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날 뒷북 기념] 할머니, 우리 할머니

 

다음날이 휴일이면 달력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해지는 이상한 취미가 있다. 그래서 어제도 개천절인 내일의 붉은 색을 바라보며 붉은 당 만세를 외치려다 말고 (붉은 당이 대체 어떤 당인지는 상상에 맡기도록 하자.) 문득 102일을 보니 푸른색으로 쓰여 있던 글씨. “노인의 날.” 노인? 내게 노인하면 떠오르는 정경은 외할머니 집 앞이다. 마을 전체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노인분들밖에는 없으니 그 장면이 떠오를 만도 하다.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모두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때에 태어난 나이니, 딱 한 명의 조부모가 있는 그 정경이 떠오를 만도 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니 할머니 생각이 났다. 우리 시대 노인과 젊은 세대. 많은 생각이 들면서 할머니 얘기가 몇 개 떠올라 노인의 날을 뒷북으로 기념하며 적어 본다.

 

0. 우리 할머니 이야기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기억하지만, 할머니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앞으로 적을 이야기도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내가 바라본 겉면의 할머니에 불과할지 모른다. 내가 아는 기본적인 것만 몇 적어보자면, 할머니는 1945년생 해방둥이. 딸 둘과 아들 둘을 낳으셨는데 딸 하나는 중학생 때에 부모를 앞질러 갔다. 그저 시골사람 분수에 맞게 농사를 지었지만 막내아들이 7살일 때 내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농사짓던 작은 땅은 마을 사람 한 분에게 소작을 맡기고 가게를 열었다. 아주 작은 시골 구멍가게. 그렇게 세월을 보내셨고 노인의 삶에 접어들었을 때 즈음에는 꽤나 행복하게 살고 계신다. 적어도 내가 보는 겉면에서는. 어려운 환경에 서울로 유학을 보냈던 막내아들은 4년 장학생으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고, 앞질러 간 딸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만족스럽게, 조금은 여유부리며 살고들 있다. 할머니는 그냥 그런, 그냥 세월의 짐을 묵묵히 지고 살아온 사람이다. 아주 소박한 원하는 일을 하나하나 하며 살고 있는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나름 진지하게 쓰고 있는데 보통 사람이라는 말에 누군가 떠오르려 한다. .)

 

할머니와 정치

천성이 천성이다 보니 정치 얘기부터 생각이 난다. 2008년이었을 꺼다. 전국에 촛불이 들끓고 있었을 때이니. 내가 처음으로 정치가 뭔지 생각하고 있었을 때이니. 할머니와 우리 집은 차로 20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다. 그래서 자주 오고가고 하는데, 그날도 할머니가 집에 오셨었다. 가까이 사는 사촌 동생들도 와 있었던 것 같다. 뉴스를 보고 있는데, 촛불 소식이 나왔다. 미국산 소고기 소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뉴스에 촛불이 나왔었구나!) 할머니가 물었다. 저 촛불집회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는 대답했다.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할머니는 재차 내게 물었고, 내 대답은 같았다. 할머니는 말했다. 저 사람들 (아마 대통령이나 뭐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거였겠다.)이 다 어른이고 그런데 미국 소고기가 그렇게 위험한 거라면 너희 같은 애들한테 먹이려고 하겠냐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미국산 소고기의 위험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도 없었고, 저들이 나에게 위험한 것을 먹이려 하지 않는다는 전제부터 잘못된 말이었다. 당장이라도 반박할 수 있는 논리였다. 아마 그때는 속으로만 저런 말을 하고 말았던 것 같다.

예전에 <그것은 알기싫다>에서 UMC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의 진실을 말해주고 싶은데, 그걸 말하면 사람들이 불편해 하길래 <그것은 알기싫다>를 만들었다고. 그 때 예를 들었던 것이 자신이 아버지에게 말했다던 K-POP의 진실이었는데, “20년간 시골 사람들 상대로 장사만 해 오셨던 아버지에게 신뢰가 사라진 사회를 설명하기가 심히 겸연쩍었다.” 뭐 이런 비슷한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때 내 기분도, 그리고 지금의 내 기분도 그렇다.

옛날에 대해 물으면 박정희 대통령의 칭찬을 가끔 하시던 할머니와, 얼마 전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대형마트의 푸드코트에 갔었다. 밥을 먹으면서 할머니는 식당 안쪽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이 다 비정규직이냐?” 나는 대답했다. “그렇지 않을까요?” 그때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서는 저 사람들 다 정규직 만들어 준다면서? 서울 사람들은 좋겠네.”

아마 그때가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되고 며칠 뒤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뭐 그런 정책을 발표한 다음이었다. 박정희를 칭찬하시던 할머니는 박정희의 긴급조치에 의해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당한 박원순의 정책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봉하마을에 다녀온 내게 그런 눔이 뭐가 좋다고.......”하며 말을 흘리시던 할머니는 박원순의 서울시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사상은 바뀌지 않았다. 할머니가 서울에 사셨다면 아마 나경원에게 투표했을 것이고, 지난 대선때는 박근혜를 찍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서울 사람들은 좋겠네.”

할머니가 서울로 가서, 내년 재선에 도전하는 박원순 시장과 새누리당의 누군가가 맞붙는다면 박원순을 뽑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다. 계속해서 노력하고, 할머니의 피부에 닿는 정책을 만들어 나간다면, 할머니의 마음은 언젠가는 돌아설 것이다. 조국 교수가 몇 년 전 썼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진보가 밥 먹여주냐?’는 질문에 이제까지 진보는 밥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라고 대답해 왔다. 옳다. 밥보다 중요한 게 있다. 하지만 이제 진보는 진보가 밥 먹여줍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2. 할머니의 눈물

언젠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 집에 할머니와 단 둘이 있었는데, 할머니 친구가 찾아오셨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어머니얘기가 나왔다. 할머니의 친구분의 어머니 얘기가 나왔다. 회상에 의하면, 그분은 참 예뻤다고 한다. (초등학생이 우리 엄마가 늬 엄마보다 이쁘거든!” 하면 믿음이 안 가지만, 그분의 말은 정말 믿음이 갔다. 세월의 목소리가 담아낸 진실성이리라.) 그러다가 이런 말이 문득 친구분의 입에서 나왔다. “그래서 돌아가시던 날도 그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셨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뜨지 못하고 그 병원에서 돌아가셨다고.

그리고 우리 할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OO(먼저 간 딸의 이름이다.)이도 살아있었으면 집에도 찾아오고, 동생이랑 같이 친정에 오면서 재밌게 지내고 있었을 텐데.......”

할머니 친구의 눈이 붉어졌다. 친구분은 화장실에 가셨고, 할머니는 마당으로 나왔다. 나 혼자 방에 남았다. 처음으로 노인의 눈물을 본 날이었다. 집에 올 때, 그 마을의 전경이 그렇게 쓸쓸했던 적은 지금까지도 없었던 것 같다.

 

3. 할머니와 죽

어렸을 때 나는 자주 아팠다. 뭐 심한 병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감기 정도에 자주 걸렸다. 부모님이 전부 직장에 나가시니, 내가 아프면 간호는 할머니의 몫으로 돌아갔다. 많이 아프진 않았는데 학교에서 조퇴를 하게 됐었다. (아마 전염성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뭐 수업을 듣기 싫었던 내 의지도 조금, 아주 쪼금 작용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엄마한테 선생님이 연락을 해 주셨고, 엄마는 할머니께 연락을 해서 할머니가 오셨다. 적당히 돌아다닐 정도는 됐기에, 마트로 가서 할머니와 죽을 샀다. 나보고 어떤 죽이 먹고 싶은지 물었다. 팩으로 나와 있는 죽이 여러 개 진열 되어 있었는데, 나는 소고기죽 (소고기에 대한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일까!)을 골랐다. 그러자 할머니는 죽을 하나 집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와보니 할머니가 산 죽은 녹두죽이었다. (이럴꺼면 왜 물어본거야!) 어차피 뭐가 딱히 먹고싶은 것도 아니었기에 주는 대로 먹었다.

먹다보니 할머니가 얘기를 시작했다. “할머니는 말이야,” 무슨 이야기일지 궁금해졌다. “참 효녀였어.” . 갑자기 들어온 깔때기에 순간 목이 막혔다. 기침을 몇 번 하고 괜찮아지자 할머니는 다시 얘기를 이었다. “옛날에는 이런 죽이 없어서 녹두로 직접 죽을 만들어야 됐어.”하고 이야기하더니 녹두죽을 만드는 것에 들어가는 엄청난 노동력과 힘듦을 설명하셨다. 내가 침대에 누울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내가 잠들려 할 때쯤에야 그 이야기의 결론이 나왔다.

할머니 어머니가 아팠을 때마다 할머니는 그 녹두죽을 만들어 주곤 했었지.”

인간에게 끝없는 욕구 한 가지가 있다면 깔때기의 욕구가 아닐까!

 

4. 할머니와 친구의 죽음

할머니 동네에는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다. 가끔 할머니 집에 가면 그 할아버지가 문턱에 앉아 맞이해 주시곤 했다. 시골 사람같지않은 기품이랄까, 뭔가 아우라가 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머니도 특히 그 할아버지에게는 더 예의바르게 대하려고 하는 게 눈에 보였고,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인가 할머니가 집에 왔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있었는데, 누군가 나가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와 봤더니 불은 꺼져 있고 TV만 켜져 있어서 TV에서 나오는 빛이 온 방을 어둡게 메우고 있었고, 같이 있었던 엄마는 없고 할머니만 축 쳐져서 앉아 계셨다.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뒤로 몇 년 간은 할머니가 집에 더 자주 오셨다. 밤에 오시면 베란다에 앉아 밤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왜 그러시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날인가는 할머니 그 자리에 앉아 별을 바라보며 하는 혼잣말이 들렸다. 할아버지 이야기, 딸 이야기, ‘그 할아버지이야기....... 먼저 떠나간 많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는 하고 계셨다. 나는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사촌 동생이 집에 오는 날에 할머니가 오셔서 그 자리에 앉아 계시면, 사촌 동생은 꼭 할머니를 찾아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로만. 할 이야기가 없으면 그냥 그 옆에 앉아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라도 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게 눈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 곁에서 동생을 떼어놓진 않았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얼마 뒤부터 집에 찾아오는 빈도가 예전과 비슷해졌고, 별을 바라보며 앉아 있지고 않게 되었다.

몇 년이 넘게 지나고서야 나는 알 것 같았다. 우리 집은 아파트였다. 아파트 10. 할머니 집은 시골의 1층 단독주택이었고. 할머니가 그토록 우리 집에 왔던 이유는 10층 높이만큼이나마 할머니가 혼잣말로 부르던 먼저 간 이들과 가까워 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할머니가 그 생각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사촌 동생이 옆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아직도 내가 그 베란다 문을 열어 할머니와 이야기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베란다 유리문에 기대 할머니의 혼잣말을 듣다가 들을 수 없어 방으로 가다가 돌아본 할머니의 뒷모습은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후회로, 그 슬픈 뒷모습은 남을 것이다.

 

5. 할머니와 교회

할머니는 독실한 신자였다. 마을에 딱 하나 있던 교회에 매주 일요일마다 나가고, 여러 일도 도와주고, 뭐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할머니의 첫째 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몇 번쯤 교회에 나가지 못했나 보더라. 결국 딸은 앞질러 갔고, 슬픔을 누르며 할머니는 다음 주 교회에 나갔다.

예배를 드리다가 목사는 설교 중에 할머니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여자 보라. 교회에도 안 나오니 딸이 죽은 거 아니냐.” 뭐 실제로는 이것보단 좀 세게. 그 이후로 할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교회를 다녔다는 얘기는 하지만, 왜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됐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도 친구분과 하는 얘기를 엿들었을 뿐.

몇 년 뒤 할머니는 가게를 열기 위해 아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고, 할머니가 살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바로 그 교회가 집을 허물고 아주 큰 건물을 지어서 이사를 왔다. 아직도 그 교회는, 속사정은 어떤지 몰라도 그 큰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냥 생각이 나서 끄적여본 이야기 몇이었다.

(왜 시험기간에는 글이 이렇게 쓰고싶은지 의문을 던지며) 마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1. z 2013.10.03 22:44 신고

    잘 읽고 갑니다^^

John Cage - 4' 33"

1952829일 비 오는 날, 뉴욕의 한 홀에서는 어떤 젊은 작곡가의 곡이 초연되려 하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터(David Tutor)가 입장했다. 뒤이어 지휘자가 등장하고 홀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관객들은 새로 나타난 작곡가의 음악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휘자는 지휘봉을 들었다. 연주자들은 연주를 위한 준비를 했고, 피아니스트는 건반 뚜껑을 열었다. 이어진 것은 고요한 정적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밖에는 없었다. 지휘자는 지휘봉을 흔드는 대신 지휘대 위의 탁상시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 33초 뒤 지휘자는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잠시 후 지휘자는 다시 지휘봉을 들었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이번에는 빗방울이 홀의 지붕을 때리는 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240초가 흐르고 지휘자는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잠시 후 지휘자가 다시 지휘봉을 들자 관객석에서는 당황한 관객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휘자는 120초가 흐르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연주는 끝났다. 연주 내내 무대 위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탈 경계적 예술의 시발점이 된 존 케이지의 <433>가 초연되었다.

존 케이지가 활동했던 20세기 말은 혼란의 시대였다. 인류가 수 천년동안 쌓아왔던 가치관들은 하나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류 존재의 기본이 되었던 사상들이 하나하나 무너져가던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인류는 인류 자신에게 아주 근원적인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술가들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가?”

존 케이지도 이러한 질문을 체감하고 있었다. 작곡가로서 그는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존 케이지가 살던 도시는 뉴욕이었다. 당시 뉴욕은 소음의 도시였다. 여기저기 시끄럽게 울리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조차도 모르는 소음까지, 존 케이지를 포함한 뉴욕의 모든 시민들은 그 소음 속에 휩싸여서 살아갔다. 그런 도시에서 케이지가 생각해낸 것은 저 소음 조차도 음악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음악일 수 있다는 발상을 해낸 것이다. 피아노 소리 뿐 아니라 말하는 소리와 도시 소음까지도 음악이라는 것이다. 음악은 주변 어디에도 있다는 것이 <433>라는 음악의 저변에 깔려 있는 첫 번째 생각이었다.

어느 날 존 케이지는 하버드 대학의 무향실에 들어가 보았다. 그는 그곳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 곳에서 두 개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들었는데, 높은 소리는 자신의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이고, 낮은 소리는 자신의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였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서 존 케이지가 떠올린 것은 완벽한 정적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존 케이지는 이미 모든 소리는 음악이다라고 생각했으므로, 소리가 없는 곳은 없다음악이 없는 곳은 없다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433> 아래에 깔려 있는 두 번째 생각이었다.

존 케이지는 모든 것은 음악이다음악이 없는 곳은 없다는 두 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433>를 작곡했다. 알다시피 <433>에서는 어떠한 음악도 연주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대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을 뿐, 음악은 연주되고 있다. 이 음악의 초연 때를 회상해 보자면, 1악장에선 바람소리, 2악장에선 빗소리, 3악장에선 관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바로 음악이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음악이라는 사실을 존 케이지는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파격적인 연주회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모든 물체는 영하 273˚C가 되면 샤를의 법칙에 의해 소멸한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물체는 영하 273˚C 아래로 온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영하 273˚C라는 온도는 어떤 물체도 접근할 수 없는 온도인 것이다. 433초를 분단위에서 초단위로 환산해 보면 273초이다. 존 케이지는 영하 273˚C의 법칙과 소리는 똑같다고 생각했다. 물체가 소멸하는 영하 273˚C에 어떤 물체도 접근할 수 없듯이, 소리의 소멸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존 케이지를 시작으로 이 근원적 질문에 대한 예술가들의 답변은 이어졌다. 비디오 아트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예술가 백남준의 답도 존 케이지의 대답과 같았다. 예술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었다. 백남준은 심지어 파괴조차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피아노 공연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부숴 버리기도 한다.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이든, <433>이든 그 음악을 처음으로 들은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아마 황당했을 것이다. 음악을 들으러 연주회에 온 사람들에게 작곡가들이 선사한 것은 파괴 혹은 침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음악들만큼 아름다운 의미를 지닌 음악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예술임을 전해주고 있는 이 음악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가장 많은 음악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여기의 하늘에서는 유난히 밝은 달이 보입니다. 그 밝은 달은 여기 있는 모두들에게 하나의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어둡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밤이 찾아와도, 절망하고 있는 우리 위에는 밝은 달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픔이 찾아와도 치료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가을은 낙엽의 계절입니다. 불그스름해진 나뭇잎들은 나무뿐만 아니라 산을, 그리고 세상 전체를 붉게 물들이곤 합니다. 나뭇잎은 나무에서 광합성을 통해 나무 전체에 사용될 에너지를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면서 햇빛이 드는 시간이 줄어들며 나뭇잎이 만드는 에너지보다 나뭇잎이 소모하는 에너지가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무는 한때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만들어주었던 나뭇잎은 떨어뜨리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다음 부분입니다. 떨어진 나뭇잎은 다시 그 나무를 위한 에너지원이 됩니다. 분해되어 다시 나무에 흡수됩니다. 나뭇잎의 생은 나무에서 시작해 나무에서 끝나는 것이지요.

곧 낙엽이 져 나뭇잎이 떨어질 것입니다. 떨어진 나뭇잎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자신을 버리고 내친 나무에 대한 원망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뭇잎이 떨어지고 가장 먼저 바라보게 되는 대상은 무엇일까요. 땅에 누워 바라보는 첫 번째 대상은 밤하늘에 빛나는 달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나뭇잎은 희망을 바라보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희망을 배운 나뭇잎이기에 다시 나무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누군가는 달이 먼 하늘에 있어 잡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멀리 있는 희망이기 때문에 우리가 잡지 못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멀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땅과 저 위에 있는 하늘은 얼마나 먼 거리인지요. 하지만 저 멀리 지평선을 봅시다. 저 멀리 지평선에서는 그렇게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땅과 하늘이 하나의 선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멀리 있더라도, 희망을 봅시다. 잡을 수 없는 곳에 있는 희망일지라도, 멀리 보면 결국 내 안에 있는 희망일 것입니다.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1. 보랏빛꿈 2012.09.04 00:31 신고

    내 안에 있는 희망의 나무가 세상으로 얼굴을 내밀면 또 다른 희망의 나무들이 함께 하게 되겠지요. 태양 아래에서는 목청을 높여 노래하고 밤이 되면 달님의 향기에 서로를 어루만지면서 숲을 만들어 가겠지요. 그 숲은 아침이면 힘든 자들의 그늘이 되어 줄 것이라는 설렘*~ 그 기운나는 콩닥거림을 느끼게 해 주어 고맙습니다^^

<4월은 온다>

 

T.S. 엘리어트의 <황무지>라는 시를 들어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구를 들어본 이는 많을 것이다. 4월은 잔인한 달. 엘리어트라는 시인이나 <황무지>라는 제목보다는 이 시구로 더 유명한 <황무지>를 통해, 엘리어트는 꽃피는 봄인 4월을 잔인한 달이라 명명했을까?

4월은 봄의 절정이다. 3월처럼 꽃샘추위가 찾아와 겨울을 연상케 하지도 않으며, 5월처럼 갑작스레 찾아오는 더위에 여름을 연상케 하지도 않는 완연한 봄이다. 봄은 어떤 계절인가. 봄은 겨울의 추위를 떨쳐버리고 따뜻함을 가져오는 계절이며, 겨우내 움츠러든 모든 것들이 움트는 시기이다. 4계절의 시작인만큼 모든 생명이 새로운 약동을 준비하는 시기이며, 출발하는 생명들에게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는 계절이다.

그런데 4월은 왜 잔인한 달일까. 4월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노력을 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황무지> 에는 겨울은 오히려 // 우리를 따뜻하게 우리를 감싸 주었었다. /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고 /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다. 라는 시구가 등장한다.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어 우리에게는 노력 없이도 가냘프게나마 생명을 키울 수 있었고, 오히려 눈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듯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왜 차가운 망각의 눈이 우리에게 따뜻한 감싸줌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이 시구에서의 망각은 자아에 대한 망각이며, 사회에 대한 망각이고, 곧 세상에 대한 총체적인 망각이다. 망각 속에서 우리는 편하게 살 수 있다. 지금의 나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삶은 지금의 나 뿐 아니라 과거의 나, 미래의 나, 그리고 사회 전반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픔을 인식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고통을 겪어야지만 하나의 인간이 될 수 있고,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 4월, 더 이상 우리는 눈을 내려서는 안 된다. 망각의 눈을, 우리는 내리게 해서는 안 된다. 마음속에서 망각의 눈을 치워야 한다. 우리가 망각의 눈 아래에 심어두었던 씨앗이 태동하며 자라나기 위해서는, 망각의 눈을 치우고 우리 자신과 사회 전체를 돌아봐야 한다. 아픔과 상처를 바라보는 이 고통의 과정이 있어야지만 3월 31일에서 4월 1일로 하루가 흐를 수 있고, 완연한 봄 안에서 씨앗은 발아하고, 자라서 푸르른 녹음을 만들어내고, 아름다운 한 송이의 꽃으로 다시 태어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대한민국 청소년과 청년들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경쟁주의적 교육에서 기인하는 자아 성찰과 사회적 관심의 부족이다. 망각의 눈을 치우고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되새김질하는 과정 없이 행복하고 인격적으로 완성된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잔인한 4월을 겪어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대한민국의 미래인 그들이 깨달아야 한다.

봄이 다가온다. 3월이 지나고 나면 4월이 오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다. 하지만 망각의 겨울눈이 자신을 영원히 감싸줄 수 있다고 착각하며 영원히 3월 31일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3월 31일에 자신을 속박시키며 새로운 나날이, 새로운 달이, 새로운 해가 다가올 수 없게 한다. 새 날을 맞지 못하는 이에게 성장이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3월 31일에 영원히 살겠다는 이들이 이것만을 알아두었으면 한다. 4월이 오지 않아도 3월은 봄의 태동이다. 눈은 이미 녹고 있으며, 3월 31일의 해가 지면 언제나 4월 1일의 해는 떠오른다.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조회수 확인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