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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디에 사는가

이번엔, 어느 나이든 농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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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참 빠릅니다.


 317일. 벌써 일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고 합니다. 317이라는 숫자를 보고는 조금은 놀랐습니다. 그 무거운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러갔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날의 날짜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11월 14일. 왜, 가끔 머릿속에 콕 박혀서 떠나지 않는 기억들이 있잖아요?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가도, 어느날 문득 떠올라 주체할 수 없는 기억들이요. 제겐 그 날이 그렇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서울시내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서울역 앞, 광화문 광장, 서울광장, 청계광장, 대학로까지. 뛰어다니느라 숨이 찼던 기억도 납니다. 돌이켜보면 결기나 사명감보다는, 호기심과 열정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민중총궐기 본대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산명령이 떨어졌죠. 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차벽이 통행로를 막고 있었고요.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매캐한 냄새를 맡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처음엔 그게 최루액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이제 막 대학교에 들어와, 시위라고는 몇 번 경험도 없던 저에겐 너무도 낯선 감각이었습니다.


 저는 곧 청계광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물대포. 최루액. 차벽. 식용유. 경찰에게 캡사이신을 맞고 괴로워하던 친구의 모습. 파편이 되어버린 기억들이 하나같이 생생합니다. 방패와 차벽과 물대포와 최루액을 가지고 있는 경찰과, 가진 것 없이 맨몸으로 맞서는 시위대.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과 무력감이 뒤섞인 그 때의 복잡한 감정이 지금까지도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리고 그 때, 저는 보았습니다. 물대포를 맞아 다친 시민이 구급차를 타고 실려나갔고, 경찰은 구급차 안의 환자를 향해 물포를 쏘았습니다. 본능적으로 달려가 물포를 몸으로 막았습니다. 물포가 등에 닿던 순간, 그 절망적인 서늘함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그들을 향한 살의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토록 분노한 일은, 그 전에도 그 뒤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사람이 달려가 물포를 맨몸으로 막았습니다. 환자는 안전하게 이송됐고, 그 뒤에 무사히 치료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도 있었습니다.






 제가 서 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그곳에서 한 농민이 물대포를 직사로 맞고 쓰러졌습니다. 당신이었습니다. 피흘리며 쓰러진 농민을 향해 경찰은 계속해서 물포를 쏘았습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 농민을 끌어낼 때도, 구급차에 실어 병원으로 보낼 때도, 경찰은 물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젖은 몸을 이끌고 들어간 식당에서, 당신이 중태에 빠져 회생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겁게 제 몸을 적시고 있는 한기가, 이번에는 그들의 저를 향한 살기로 느껴졌습니다. 공포스러웠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해산집회가 시작됐고, 경찰도 떠나갔습니다. 저도 곧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종일 뛰어다녀 피곤했는데도, 쉽게 잠들지 못해 뒤척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300일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신은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물포가 당신을 쓰러트렸지만, 사실 사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던 경찰이, 민중총궐기 이후에도 눈 하나 깜짝 않던 정권이, ‘폭력집회’를 운운하던 언론이, 국가폭력을 눈 앞에 두고도 병문안 한 번 오지 않던 정치인이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세웠습니다.


 경찰은 사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규정을 위반하고 물대포를 직사로 쏘아 당신을 결국 중태에 빠지게 만든 경찰은, 사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다를 바 없이,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을 박멸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사형선고였습니다.


▲ 강신명 전 경찰청장이 민중총궐기 과잉진압에 대해 "사과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어제, 당신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상황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자마자, 경찰은 서울대병원 주위를 포위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눈 앞에 두고 부검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시체를 탈취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떠돌았습니다.


 일반 시민도, 구급차도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한 서울대병원의 정문. 슬픔이 아니라 결기를 가지고 모여야 하는 빈소. 운구되는 시신을 지키기 위해 스크럼을 짜야 하는 시민. 단 한 순간도, 죽음 앞에 슬퍼할 겨를을 주지 않는 그들입니다. 당신을 살해한 그들은 지금까지도 그대로였습니다.


 당신이 사망한 뒤, 경찰은 결국 부검 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영장이 발부되면, 경찰은 강제로 시신을 부검할 수 있습니다. 이미 300일 넘게 입원해 있었기에 사인을 알 수 있는 병원 기록이 충분한데도, 그들은 물포 사격에 의한 사망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죽음에의 속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행히 부검 영장은 법원에 의해 기각됐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영장 재청구를 검토하고 있으며, 서울대병원을 압수수색해 당신의 진료기록을 확보했습니다. 최소한의 예의를 요구하는 것은 이미 사치가 되어버렸습니다.


 6월 민주항쟁 당시,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의해 사망한 이한열 열사의 시신을 그들은 탈취하려 했었습니다. “이한열의 시신 1구”라 적힌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온 경찰. 1987년의 일입니다.


 노동운동 중 의문사한 박창수 열사의 시신을, 경찰은 장례식장 벽을 뚫고 들어와 탈취한 뒤 화장해 돌려줬습니다. 1991년의 일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진보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어느 한 선이 무너져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삶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죽음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시대입니다.


 시대가 과거로 회귀한다고들 하지요. 국정원이 간첩사건을 조작했을 때에도, 선거에 개입했을 때에도, 토건사업으로 국가를 중흥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던 때에도, 역사는 국가가 편찬해야 한다던 때에도, 수장되어가는 수백의 목숨을 눈앞에 두고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때에도, 사실 저는 그것을 잘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일말의 희망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시대는 변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결별했다고 믿고 있는 과거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힘과, 그 힘에 붙어 살아가는 기생충들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아무런 주저 없이 병원 앞에 배치된 경찰을 보고 그것을 확신했습니다.


 저는 요즈음, 지나가는 교통경찰만 봐도 문득 그 때의 일이 떠올라 치미는 분노를 삭이며 살아갑니다. 서울대병원 앞에 묵묵히 서 있는 경찰을 보며, 저는 그 감정의 당위를 다시 한 번 발견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시대는, 지금보다 더욱 끔찍할지 모릅니다.


▲ 서울대병원 앞에 배치된 경찰병력.




 폭주하는 시대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당연스러워지는 세상입니다. 더이상 놀라지 않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들의 세상입니다.


 다만 이것이 어느 한 시대의 서막이 아니기를, 저는 바랄 뿐입니다.


 우리의 시대가 어디쯤 위치하는지, 지금을 사는 우리는 모르기 마련이지요. 미래의 우리가 당신의 죽음을 역주하는 세상의 서막으로 기록할지, 그 정점으로 기록할지, 혹은 변화의 출발로 기록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바로 지금의 우리만이,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무엇이라 기록될지는 바로 우리가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권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일이, 당신의 죽음 앞에 선 저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일이라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쯤을 살고 있는지는 영원한 의문이지만, 그래서 또 영원한 확신이기도 합니다.




 300일이라는 시간 동안, 당신과 당신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일말도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앞으로 긴 시간 동안 그 죽음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시대를 정의하는 하나의 징표를 말입니다.


 기억하겠다는 말로는 이제 부족합니다. 기억하게 만들겠습니다. 모두가 당신의 이름을 잊을지라도, 당신의 죽음 위에 단단하게 쌓여진 상식적인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남겨진 일은 남겨진 자들의 것입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그 열정 위에 우리가 서겠습니다. 끝까지 살아남아 서겠습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죽음으로 진보하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죽음 이전에 미리 나아갈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을 듣지 못하는 세상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당신도, 저도 평화롭게 세상의 진보를 논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 결국 또 한 번의 죽음을 만들어내는 세상. 이 유감스러운 시대가 어서 종말을 맞기를 바랄 뿐입니다. 죽음을 그 죽음의 가치만큼 슬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리고 제가 꿈꾸는, 그리고 당신이 꿈꾸었을, 그 세상을 향해 저는 오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좋은 소식만 전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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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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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한 편의 소설이다.


 감동적이지도 않으며, 스펙타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짧은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나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써넣은 소설일 뿐이다. 어쩌면 소설이라기보단 쓸데없는 망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내 머릿속 망상은 동방의 어느 작은 나라에서 시작한다. 이 작은 나라는 아주 평범한 나라 중 하나다. 남들처럼 평범한 자본주의 국가고, 평범한 민주주의 국가다. 강대국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균형을 잡을까 궁리하는 나라고,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국가다.


 이들은 식민 지배를 겪었지만, 그래도 나름 열성적인 독립운동으로 다시 나라를 세웠다. 군사 쿠데타와 독재 정권을 겪었지만, 나름 국민이 합심해 독재자를 쫓아낸 경험도 가지고 있다.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지만, 나름 기적에 가까운 경제 성장을 이루며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종종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지만, 또 자기 손으로 쫓아낸 독재자의 딸을 자기 손을 다시 대통령으로 세우기도 하는 나라다.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놀랄 만큼 미개한 국가지만, 또 때로는 대단히 합리적이고, 전무후무한 역사를 써내기도 하는 다이나믹한 국가이기도 하다. 아무튼 동방의 작은 반도에서,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또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 미지의 동방 국가에는 그래도 5천만이라는, 세계에서 스물 일곱 번째로 많은 국민이 살아가고 있다.




 물론 특기할 만한 점은 있다. 이 작은 나라는 땅덩어리도 좁은 주제에 무슨 배짱인지 25개라는 놀라운 숫자의 원전을 보유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원전 밀집도를 가지고 있는 땅이다. 이 땅에 있는 원전 단지들은, 모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자로가 모여 있는 단지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심지어 이 나라 정부는 얼마 전, 2기의 원전을 추가로 건설하기로 했다. 이미 오래되어 위험한 원전도 그냥 작동시키기로 했다. 심지어 이 나라에서 좁은 해협 하나만 건너면 있는 나라는 얼마 전 세계 최악의 원전 사고를 겪었음에도 말이다. 왠지 이런 땅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그렇다고 해 두자.


 소설의 배경은, 이렇게 이상하지만 그래서 대단히 평범한 나라다.





 자, 소설에는 서사가 있어야 한다. 이 극동의 좁은 나라를 상상하고 있는 조물주로서, 나는 오늘 이 땅에 무언가 서사를 만들어주기로 결정했다. 이 땅에 내려질 서사는 ‘지진’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영토의 어느 귀퉁이에서 지진이 발생한다. 이 나라가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수준의 지진이었다. 생각해보면 비슷한 수준의 지진이 몇 번 있었던 것 같기는 했지만, 이 나라 정부는 ‘망각’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있다. 과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미래로 나아가는 것만 해도 바쁘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옆 나라에서는 일 년에도 몇 차례씩 지진이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이 나라에 ‘망각’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는 ‘무관심’이었으니까. 25기의 원전을 보유하고도, 옆 나라에서 벌어진 최악의 원전 사고에 대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는 정부를 가진 국가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지진이 벌어진다. 지진에 익숙하지 않은 이 나라 시민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늘 가만히 서 있을 것 같던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요동치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 책상 밑으로 숨어야 하는지, 제대로 교육받은 기억은 없다.


 켜져 있던 TV에서는 아무런 이상 없이 정규방송이 진행 중이다. 이게 지진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재난방송 주관사’라며, 재해가 벌어지면 TV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라던 방송사의 공익광고가 떠오른다. 그랬던 그들은 지금, 아무런 정보도 전하지 못한 채 침묵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단 급한 대로 119에 전화를 건다. 하지만 딱히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불안에 떨며 지진이 멈추기만을 기다린다. 누군가 다치기 전에는, 누구도 이들을 구해주지 않는다. 구조조차 제대로 못 하는 국가가 예방이라고 잘할 수 있을 리는 없다.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매뉴얼은 없다. 날씨가 덥다면서 울려대던 재난문자도 오지 않는다. 국민의 안전관리를 전담하겠다며 야심 차게 출범한 ‘국민안전처’의 홈페이지는 이미 접속할 수 없다. 지진은 곧 멈추지만 불안은 멈추지 않는다.


 여진이 계속된다.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길 두려워한다. 단 한 곳도 빠지지 않고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집 밖에 모인 사람들은 하룻밤 머물 대피소를 마련한다. 하지만 어느 국가 기관도, 어느 시스템도 이들을 구하러 오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딱히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다. 근처에 있던,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원전도 다행히 별다른 이상 없이 가동된다. 사망자도 없으며, 문화재 피해도 미미하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이내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국가는 그 영원의 나태함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망상을 머릿속에서 펼쳐 가는 내가, ‘더 거대한 지진’이라는 서사를 이 땅에 부여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 나라의 기상청 과장도 브리핑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땅 밑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오늘 그 말에 대가를 제공하기로 한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지진이 발생한다. 제대로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땅의 진동이 느껴지고, 건물의 흔들림과 함께 공포감이 엄습한다. 땅 위에 안전한 곳은 없다. 이제는 어떤 일이 생길까.


 다시 한 번, 사람들은 대피할 방법을 몰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자신감에 차 있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지진을 겪고 난 뒤 대피하는 방법을 익혔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SNS만으로도 모든 것을 깨우쳤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의기양양한 사람들 가운데서 첫 번째 피해자가 나올 것이다. 공인된 정보 제공 시스템의 부재가, 더 많은 사람들을 피해자의 자리로 몰아세울 것이다.


 다시 119에는 신고가 쏟아진다. 하지만 역시 오늘도,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다. 혹시 모른다. 지난번 지진이 끝나고 ‘지진 핫라인’ 같은 것을 만들었을지도. 아니면 국민안전처를 해체했을지도 모른다. 이 나라 집권자의 취미는 ‘핫라인 만들기’와 ‘고심 끝에 해체’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 악취미 덕에 만들어진 핫라인은, 늘 그렇듯 작동하지 않는다. 전화와 홈페이지의 불통은 이 국가의 숙명이다. 피자 배달도 30분 만에 해 준다는 나라에서 정작 경보 알림은 30분이 넘어도 오지 않는다. 그나마 알림이 와도 별다른 도움은 되지 않는다. 지진이 왔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지진은 지난번 지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지진이다. 건물이 무너진다. 집에 있던 사람들이 깔리고, 야근을 하던 직장인들이 깔리고, 야자를 하던 학생들이 깔린다.


 사실 얼마 전 이 나라는 배가 뒤집혀 고등학생을 포함한 수백 명이 죽는 사고를 겪은 바 있다. 물론 아무것도 변한 건 없다. 정부의 대응 능력부터, 사람들 속의 뿌리 깊은 안전불감증까지, 늘 그대로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 나라 국시의 제일은 망각이다.


 피해자가 속출한다. 이쯤 되면 원전도 안전할 수 없다. 무슨 생각인지 25개라는 엄청난 숫자의 원전을 지어 놓은 나라다. 진앙지 근처에 있는 몇몇 원전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언제든 이상이 생길 수 있는 대단히 민감한 기관을 시스템의 힘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이 원전이다. 이렇게 거대한 자연재해에는 손을 쓸 도리가 없다.


 사실, 이 나라는 과거 이미 몇 차례의 작은 원전 사고를 겪은 적도 있다. 물론 이 원전 사고의 끝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허술한 시스템이 거대한 지진에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냉각수 가동 장치에 이상이 생기고, 노심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다가, 결국 폭발과 함께 방사선 누출이 시작된다. 피폭당한 사람들은 사망하기도 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은 언제 발생할지 모를 몸의 이상과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사고는 오늘 벌어졌지만, 피해는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다. 바다가 오염되고, 토양이 오염된다.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만들어진다. 이 땅에 접근할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적어도 그때, 이 사고에 책임을 져야 했던 우리 모두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정도는, 모두들 아무 말도 없지만, 짐작하고 있다.




 흔들리는 건물을 피해 밖으로 나온 시민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대피소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도 알려준 적은 없다. 애초에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기구라면, 여기 국가는 없다.


 겨우겨우 모인 사람들에게 국가는 아무것도 제공해줄 수 없다. 담요 한 장 내어줄 생각을 하지 못한다. 추위와 배고픔은 각자가 견뎌야 할 과업이다. 바깥사람들은 성금을 걷는다. 그게 제대로 전달되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복구와 구조를 해야 하는지 체계조차 잡혀있지 않다. ‘골든 타임’이라는 말은, 그 말에 삶과 죽음을 걸고 있던 사람들의 싸늘한 영정은 무시한 채, 어느새 관용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겪지 않았어야 할 시행착오를 겪는 사이,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난다.


 이 나라 국민 모두는 처음부터 정부의 긴급한 명령이나 조치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 나타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릴 것이고, 어차피 그 뒤로 장관이니 자문위원이니를 소집하는 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촉각에 걸린 생명이 더는 남아있지 않을 때에야 조치라고 할 만한 것이 마련된다.




 시간이 지나며 여진은 잦아든다. 사람들은 복구 작업에 나선다. 사망자의 수는, 매일 아침 신문을 볼 때마다 늘어나 있다. 비극과 슬픔이 국토를 지배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후회가 깊은 곳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누구도 살아 나오지 못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초읽기를 하듯 사망자의 수는 째깍째깍 올라간다. 모든 죽음이 트라우마가 된다. 무너진 집과 건물,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가 사진을 찍듯 머릿속에 남는다.


 국토 전체가 상가(喪家)로 변한다.





 하지만, 그 비극의 속에서도, 모든 것을 잡아먹는 마수와 같은 시간은 흐른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 명의 죽음은 통계다.” 무솔리니의 말이다. 슬픔보다는 황망함과,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무감각이 세계를 지배한다. 사람들은 슬프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괴롭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두는 결국 망각의 늪에 빠진다. 다시 상기하자면, 이 나라 국시의 제일은 망각이다.


 원전과 지진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와 신문을 지배하지만, 기사는 1면에서 2면으로, 다시 박스 기사로, 점차 밀려나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집권자는 다시 취미활동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기자들을 세워두고 짜여진 질문을 받거나, 자신을 모독하지 말라고 말하거나, 관련 기관을 해체하거나. 모두 그의 취미 활동이다.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도 그의 취미생활 중 하나이니까.


 다시, 망각의 계절이 시작된다. 어쩌다 문득 떠오르는 과거에 대한 무채색의 회상이 아니고는, 우리는 이 사건을 더는 기억하지 못한다. 세상은 그대로 굴러간다. 단 몇 달의 공백이 있었을 뿐이다. 피해자들에게는 “지겹다”는 외침만 돌려주면 그만이다.


 시스템의 부재와, 정부의 무능은 이미 논의에서 배제된다. 이 나라 사람들은, 피해자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받고, 얼마나 많은 특혜를 받아가는지에만 집중한다. 이 나라의 핵심 가치는 탐욕이다. 언젠가 내가 그 흔들리는 땅 위에 설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바뀌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그것이 이 극동의 작은 국가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총체다.


 어차피 세상이 다시 조용해질 것이라는 말을, 그들은 저 깊은 곳에서부터 신뢰한다.


 이곳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다.





 이것은 한 편의 소설이다. 그저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한 줄기의 망상이다.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라는, 이 사회를 지탱하는 시스템과 그 시스템 속에서 흘리는 사람들의 땀이 이렇게까지 무너지진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확신은 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그 확신이 아무것도 아닌 채로 버려질 수 있으며, 현실은 더욱 끔찍하다는 생각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확신이 시스템에 기반한 확신인지, 아니면 지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에 기반한 확신인지, 나는 솔직히 구분하지 못한다.


 어쨌든 이것은 현실이 아닌 소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동방 작은 나라에 대한 망상이, 언제쯤 대한민국의 현실로 돌아올지, 사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한 편의 소설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진실의 일단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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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시대

메갈리아와 ‘폭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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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우한 시대다.


 인터넷만 접속하면 온갖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논쟁이 쓰나미처럼 눈에 들어온다. 논쟁의 맥락을 따라가다가도 피로감이 겹쳐 창을 닫는 일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무지와 광기의 힘이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시대다.


 어느 성우는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쓰여진 티셔츠를 인증했다가 배역에서 교체당했다. 해당 게임사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반대 진영의 사람들은 게임사를 비판한 이들의 이름을 적은 ‘살생부’를 제작했다. 성우를 옹호했던 많은 이들이 SNS 활동을 중단했다. 결국 이 움직임은 웹툰시장에 대한 규제를 주장하는 ‘예스컷’ 운동으로까지 확장됐다.


 핵심과 맥락을 잃은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결국 반목과 분쟁이 사태의 전부를 정의해버리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논쟁은 그 자체로 이 사회에 무언가를 남긴다. 때로 무가치해 보이고 불필요해 보여도, 사회 전체로선 그것이 성장의 과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된, 하지만 해결되지는 않은 이 상황에서, 나 역시 목소리를 얹을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논쟁의 배경이 되는 사상은 하나다. 페미니즘.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은 대단히 명징하고 상식적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페미니즘’을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라고 정의하고 있다.


 “성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 이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이 견해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페미니즘만큼 모든 이들이 동의할 수 있으면서도 논쟁적인 단어를 찾기는 어려울 정도다.


 사회의 상식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떤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지점까지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문제가 됐을까. 대체 무엇 때문에 인터넷 공간 위에서 무한한 논쟁이 반복되고 있는가.




 이 배경에는 ‘메갈리아’가 있다. DC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 시작된 이 사이트는, 인터넷상의 모든 과격 급진 페미니즘을 선동하는 사이트로 묘사된다. 때로는 마치 모든 페미니스트들을, 심지어는 이 사이트가 만들어지기 전에 활동한 페미니스트까지도 조종하는 암흑권력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사실 정작 ‘메갈리아’ 내부에서는 사이트가 망해가고 있다는 의견이 대다수인데도 말이다.


 이제는 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메갈리아’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런 이미지를 얻었을까. 핵심은 ‘미러링’이다. 남성들이 여성들을 향해 일상적으로 벌이던 성적 차별 혹은 대상화를, 여성들이 남성들을 향해 돌려주겠다는 것이 이 사이트의 활동 방식이다.




 사실 이 ‘미러링’은 당장 듣기에도 문제가 많은 방식의 운동이다. 당장 누군가가 자신을 폭행했다고 해서, 자신이 그를 폭행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범죄를 저지른다면, 사법당국과 행정당국의 도움을 받아 범죄를 멈추는 것이 ‘제도적이고’ ‘문명적인’ 방식이다.


 ‘미러링’이라는 방식이 옳다고 해도, 그 과정의 폭력성은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단순한 ‘미러링’의 수준을 넘어서는, 정도가 지나친 남성에 대한 비하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를 비판하기 위해 이용하는 근거 중 하나다. 이런 수준의 폭력성은 상대방에게 비판의 여지를 주는 것을 넘어, 도덕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방식이다.


 ‘미러링’의 대상으로 ‘일간베스트 저장소 (이하 ‘일베’)’를 선택한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일베는 주로 남성들이 여성에 대한 비하와 성적 대상화를 쏟아내던 공간이기도 했지만, 사회 대다수 대중으로부터 비상식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던 사이트이기도 했다.


 ‘미러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다수의 남성들이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지나치던 지점을 꼬집어서 남성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은 자신이 일상적으로 벌이던 일이 누군가에겐 상처였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일베는 남성을 포함한 대다수 사회대중으로부터 외면받던 사이트였다. 누구도 일베를 ‘일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메갈리아가 일베를 미러링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부터, 핀트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당장 메갈리아에서 ‘미러링’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는 일베식 말투를 봐도 그렇다. “~노”로 끝마치는 말이나, “이기야”와 같은 단어는 일베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기 위해 사용되던 말이다. 이런 말투의 미러링은 사회대중을 메갈리아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만든다. 고인에 대한 모욕을 미러링하면, 그건 미러링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모욕으로 남을 뿐이다.


 이런 폭력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성소수자, 특히 남성 성소수자에 대한 문제였다. 메갈리아 안에서는 한때 “남성 성소수자도 한국 남성이므로, 이들의 신상을 공개해 사회에서 매장시키자”는 움직임이 일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곧 운영진에 의해 차단당했고, 밀려난 이들은 ‘워마드(WOMAD)’라는 새로운 사이트를 만들었다.


 성소수자에 대한 신상 공개는 흔히 ‘아웃팅’이라고 불리는 범죄 행위다.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차별과 폭력을 그대로 또 다른 약자에게 가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만들어진 ‘워마드’가 현재로선 ‘메갈리아’보다 더 활동적인 사이트가 되었다는 사실은 일종의 코미디에 가깝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미러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지나친 폭력성. 메갈리아가 지닌 문제는 이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메갈리아가 남성에 대한 폭력을 저질렀으니 문제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면 되는 것일까? 그 결론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산술적으로 평등한 판결을 내리기란 쉽다. “성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아주 간명하고 상식적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하면 그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를, 그들은 알려주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와, 그 무지가 가지고 있는 패권과 수없이 다퉈야 했던 이들의 삶을 보고도, 무책임하게 그런 말을 던질 수 있을까.





 커뮤니티 사이트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물론 ‘여론’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하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전부 똑같을 수는 없다. 메갈리아에 접속한 어떤 사람은 온건하고 평화적인 방법을 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식을 원할 수 있다. 때로는 범죄적인 방식을 옹호하는 사람도 등장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문제적 발언이 등장할 수도 있다. 때로 여론이 이에 동조할 수도 있다. 도를 넘은 비하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 용인될 수도 있다. 그렇게 폭력성이 발현될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사이트 외부의 사람들은, 해당 글이나 발언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아웃팅 범죄나 특정인에 대한 명예훼손 등 범죄적 행위를 제외한다면, 그것을 단순히 “모든 폭력은 나쁘다”라는 결론으로 이끌 수 있을까. 물론 모든 폭력은 나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라면, 그 유아기적 발상에 갇혀 다른 해석의 여지를 두지 못한다면, 이 사회가 성장할 여지도 거기서 끝나고 만다.




 메갈리아는 폭력적이다. 하지만 이 결론에 갇히지 말고, 눈을 돌려 사회의 현실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여성에 대해 폭력적이다. 메갈리아보다 더 폭력적이다. 메갈리아의 폭력은 저항이다. 사회 전체가 벌이는 폭력에 대한, 아주 일말의 저항이다.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단순히 일베와 같은 특정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혐오발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거대한 구조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 회사,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에 고정하려는 사회 분위기,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여성의 노동 환경, 박탈되는 여성의 승진 기회.


 당장 국회의원 숫자만 놓고 보자. 300명 중 여성 의원은 51명이다. 비례대표는 여성과 남성이 절반씩 들어가도록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심지어 17%라는 여성의원 비율은 역대 최고 수치다.


 이 폭력적인 사회를 아무렇지 않게 묵시하면서, 메갈리아가 벌이는 폭력만을 못견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폭력은 나쁘다. 이 단순한 정의를 왜 이 사회에 적용시키지 않고, 메갈리아라는 소수 집단에게만 적용시키는가.


 누군가가 개인에게 벌이는 범죄 행위는, 사법당국과 행정당국의 도움을 받아 처벌하는 것이 ‘문명적이고’ ‘제도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성적 차별과 대상화에 관해서라면 비문명적이고 야만적이다. 제대로 된 처벌 규정과 제재 방법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 야만적인 사회보다, 저항하는 개인에 주목하는 비열함의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메갈리아의 전략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성평등 실현을 위해 폭력적인 방식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그들이 폭력적이지 않았다면 함께 싸워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것은 가증스럽다. 페미니스트들은 이제까지 수백 년에 걸쳐 그 ‘폭력적이지 않은 투쟁’을 병행해 왔다. 그들과 함께한 이들이 얼마나 됐던가.


 폭력적인 전략으로 ‘잠재적 우군’을 놓치지 말라는 충고 아닌 충고는 또 얼마나 우스운가. 그 잠재적 우군은 얼마나 잠재적이기에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도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는가. 지금 당장에도 폭력적이지 않게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은 많다. 언제 한 번이라도 그들과 연대해본 일 있었는가.


 여성에 대한 혐오범죄가 벌어질 때,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사회에서 도태당할 때, 심지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낙태하는 제노사이드가 벌어질 때, “페미니즘이 싫다”며 IS에 가담하는 청년이 등장했을 때. 그 ‘잠재적 우군’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들은 잠재적 우군인가, 잠재적 적군인가.




 이것은 하나의 전략이다. 거대한 폭력에 맞서기 위한 작은 폭력이다. 물론 그 과정과 별개로 존재하는, 아웃팅과 같은 대응적이지 않은 폭력은 반드시 제재되어야 한다. 하지만 메갈리아를 정의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폭력이 아니다. 거대한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한 저항이 메갈리아를 정의한다.


 이 전략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 역시 이 전략에 크게 동의하는 편은 아니다. 대다수가 사회의 현실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당연시하는 상황에서, 대중을 ‘기분 나쁘게’ 하는 방식의 운동, 대중에게 ‘설명해야’하는 방식의 운동은 그 정의로움와 무관하게, 성공의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폭력을 아무런 고찰 없이 단순히 “폭력적인 것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이는 핵심과 맥락을 잃은 비판일 뿐이다. 내가 허락해야만 페미니즘인 것이 아니다. 이들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으로 페미니즘과 연대해도 좋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 없이 손가락 끝으로만 “모든 폭력은 나쁘다”고 말하는 일은 오히려 메갈리아 이상으로 폭력적이다.




 또한 메갈리아가 이 사회에서 해낸 역할에 대해서도 부정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를 통해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차별과 대상화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그랬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으로 살고 있는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해 일말도 짐작하지 못했다. “너는 여자니까”와 “너는 남자니까”를 아주 당연하게 믿고 자랐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수많은 압박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지냈다.


 아니, 어쩌면 나의 의도적 외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여자가 아니었더라면”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여성들의 대화를 듣고도 모른척 한 나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포기한 꿈과 희망과 열정에 대해 아무런 고찰을 하지 못한 나였다.


 여성에 대한 뿌리깊은 혐오가 나에게도 있었다.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으며, ‘인간’의 기본형으로 ‘남성’을 당연하게도 생각했다. 성 역할의 구분과 성별의 구분을 당연시하며 살아갔다. 남성과 여성 모두가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을 바꿔준 것이 메갈리아였다.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수많은 불쾌한 일들과 억울한 일들, 고통스러운 일들과 힘든 일들. 심지어 ‘소라넷’과 같은 범죄행위가 아주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메갈리아가 아니라면 몰랐을 것이다.




 메갈리아는, 나를 포함해 사회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자각시켰다. 아마 메갈리아를 통해 날개를 편 ‘미러링’과 각종 ‘폭력적’인 페미니즘은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을 자각시킬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메갈리아의 전략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메갈리아가 사회적으로 절대악의 상징처럼 되어버려도, 그렇다면 메갈리아는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메갈리아’에서 나오는 말들에 대해 불쾌하고 짜증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에 불쾌한 우리는, 과연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고 살았는가? 여성에 대해 남성이 일상적으로 던지는 말들을, 그 대상이 남성이 되었다는 이유로 불쾌하게 느낀 것은 아닌가?


 메갈리아가 던지는 의문은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수와 과한 폭력성이 있었더라도, 메갈리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메갈리아를 ‘여자 일베’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일베’에 접속하지 않을 뿐 ‘일베성’을 뿌리깊게 품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메갈리아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혹은 메갈리아와 관련된 물건을 인증했다는 이유로,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앗아가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일베적’인 이들이 아닌가.




 민중총궐기에 나온 시민들을 향해 “왜 경찰에게 폭력을 행사하냐”며 비판하던 이들이 있었다. 결국 실제로 국가의 폭력에 의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칠십줄 노인에 대해서 이들은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당장 지금의 일만은 아니다. 민주화운동에 대해, 독립운동에 대해, 그리고 이전의 수많은 민권운동과 자유주의 운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 “폭력성”을 비판했다.


 쉬운 말이다. “목적은 옳았지만 과정이 옳지 않았어.”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폭력을 기반으로 확보된 자유를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폭력적인’ 과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메갈리아의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문이다.


 자유, 정의, 평등, 우애. 당연해보이는 모든 가치의 저 깊은 곳에는, 언제나 피의 냄새가 서려 있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만드는 오늘이다. 불우한 시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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