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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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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젯밤엔 잠을 잘 자지 못했습니다. 아침 다섯 시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던 것 같네요. 겨우겨우 세 시간쯤 자고 일어났습니다. 점심때쯤 되어서야 밖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오늘 강남역에 다녀왔습니다.


 단지 항구의 이름이었던 ‘팽목항’이라는 말이 어느새 세월호와 그 이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말이 된 것처럼,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말도 어느새 증오범죄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강남역에 도착해서부터 10번 출구를 찾아 나가기까지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저는 사실 요 며칠간 이 사회가 버겁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새벽 1시, 대한민국 최대의 번화가라는 강남 한복판에서 여성을 상대로 한 증오범죄가 벌어졌습니다.


 그 사건의 추모행사를 처음 기획한 것은 ‘워마드’라는 성소수자 혐오 커뮤니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남역에 모이자 이를 ‘남혐’이라고 몰아가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일베’ 회원들은 강남역에 붙은 포스트잇을 태우고, 조화를 보내 피해자를 모욕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여혐을 일반화하지 마라”는 포스트잇이 공공연히 붙기도 했습니다.


 약자와 소외된 이를 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정치인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여성민우회는 빠지라’는 자칭 페미니스트의 말도 들었습니다.


 언론은 이 사건을 ‘여혐’과 ‘남혐’의 대결구도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포털 사이트의 댓글창은 볼 용기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범죄에 대한 공포를 ‘남성에 대한 일반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세상은 지나치게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버거웠습니다. 강남역으로 갈 때까지 며칠간 고민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강남역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종편부터 지상파, 케이블에 1인 미디어까지 취재를 온 언론인들도 많았습니다. 포스트잇에 쓰인 글씨를 조금 읽어 보았습니다.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게 있어 끝까지 읽지는 못했습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강남역 앞을 몇 차례나 빙빙 돌았습니다. 마음을 조금 가라앉힌 후에야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 뒤에 붙어 줄을 섰습니다. 막상 펜을 손에 잡으니 글을 쓰는 것은 쉽더군요. 부끄러울 만큼 쉽게 쓰인 글을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 붙였습니다. 더 이상 붙일 공간이 없어 본의 아니게 다른 분의 마음을 조금 가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조금씩, 글을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체로 단단한 벽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의 죽음이 만들어 낸 분노, 애환, 슬픔, 울분, 그리고 저항. 혐오와 증오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단단한 벽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조화도 몇 개 놓여 있었습니다. 단연 눈에 띄는 조화는 문구가 적힌 띠지가 잘려 있는 밋밋한 조화였습니다. 어젯밤까지는 이것도 문구가 붙어 있었다고 하죠.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맙시다.”라는 문구가요. 네, ‘일간베스트 저장소’ 회원들이 보낸 조화였습니다. 죽음 뒤에도 혐오에 이용되어야 했던 그들의 이름에 묵묵히 애도를 표하고 돌아섰습니다.





 순간 바람이 불었습니다. 잘 붙여지지 않았던 포스트잇 몇 개가 떨어져 날아갔습니다. 제 앞에 서 계셨던 남성분이 이것을 주워 다시 잘 붙여 주더군요. 포스트잇이 있던 테이블에 테이프가 함께 놓여 있었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습니다. 제가 쓴 포스트잇도 위태로워 보여서 다시 꾹꾹 눌러 붙여 두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센 바람이라도 불면 떨어질 것 같아 보이는 포스트잇이 몇 개 보였습니다. 밤새 소나기라도 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 자리에서 휴대폰을 꺼내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당장 돌아오는 화요일에 비소식이 있더군요.


 그때쯤 되면 천막이라도 치고 공간을 보호해야 하겠죠. 비가 그 글들은 쓸어내릴 수 있어도 분노와 저항의 에너지를 씻어낼 순 없다는 것을 알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시 글을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에 새겨두고 싶었습니다.





 대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에 올라와 살게 된 지가 이제 1년 넘게 지났습니다. 돌이켜보니 지하철로 20분쯤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살았음에도 강남에는 한 번도 와 보지 못했더군요. 실제로 와 보니 그 괴리감이 더 거대하게 느껴졌습니다. 높게 솟을 빌딩들, 수많은 사람들, 유난히 파란 하늘, 하지만 그 속에서 외로이 죽어가야만 했던 한 여성의 꿈.


 밤이면 이 땅은 얼마나 더 화려하게 빛날까요. 그 때가 되면 그 괴리감을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낮에 오길 차라리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쌓여 있던 국화꽃, 형형색색의 포스트잇. 그것들만이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글을 읽다 보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며칠간 품어왔던 버거움이 해소되는 것 같았습니다.


 여전히 거기,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그곳에 ‘여혐’과 ‘남혐’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성차별적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항’만이 존재했습니다.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부당한 세상에 대한 온당한 분노만이 존재했습니다.


 세상은 조용하지 않습니다. 찻잔 속의 태풍은 결국 언젠가 찻잔을 깨뜨릴 원동력이 됩니다. 바로 오늘의 강남역 10번 출구가 그랬습니다.




 여성에 대한 명백한 증오범죄.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음습한 확신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와, 몸서리가 쳐지는 날들입니다. 성(性)과 그 지향성이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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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복이 집사 2016.05.20 17:17 신고

    잘 읽었습니다!

비더슈탄트 (Widerstand)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비더탄트 (Widerstand)’라고 합니다.

사실 제 소개라고 해 봐야 단조롭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제도권 교육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거든요. 평범하게 초등학교, 중학교. 또 장소가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그리고 지금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입니다. 제 삶에서 제 기억이 닿는 범위 안에는, 적어도 학교에 적을 두지 않고 살았던 적은 없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 블로그가 만들어진 것과 거의 역사를 같이 합니다. 그랬던 제가 어쩌다가 이런 블로그를 운영하게 됐는지, 또 어쩌다가 ‘비더탄트 (Widerstand)’라는 반동적인 닉네임까지 달게 됐냐고 물으시면,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비더탄트 (Widerstand)’는 포털 검색으로도 쉽게 나오는 것처럼 독일어로 ‘저항’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의 저항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저항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아쉽게도, 혹은 다행이게도 저는 사건의 중심에 서거나 대오의 선두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게으른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지요.

글을 쓰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 같습니다. 광장의 중심보다는 골방의 노트북 앞이 더 마음에 드는 공간이랄까요. 물론 광장에 나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모든 것이 끝나고 사건을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제게는 더 좋다는 뜻이지요.

저는 대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합니다. 예술가들의 자취를 찾아가는 게 제가 공부하는 분야지요. 흔히들 예술가가 시대를 가장 앞서간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저는 가장 앞서 있던 이들을 가장 뒤에서 쫓아가는 사람입니다. 꼭 예술 뿐 아니라, 지금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는 종종 스스로를 ‘그림 공부하는 글쟁이’로 소개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그림을 공부한다는 말이 꼭 그림을 공부한다는 사실 자체를 말한다기보단,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려주는 것 같군요.

노트북 앞에 앉아 창밖으로 세상을 보는 일은 제겐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이 블로그를 통해, 제 창밖에 보이는 이야기들을 저의 시각으로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재밌고 유용한 방식으로 말이죠.

저는 '좋아서 하는 미디어, 채널 비더슈탄트(www.facebook.com/widerstand365)'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미디어 채널에서는 글을 포함한 다양한 방식으로 저의 생각을 전합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이 블로그 역시 채널 비더슈탄트의 일부분입니다. 채널 비더슈탄트에서는 '뉴스 포워딩'과 '뉴스 트래킹'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청연 팀과 운영하는 '현자타임'이라는 팟캐스트도 제공되고 있습니다. 물론 채널 비더슈탄트의 공식 트위터 계정 @CHwiderstand도 있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비더슈탄트, 세상을 읽다>라는 블로그는 저의 홈그라운드입니다. 제가 각종 매체에 쓰는 글의 원본은 이 블로그에 전부 올라옵니다. 다만 올라가는 사이트에 따라 편집이나 구성에서 차이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이 블로그 외에 저의 글은 <이승로그 (murutukus.kr)>라는 팀블로그에 게재됩니다. 물뚝심송 님, 요제프 님, 묵혈 님 등 다양한 분들이 함께 필진으로 계시는 블로그입니다.

<이승로그>에 올라간 글은 '직썰 (ziksir.com)' 팀에서 데려가 주시기도 합니다. <오마이뉴스>에도 종종 글을 기고하며, <딴지일보> 독투불패 게시판에도 글이 올라갑니다. 운이 좋으면 마빡에서 뵐 수도 있겠죠. <필스교양>이라는 팟캐스트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트위터에서도 @widerstand365 계정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생각, 사담,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저와 연락을 원하신다면 트위터에서 DM을 주시거나, widerstand365@daum.net으로 메일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widerstand365로 텔레그램을 주셔도 됩니다. G메일 계정으로 widerstand365@gmail.com이 있지만, 확인을 자주 하지는 않습니다. 채널 비더슈탄트는 공식적으로 CHwiderstand@gmail.com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다 좋은 글로 유쾌하게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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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읽다 > [소개] Profi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더슈탄트(Widerstand)입니다.  (0) 2016.03.19

YS, 시대가 그와 함께 지다.




어제 밤에 글을 쓰고 자리에 누워 휴대폰을 켰는데 경향신문 속보가 푸쉬알림으로 떠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사망.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인지 복잡한 기분에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겨우겨우 든 잠에서도 악몽을 몇 차롄가 꾸고 깨어났다.


나는 1997년 2월에 태어났다. 김영삼 정권이 끝나기 1년 전쯤에 세상을 본 셈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김영삼에 대한 정치적 기억은 내 머릿속에 없다. 김영삼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처음 본 것은 어떤 만화책에서였던 것 같고, 그의 얼굴을 TV에서 처음 본 것은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 때였던 것 같다. 만화책에서 봤던 외모와 의외로 비슷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마 김영삼은 내가 역사책으로 공부한 가장 최근의 정치인일 것이다.


내가 가진 최초의 정치적 기억은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16대 대통령 선거였다. 그렇기에 나는 YS와 DJ를 역사책으로 공부했다. 어쩌면 내가 양김의 시대를 현실이 아니라 역사로 공부한 첫 세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YS의 죽음에 아찔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노무현을 정계에 끌어들인 것이 김영삼이었다. 하지만 또 김무성을 정계에 끌어들인 것이 김영삼이었다. 가장 투쟁적인 민주화 열사였다. 그것은 어제 잠깐 찾아본 그의 연설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3당 합당으로 대한민국의 독재정치 타도를 어렵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말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역사가 곧 우리고 우리가 곧 역사다.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말은 판단을 회피하려고 하는 단순한 직무유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양김 대한 판단을 역사에 맡기자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직접 판단하고 싶다. 그에 대해 공부하려면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느리더라도 확실히 판단하고 싶다. 그것이 어쩌면 정치인으로서의 YS를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첫 세대에게 남은 새로운 의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DJ가 새 시대의 첫차와 같은 느낌이라면, YS는 구시대의 막차와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정말로 그 막차가 떠났다. 한 시대가 뚝 끊어진 느낌이다.


김영삼의 죽음과 함께 맞이할 새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 민주화의 과거는 하나둘 죽어가는데 독재의 과거는 생생하게 살아남아 현실로 다가온다. 처참하다. 이제는 잘 모르겠다. 이겨야 한다, 그런 생각밖에 남지 않는다. 그게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제단에 바칠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인 것 같아서.


RIP. 남겨진 일들은, 남은 자들의 것일 뿐. 그 굴곡진 삶을 뒤로하고 이제는 편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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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날 뒷북 기념] 할머니, 우리 할머니

 

다음날이 휴일이면 달력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해지는 이상한 취미가 있다. 그래서 어제도 개천절인 내일의 붉은 색을 바라보며 붉은 당 만세를 외치려다 말고 (붉은 당이 대체 어떤 당인지는 상상에 맡기도록 하자.) 문득 102일을 보니 푸른색으로 쓰여 있던 글씨. “노인의 날.” 노인? 내게 노인하면 떠오르는 정경은 외할머니 집 앞이다. 마을 전체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노인분들밖에는 없으니 그 장면이 떠오를 만도 하다.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모두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때에 태어난 나이니, 딱 한 명의 조부모가 있는 그 정경이 떠오를 만도 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니 할머니 생각이 났다. 우리 시대 노인과 젊은 세대. 많은 생각이 들면서 할머니 얘기가 몇 개 떠올라 노인의 날을 뒷북으로 기념하며 적어 본다.

 

0. 우리 할머니 이야기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기억하지만, 할머니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앞으로 적을 이야기도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내가 바라본 겉면의 할머니에 불과할지 모른다. 내가 아는 기본적인 것만 몇 적어보자면, 할머니는 1945년생 해방둥이. 딸 둘과 아들 둘을 낳으셨는데 딸 하나는 중학생 때에 부모를 앞질러 갔다. 그저 시골사람 분수에 맞게 농사를 지었지만 막내아들이 7살일 때 내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농사짓던 작은 땅은 마을 사람 한 분에게 소작을 맡기고 가게를 열었다. 아주 작은 시골 구멍가게. 그렇게 세월을 보내셨고 노인의 삶에 접어들었을 때 즈음에는 꽤나 행복하게 살고 계신다. 적어도 내가 보는 겉면에서는. 어려운 환경에 서울로 유학을 보냈던 막내아들은 4년 장학생으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고, 앞질러 간 딸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만족스럽게, 조금은 여유부리며 살고들 있다. 할머니는 그냥 그런, 그냥 세월의 짐을 묵묵히 지고 살아온 사람이다. 아주 소박한 원하는 일을 하나하나 하며 살고 있는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나름 진지하게 쓰고 있는데 보통 사람이라는 말에 누군가 떠오르려 한다. .)

 

할머니와 정치

천성이 천성이다 보니 정치 얘기부터 생각이 난다. 2008년이었을 꺼다. 전국에 촛불이 들끓고 있었을 때이니. 내가 처음으로 정치가 뭔지 생각하고 있었을 때이니. 할머니와 우리 집은 차로 20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다. 그래서 자주 오고가고 하는데, 그날도 할머니가 집에 오셨었다. 가까이 사는 사촌 동생들도 와 있었던 것 같다. 뉴스를 보고 있는데, 촛불 소식이 나왔다. 미국산 소고기 소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뉴스에 촛불이 나왔었구나!) 할머니가 물었다. 저 촛불집회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는 대답했다.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할머니는 재차 내게 물었고, 내 대답은 같았다. 할머니는 말했다. 저 사람들 (아마 대통령이나 뭐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거였겠다.)이 다 어른이고 그런데 미국 소고기가 그렇게 위험한 거라면 너희 같은 애들한테 먹이려고 하겠냐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미국산 소고기의 위험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도 없었고, 저들이 나에게 위험한 것을 먹이려 하지 않는다는 전제부터 잘못된 말이었다. 당장이라도 반박할 수 있는 논리였다. 아마 그때는 속으로만 저런 말을 하고 말았던 것 같다.

예전에 <그것은 알기싫다>에서 UMC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의 진실을 말해주고 싶은데, 그걸 말하면 사람들이 불편해 하길래 <그것은 알기싫다>를 만들었다고. 그 때 예를 들었던 것이 자신이 아버지에게 말했다던 K-POP의 진실이었는데, “20년간 시골 사람들 상대로 장사만 해 오셨던 아버지에게 신뢰가 사라진 사회를 설명하기가 심히 겸연쩍었다.” 뭐 이런 비슷한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때 내 기분도, 그리고 지금의 내 기분도 그렇다.

옛날에 대해 물으면 박정희 대통령의 칭찬을 가끔 하시던 할머니와, 얼마 전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대형마트의 푸드코트에 갔었다. 밥을 먹으면서 할머니는 식당 안쪽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이 다 비정규직이냐?” 나는 대답했다. “그렇지 않을까요?” 그때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서는 저 사람들 다 정규직 만들어 준다면서? 서울 사람들은 좋겠네.”

아마 그때가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되고 며칠 뒤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뭐 그런 정책을 발표한 다음이었다. 박정희를 칭찬하시던 할머니는 박정희의 긴급조치에 의해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당한 박원순의 정책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봉하마을에 다녀온 내게 그런 눔이 뭐가 좋다고.......”하며 말을 흘리시던 할머니는 박원순의 서울시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사상은 바뀌지 않았다. 할머니가 서울에 사셨다면 아마 나경원에게 투표했을 것이고, 지난 대선때는 박근혜를 찍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서울 사람들은 좋겠네.”

할머니가 서울로 가서, 내년 재선에 도전하는 박원순 시장과 새누리당의 누군가가 맞붙는다면 박원순을 뽑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다. 계속해서 노력하고, 할머니의 피부에 닿는 정책을 만들어 나간다면, 할머니의 마음은 언젠가는 돌아설 것이다. 조국 교수가 몇 년 전 썼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진보가 밥 먹여주냐?’는 질문에 이제까지 진보는 밥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라고 대답해 왔다. 옳다. 밥보다 중요한 게 있다. 하지만 이제 진보는 진보가 밥 먹여줍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2. 할머니의 눈물

언젠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 집에 할머니와 단 둘이 있었는데, 할머니 친구가 찾아오셨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어머니얘기가 나왔다. 할머니의 친구분의 어머니 얘기가 나왔다. 회상에 의하면, 그분은 참 예뻤다고 한다. (초등학생이 우리 엄마가 늬 엄마보다 이쁘거든!” 하면 믿음이 안 가지만, 그분의 말은 정말 믿음이 갔다. 세월의 목소리가 담아낸 진실성이리라.) 그러다가 이런 말이 문득 친구분의 입에서 나왔다. “그래서 돌아가시던 날도 그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셨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뜨지 못하고 그 병원에서 돌아가셨다고.

그리고 우리 할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OO(먼저 간 딸의 이름이다.)이도 살아있었으면 집에도 찾아오고, 동생이랑 같이 친정에 오면서 재밌게 지내고 있었을 텐데.......”

할머니 친구의 눈이 붉어졌다. 친구분은 화장실에 가셨고, 할머니는 마당으로 나왔다. 나 혼자 방에 남았다. 처음으로 노인의 눈물을 본 날이었다. 집에 올 때, 그 마을의 전경이 그렇게 쓸쓸했던 적은 지금까지도 없었던 것 같다.

 

3. 할머니와 죽

어렸을 때 나는 자주 아팠다. 뭐 심한 병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감기 정도에 자주 걸렸다. 부모님이 전부 직장에 나가시니, 내가 아프면 간호는 할머니의 몫으로 돌아갔다. 많이 아프진 않았는데 학교에서 조퇴를 하게 됐었다. (아마 전염성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뭐 수업을 듣기 싫었던 내 의지도 조금, 아주 쪼금 작용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엄마한테 선생님이 연락을 해 주셨고, 엄마는 할머니께 연락을 해서 할머니가 오셨다. 적당히 돌아다닐 정도는 됐기에, 마트로 가서 할머니와 죽을 샀다. 나보고 어떤 죽이 먹고 싶은지 물었다. 팩으로 나와 있는 죽이 여러 개 진열 되어 있었는데, 나는 소고기죽 (소고기에 대한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일까!)을 골랐다. 그러자 할머니는 죽을 하나 집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와보니 할머니가 산 죽은 녹두죽이었다. (이럴꺼면 왜 물어본거야!) 어차피 뭐가 딱히 먹고싶은 것도 아니었기에 주는 대로 먹었다.

먹다보니 할머니가 얘기를 시작했다. “할머니는 말이야,” 무슨 이야기일지 궁금해졌다. “참 효녀였어.” . 갑자기 들어온 깔때기에 순간 목이 막혔다. 기침을 몇 번 하고 괜찮아지자 할머니는 다시 얘기를 이었다. “옛날에는 이런 죽이 없어서 녹두로 직접 죽을 만들어야 됐어.”하고 이야기하더니 녹두죽을 만드는 것에 들어가는 엄청난 노동력과 힘듦을 설명하셨다. 내가 침대에 누울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내가 잠들려 할 때쯤에야 그 이야기의 결론이 나왔다.

할머니 어머니가 아팠을 때마다 할머니는 그 녹두죽을 만들어 주곤 했었지.”

인간에게 끝없는 욕구 한 가지가 있다면 깔때기의 욕구가 아닐까!

 

4. 할머니와 친구의 죽음

할머니 동네에는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다. 가끔 할머니 집에 가면 그 할아버지가 문턱에 앉아 맞이해 주시곤 했다. 시골 사람같지않은 기품이랄까, 뭔가 아우라가 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머니도 특히 그 할아버지에게는 더 예의바르게 대하려고 하는 게 눈에 보였고,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인가 할머니가 집에 왔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있었는데, 누군가 나가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와 봤더니 불은 꺼져 있고 TV만 켜져 있어서 TV에서 나오는 빛이 온 방을 어둡게 메우고 있었고, 같이 있었던 엄마는 없고 할머니만 축 쳐져서 앉아 계셨다.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뒤로 몇 년 간은 할머니가 집에 더 자주 오셨다. 밤에 오시면 베란다에 앉아 밤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왜 그러시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날인가는 할머니 그 자리에 앉아 별을 바라보며 하는 혼잣말이 들렸다. 할아버지 이야기, 딸 이야기, ‘그 할아버지이야기....... 먼저 떠나간 많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는 하고 계셨다. 나는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사촌 동생이 집에 오는 날에 할머니가 오셔서 그 자리에 앉아 계시면, 사촌 동생은 꼭 할머니를 찾아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로만. 할 이야기가 없으면 그냥 그 옆에 앉아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라도 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게 눈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 곁에서 동생을 떼어놓진 않았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얼마 뒤부터 집에 찾아오는 빈도가 예전과 비슷해졌고, 별을 바라보며 앉아 있지고 않게 되었다.

몇 년이 넘게 지나고서야 나는 알 것 같았다. 우리 집은 아파트였다. 아파트 10. 할머니 집은 시골의 1층 단독주택이었고. 할머니가 그토록 우리 집에 왔던 이유는 10층 높이만큼이나마 할머니가 혼잣말로 부르던 먼저 간 이들과 가까워 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할머니가 그 생각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사촌 동생이 옆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아직도 내가 그 베란다 문을 열어 할머니와 이야기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베란다 유리문에 기대 할머니의 혼잣말을 듣다가 들을 수 없어 방으로 가다가 돌아본 할머니의 뒷모습은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후회로, 그 슬픈 뒷모습은 남을 것이다.

 

5. 할머니와 교회

할머니는 독실한 신자였다. 마을에 딱 하나 있던 교회에 매주 일요일마다 나가고, 여러 일도 도와주고, 뭐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할머니의 첫째 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몇 번쯤 교회에 나가지 못했나 보더라. 결국 딸은 앞질러 갔고, 슬픔을 누르며 할머니는 다음 주 교회에 나갔다.

예배를 드리다가 목사는 설교 중에 할머니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여자 보라. 교회에도 안 나오니 딸이 죽은 거 아니냐.” 뭐 실제로는 이것보단 좀 세게. 그 이후로 할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교회를 다녔다는 얘기는 하지만, 왜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됐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도 친구분과 하는 얘기를 엿들었을 뿐.

몇 년 뒤 할머니는 가게를 열기 위해 아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고, 할머니가 살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바로 그 교회가 집을 허물고 아주 큰 건물을 지어서 이사를 왔다. 아직도 그 교회는, 속사정은 어떤지 몰라도 그 큰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냥 생각이 나서 끄적여본 이야기 몇이었다.

(왜 시험기간에는 글이 이렇게 쓰고싶은지 의문을 던지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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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z 2013.10.03 22:44 신고

    잘 읽고 갑니다^^

*이 글은 6월 7일 게시한 트위터 게시물에 부연 설명을 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트위터 홈페이지에서 바로 가져온 내용이라 글이 역순으로 정렬되어 있습니다. 아래서부터 위로 읽어주세요.


  1. 비가 아주 많이 쏟아져서 아무것도 안 남고 비와 나만 남았으면 좋겠다.

  2. 오늘도 법원에서 서류가 왔네요. 설마했는데.. 정말 검찰 상고했더군요. 전두환 취재가 죄가 되는 세상,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만 믿고 갈뿐.

  3. 근데 진짜로 둘은 안 닮은 듯 했는데 따지고보면 참 많이 닮은 듯.

  4. 걔는 탁재형이고 전 탁현민입니다. 안닮았습니다 . RT : 어그로분산이신가요 피디님 ㅎㅎ 우연히 벙커갔다가 피디님의 쿠바 여행기를 들었어요 ^^새삼스레 다시 방갑습니다

  5. 그 나라 이니까.

  6. 원세훈 불구속 기소... ● 노동자/민중이 시위라도 할라치면 일단 잡아넣고 보는 그 나라 맞나?

  7. 나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하는 이들을 사랑한다.

  8. 이건 뭐, 수장부터 막내까지 미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광기의 시대다.

  9. 남북 장관급회담이 열리기로 했군요. 남북관계의 진전을 바랍니다. 다만, 왜 북한이 갑자기 회담을 제의했는지는 아직 의문이군요.

  10. 우리는 새처럼 나는 방법도 알게 되었고, 물고기처럼 수영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형제 자매와 함께 걷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마틴 루터 킹)

  11. 인정, 참회, 사과, 용서의 순서가 되야하는데, 사과는 고사하고 인정조차 안하니 말이다.

  12. 용서 없는 미래란 없다. 그러나...사과 없는 용서도 없다. ● 그게 친일이듯...5.18이든...독재잔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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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Cage - 4' 33"

1952829일 비 오는 날, 뉴욕의 한 홀에서는 어떤 젊은 작곡가의 곡이 초연되려 하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터(David Tutor)가 입장했다. 뒤이어 지휘자가 등장하고 홀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관객들은 새로 나타난 작곡가의 음악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휘자는 지휘봉을 들었다. 연주자들은 연주를 위한 준비를 했고, 피아니스트는 건반 뚜껑을 열었다. 이어진 것은 고요한 정적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밖에는 없었다. 지휘자는 지휘봉을 흔드는 대신 지휘대 위의 탁상시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 33초 뒤 지휘자는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잠시 후 지휘자는 다시 지휘봉을 들었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이번에는 빗방울이 홀의 지붕을 때리는 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240초가 흐르고 지휘자는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잠시 후 지휘자가 다시 지휘봉을 들자 관객석에서는 당황한 관객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휘자는 120초가 흐르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연주는 끝났다. 연주 내내 무대 위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탈 경계적 예술의 시발점이 된 존 케이지의 <433>가 초연되었다.

존 케이지가 활동했던 20세기 말은 혼란의 시대였다. 인류가 수 천년동안 쌓아왔던 가치관들은 하나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류 존재의 기본이 되었던 사상들이 하나하나 무너져가던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인류는 인류 자신에게 아주 근원적인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술가들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가?”

존 케이지도 이러한 질문을 체감하고 있었다. 작곡가로서 그는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존 케이지가 살던 도시는 뉴욕이었다. 당시 뉴욕은 소음의 도시였다. 여기저기 시끄럽게 울리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조차도 모르는 소음까지, 존 케이지를 포함한 뉴욕의 모든 시민들은 그 소음 속에 휩싸여서 살아갔다. 그런 도시에서 케이지가 생각해낸 것은 저 소음 조차도 음악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음악일 수 있다는 발상을 해낸 것이다. 피아노 소리 뿐 아니라 말하는 소리와 도시 소음까지도 음악이라는 것이다. 음악은 주변 어디에도 있다는 것이 <433>라는 음악의 저변에 깔려 있는 첫 번째 생각이었다.

어느 날 존 케이지는 하버드 대학의 무향실에 들어가 보았다. 그는 그곳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 곳에서 두 개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들었는데, 높은 소리는 자신의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이고, 낮은 소리는 자신의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였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서 존 케이지가 떠올린 것은 완벽한 정적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존 케이지는 이미 모든 소리는 음악이다라고 생각했으므로, 소리가 없는 곳은 없다음악이 없는 곳은 없다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433> 아래에 깔려 있는 두 번째 생각이었다.

존 케이지는 모든 것은 음악이다음악이 없는 곳은 없다는 두 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433>를 작곡했다. 알다시피 <433>에서는 어떠한 음악도 연주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대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을 뿐, 음악은 연주되고 있다. 이 음악의 초연 때를 회상해 보자면, 1악장에선 바람소리, 2악장에선 빗소리, 3악장에선 관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바로 음악이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음악이라는 사실을 존 케이지는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파격적인 연주회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모든 물체는 영하 273˚C가 되면 샤를의 법칙에 의해 소멸한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물체는 영하 273˚C 아래로 온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영하 273˚C라는 온도는 어떤 물체도 접근할 수 없는 온도인 것이다. 433초를 분단위에서 초단위로 환산해 보면 273초이다. 존 케이지는 영하 273˚C의 법칙과 소리는 똑같다고 생각했다. 물체가 소멸하는 영하 273˚C에 어떤 물체도 접근할 수 없듯이, 소리의 소멸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존 케이지를 시작으로 이 근원적 질문에 대한 예술가들의 답변은 이어졌다. 비디오 아트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예술가 백남준의 답도 존 케이지의 대답과 같았다. 예술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었다. 백남준은 심지어 파괴조차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피아노 공연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부숴 버리기도 한다.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이든, <433>이든 그 음악을 처음으로 들은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아마 황당했을 것이다. 음악을 들으러 연주회에 온 사람들에게 작곡가들이 선사한 것은 파괴 혹은 침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음악들만큼 아름다운 의미를 지닌 음악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예술임을 전해주고 있는 이 음악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가장 많은 음악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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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들

쏘아버린 화살을 따라 달려나가고 있다.

그렇게 달려나가다 보면

저어 멀리 우리가 넘어야 하는 산이 보이기도 한다.

더 멀리에는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장애물들이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만을 바라보며 시름에 젖기도,

완전히 잊고 즐겁게 웃기도 하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그 거대한 산의 앞에,

그 높은 장애물의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찌됐건 쏘아버린 화살을 따라 달려나가고 있고,

세상 사람들을 자신의 화살을 따라가기 바쁘면서도

남의 화살을 지켜보며 조소(嘲笑)할 여유만큼은 일부러라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차례가 와서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몫으로 저 높은 산과 장애물을 넘어서야만 한다.

어쩌면 그 산을 오르다 지쳐 쓰러질지도 모르고,

장애물을 넘지 못해 쓰러져 뒹굴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것이 두려워 살짝 피해갈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차마 사랑할 수 없는 그 회색의 산과 장애물을 넘지 못하면

사람들은 또 예전과 같은 조소를 우리에게 줄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애써 넘으려 하는 이유는 그 조소를 피하기 위함일 것이다.

조소를 피해 그 산을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사랑하는 푸른빛의 산이 나타나 나를 감쌀 것이고,

그때야 나는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조소를 받는다고 해서 녹색의 산이 나타나지 않거나 그 산이 나를 품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회색의 산을 넘어가면 더 아름다운 길이 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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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e 2012.10.23 00:45 신고

    그곳에 다다를 때까지 그대가 지켜보고 관심과 사랑을 건넬 대상은 단지 그대 뿐임을*~
    지금처럼 잊지않는다면 그댄 지금도 그 후에도 작은 미소 지을 수 있는 거지^^

* 이 글은 역순으로 정리되어 있는 글입니다. 트위터에서 바로 따온 글이라 나중에 올린 트윗일수록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올린 순서대로 읽으시려면 이 글의 가장 아래부터 위로 읽기 시작하시면 됩니다.



 은 대선후보를 내기로 하였습니다. 단일화 중심이 아닌 진보의 가치중심 연대를 중시했습니다. 무조건적 단일화보다는 가치를 지켜내고 연대하자는 실리적 입장이지요. 좋은 입장입니다.


- 단일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단일화의 대가로 진보의 가치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단일화보다는 좋은 입장이다.

 이라는 당명은 철저하게 민주적 절차로 결정되었습니다. 우선 제안된 7개 당명중 투표로 2개 제외하고, 소수의견 중시를 위해 소수의 극단적 반대가 있는 민들레당과 새진보당 추진회의를 제외하고 투표했습니다.


- 출발부터 좋았다. 철저하게 민주적으로.

내일 김경준의 자서전이 나온다고. 현재 MB와 김경준의 관계는 나쁜 상태이지요. BBK 사건 터졌을 때 MB가 발뺀 이후로 줄곧 나쁘다가 에리카가 MB의 BBK 혐의를 털어줬는데도 그 대가로 추정되는 미국 이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죠. 기대됩니다.


- BBK의 내막이 내일 드러날지도 모른다.

신이시여, 우리의 한 주를 축복하소서.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며,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나타나지 않습니다. -


-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게 우리다. 머리 속에서 해야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다.

개국 7개월(2012.6월 기준) 종편적자:중앙종편(825억),조선(506억),동아(191억),매경(181억)...윤관석의원실...MB정부가 보수언론을 잡아먹는가???


- 노무현이 못한 언론개혁을 이명박이 하고 있다. 이러다가 종편이 1원에 시장에 나오고 딴지일보가 매수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 닫힌 보수들의 특성은 모든 특권을 줘도 적자를 낼 만큼 무능하다는 것이다.

시군구 정당공천 폐지 찬성 RT : 안철수: "대통령 권한은 인사권에서 나오듯 정당의 힘은 공천권에서 나온다. 공천권이라는 힘이 워낙 세서 사명감 있고 똑똑한 분도 정치를 하게 되면 국민보다는 공천 권한 가지신 분들만 바라보게 된다"


- 맞는 말이다. 시군구의 정당공청 폐지가 이루어지거나 시군구의 공천권을 국민에게 완전히 넘겨야 한다.

2. 대통령 당선인의 핵심 참모는 '어륀지'따위 소리나 해대면서 국어교육을 영어로 하자고 말한다. 그러면서 영어교육은 교과서나 연설문 외우기 대회 따위로 하고들 있다.


- 교과서 외우기 대회, 링컨 연설문 외우기 대회... 이런 것들로 영어교육을 한다. 필리핀만 보자. 그들이 영어에 투자하는 돈이 얼마나 되나. 우리와 비교라도 되는 수준인가? 거의 없다, 그들은. 그런데 필리핀은 우리 사람들이 그들의 모국어가 영어라고 착각할 정도로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 필리핀으로 유학을 보내기까지 한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는가? '어륀지' 따위 소리나 하며 국어교육을 영어로 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희망은 보이지 않으니, 바뀐 정권에서는 교육의 혁신을 기대해 본다.

1. '고교 순위'라는 리스트의 1위는 외국어고이고, 그 리스트의 상위에 랭크되는 한복을 입고 수업하는 학교에선 영어로 수업하고, 최고의 과학기술대학에선 영어로 수업하다 학생을 죽였고, 문화재청에서는 영어로 우리 문화유산을 설명하는 대회를 연다.


- 적어도 세상에 영어로 사람을 죽이는 나라는 없다. 적어도 세상에 자신의 문화유산을 영어로 소개하는 대회를 문화재청에서 여는 나라는 없다. 적어도 세상에 대통령 당선인의 핵심 참모가 모국어 교육을 외국어로 하자고 주장하는 나라는 없다.

철학적 과제는 우주의 본질이나 신의 존재 따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


- 철학이 시대의 문제에 다가가지 않는다면 빛의 학문(哲學)이 아니라 죽은 학문이다.

민주당은 단일화 전까지 중원에 안철수를 세워 놓고 내부 정비를 해야 한다. 안철수가 나가던 문재인이 나가던 민주당이 충분히 국민들로 하여금 달라지고 강단있어졌다는 평가를 받아야 중도 성향의 표가 이탈하지 않는다. 인물론으로는 한계가 있다.


- 개혁된 민주당이 안철수를 영입해 대권으로 갔으면 한다. 현실적으로 당적 없는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수행은 그 반대보다 어려우니.

페미니즘이 마치 여성우월주의인양 말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을 가진 이는 극소수지만 존재한다. 하지만 여성우월주의는 페미니즘이 아닌 쇼베니즘이다. 페미니즘과 쇼베니즘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논하겠다는 건가?


- 페미니즘과 쇼베니즘도 구분하지 못한다.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 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후자의 마이너들의 특징은 기본적인 것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엔 '마이너'들이 많다. 그들을 두 부류로 나누자면, 첫째는 사고가 너무 선진적이여서 동시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사고가 너무 발달하지 못해서 동시대 사람들이 버리는 경우이다. 전자에 의해 세상은 발전했다.


- 그 성재기라는 사람이 진중권 교수에게 그러더라. 자신과 같은 마이너의 힘으로 세상은 발전했다고. 그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여성과 남성을 넘어 인간으로 조화하기 위해 약자인 여성의 권리신장이 필요하다.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을 남성의 우위에 놓자는 운동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조화, 그것을 위한 운동이다.


- 인간으로써 여성을 생각하는 사회의 도래를 위해 여권의 신장이 필요하다.

내가 오늘 갑자기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여성을 '인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타임라인에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민주동호회 내부에서조차도 여성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보는 이들이 넘쳐났다, (감독 이숙경)"


- 얼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성재기라는 사람이 있다. 논란이 되기 이전부터 웃음거리로 삼기 위해 팔로우하고 있었는데, 그의 프로필이 눈에 띄었다. 남성연대 상임대표. 나는 그것이 그 홀로 만든 유령단체인 줄 알았는데, 실제 존재하는 꽤 큰 단체였다. 게다가 그에게 응원을 보내는 글 -물론 대부분은 없거나 달걀도 못 깬 유령계정이지만-이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여성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회.

여성부- 설립 의도는 좋았으나 보수로 정권이 넘어가며 의도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 보건부로부터 가족•아동관련 업무를 승계받으며 여가부로 바뀌면서 왜곡은 극을 달리기 시작했다. 정권이 바뀌면 원래 의도대로 운영되어야 한다.


- 박근혜가 여성이면서도 남성으로 통치한다면, 남성이면서도 여성으로 통치하는 이는 누구일까. 아마 DJ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위주의 타파와 여권 신장을 가장 훌륭히 이끌어낸 남성 정치인이 아닐까. 이런 한 위대힌 정치 지도자의 혜안으로 만들어진 여성부는 잘못된 정권의 의미 왜곡으로 인해 좋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 정권이 교체되면 바꾸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변화를 위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사실 담벼락을 보고 욕한다고 변하진 않는다. 행동만이 그 길이다. 그 말씀은 행동을 하기 위한 단계로 욕이라도 하라고 하신 것이지, 담벼락에 욕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 행동이 중요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씀은 담벼락을 보고 욕을 하고, 그렇게 쌓아놓은 그들에 대한 분노로, 행동아라는 의미이다. 담벼락에 대고 욕만 한다고 세상이 변하리란 생각은 착각이다.

탁교수 말처럼, 정치권력의 교체는 피상적 변화일지 모른다. 진정한 변화는 시민 개개인의 변화. 정치의 변화는 시민의 변화를 측정하는 척도일 뿐이다.


- 한 번의 정권 교체로 모든 것을 바꿀 순 없다. 진정한 변화는 우리의 변화, 시민의 변화이다. 정권 교체는 그 척도이다.

7. 최초의 여성 대통령은 박근혜여서는 안된다. 여성 대통령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유연함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별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여성이어야 한다.


- 성별을 넘어 사회적 여성이 그 유연함의 선봉에 서야 한다.

6. 노통은 자기가 대통령 후임자를 선택할 수 있다면 한명숙을 선택할 것이라 했다. 그도 '부드러운 정치'를 꿈꿨기 때문이리라. 그가 꿈꿨던 여성적 정치의 면모는 박근혜라는 여성과는 전적으로 배치된다.


- 왜 노통은 한명숙을 말했을까.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읽은 후에 든 의문이었다. 부드러운 정치, 권위주의 타파. 누구보다 여성 정치인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기에.

5. 영국과 우리에게 나타난 유력한 여성 정치인은 남성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난 언제나 진정한 여성 정치인의 집권을 꿈꿔왔다. 처음은 한명숙이었고, 그녀의 사퇴 이후엔 이정희였고, 그녀의 배신 이후엔 심상정이다.


- 그렇게 영국과 우리의 정치는 닮아 있었다. 최초로 나타난 여성 선출직 집권자 혹은 집권자가 될 유력한 후보의 모습은 두 나라에서 같았다. 이러한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의 여성 정치인을 나는 늘 꿈꿔왔다. 처음엔 한명숙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 다음에는 이정희 (물론 당시의 이정희가 한명숙보다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어 있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녀의 배신 이후에는 심상정이다.

4. 사회에 여성 지도자가 필요한 것은 부드러움 때문이다. 남성의 경직성을 깨고 유연함을 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처와 박근혜는 이런 면에 전적으로 배치된다. 유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여성이 정치에 진출해야 하는 이유는 유연함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정치는 과거 야만적 쟁투(爭鬪)의 문명화된 형태이다. 이 쟁투를 부드럽고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 여성 정치인의 역할이다. 그런데, 박근혜는 그런 면모가 없다.

3. 박근혜의 이런 면은 대처와도 닮아있다. 대처를 그린 영화 「철의 여인」에서 대처는 그녀의 주변인들을 남성적으로 다스린다. 자신을 여성이라고 무시하는 한 남성에게는 남성과 같은 목소리로 명령하기도 한다.


- 이 영화에서 대처는 한 남성 관리가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자 남성과 같은 목소리로 크게 소리쳐 명령한다. 그러자 그 남성은 황급히 그녀의 말을 듣는다. 대처도, 박근혜도, 그들의 통치 방식은 늘 그렇다.

2. 박근혜는 스스로가 여성임을 강조하지 않는다. 여성적 카리스마가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론 여성이지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녀는 남성적 카리스마로 군림하고 있다.


- 그녀를 보라. 부드러움이나 유연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安이나 文보다 더 경직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남성적 힘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영향인 듯도 싶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단 한번도 여성 대통령을 가지지 못했을 뿐더러, 유력한 여성 후보를 가져본 일조차 없다. 그러다 한명, 박근혜가 떠올랐지만 그녀는 여성이되 여성이 아니다.


- 박근혜는 여성적 면모를 지닌 이가 아니다. 여성이되 여성이 아니라는 말은 그 다음에 설명되어 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에 여성이 있었나? 국회의원에 여성 비율이 얼마나되지? 역대 국무총리에 여성이 몇명이나 있지? 고위공무원중 여성비율이 얼마나되지? 묻다 보면 누구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우리나라 여성의 권리는 아직 이렇다. 역대 대통령에는 여성이 한 명도 없었고, 국무총리에는 국무총리가 된 이는 한명숙 1인이고, 이를 제외하고 임용되지 못하고 서리로 그친 이가 1인 있다.

박근혜 캠프에서 경제민주화 요구 목소리가 높아지고, 후보는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 목소리를 내놓았다. 새누리와 박근혜는 싫어하지만 이는 환영한다.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이가 늘어나는 것은 어느때이든 기쁘다.


- 언제나 기쁜 일이다. 누군가가 진보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것이 박근혜 캠프라 하더라도, 우린 적어도 최소한의 희망은 본 것 아닐까. 물론 최소한보다는 최대한의 희망을 선택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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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 언론. 복지.

대통령이 되려는 이가 꼭 알아야만 할 세 가지


2. 정동영 전 장관이 문재인 캠프로 들어갔다. 정동영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정치평론가들은 "조금 과장하면 정동영의 마음을 얻는자가 이긴다"고 말했다. 판이 재미있어진다.

문재인이 정동영을 잡았다. 정동영이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 정동영의 마음을 얻는 자가 하늘의 마음을 얻는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 정동영을 문재인이 등용했다.


3. 곽노현 교육감 판결이 이틀 남았다. 광화문광장에서는 48시간 릴레이 시위가 펼쳐진다. 사후매수죄에 대한 헌재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판결이라니, 재판부는 선고기일을 늦춰라.

미네르바가 그랬다. 미네르바가 기소된 근거가 된 법령은 위헌 판결이 났고, 그로 인해서 무죄 판결이 났다. 곽 교육감의 '사후매수죄'도 위헌의 소지가 다분하다. 위헌적 법률로 형을 집행하는 일을 재판부는 벌여서는 안된다. 이제, 이틀 남았다. 적어도 헌재 판결까지 기다려줄 수는 있지 않은가.


4. 이인영도 문재인캠프로 들어갔다. 박선숙을 기용한 안철수캠프, 박영선•이인영•정동영을 기용한 담쟁이캠프.

김근태 계보의 좌장, 486 정치인의 상징, 민주당의 왼쪽 심장 구로구 이인영 의원이 담쟁이캠프로 들어갔다. 문재인은 안철수보다 민주당이란 정당에 속해있다는 점에서 인재를 훨씬 잘 활용할 수 았는 조건을 갖췄다. 그라고 그는 그 조건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5. 박근혜가 사과를 하려거든 정동영처럼 했어야 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했어야 했다. 정동영이라면 사과하고 달려가는 곳은 인혁당 유가족, 제주의 강정, 전태일 기념관이었을 것이다. 춤이나 추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정동영은 행동으로 사과했다. 그가 지난 5년간 보여준 현장정차인으로써늬 면모는 5년 전의 그와 달랐다. 사과는 그렇게 하는거다. 말로하는 사과는 오바마처럼, 행동으로 하는 사과는 정동영처럼. 박근혜의 사과는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6. 내일 새진보정당 추진위원회는 1차 전국연합회의를 연다. 신당에 대한 큰 그림이 그려질 듯 하다.

새진보정당의 큰 그림이 내일 그려진다. 사민주의 정도의 포괄적 가치를 강령으로 하는 정당이었으면 한다. 당명도 새로웠으면.


7. 오늘 이정희 전 대표는 두시부로 이정희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심재환 변호사는 음주운전을 했다. 한쪽은 음주한 정신상태로 보이는 음주정치를, 한쪽은 음주운전을

이정희 전 대표가 대선에 나왔다. 이제 통합진보당은 큰 금액을 국가로부터 지원받는다. 그리고 그 돈의 양만큼 지지율을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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