위한 무례한 국회의장 압박, 꾸준한 국회 비판과 ‘세비 반납’ 요구까지. 입법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문고리 권력’ 논란은 또 어떤가. 대통령은 본인과 함께 공적인 일을 담당하는 참모를 투명하게 공개할 의무가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이력을 밟아 왔고,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장관이나 총리에 대한 청문회가 괜히 실시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이들을 참모로 이용하고 있다는 증언은 집권 초기부터 쏟아졌다. 직접 기초연금 공약을 설계한 진영 전 복지부 장관은, 제대로 된 설명도 없는 공약 파기에 결국 사퇴해 더불어민주당으로 넘어왔다.


 ‘7인회 논란’이나 ‘정윤회 파문’, ‘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 논란’ 등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참모진이 내각 위에 군림한다는 의혹이 임기 내내 이어졌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우병우 민정수석 역시 ‘문고리 권력’이라는 논란이 피어나고 있다.


 합법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통해 선임되지 않은 이들이 국정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은, 정부의 운영 메커니즘이 원칙과 신뢰와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주의 사회가 합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사회가 합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의무 역시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대화보다는 차벽을 앞세우는 정부. 소통의 의무는커녕 집회에 나선 국민을 폭행하는 정부. 최소한의 헌법과 법률마저 어기는 정부, 그리고 삼권분립의 원칙조차 지키지 못하는 정부. 박근혜 대통령은 바로 이런 정부를 이끌고 있다.


 아무런 의무의 이행 없이 권리만을 주장하는 정부가, 국민 앞에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권리에 정당성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그런 의미에서라면, 대통령은 흔들려야 한다. 헌법과 법률에 의해 흔들려야 한다. 정당한 절차에 의해 흔들려야 한다.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해 흔들려야 한다. 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무에 의해서 흔들려야 한다.


 제대로 흔들려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가진 대부분의 문제는 어디서 흔들려야 하고, 어디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구분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박근혜 대통령 임기가 3년 반 정도 흘렀다. 앞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되는 2018년 2월 24일까지, 1년 반 정도의 기간이 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임덕이 시작될 것이고, 대선 국면에 접어들면 사실상 대통령으로서 어떤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벅차다. 박근혜 대통령 사실상의 임기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찌됐든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통솔하는 자리에 서 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박근혜 정부가 국가를 잘 꾸려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제 남은 짧은 임기 동안이라도, 의무와 권리를 함께 지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대통령이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방식으로 흔들릴 수 있기를 바란다.




 “대통령이 흔들리면 나라가 불안해진다.”


 “국가와 국민을 지켜내기 위해 해야할 것은 최선을 다해 지켜낼 것이다.”


 “소명의 시간까지 의로운 일에는 비난을 피해가지 마시라.”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그 권리와 의무의 무게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제대로 흔들리지 못한다면, 가장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소명의 시간”이 오기 전에, “국가와 국민을 지켜내기 위해” 국민 스스로 “대통령을 흔들”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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