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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하는 민주주의를 위해

그래도 여전히,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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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하기 전에, 간단한 실험을 하나 해 보자. 질문 몇 개에 대답만 해 보면 된다. 스스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는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왜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가?”

 “왜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가?”

 “왜 법을 지켜야 하는가?”

 “왜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이변이 벌어졌다.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의 제 4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내년 초 취임식을 거치고 나면,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은 끝나고 이제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가 도래한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주요 여론조사는 하나같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당선을 예측했다. 하지만 투표장 속 민심은 달랐다.


 경합주인 오하이오, 노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등은 모두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선거인단의 과반수인 270명을 먼저 차지한 트럼프는 선거에서 승리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유권자 전체 표에서는 승리했지만, 조금이라도 이긴 사람이 한 주의 모든 선거인단을 차지하는 ‘승자독식제’ 때문에 최종적으로 낙선했다.




 트럼프는 어떤 사람인가. 당장 생각나는 몇 가지 사례만 이야기해 보자. 트럼프는 멕시코 인을 ‘강간범’에 비유했으며, 멕시코와 미국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말했고, 미군 전사자 가족을 그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비하했다.


 장애인을 조롱했으며, 성추행을 저질렀고, 그 피해를 고백한 여성들에겐 “성추행을 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부모가 멕시코인인 판사는 공정하지 않다고 말했으며, 낙태 여성은 처벌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유세장에서 상대 지지자에 대한 폭력을 조장했으며, 기후 변화는 중국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 주장했다.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았으며, 본인이 고용한 노동자의 임금을 주지 않고 위장 파산했다.


 상대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감옥에 보내겠다고 말했고, 외모를 비하했다. “더러운 여자(such a nasty woman)”라는 욕설도 대선 토론장에서 서슴지 않았다.


 그는 부끄러운 후보였다. 혐오와 증오를 가치로 내건 사람이었다. 공화당 내에서도 후보를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상당한 힘을 얻었다. 지지자들도 트럼프가 부끄러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여론조사에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조용히 투표로 말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17년 1월 20일 무리 없이 취임할 것이다. 사람들은 불편한 가치보다는, 편리한 혐오를 선택했다.


 사람들은 저 깊은 곳에서 ‘트럼프의 세상’을 원하고 있었다. 유리 천장을 부수고 ‘남성적인’ 세계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여성이 옳은 말 하는 세상을 원하지 않았다. 돈 많고 별 생각 없는 남성이 혐오발언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는 세상을 원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결정이었다.




 정치적 중립을 논하고 싶지 않다. 트럼프는 최악의 후보였다. 극단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민주주의 사회는, 그 최악의 극단을 투표로서 선출했다. 절망의 밤이었다.


 하지만 이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우리는 다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무엇이 이 극단의 시대를 만들었는가.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시대. 논리와 이성보다는 감정과 혐오가 투표를 이끄는 시대. 무엇이 이 시대를 만들었는가. 사회의 다수가 그를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도널드 트럼프는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각 주는 주민의 총의를 모아 연방정부에 전달했으며, 이를 취합해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다. 민주주의가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단순히, 투표를 한다는 사실이 민주주의는 아니다. 민주주의는 결정의 ‘방법’이지만, 그걸 넘어서 모든 유권자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공정한 투표만이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다.


 누구든지 어떤 말을 하고, 모두에게 그 말을 전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 뜻이 맞는 사람이 모여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집회의 자유. 단체를 만들어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결사의 자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그 맥락을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 원하는 말을 글로 쓸 수 있는 출판의 자유.


 약자에의 보호. 규칙의 준수. 혐오하지 않는 발언. 인권에 대한 존중. 이 모든 것들이 민주주의를 핵심적으로 구성하는 ‘과정’들이다.


 그래서 모든 민주주의 사회는 ‘투표’라는 방법을 넘어서, ‘자유’라는 과정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민주주의 역사는, 바로 이 자유를 억압하려는 이들과 쟁취하려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자유를 쟁취하고 보장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자유를 ‘왜’ 쟁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의문에 명쾌한 답을 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그 답을 내리지 못했다면, 우리가 쟁취한 자유는 다시 반납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우리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질 시간이 있었는지. 우리에게 그런 고민을 허락하는 환경이 주어졌는지. 가치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졌는지. 그리고 그 질문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오만했다. 모두가 고민 없이도 그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고민 없는 가치는 몰락하기 마련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말이다.




 처음에 던졌던 질문을 상기해 보자. 우리는 이런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논리적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막연히 무언가를 옳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이 본질적 질문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지는 않았는가?


 왜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한 사람에 의한 통치는 필연적으로 한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체제를 낳는다.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지만, 누구보다 무능한 사람이 지도자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의 의견을 묻는다. 오류를 최소화하고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왜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가. 판단능력을 가진 인간은 모두 각자의 입장과 각자의 시각에서 사안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때, 최대한 많은 수의 시각이 모여야 그 사안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모두의 자리에서 각자가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더 정확한 판단능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가.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의 결정에 모두가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수의 목소리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소수자에게도 그들의 논리를 펼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 주어야 한다. 누군가의 힘에 억눌리지 않은, 올바른 결론을 찾아나가는 민주주의 사회의 방법론이다.


 왜 법을 지켜야 하는가. 법은 사회 전체가 만든 규칙이다. 규칙을 어기기 시작하면 사회 전체에 신뢰가 사라지고, 사라진 신뢰는 필연적으로 비용을 발생시킨다. 상대방이 규칙을 어길 가능성을 생각하며 쓰는 비용이, 규칙을 지키기 위해 쓰는 비용보다 더 크다.


 왜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어떤 단어는 특정 집단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누구도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는 게 사회 전체를 덜 불쾌하게 만든다. 단어를 바꾸는 과정의 이질감은, 사회 전체에서 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사는 기득권 세력이 안고 가는 것이 공정하다.




 이것은 몇 가지 질문해 대해 내가 내린 답이다. 누군가는 이 답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도, 달리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가치를 가지고 고민해본 일이 있느냐는 것이다. 가치에 대해 논쟁하고, 그 가치를 지켜야 할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볼 기회가 우리에게는 있었는가. 생각의 차이를 두고, 그것을 좁히기 위해 노력할 여유가 주어졌는가.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성장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고민의 과정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권리조차 암암리에 박탈된 채 살고 있었다.




 경제는 성장했다. 우리는 과거의 인류보다 부유하다. 기술도 성장했다. 우리는 과거의 인류보다 효율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민은 성장했는가. 인류는 스스로 숭고한 가치를 추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투표장 안에서 사람들이 품고 있던 본심은 달랐다. 이성의 둑은 이미 허물어졌다.


 우리는 안이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 결정의 방법을 넘어 과정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 과정의 의미와, 그것을 수호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의문을 품을 권리를 주는 사회를 생각해야 한다. 질문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세상을 지향해야 한다.


 이것은 특정 정권, 특정 국가를 넘어선 문제다. 도널드 트럼프를 지도자로 선출한 세상에서, 이것은 적어도 혐오보다는 우애가 옳다고 생각하는 인류 모든 이들이 가진 의무다.




 민주주의는 그래서 어려운 체제다. 민주주의는 끝없는 자기 혁신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옳은 가치라도, 국민의 절반 이상을 설득시키지 못하면 몰락하고 만다. 의심받지 않는 본성은 사회에 진보보다는 퇴보를 가져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절망하지 말자. 민주주의는 현대까지의 역사를 거친 인류가 발명해 낸 최선의 체제다. 우리가 노력하는 한, 오류의 가능성이 가장 낮은 체제다. 그리고 그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체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다시 기회가 있다. 대중과 함께 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우리가 잡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는 기회가 있다. 언제든지, ‘왜’라는 질문을 꺼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사회 구성원 전부에게 확대시킬 수 있다면, 인류 전체는 다시 한 번 큰 진보의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시대가 나빠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대중은 트럼프를 선택했다. 그리고 트럼프는, 그 선택의 대가를 충분히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만큼,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 구호를 생각하게 된다. “Stronger Together.” 함께하면 더 강해질 수 있다. 이제 모두와 함께 가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원칙을 지키기 위한 질문을, 모두 함께 시작해야 한다.


 아주 어려운 싸움이 눈앞에 있다. 트럼프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우리 모두의 기저에 깔려 있는, 의심받지 않는 본성이 그를 만들었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의 몰락은 필연이다. 우리는 그 전조를 보고 있는 것뿐이다.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논리에 대해 회의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권리를, 인류 전반에 확대해야 한다. 그렇게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그 기반을, 쌓아두어야 한다. 그것이 시대의 역행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낙선 연설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했던 말을 전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자.


 “수많은 고난과 역경의 순간이 우리의 앞에 예견되어 있다. 하지만 옳은 일을 위한 싸움이라면, 그 모든 것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우리의 가치를 위해,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만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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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아아앙 2016.11.17 01:41 신고

    음...우선 필스교양 잘 듣고 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먹고 살기 힘들어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유중에는 오바마의 행정력의 한계...그러니까 더 나은 삶을 제공하지 못한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전 지금 강한 강도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지만 뾰족 한 대안이 있지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주변의 사람들의 삶이라는게 딱히 나아보이지도 않지요
    여유가 있어야 토론을 할수도 있지 않을까요
    박원순 시장식의 소통형 리더쉽이 잘 먹히지 않는 이유도 삶의 피곤함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기승전 기본소득으로 끝나네요 ㅎㅎ
    그럼에도 생각해볼것이 많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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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직 여기에 있습니다.

아직은, 관악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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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대 최경희 총장이 사임했다는 소식을 막 들었습니다. 세달 여에 걸친 투쟁 끝에 승리를 이끌어내신 이화여대 학생분들께 축하와 더 큰 응원을 보냅니다. 승리의 기운이 한강을 건너 여기까지도 밀려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여기는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입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분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지난 10월 10일,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전면철회를 주장하며 본부를 점했으며, 현재까지 본부를 지키고 농성 중에 있습니다.





 의문을 표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시흥캠퍼스가 생기면 학교도 넓어지고 좋은 거 아니야?” “시흥시 주민들에게 약속해 놓고 파기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학생들이 시흥캠퍼스 조성에 참여할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저는 총학생회에서도, 단과대 학생회나 무슨 단체 같은 것에서도 활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문을 꽤나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런 의문에 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답을 드리기 위해선, 조금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무려 9년 전인, 2007년의 일입니다.


 2007년, 서울대학교에서는 <서울대학교 장기발전계획 2007-2025>라는 계획서를 발간했습니다. 이 계획은, 2025년까지 서울대학교가 전세계 10위권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높은 목표이긴 하지만, 대학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학교가 다양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그런데, 이 계획서의 ‘국제화’ 항목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글로벌 리더십 캠퍼스를 구축하고, 신학문 분야의 교육과 연구를 위해 거주대학을 활용할 것.


 ‘거주대학’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기로 하죠. 가장 중요한 것은 ‘글로벌 리더십 캠퍼스 구축’이었습니다.


 바로 이 ‘글로벌 리더십 캠퍼스’가, 시흥캠퍼스 논의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학교 측에서 새로운 캠퍼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우선은 계획서에서도 제시됐듯이 국제화 문제입니다. 학교는 내국인의 외국 유학이라는 기존 방식의 국제화가 아니라, 유수한 외국의 인재를 유입하는 방식의 국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옳은 말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국제화가 진행된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이 다음부터 논리구조가 이상하게 전개됩니다. 그런 국제화를 시행하기 위해, 새로운 캠퍼스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타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관악캠퍼스에서는 왜 국제화를 하지 못하는지 의문이지만, 학교가 지금까지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않으니 저도 답해 드릴 순 없습니다. 전직 기획처장님의 “국제공항이 가까워서”라는 답변은 답변이라기엔 많이 민망하니까요.


 학교가 주장한 또 하나의 이유는 ‘관악캠퍼스의 포화’였습니다. 관악캠퍼스가 너무 꽉 차 있어서, 새로운 연구소를 짓거나 학생 자치 공간을 마련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었죠.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공간이 부족한 걸까요? 이건 조금 더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서울대학교 장기발전계획> 이야기를 했었죠? 그런데 사실 이 계획서에는, 지금 말하고 있는 ‘글로벌 캠퍼스’ 말고, 또 다른 캠퍼스 하나를 더 지어야 한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 캠퍼스는 바이오 산업이나 친환경 사업 관련 연구를 하는 캠퍼스로 계획되었죠.


 이 캠퍼스는 어떻게 됐냐구요? 만들어졌습니다. 이미 완공되어 있어요. 강원도 평창시에 서울대학교 평창캠퍼스가 설립되었고, 현재 운영 중에 있습니다. 270만m² 크기의 거대한 캠퍼스를, 3,400억 정도의 돈을 들여서 만들었습니다. 물론 아직 서울대학교가 국립대학이던 시절에 세운 계획이니, 대부분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졌죠.


 그런데 이 캠퍼스, 운영이 잘 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거대한 캠퍼스에 상주하는 교수는 15명 남짓에 불과합니다. 학생들은 정원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죠. 물론 농생물학 등의 연구는 큰 토지가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교수님들이 장원을 만들고 영주가 되신 게 아니라면 이건 너무 넓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들어선다는 기업 연구소는 감감 무소식이고, 학교는 현재 이 캠퍼스 유지에만 매년 250억 정도의 돈을 쓰고 있습니다. 심각한 수준이죠. 서울대학교의 계획 없는 공간 운영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관악캠퍼스라고 다를까요? 서울대학교가, 평창캠퍼스를 제외하고 가지고 있는 땅은 모두 400만m² 정도 됩니다. 거대하죠. 국내에서 가장 넓습니다. 세계적인 수준에서 봐도 좁지 않아요. 그 넓은 중국의 북경대보다 크고, 예일대는 학교 안의 골프장까지 합해도 서울대보다 좁습니다. 동경대는 크기가 서울대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관악캠퍼스가 오래 전부터 난개발되어 왔고, 개발제한구역이 걸린 부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간 부족’이라니, 이렇게 거대한 캠퍼스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국제화도, 공간 부족도, 시흥캠퍼스 건립의 이유가 되어주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런 알 수 없는 이유로, 서울대학교는 2007년에 국제화 캠퍼스 부지를 공모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시흥시가 선택됐죠. 시흥시는 현재 ‘배곧 신도시’라 불리는 새로운 신도시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서울대학교가 들어올 부지를 마련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6월, 서울대학교와 시흥시가 양해각서를 체결했습니다. 물론 ‘양해각서’라는 문서는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양해각서를 통해 시흥시와 서울대학교가 약속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흥시는 서울대학교에 약 20만 평 정도 되는 땅을 무상으로 제공합니다. 그리고 민간 건설업체 하나를 선정해서, 서울대학교 주변에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해 줍니다.


 신도시 부지이기도 하고, 대학이 들어온다고 하니 땅값이 꽤나 오르겠죠? 분양 과정에서 민간 건설업체가 이익을 많이 볼 겁니다. 그런데 이 이익은 서울대학교 덕분에 번 것도 일부 있으니, 이 민간 건설업체는 3000억 원 규모의 건물을 서울대학교에 무상으로 지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분양 실적에 따라 최대 1500억을 서울대학교에 직접 지급하여야 하죠. 이렇게 합의가 됐습니다.


 결국 서울대학교는 시흥시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해 주고, 그 대가로 20만 평 정도의 땅과, 4500억이라는 이익을 취할 수 있게 된 겁니다.


 2011년에 사업 마스터플랜이 완성되었고, 2012년부터 배곧신도시가 착공에 들어갔습니다. 위에서 말한 ‘민간업체’는 2013년에 ‘한라’라는 건설업체로 선정됐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민간업체 선정 때까지 시흥캠퍼스의 진척 상황을 전혀 안내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캠퍼스가 새로 생긴다는 소식과, 이미 민간업체 선정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갑작스럽게 접하게 된 거죠. 심지어 본부 측의 통보도 아니었습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이 소식을 접했습니다.


 비민주적으로 추진된 캠퍼스에 대해 학생들은 당연히 반발했습니다. 당시 총학생회는 단식 투쟁, 천막 투쟁 등을 이어갔죠. 학교는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대화협의회’라는 기구를 만들고, 이 기구에서 학생 측과 학교 측이 시흥캠퍼스에 대해 직접 토론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2014년 7월에 신임 성낙인 총장이 부임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화협의회는 최소 한 달에 한 번 회의를 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총장은 이 약속을 어겼습니다. 2014년 9월에 한 번, 8개월 뒤에 한 번, 그리고 또 1년 뒤에야 또 한 번의 회의를 열었죠. 이 기구는 사실상 기능을 잃어버렸습니다.


 약속을 어긴 사례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낙인 총장은 학생들에게, ‘실시협약’을 체결하기 전에 대화협의회를 통해 반드시 이야기를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실시협약’은 양해각서와 다르게 실제로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는 협약이죠. 하지만 성낙인 총장은 대화협의회를 열지 않았고, 지난 8월 22일 학생들에게 30분 전에 보낸 메일 한 통으로 실시협약 체결을 알렸습니다. 체결식조차 없었던 졸속 협약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미 ‘총조사’라는 것을 실시해,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체결 반대라는 의견을 제시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의견과, 총장의 약속은 허공에 사라지고 말았죠. 학생 측은 항의하며 총장에게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청원경찰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실시협약 체결 이후 9월 6일, 학생들은 총장 명의로 메일을 받았습니다. “신뢰의 서울대학교를 약속합니다.”라는 제목이었죠. 이 메일에서 성 총장은 시흥시와의 신뢰를 지키게 되어 다행이라며, 불통에 대한 지적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다니 유감”이라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사과같지만 사과는 아닌, 애매한 내용이었죠.




 시흥캠퍼스는 이렇게 학생들의 뜻을 완전히 무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협약을 만들고 체결하는 과정까지 학생들의 의견이 들어갈 틈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시흥캠퍼스에서 무엇을 그리 하고 싶길래 이런 방식으로 일처리가 되는 걸까요? 시흥캠퍼스는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려 하는 걸까요?


 처음 학교에서 제시한 운영 형태는 위에서 말한 ‘거주 대학’이라는 형태였습니다. Residential College, 줄여서 ‘RC’라고 흔히 부르는 방식입니다. 학생들 전부가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형태죠. 사실 이것도 나쁜 형태는 아닙니다. 대학생 주거난을 해소하고, 집중적인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실제로 유럽의 많은 대학이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죠.


 하지만 지금 서울대학교가 선택하고 있는, 하나의 캠퍼스와 단과대가 있는 형태도 역시 나쁜 형태는 아닙니다. 미국의 많은 대학교는 이런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어느 한 쪽이 옳은 게 아니죠. 또한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대학을 RC형태로 바꾸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갑니다. 기숙사도 지어야 하고, 프로그램도 새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자율권 침해 문제도 심각합니다.


 학생들은 반발했습니다. 학생들을 의무로 기숙하게 하는 학교를 만들면서, 학생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으니까요. 강한 반발에 부딪힌 학교 측도 결국 “학생들의 동의 없는 강제 RC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RC를 하지 않는다면, 그 넓은 시흥캠퍼스에는 누가 들어갈까요?


 총장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계획이 없다.”


 특정 단과대학을 들어서 시흥으로 옮기는 것은 어떨까요?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학교 측이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학생들의 동의 없이 단과대 이전은 없을 거라고요. 현재 관악캠퍼스에는 시흥 이전을 원하는 단과대학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시흥캠퍼스에는 누가 들어갈까요?


 총장님의 답변은 다시 이렇습니다. “계획이 없다.”


 서울대학교 병원 분원도 시흥캠퍼스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병원은 서로 다른 법인입니다. 서울대학교가 병원을 넣겠다고 약속해줄 수 없어요. 하지만 각종 포털사이트 지도에는 이미 ‘서울대학교 병원 예정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병원의 동의는 어떻게 얻어야 할까요? 역시 계획이 없습니다.


 학생들의 이동 편의를 위한, 관악-시흥간 셔틀버스 운행 이야기도 나왔죠. 하지만 시흥시는 상주 인원이 많길 원합니다. 이 분쟁은 어떻게 해결할까요? 이쯤 되면 예상하셨겠지만, 역시 계획이 없습니다.


 시흥캠퍼스 건설 과정에서, 민간업체에게 받는 건물과 돈이 4500억 정도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사실 이 자금으로는 시흥캠퍼스 전부를 완공할 수 없습니다. 전부 완성하는 데는 1조 8천억 정도의 돈이 들어가요. 부족한 돈은 어디서 마련할까요? 이번에도 당연히, 계획이 없습니다.


 총장님은 이런 말로 이 모든 문제를 정리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숙제다.”




 20만 평 규모 땅에, 1조 원을 들여서 캠퍼스를 짓는데, 계획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2018년 3월부터 1차 운영을 시작한다는데, 대체 무얼 할 지는 학생도 모르고 학교도 모르고 시흥시도 모르고 건설업체도 모릅니다. 숙제는 총장님이 만들었는데 갑자기 ‘우리 모두의 숙제’가 되어버렸어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정말 궁금해집니다. 이 캠퍼스는 대체 왜 지으려고 하는 걸까요?


 문제는 아주 단순합니다. ‘돈’입니다.


 서울대학교는 2011년, 학생들과 시민들의 반대를 뚫고 법인화를 강행했습니다. ‘국립 서울대학교’는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가 되었습니다. 과거엔 국가에 완전히 속한 국가기관이었다면, 지금은 일종의 공기업이 된 셈이죠. 국가가 법인을 세우고, 이사와 이사장을 선임해 그들이 학교를 관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기죠. 국가가 서울대학교에 돈을 줄 이유가 사라집니다. 물론 대학이고, 국립법인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국고 보조금이 들어가지만, 예전처럼 많은 돈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서울대학교가 돈을 버는 방식은 다섯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국고 출연금, 등록금, 연구비, 기부금, 그리고 수익사업을 통한 이윤입니다. 국고 출연금은 말했듯이 늘릴 수가 없고, 등록금을 올리기엔 부담스럽죠. 연구비와 기부금은 학교에서 늘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학교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수익사업입니다.


 단순한 수익사업이 아닙니다. 학교 로고를 박아서 기념품을 파는 정도가 아니죠. 건물을 올리는 정도로도 안 됩니다. 스케일이 크죠. 캠퍼스 하나를 통째로 새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생깁니다. 그렇게 ‘시흥캠퍼스’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20만 평의 땅과 3000억의 건물, 그리고 1500억의 자금. 서울대학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물론 학교를 운영하는 데 최소한의 운영 자금은 필요합니다. 학교 운영 자금이 충분해서 학생들의 등록금을 낮춰주거나, 복지 사업을 진행한다면 좋은 일이죠. 하지만, 단순히 건물을 세우고 자신의 임기 내에 치적을 만들기 위해서 수익사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무시된다? 교육 기능을 잃어버린다? 학교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흥캠퍼스를 두고 얼마나 많은 돈이 오가고 있는지는 이미 보셨습니다. 물론 시흥캠퍼스 완공과 운영에는 앞으로 더 많은 돈이 들어가겠지만, 그 때는 또 새로운 수익사업을 찾아나서면 되죠. 캠퍼스 안에 민자 기숙사를 만들어도 되고, 편의점이나 대기업 빵집을 유치해도 됩니다. 기업이 원하는 연구소를 유치해서, 기업이 원하는 연구만 진행해도 됩니다. 캠퍼스가 생기면 돈을 벌 방법이야 많습니다. 교육을 할 방법이 없어서 문제죠. 물론 그들에게는 큰 문제도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서울대학교가 돈을 버는 방식은 또 어떻습니까. ‘서울대학교’라는 이름을 팔아 무상으로 토지를 제공받았고, 주변에 투기 붐을 일으켰죠. 그 과정에서 민간 토건자본이 돈을 벌어갔고, 그 이익의 일부를 서울대학교가 가져가는 형태입니다. 학교가 투기를 부추기고, 토건자본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거죠. 학교로서 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흥캠퍼스에서 어떻게 교육을 할지에 대한 아무런 계획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서울대학교가 시흥에 가는 이유는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죠. 학교가 바라는 것은 오직 돈입니다. 그 돈을 위한 계획만 철저하다면, 시흥에 캠퍼스를 짓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결국, 시흥캠퍼스는 단순히 캠퍼스를 하나 더 짓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계획이었다면,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좋은 캠퍼스를 만들고자 노력해도 됩니다. 총장의 ‘유감’ 정도에 굽히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흥캠퍼스는, 기업이 되어버린 대학교가 어떤 방식으로 돈을 쫓아 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짓밟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좋은 캠퍼스’를 만들자며 움직일 수 없는 거죠. 투기자본을 이용해 돈을 버는, 기업이 되어버린 대학은 변하지 않으니까 말이죠.




 결국 학생들은 파기되는 약속, 비전 없는 토건사업, 기업화된 대학을 ‘시흥캠퍼스’라는 하나의 상징을 통해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는 법인화 이후, 사실상 학생들이 학교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막아세우고 있습니다. 총장 직선제는 폐지되었고, 이사회가 총장을 선출합니다. 새로 이사를 선출해야 할 때, 신임 이사는 사실상 이사회에서 뽑습니다. 폐쇄적인 자기선출 구조죠. 제도적으로, 학생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방법은 없습니다.


 결국 학생들은 지난 10월 10일, ‘전체학생총회’라는 기구를 소집했습니다. 이것을 서울대학교 학생회의 가장 높은 의사결정 기구로, 직접민주주의 기구입니다. 서울대학교 전체 재학생의 10% 이상이 모이면 성사되고, 현장에서 투표를 통해 학생회의 움직임을 결정합니다.


 서울대학교 재학생은 16,000명이 조금 넘습니다. 10월 10일, 전체학생총회에는 2000명 가까운 학생들이 모여 총회를 성사시켰습니다. 여기서 투표를 통해 학생들은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전면철회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투쟁 방식으로 본부 점거를 결의했습니다. 이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본부에 진입, 현재까지 농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낙인 총장은 12일 학생들과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성 총장은 “나의 임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제까지 반대하지 않다가 왜 그러느냐”, “나는 소통을 했고, 사과를 했다.”고 주장하며 실시협약 철회는 불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분명 법적 효력이 있는 실시협약은 성 총장 본인이 체결했고, 학생들은 학생총회 전까지 보름 가까이 본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캠프파이어라도 하고 논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소통과 사과 역시 미흡했죠. 결국 뚜렷한 성과는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총장실 점거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 있습니다. 총장실에서 학생들이 발견한 문건 중, 시흥캠퍼스 반대 학생들을 사찰한 문건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학번과 소속, 지도교수, 활동 내용 등을 적은 문서였죠. 성낙인 총장은 본인이 시킨 일이 맞다고 밝혔습니다.


 학생들이 시흥캠퍼스에 반대하는 동안, 학교는 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학생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민주주의적 구조 따윈 없었습니다. 등록금을 내는 학생이 학교 운영에 참가할 자본주의적 구조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의 참여를 조직적으로 막아세우는, 독재의 구조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시흥캠퍼스 반대에 대한 수많은 의문. 이것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메일을 보내고, 직접 찾아가고, 천막을 치다가, 이제는 본부에 들어갔습니다. 학생들은 총장실에서, 부총장실에서, 기획처장실에서, 대회의실에서, 그리고 본부의 차가운 복도에서 오늘도 밤을 지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시흥캠퍼스 건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화되어 돈만 쫓아가고 있는 대학과, 그 과정에서 묻히는 학생들의 목소리, 교육의 본분을 지키지 못하는 학교의 운영원리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적이지도, 그렇다고 자본주의적이지도 못한, 권위와 패권만이 존재하는 대학을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서울대학교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화여대 학생들은 결국 총장 사퇴라는 결실을 얻었습니다. 그 승리에 다시 한 번 축하와 응원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부러움과 함께, ‘우리도 이길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함께 따라 올라옵니다.


 하지만, 꼭 이길 수 있다고 믿어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싸웁니다. 더이상 “이제까지 반대하지 않다가 왜 그러느냐”는 반문을 듣지 않기 위해 싸웁니다. 어느날 문득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해 싸웁니다. 누군가에게 더 이상 미안하지 않기 위해 싸웁니다. 단 한 걸음의 진보를 위해 싸웁니다. 그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싸웁니다.




 이곳, 우리가 점거하고 있는 총장실은 그런 공간입니다.


 때로 지쳐하는 사람들을 보며, 소리치다 우는 친구를 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휴학계를 내고 온 동기를 보며,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는 사람들을 보며, 추운 밤에도 촛불을 들고 모이는 학생들을 보며, 묘한 결의에 차 있는 캠퍼스를 보며,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이 점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리고 어떻게 끝을 맺을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단 한 가지 있습니다.


 하지만 관악캠퍼스에, 강의실에, 본부의 차가운 바닥에, 도서관에, 광장에, 그리고 총장실에.


 여기에, 아직 우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의문에 대한, 저의 대답입니다. 오늘도 총장실에서 잠을 청하는 우리 모두의 대답입니다. 함께 이 결정을 만든 2000명 학생들의 대답입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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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滿)’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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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기구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알 때, 과연 그것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말이다.




 시대가 차오르고 있다.


 2013년 2월 25일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3년 반이나 흘러갔다. 임기는 이제 종반으로 치닫고 있다. 퇴임까지는 이제 500일도 남지 않았다.


 시간이 이쯤 되면, 어느 정권이든 레임덕이 오기 마련이다. 대통령의 발언이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당내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반발 여론이 나오기 시작하며, 측근들의 이탈도 시작된다. 흔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심하다. 박근혜 정권은 어떤 정권이었는가. 돌이켜 보자. 여당의 대표가 개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에게 사과해야 하는 정권이었다. 300명의 시민을 국가가 구해내지 못하는 최악의 참사를 겪고도 개각 한 번 없이, 총리조차 유임시켰던 정권이었다. 대통령의 발언 하나에 개성공단이라는 거대한 상징이 문을 닫아야 하던 정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총선에선 참패했으며,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의 비선 실세 의혹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의 폭로도 계속되고 있다. 당내에서도 대통령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조차 대통령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지지율은 20%대로 크게 떨어졌다. 보수 지지층의 이탈도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직접적으로 ‘탄핵’ 언급까지 나왔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두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런 정도의 사건이 서구에서 일어났다면 어떤 대통령도, 어떤 내각도 사임할 일”이라며, “이런 야만적 불법행위와 권력남용을 자행하는 현 정부와 대통령은 탄핵대상”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까지 참석하는 서울특별시장이 직접 ‘탄핵’을 언급한 것이다. 어쩌면 단발적인 사건일 수 있지만, 어쩌면 거대한 논의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이다. 당장 주변에서도 ‘탄핵’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이 정권 아래에서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3년 반이라는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다. 정권과 직·간접적으로 이어진 그간의 일들을 떠올려 보자.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만 적어봐도 한참이나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건들이, 민주주의가 제시하고 있는 원칙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벌어졌다. 법치주의. 삼권분립. 영장주의.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등. 수많은 민주주의적 원칙과 헌법적 가치가 파괴되고 무시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지점이 있다. 이 수많은 사건들이, 명시적으로 법률을 어기지 않은 채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법치의 시대: 합법의 극단에 서서”에서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몇 가지 사건만 살펴보자.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은 어떨까. 법무부의 제청으로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판결했다. 정당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정당의 해산은 사회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은, 사건의 핵심인 이석기 전 의원의 판결이 나오기 전에 이루어졌다. 판결 자체도 졸속이었다. 최종변론을 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제출한 증거를 모두 검토했다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점에 판결이 나왔다.


 정당이 빈약한 근거로 해산됐다는 사실 자체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는 헌법재판관의 구성부터가 문제였다. 헌법재판관 9인 중 3인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3인은 대법원장이 임명하고, 나머지 3인은 국회에서 임명한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국회 선출 3인은 통상 여당 1명, 야당 1명, 합의 1명으로 결정된다. 정권에 가까운 인사가 7인 이상을 점유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뭐 어떤가. 이 모든 일들은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 아래서 결정되었다. 정부가 정당의 해산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 헌법재판소가 정당해산권을 가진다는 것, 정권과 가까운 인사가 헌법재판관의 대부분을 맡게 된다는 것, 모두 헌법과 법률에 적시되어 있는 절차다.


 통합진보당 해산 과정에서 정당민주주의의 원칙, 삼권분립의 원칙 등 수많은 ‘원칙’이 사라졌지만, 누구도 법을 어기지 않았다. 우리의 체제는 이 모든 것을 용인하고 있다.


 한 가지 사례만 더 살펴보자. 국회법 파동과 유승민 원내대표 축출 사건은 어떨까. 여야의 합의 하에 국회법 개정안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고, 합의를 이끌어낸 유승민 원내대표를 지목해 “투표로 심판해 달라”고 주문했다.


 결국 새누리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권고했고, 유 원내대표는 이를 수용해 물러났다. 그리고 그는 지난 4.13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고, 결국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배신의 정치”라는 말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대통령이 자당의 원내대표를 축출한 것이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국회에 대한 월권행위였다. 삼권분립의 원칙과, 정당민주주의는 다시 한 번 실종됐다.


 하지만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권리다. 대통령은 이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무어라 발언하든, 그것을 규제할 수 있는 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누리당은 ‘의원총회’라는 의사결정 기구를 통해 원내대표의 사퇴를 권고했으며, 유승민 원내대표는 그것을 따랐을 뿐이었다.


 원칙은 다시 한 번 파괴되었지만 누구도 그것으로 인해 실질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원칙이 파괴되었지만 사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듯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물론 정당의 해산 자체가 잘못됐다거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 존립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법원은 정당한 절차를 통해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 유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정부는, 그 자체로 필요성을 잃는다.


 거부권 행사 역시 마찬가지다. 거부권은 대통령중심제 사회에서, 대통령이 갖게 되는 권한의 하나다. ‘대통령’과 ‘국회’라는 두 개의 의사결정기구가 서로 견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도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정당한 제도가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당 해산권은 상대 정파를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거부권은 당내 반대 세력을 숙청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떤 제도적 제재도 없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이 정당한 제도를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데, 어떤 법적 제한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헌법재판소라는 제도적 장치는 정권의 입맛에 맞게 변질되었고, 정당이라는 장치는 애초에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었다. 단 한 사람의 독주를, 누구도 제지할 수 없다.




 국가기구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알 때, 과연 그것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

 괴벨스의 말을, 이 시대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정권은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대통령제의 시스템이 어디까지 달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극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원칙이 파괴된 법치주의자의 시대다. 제도가 폭력을 용인하는 시대다. 모두가 서서히 망가지고 있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시대다.





 시대가 차오르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시스템은 이제 지난 3년 반을 통해, 그 끝을 보여주며 차오르고 있다. 여기는 극단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모든 것이 차오른 극단이다.


 ‘만(滿)’의 시대다. 모든 것이 차오른 시대다.


 하지만, 차오르면 기울기 마련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만(滿)’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만(晩)’의 시대이기도 하다. 극단을 경험한 우리는 이 극단을 넘어, 저무는 시대의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시대가 차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통령에게 정책 건의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장관을 보고 있으며, 기자회견장이 되어버린 국무회의를 보고 있다. 끝없이 터져나오는 비리에도, 대통령의 비호 아래 버티고 있는 수석을 보고 있다. 언론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도 여당의 대표가 된 친박계 정무수석을 보고 있으며, 대통령의 측근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현실을 보고 있다.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는 지지율은, 우리 모두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콘크리트 지지율’이라 불리던 선은 이미 무너졌으며, 우리는 극단의 시대에 대한 절망을 표출하고 있다. 이 체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나타나고 있으며, 대통령 한 사람의 심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세상을 지겨워하고 있다.


 그리고 시민들의 생각이 이렇다면, 그 뜻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민의가 모여 충돌하고 합의하다 결국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곳이 정치, 곧 ‘민의의 전당’이 아니던가. 정치에게는 이 차오르는 ‘만(滿)’의 시대를, 저물어가는 ‘만(晩)’의 시대를, 새로운 시대로 바꾸어야 할 의무가 있다.


 서울특별시장에게서 ‘탄핵’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개헌’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논의되고 있었다. 탄핵과 개헌을 포함한 전방위적 정치개혁 논의의 필요성이 떠오르고 있다.




 물론 이것은 “반드시 탄핵을 해야 한다”거나, “반드시 개헌을 해야 한다”는 류의 주장은 아니다. 이제 논의를 시작해 보자는 것일 뿐이다.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한 사실이 있어야 한다. 이 사실을 기반으로 국회의원의 과반수가 탄핵소추안을 발의해야 하고, 이 탄핵소추안을 국회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헌법재판소가 탄핵 결정을 내리면, 대통령이 탄핵된다.


 개헌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과반수가 개헌안을 발의해야 하고, 이 개헌안을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국민투표까지 거쳐 동의를 얻어내야만 개헌을 할 수 있다.


 어려운 일이다. 현실 가능성이 없을지도 모른다. 국회의원 3분의 2는 20대 국회 기준으로 200명이며, 현재 ’야당’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의원은 모두 171명이다. 3분의 2를 맞추기 위해선 새누리당 의원 29명의 영입이 필요하다.


 이런 현실적 어려움 외에도, 논의 과정에서 애초에 국민들이 원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날 수도 있다. 체제의 변화는 언제나 반동에 부딪히기 마련이며, 익숙함과 권위를 향한 갈망이 이 논의를 무산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떤가. 단순히 논의를 시작하자는 것 뿐이다. 그 과정에서 무너질 수도 있고, 좌절할 수도 있으며, 또 시간이 흐르며 유야무야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논의를 시작하는 데 대해서 그런 많은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정당 안에 정치개혁 논의를 위한 기구를 만들고, 그 기구에 힘을 실어주는 일. 가감 없이 모든 주장을 제시하는 일. 그 과정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아보는 일. 수많은 장애물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 지금 이 시점에서, 정치가 사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이다.


 차오르는 만(滿)의 시대, 그리고 저무는 만(晩)의 시대. 끝까지 차올라 이제 저무는 일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정치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정치가 져야 할 의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대에 오히려 다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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