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아직도 10억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이르까지/보리스 스뚜르가츠끼 형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은 우리에게 꽤나 생소한 작품이다. 도스도예프스키나 톨스토이를 제외하고는 이름도 몇 들어보지 못한 러시아 소설이 주는 이질감을 이 책은 그대로 끌어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망설이지 않고 손에 쥐게 되는 것은 이 책이 지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품은 레닌그라드200년만에 찾아온 폭염 속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말랴도프는 최근 ‘M-캐비티라는 항성 역학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인데, 이상하게도 이 연구를 손에 잡으려고만 하면 전화가 울리고, 초인종이 울리고, 시키지도 않은 음식이 배달되면서 연구의 진전을 막는다. 그리고 연구를 방해받는 현상은 이웃 물리학자인 스네고보이, 동료인 비안가르텐, 자하르에게도 마찬가지로 벌어진다. 갑자기 여자들이 몰려든다던지, 자신의 연구를 포기하는 대가로 연구소 소장 직을 제안 받는다든지 하는.

그리고 그러던 중 비안가르텐에게는 빨간 머리의 남자가 찾아온다. 그 남자는 자신이 그의 연구를 방해한 주범이라고 밝힌다. 그는 비안가르텐에게 그의 연구가 어떤 4차원 문명에 의해 감시받아 왔으며, 연구가 진행되면 지구 문명이 4차원 문명을 위협할 세력으로 성장할 첫걸음이 되니 당장 연구를 폐기하라고 명령한다. 그 대가로 연구소 소장 직등 모든 속물적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으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최후 수단을 강구할 것임을 암시하며, 이런 감시를 받는 사람은 그를 제외하고도 동료 세 명이 더 있다고 말하고 떠난다.

어쩌면 황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설정이다. 어쨌든 ‘4차원 외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된 비인간적 힘, 절대적 힘 앞에 소설 속 인물들은 대응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소설 속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늘 닥치는 상황이다. 우리는 과학자도 아니고, 4차원 외계 문명이 우리를 찾아올 일도 없겠지만, 우리는 삶 속에서 많은 순간 거대한 힘, 비안간적 힘의 위협에 대응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는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소설 속 인물과 우리는 단 두 갈래만이 나 있는 길 위에 서게 된다. 순응하고 굴복하거나, 저항하고 싸우거나. 서로 다른 두 길로 뻗어나가는 그 갈림길 위에서 단 하나의 길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순응하고 굴복하는 것도 분명 하나의 길이다. 작품 속에서는 비안가르텐, 자하르, 주인공 말랴도프에 동양학자 글루호프까지 모두 순응의 길을 걷는다.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합리화로, 각자의 비겁함으로 각자는 각자의 굴복을 겪고야 만다. 이 작품 속에서 만나는 인물들 중 굴복을 선택한 인물의 수가 보여주듯이, 우리들 중 이 길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를 지키기 위해, 혹은 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너를 팬케이크처럼 납작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휘황찬란한 새 연구소의 소장직에 앉히거나 둘 중 하나야. 내 선배 과학자 두 명이 얻고 싶어 몸부림치다 떨어져나간 자리야. 그 연구소에서 나는 노벨상 감의 실험을 열 가지 쯤 할 거야. 알아들어? 나쁜 일이 아니라고. 그건 일종의 내 생득권같은 거야. 비안가르텐의 권리. 학문적 호기심에 대한 자유

 

“20세기는, 동지, 계산의 시대야. 감정은 없어 나한테 가장 소중한 건 나와 내 가족과 친구야. 나머지는 내 책임의 한계 밖이야. 투쟁? 물론. 나 자신과 내 가족, 내 친구를 위해서. 하지만 인류를 위해서? 은하계의 위신을 위해서? 모조리 얼어 죽을 헛소리야!”

 

나한테는 토론할 것이 없어.” 나는 말했다. “내겐 보브까가 있을 뿐이야.”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선택했고, 그 대가로 세상의 미래를 좌우할 수도 있는 연구를 포기한다. 말랴도프는 세상을 등지고 자신의 아들인 보브까를 선택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순응을 선택한 이들에게 한가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진정으로 를 지켰는가? 그들이 버린 것은 진정 세상의 미래였을까?

단선적으로는 그렇다. 그들은 나와 내 가족과 친구를 지켰고, ‘인류은하계의 위신은 내팽개친다. 하지만 그 이면에 들어가면 그들이 진정 버린 것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비안가르텐과 자하르를 다시는 못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만나는 것이 너무도 당황스럽고, 또 서로의 꼴만 봐도 넌덜머리가 날 것이다. 그리고 당황스러움과 넌덜머리를 잊기 위해 보드까와 포트와인을 사야 할 것이다. 물론 그래도 내겐 이르까가 있으며 보브까는 무사히 자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절대로 내가 바라던 형의 청년으로 자라지 못할 것이다. 내겐 이미 그 아이가 그래 주길 바랄 권리가 없어졌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절대로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중대한 발견을 할 수도 있었지만 너를 위해서……한 아빠일 것이니까. 내 머리통 속에 그 빌어먹을 M-캐비티가 떠오른 순간을 나는 영원히 저주하리라.

 

그렇다. 그들이 버린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그들이 버린 것은,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바로 그 대상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랴도프가 한탄처럼 읊조린 저 대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말랴도프는 아들 보브까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 아이가 자신이 바라던 형의 청년으로 자라 주길 바랄 권리는 이미 그에게 없음을 인지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랴도프는, 순응하는 자들은 그 길을 간다. “지금은 저들이 너무 강력해 순응하지만 살아남아 다음번에는 꼭 저항하리라.”라는 스스로도 믿지 못할 약속만을 남긴 채로.

스스로도 믿지 못할 약속만을 남기고 후회와 함께 자신을 등지고 싶지 않다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길 한 갈래가 남아 있다. 저항하는 길. 우리의 양심을 우리 스스로 지켜내는 길이 우리 앞에는 펼쳐져 있다.

어쩌면 이 길을 간다는 것은 바보같은 일일 지도 모른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 지도 보장할 수 없는데, 심지어는 이 길의 끝에 다다른다는 보장조차 없다. 아니, 오히려 다다르지 못할 거라는 보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굴곡지고 고난한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들이 이 길을 걷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에게 이 소설은 그들이 길 위를 걷는 것은 길 끝이 아니라 길 위자체에 목적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순응과 굴복의 길 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자신, 저항의 길 위에는 있다고, 저항의 길 위를 한 발짝이라도 내딛은 이에게는 있다고 이 작품은 말해주고 있다.

작품 속에서 결국 저항을 선택하게 되는 단 한 사람은 베체로프스끼이다. 그는 위협을 받은 네 명의 과학자에 포함된 인물이 아니다. 그는 그저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입장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도망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나는 아직 연구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았다고, 기뻐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겁함을 선택하진 못했다.

절망에 빠진 말랴도프가 너는 결코 길 끝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라 말할 때, 그는 이렇게 대답 아닌 대답을 한다.

 

차분하고 불그스름한, 확신. 모든 것은 순리되로 되어야만 한다는, 그리고 그 밖에는 아무 다른 해결책도 없다는 확신. 그는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계속 말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서둘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의 세월이 있다고 그가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10억 년 동안 많은 일들이,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4차원 외계 문명의 이형(異形)으로 다가오는 비인간적 힘의 유형에는 여럿이 있을 수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조상에게는 일제가 그랬고, 독일인들에게는 나치가 그랬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이고 굵직한 힘이 아니고서라도, 우리 곁에 이러한 들은 산재해 있다. 작중에서 베체로프스끼가 지적하듯이, ‘그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 우리가 당장 당면하고 있는 사회의 현실일 수도 있고, 구조적 부조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힘에 대항한다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스스로만 희생시키는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불의에 대항하라는 명징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가 당장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더라도, 우리 앞에는 10억 년의 세월이 있다고.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10억년 동안 많은 일들이,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우리는 그 ‘10억 년의 길 위에 서 있는 존재들이다. 일제에 항거한 조상들이 없었더라면, 불의에 맞서 싸운 선배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곳에 이 모습으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10억년의 길 위에서 다시 한 번 갈린 길. 우리는 바로 그 갈림길 위에 서 있다. 굴복을 위한 한 발자국이냐, 저항을 위한 한 발자국이냐의 선택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물려받은 10억년의 길목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보브까들에게 어떤 길을 물려줄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떤 10억년의 길을 만들 수 있을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바로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내딛는 한 발자국에게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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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도서시장은 몰락했다. 누구나 아는 얘기다. 훌륭한 인문한 서적이 500부도 못 팔리는 경우가 많다. 소설책? 초판 나가기도 힘들다. 뭐 20대는 출판시장에선 아예 ‘없는 계층’이고, 독서문화따위는 사라지고 말았다. ‘도서관’ ‘독서실’하면 뭐가 떠오르는 지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다. 분명 이름은 도서관이고 독서실인데 우린 여기서 뭐, 책을 펴기는 편다. 그게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같은 교양서나 <파우스트> 같은 고전이 아니라 <해커스토익>이라는게 문제지.

 진짜 팔려야 될 책은 안 팔리고 ‘사회의 잘못? 웃기지 마. 닥치고 반성이나 해’하며 죄책감이나 파는 자기계발서나 팔리는 사회가 우리 사회다. 그런데 2010년 이런 출판시장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400쪽이 넘는 미국 최고의 철학자의 인문학 서적이 100만부가 넘게 팔린 것이다. 그렇다. <정의란 무엇인가>다. 이 책, 100만명이 읽을 정도로 쉬운 책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정의란 무엇인가>가 많이 팔린 것이냐. ‘정의’가 결핍된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2012년 말과 2013년 초, 우리 사회에 히트를 친 (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솔직히 이 말을 확신하진 못한다. 주변에서 이 책들을 읽거나 산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다만 분명 이 책 중 하나는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랐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 연재 당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연재가 끝나기도 전에 단행본을 출간했다.) 두 권의 책이 있다. 한 권은 요즘 읽고 있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다. 다른 한 권은 웹툰으로 연재되었던 <죽음에 관하여>다. 아주 화제가 되고 입에 오르내리진 못했지만 나는 분명 이 두 권을 관통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 오늘의 화제는 ‘죽음’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사회의 부정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죽음에 관하여>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모두 죽고 싶은 것인가. 분명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람들은 처절하게 살아남고 싶은 것이다. 죽음의 논함을 통해 삶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정의’에서 ‘죽음’으로 연결되는 2010년에서 2013년, 우리 사회는 ‘사회’에서 ‘그 속의 개인’으로 눈을 돌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현상에 대한 옳고 그름의 문제는 판단하지 않겠다. 결국 사회를 바꾸는 것은 개인이고, 개인을 바꾸는 것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것과 개인의 변화는 어느 하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둘이 같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 뿐이지.


 


앞이 너무 길었다. 이제 잊어왔던 제목을 보시라. <죽음에 관하여에 관하여>다. 나는 여기서 개인과 사회를 논하려 하는 것도, 의문과 반론 투성이에다가 아직 다 읽지도 못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에 관하여>다.

 <죽음에 관하여>를 들어본 적 있는가. 당신이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꽤나 있다. 하지만 이 정도만은 알아두자. <죽음에 관하여>는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은 네이버의 웹툰이다. 그리고 설령 당신이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이 작품은 네이버 웹툰 안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작품은 완결을 맞았다.


 그런데 이 작품, 하나하나 의미를 파악해 보자. 아, 주제 너무 단순하다. “거짓말 하지 마라” “약속을 지켜라”하는 얘기를 정언명령이니 가언명령이니 하며 복잡하게 말하는 칸트에게 헤겔은 말한다. “저친구 뭐 저렇게 다 아는 얘기를 하고 있어? 유아적이야.” 내가 이 작품의 주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느끼는 감정과 똑같다. 돌리고 돌리고 돌려서 말하지만 결론은 ‘친구는 소중하다’라거나 ‘가족은 소중하다’ ‘자살하지 마라’같은 이야기 하고 있다. 다 옳은 이야기지만 이렇게 어렵게 말 안해도 우린 다 안다. 물론 중요한 얘기도 있다. ‘삶 속에서 죽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 그런데 이런 얘기는 또 너무 직접적이다. 작품 속에서 유추하고 사고하고 느껴서 알아야 할 주제를 그냥 말해버린다. 너무 밋밋하다. ‘표면적 이야기밖에는 없다’는 혹자의 비판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도 난 이 작품의 애독자다. 난 네이버 웹툰의 초기부터 웹툰이란 걸 봐왔다. 그런데 내가 (그리 길지도 않지만) 생애 처음으로 사본 만화책이란 것이 <죽음에 관하여> 단행본이었다. 왜 그럴까. 나는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는 어쩌면 ‘뻔한’ 이야기도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다 아는 얘기라고? 맞는 비판이지만 치명적 약점이 있다. 다 아는 얘기가 왜 필요없는 이야기인가? 다 아는 얘기는 그만큼 그 속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끊임없이 되새기지 않으면 그 속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놓친다면? 거기서 잘못된 선택과 실수가 시작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를 들어보자. ‘친구가 소중하다.’ 그래, 다들 하는 얘기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 얘기 안하는 사람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깨닫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아니라면 왜 인류는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 똑같은 말만 하고 있을 꺼냐는 얘기다.

 고전(古典)을 읽어본 적 있는가? 내가 묻고도 어이없다. 안 읽어본 사람 어디 있겠냐. 뭐 다들 한 권쯤은 읽어 봤겠지. 그런데 난 다른걸 묻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읽어본 적 있냐고 묻고 있다. 그 고전의 글자를 읽은 게 아니라 뜻을 읽은 적 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뭐, 그런 적 있다고 치고 진행해 보자. (불행하게도 나는 이 ‘가정’ 속에 포함되는 사람보다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꺼라는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이 이분법을 사용하련다. 아직 ‘책 읽는 사회’를 위한 작은 희망쯤은 갖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그 작품에서 말하는 ‘뜻’은 무엇이던가. 결론은 초월적 가치다. 사랑. 정의. 희망. 뭐 이런 것들 아니던가. ‘뻔’하지 않은가. 다들 하고 있는 얘기를 어떻게하면 다시 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가끔.

 자 그럼 여기서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 분명 생길 것이다. “고전의 뛰어난 내면 묘사와 같은 기법들은 괜히 있냐. 주제가 같아도 내용은 다르다. <죽음에 관하여>의 내용은 표면적이고 단편적인 파편과 같다.”라며. 그런데 바로 위 문단을 봐라. 난 여러분에게 <죽음에 관하여>의 내용 전달 기법이나 세세한 내면 묘사 따위가 훌륭하다고 말한 적 없다. 그것들은 ‘글자’에 불과하다. 다 걷어치우고 ‘핵심’만 바라보면 달라질 것은 없다. <죽음의 관하여>의 3화나 <파우스트>나 사랑을 이야기한 점에 대해선 다를 게 없고, <죽음의 관하여>의 자살 관련 작품이나 다른 고전 작품의 자살 관련 작품이나 순전히 주제만 놓고 보면 달라질 게 없다는 거다.

 그럼 내가 <죽음의 관하여>가 <파우스트>보다 낫다고 생각하냐, 전혀 아니다. 괴테가 60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 <파우스트>와 28회짜리 웹툰 <죽음의 관하여>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그건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난 분명 위에서 주제의 면에선 달라질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럼 왜 <파우스트>가 더 명작이라는 것이냐. 그건 ‘내용’의 측면 때문이다. 한 작품에는 주제만이 중요한가? 절대 아니다. 그럴꺼면 “자살하지 말라” 한 줄 써서 책으로 내는게 가장 위대한 책일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독자가 얼마나 그 주제를 느끼고,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냐와 직결되는 부분이다. 즉, 주제를 파악했다는 전제 하에 그 작품의 내용은 독자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거다.

 <죽음의 관하여>의 문제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내용이 너무 단촐하다. <파우스트>의 사랑 이야기는 수백 쪽에 달하는 내용 전체다. 하지만 <죽음의 관하여>의 사랑 이야기는 단 두 편의 짧은 만화로 이루어져 있다. 상식적으로, 어떤 작품을 읽을 때 당신은 사랑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겠는가? 단연 전자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쉽게 풀어낸다. 너무 쉽게 풀어내서 독자로 하여금 그리 중요한 것 같지도 않게 넘어가버리도록 만든다.

 그런데 묻자. 그렇다고 <죽음의 관하여>가 저질 3류 작품인가? 절대 아니다. 두 명의 신인 작가가 이렇게 짧은 내용에 이정도로 한 주제에 대해 잘 풀어내기란 쉬운 일은 전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내 느낌은 이렇다. 작가가 독자에게 하나의 주제를 얼마나 잘 설명해내고 묘사해내서 각인시키냐는 물론 작가의 능력이 1차적으로 중요하다. 그렇지만 또 한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독자의 능력 아닐까? 여기서 나는 이 작품의 진의(眞意)를 중요히 생각해보지 않고 넘어가버린 독자의 능력을 직접적으로 탓할 수는 없다. 그건 작가의 능력 부족일 가능성이 미미하게나마 더 크니까. 하지만 작가는 분명 최선을 다해 최고에 가까운 결과를 내놓았고, 독자의 능력 부족도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라고 나는 본다.


 자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서론에서 우리는 ‘사회’에 관심있던 이들이 ‘개인’으로 관심을 돌렸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그래, 죽음은 개인의 문제다. 내가 ‘죽음 신드롬’을 말할 떄 이들이 실은 죽음을 이해하며 처절하게 삶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라는 점도 이미 이야기했다. 이 ‘삶’도 개인의 문제다. <죽음에 관하여>라는 작품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걸 안겨주고 떠나고 있다. <죽음에 관하여>를 읽어본 이는 알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의 기본은 죽음이다. 하지만 그 위에는 삶과 희망과 꿈이 있고, 그보다 더 위에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사회가 있다.

 생각해내기 어려운가? 예를 들어보자. 우선 모든 회차는 다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것도 많지만) 5화를 보라. 5화는 죽음을 통해 삶과 꿈,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음은 19화 등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 (막상 예를 들자니 딱 잡히는게 없다. 예시가 없어서가 아니라 전부 다 예시가 될 수 있어서다. 원한다면 1화부터 28화까지 모두 의미를 분석해줄 수도 있다.)

 그렇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열광과 <죽음에 관하여>에 대한 열광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사회를 직접 말했다면, <죽음에 관하여>는 개인을 통해 사회를 말한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난해한 이야기를 난해하게 풀어낸 책이 있다면, <죽음에 관하여>처럼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풀어내는 책도 필요한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는 결론적으로 죽음을 통해 삶을, 삶을 통해 사회를 논하고 있는 작품이며,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도 당연하게 써내려가고 있는 책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써 나가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이 작가의 문제일지, 나와 당신같은 독자의 문제일지는 개인이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    비더슈탄트, 한 발자국 더.

 사실은 중간에 작가에 대한 언급을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글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따로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죽음에 관하여>의 스토리 작가는 ‘시니’, 그림 작가는 ‘혀노’다. 웹툰으로 올라갈 때마다 같이 올라가는 BGM을 만드는 ‘squar’도 있다. 스마트폰에선 들리지 않는 이 음악을 들으려 항상 인터넷으로 보는 정도지만, 작품 자체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니 일단 차치하도록 한다.

 작가인 ‘시니’와 ‘혀노’는 신인(新人)작가다. 트위터로 아주 가끔 멘션을 주고받거나 트윗을 보면서 느끼는 그들의 캐릭터는 대충 이렇다. 성격 좋고 재밌고, 개드립 좋아하고 친구인 작가 둘끼리 싸우는 척, 놀리는 척 하지만 서로 뗼 수 없는 사이인, 투표는 하고 꿈은 중시하지만 정치에 대해 잘 알거나 관심이 있지 않고, 투표독려도 딱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20대. 물론 저 중에 대부분이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난 저 사람들을 한 번도 본적 없고, 오직 트위터와 만화, 거기에 내 상상을 보태 만든 인간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도 저 중 몇몇은 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저렇게 가정하고 말해 보자.

 그리고 다시 한번 만화를 보자. 놀랍다. 이런 ‘전형적인’ 20대에게 이런 작품이 나왔다. 본문에서 우리는   <파우스트>와 <죽음에 관하여>를 비교해본 적이 있다. <파우스트>의 저자 괴테는 평생을 사유와 철학적 생각 속에서 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의 시니와 혀노는 웃고 드립이나 치며 이런 작품을탄생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파우스트>보다 이 작품이 위대하다거나, 괴테보다 이 작가들이 더 위대하다거나, 작가들이 전혀 진지한 모습 없이 작업을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물론 ‘웃고 드립이나 친다’는 것도 위에서 말한 내 가정일 뿐이다. 틀릴 가능성이 더 많은.)

 난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대한민국 20대의 전형이 만들어낸 전혀 ‘전형’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들. 나는 여기서 작가인 시니와 혀노가 앞으로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내리라 확신할 수 있고, 더 크게는 눈 앞만 바라보고 달리던 대한민국, 그리고 대한민국 20대에게 하나의 횃불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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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e 2013.02.24 13:08 신고

    <죽음에 관하여>가 내겐 더 어려웠다는 거. 너무 단순해서 어려웠다고 해야 하나? 아마도 웹툰이란 장르에 대한 부족한 마음 때문이기가 더 맞지ㅇ싶ㅇ거든. 다 보고 읽고 만난 생각은 이십대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의식만큼의 표현이구나. 죽음의 이쪽 저쪽의 경계를 죽음이란 시선으로 보았구나*~
    비더슈탄트의 글을 읽으니 내가 여기는 죽음의 의미가 확연하게 파고 든다고 해야겠군.

 

 

 

 

아란타?

 소년은 아란타(阿蘭陀)로 떠난다. 아란타는 어디일까? 이 나라는 화란(和蘭), 화란타(和蘭陀), 하란(荷蘭)이라고도 불린다. 그렇다. 네덜란드(Netherland)이다. 한자 표기는 네덜란드의 지역인 Holland라는 곳의 이름에서 따왔다. 조선의 소년이 어째서 아란타로 떠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소년은 왜 아란타로 떠나려 하였을까. 그것을 조선 사회에 묻고자 한다.

 

 

청유와 이언진

 청유에게 이언진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다. 수백 개의 시를 왜인(倭人)들에게 슥 지어주고는 그 시를 다 외우는 비상한 재주, 문장력, 능력과 순발력, 게다가 다양한 분야에 지닌 지식까지. 청유는 이언진처럼 되고자 하는 존재이다. 청유와 이언진의 관계는 그렇게 맺어진 관계였고, 그래서 청유는 이언진의 죽음에 더 큰 의미를 부과하게 된다.

 

 

이정, 장유한 그리고 재물

 조선 사회는 재물을 쫓는 사회였다. 목숨을 걸고 인삼 밀매를 하고, 상아 밀매를 하는 장소였다. 그런 조선에서 청유는 두 인물을 보게 된다. 이정과 장유한이다. 이정은 세계에 대한 안목이 있고, 청유를 도와주는 긍정적 인물로 묘사된다. 장유한은 청유를 도와주긴 하나 본질적으로 세속적인 인물이다. 청유에게 보이는 통신사 제의 들의 호의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로 접어들며 이정의 이미지는 변모한다. 청유의 아버지와 동업 관계였으나 이익을 독접하기 위해서 친구였던 청유의 아버지를 모함하고 이간질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이가 이정이었다. 장유한을 제거한 이도 이정이었다. 이정의 딸을 연모하기도 한 청유는 이정에 대한 존경심을 뿌리뽑힌다. 그렇게 존경하던 이정도 본질은 세속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언진과 청유가 바라본 조선의 현실이었다.

 

 

조선에서는 문을 부술 수 없다.

 이언진은 말한다. 성대중은 멋진 인물이라고, 문을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는 문이 열리리라고 믿고 포기하지 않는 이라고. 하지만 '멋진'이라고 말하면서 이언진 자신은 다르다고 말한다. 기다리다 보면 문이 열리리라고 믿는 인물은 아니다, 이언진은. 이언진 문을 부수고 뒤엎겠다고 말한다. '시'라는 무기로 그 문을 부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청유에게, 아니 우리에게 하나의 물음을 던진다.

 

너는, 무엇으로 문을 부수겠느냐? 

 

 하지만 이언진의 말년은 비참했다. 연암 박지원과의 관계에서 실패한 그는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젊은 나이에 병들어 요절한다. 그는 '시'로 문을 부수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에 청유에게 말한다. 자신의 시를 모두 불태우라고. 조선에서는 이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청유는 조선에서 문이 열리지 않아도 일본에서, 외국에서 충분히 문을 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조선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문을 부수자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이언진은 조선에서 삶을 마감한다. 이언진의 죽음 소식을 들은 박지원은 통곡한다. 박지원이 이언진에게 험하게 말한 것은 그 비상한 재주에 자만하지 말라는 의미였다고 말하며.

 

 

그래서 소년은, 아란타로 간다.

 소년은 이언진에게 말했다. 조선을 떠나자고. 하지만 이언진은 조선을 떠나지 않았다. 청유는 아란타로 떠난다. 조선 밖에서 문을 부수러 간다. 이언진과 일본에 있었을 때 들었던 아란타라는 생소한 국가로 떠나려는 마음을 품는다. 홍이(紅夷)를 향해 떠난다. 그들은 이언진의, 그리고 청유에게 문을 열어줄 이이기 때문에.

 

 

이언진은 오늘에 이르러 우리에게도 삶 전체를 통해 한가지 질문을 던진다.

 

"너는, 무엇으로 문을 부수겠느냐?"

  -청유와 함께 아란타로 가겠느냐?

  -성대중과 함꼐 문 앞에서 기다리겠느냐?

  -이언진과 함꼐 문을 부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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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자 박경신, 표현의 자유를 외치다.

 우선 표지를 보자. 한 사람이 화살에 찔려 넘어져 있는 데 사람들은 그냥 슥 지나치며 말한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남의 일이야"라고.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쓰러진 이는 조용히 말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지"라고. 이 표지가 암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의 제약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로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명예훼손죄

 대한민국에는 아주 '특별한' 범죄가 하나 있다. '명예훼손죄'라는 이름을 가진 범죄이다. 이것이 '특별한' 법안인 이유는 OECD 34개국에서 극소수의 국가만이 지니고 있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몇몇' 국가들에서도 명예훼손죄는 이미 사문화된 법일 뿐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진실'을 유포한 것도 명예훼손죌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조문을 보자.

 

제 307조 (명예훼손)

 ①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 307조 1항과 2항의 내용이다.

 

 명예훼손이라는 조항 자체도 잘못되었지만, 제 1항의 '진실유포죄'의 경우에는 명백한 표현의 자유 침해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저자는 명예훼손죄의 축소를 주장한다. 형법으로 하여금 명예훼손죄를 범죄로 규정하는 OECD 국가는 사문화된 몇몇 국가밖에는 없지만, 민사상의 불법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는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로 독일을 들 수 있다. 독일에서 명예훼손죄는 범죄(crime)이 아닌 불법 행위(tort)로 규정된다. 범죄는 형사상 처벌이 가능하지만, 불법 행위는 민사상 처벌만이 가능하다.

 

 

모욕죄

 모욕죄 또한 많은 국가에서 사라진 조항이기도 하다. 물론 '모욕' 자체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국가에서는 모욕죄 대신 혐오죄를 적용한다. 모욕죄 적용의 근거가 되는 조항을 보자.

 

제 311조 (모욕)

 공연히 사람을 모욕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권력관계'이다. 생각해 보자. A가 B를 모욕죄로 고소하였다. A와 B중 누가 권력관계에서의 강자일 확률이 높을까? 우리 사회에선 A가 강자일 확률이 높다. 모욕죄가 강자가 약자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경향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 대안으로 서구 사회에서는 혐오죄를 내놓았다. 혐오죄란, 명확한 권력관계를 전제로 하는 범죄이다. 강자가 약자를 모욕하였을 때에만 범죄로 취급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유태인 학살 부인죄나 서구의 인종차별 금지 조항 등을 들 수 있다.

 

 

나의 SNS를 검열하라

 서기호 전 판사가 판사 시절 트위터에 글을 남겼다. "방통위는 나의 트윗을 적극 심의하라"라고. 이 날은 방송통신위원회가 SNS를 심의하는 전담팀을 만들어 활동을 개시한 날이었다. SNS 검열·콘텐츠의 사후심의 등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겸열'이라는 것이 남아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책 본문 일부를 인용하도록 한다.

 

49차 통신소위세너는 'DPRK North Korea Connection'이라는 페이스분 계정 전체가 차단됐다(가-1775). 이 계정에 올라온 글의 대부분은 다른 웹페이지로의 링크였는데, 그 중 하나는 북한 정치수용소를 폐지하라는 운동을 벌이는 단체였다. 이외에도 유명 남한가수들이 등장해 이산가족 재회의 염원을 노래했던 동영샹의 링크도 차단되었다.

 

 

이에서 보듯이, SNS 검열은 '링크'의 검열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명백하고 실존적인 위험

 명예훼손을 민사상 사건으로 처벌하는 데에도 조건이 있다. '명백하고 실존적인 위협'이 있음을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원고가 입증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명예훼손은 적용될 수 없다.

 

 

남은 이야기들

 형법 제 307조를 제외하고도 명예훼손을 적용할 수 있는 형법적 근거는 여럿 있다. 살펴보도록 하자.

 

제 308조 (사자의 명예훼손)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자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09조 (출판물등에 의한 명예훼손)

 

①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신문, 잡지 또는 라디오 기타 출판물에 의하여 제307조 제1항의 죄를 범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제 1항의 방법으로 제307조 제2항의 죄를 범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또한 형법 제 307조 1항, 진실유포죄의 적용을 제한하는 법적 근거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의 적용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법령 적용상의 문제가 있다.

 

제 310조 (위법성의 조각)

 제 307조 1항의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여기서 한가지 더 문제를 제기하자면, 대한민국 헌법에는 직접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조항이 없다.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 여러 다른 조항에 따라 간접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언급한 조항은 발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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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히로나카 헤이스케 (출처: 네이버 블로그 :: 不老長生 http://blog.naver.com/nanjoyonghan/90084730468)

(↗) 학문의 즐거움 (원제:学問の発見)의 표지

 

 이 책, 「학문의 즐거움」의 일본어 원제는 「学問の発見」이다. 직역하자면 '학문의 발견'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원제처럼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학문을 하는 중에 커다란 '발견'을 해낸 사람이다. 그가 해낸 발견은 그에게 필즈 메달을 안겨준 '특이점 해소 정리'등의 수학적 발견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수학을 연구하는 과정에 있어 삶의 철학에 관한 대단한 발견을 해낸 사람이었다.

 

 그가 제시하는 첫번째 '발견'은 '체념하라'였다. 체념은 자책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그 에너지마저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넘을 수 없는 벽 앞에 섰다고 느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책하고, 실망하고, 좌절한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나는 저 벽을 넘을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할까?"하고. 하지만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달랐다. 히로나카는 벽 앞에서 좌절할 에너지가 있다면, 그 에너지를 벽을 넘을 방법을 구상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나는 실력이 없으니까 저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그는 좌절하지 않고 '실력이 있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노력하는 데에 그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

 

 그가 해낸 두번째 발견은 세상의 모두에게 배우라는 것이었다. 히로나카가는 배움의 대상을 특정짓지 않았다. 그는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교사나 교수에게만 배운 것이 아니다. 친구에게도, 자신보다 아는 것이 없는 이에게도 자신이 배울 점을 찾아내었다. 작은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것 등 그가 친구에게 배운 것은 너무나도 많았고, 그는 삶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워낼 수 있었다. 모든 이에게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지금의 히로나카 헤이스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번째 발견은 작은 성공을 쌓으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각자 자신이 품고 있는 원대한 이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원대한 이상'이라는 최종 목적지만 가지고는 길을 잃을지도 모르고,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질려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히로나카는 작은 발자국에 기뻐하라고 말한다. 작은 발자국에 기뻐하지 않고서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도 말한다. 작은 일에 기뻐하고, 만족감을 느끼며 이런 체험이 쌓이면서 그 원대한 목표에 점점 접근해나가라고 말한다. 히로나카는 처음에 그에게 필즈상을 안겨준 '특이점 해소'라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 자신이 그것을 해결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특이점 해소'라는 정리의 증명에 가까워질 수 있었고, 결국 그 원대한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네번째 발견은 다양한 경험을 하라는 것이다. 다양한 경험은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올바르게 정립하는 데에 영향을 준다. 특히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는 사고의 틀을 없앨 수 있다. 한 공간에서 하나의 문화에 익숙해지게 되면, 그 문화의 틀에서만 사고하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면, 하나의 문제도 다양한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고의 유연성을 키울 수 있게 된다. 틀에 박힌 고정적 사고는 히로나카가 그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데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유학하게 되고, 유학을 통해 '모든 것을 질문하는 학생들' 등의 새로운 사고를 접하게 되었고, 이렇게 생긴 사고의 유연성은 히로나카가 원대한 꿈을 이루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히로나카는 이 책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평범한 사람'임을 강조한다. 자신과 같은 평범한 이가 어떻게 필즈 상까지 받을 수 있었는지를 역설한다. 히로나카가 발견한 '평범한 사람'에서 '필즈 메달 수상자'까지 나아가는 데 자신에게 도움을 준 것은 위의 네 가지였다. 히로나카의 발견은 비단 히로나카의 것 뿐만이 아니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히로나카의 발견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발견인 것이다. 한 수학자가 일생을 바쳐 알아낸 네 가지 발견을, 우리는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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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를 팝니다 - 대한민국 보수 몰락 시나리오> 김용민 저, 퍼플카우

 

 

보수, 그들의 실체를 밝히다!

2012년 대한민국, 보수는 어떤 모습인가. 김용민이 바라보는 보수의 모습은 치졸한 권력욕, 그리고 그것에 의해 발현되는 비겁한 모습들,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보수를 한국인들은 왜 지지하는가. 그 실체를 낱낱이 파헤쳤다. 하지만 그의 ‘보수 분석’이 날카롭고, 더욱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한때 ‘보수’였기 때문이다. 그가 보수로서 바라본 보수의 실상과 보수로서 느낀 보수의 참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네 가지 유형의 보수

저자 김용민은 보수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모태 보수, 기회주의 보수, 무지몽매 보수, 자본가 보수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보수는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저자는 이들 네 가지 유형 각각의 ‘몰락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충분히 눈여겨볼만 한 시나리오이며, 이 책을 집필한 2011년 11월에서 반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의 시점에서, 이미 그 시나리오들은 현실에서 실행되고 있다.

 

요람부터 1%, 모태 보수

저자가 분류한 보수 유형 중 첫 번째 유형은 ‘모태 보수’이다. 모태,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1%를 자처하고 태어난 인물들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육영수 여사의 사망 이후부터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하며 자란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혹은 현대그룹의 아들,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 등이 모태 보수의 대표격인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모태 보수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그들의 대표적 특징은 ‘여유’이다. 그들은 어떤 공격에도 여유롭게 대처한다. 어쩌면 가장 말이 통하는 보수의 유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근본적으로 나약하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그들에게서는 강한 권력욕이나 힘있는 행동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새누리당의 ‘소장파’ 의원들에게서 잘 나타나는 특성인데, 이들은 보수 중에서도 개혁적으로 행동한다. 날치기 처리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내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 하지만 결국에 이들은 ‘기회주의 보수’에 의해 몰락한다. 날치기 반대 결의안을 낸 의원 중 홍정욱 의원 등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의원들이 한미 FTA 과정에서 날치기에 동참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면이다.

 

진보의 ‘변절자’, 기회주의 보수

두 번째 유형은 ‘기회주의 보수’이다. 기회주의 보수는 진보진영에서 ‘변신’한 사람들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이재오 특임장관 등은 ‘민중당’이라는 진보정당에서 주축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인물들이지만, 민중당이 14대 총선에서 한 석도 내지 못하는 등의 저조한 성과를 보이자 민주자유당으로 건너간 인물들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창당해 보수진영으로 넘어간 대표적 인물이다.

기회주의 보수의 기본적 특성은 강한 권력욕이다. 이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변한 사람들인 만큼 보수의 어떤 유형보다도 강력한 권력욕을 지니고 있다. 이제까지 보수진영에서 탄생한 대통령들이 -심지어는 ‘가카’ 까지도- 기회주의 보수의 유형에 속한다는 것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한계점은 바로 그 권력욕에서 나타난다. 강한 권력욕까지는 좋지만, 이들은 이것을 권력에 대한 집착까지 확장시켜버려 진정으로 건강한 정치풍토가 자리매김하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이들의 또 다른 문제점은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유 없이 당장의 일만 바라보며, ‘기회주의자’나 ‘변절자’라는 비판에 여유롭게 대처하지 못한다.

 

모르지만 일단 지지, 무지몽매 보수

‘무지몽매 보수’는 대한민국의 골수 보수층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형들이다. 1%만을 위한 정책에도 환호하는 99% 계층의 시민들이 이들이다. 한마디로, ‘조중동’에 가려 대한민국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무지몽매 보수에서 진보진영은 희망을 찾아야 한다. 이들이 ‘모르고’ 지지하는 지지층이므로, 이들을 무지에서 깨어나게 한다면 이들을 진보진영의 지지층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저들이 펼치는 정책은 당신들이 아닌 저들 스스로만을 위한 정책이라는 면을 그들이 알 수 있게 한다면, 이들이 대한민국을 보는 사고관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진짜 1%, 자본가 보수

‘자본가 보수’는 대한민국 소득계층의 상위 1%를 차지하는 계층이다. 이들은 한마디로 보수 정치인들의 ‘돈줄’이다. 이들은 보수 정치인들 뿐 아니라 일부 진보진영 정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는 벅찼다. 이게 이들의 진정한 무서움이다.

이들은 어느 정도 모태 보수와 겹치는 면이 있다. 여유롭다는 면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과 모태 보수는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 모태 보수는 정치인이다. 정치인이 아니라도 정치에 관련이 깊게 사는 사람들이다. 정치는 그래도 약자와 강자를 아우르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이들의 근간이 약자와 강자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가 보수는 다르다. 이들의 근간은 강자에게 편중되어 있고, 이들의 세계에서 약자는 도태되는 대상일 뿐이다. 이것이 두 계층의 근본적 차이이다.

 

숨겨진 ‘외부세력’, 언론과 공무원 그리고 교회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조중동)의 편파적 보도는 예전부터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이 언론세력의 근본적 문제는 이들 신문이 대한민국의 언론시장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무지몽매 보수를 탄생시키는 근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공무원도 빠질 수 없는 외부세력 중 하나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이 문제는 언론만큼 큰 비중으로 다뤄지지는 못하고 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보면 이 문제를 실감할 수 있다.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약속을 어겼다. 노 전 대통령이 미국이 쌀 문제를 들고 나오면 협상을 깨라고 주문했지만, 김 본부장은 2014년 이후 재논의하자는 뜻을 비쳤다. 공무원은 ‘철밥통’이다. 해고가 자유롭지 못한 안정적 직장이다. 곧,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들은 해고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보수진영을 지지한다. 진보진영보다는 보수진영의 집권이 더 많았던 보수적 사회에서, 보수진영 집권기에는 이익을 받다가, 진보진영 집권기에서는 몰래 보수의 집권을 대비하는 것이다. 들키지 않으면 훌륭한 대비가 되는 것이고, 들켜도 해고당할 걱정은 없다.

다음 외부세력은 교회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 20조 2항에는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쓰여 있다. 제정의 분리를 천명한 헌법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대형 교회들은 명백하게 보수적 성향을 지닌다. 세계 최대 규모라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 금란교회 감홍도 목사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경고 등의 조치를 받기도 하지만, 이들의 행동은 시정되지 않는다. 명백하고 노골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강조하는 이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든 장본인이다.

 

진보와 보수의 미래는?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함께 있는 해이다. 4월 11일에는 제 19대 국회의원총선거가, 12월 19일에는 제 18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있다. 두 번의 큰 선거가 있는 2012년은, 대한민국 정치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해이다. 2012년, 보수와 진보는 어떻게 될까?

우선 보수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는 2012년 12월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느냐와 관계없는 사실이다. 2012년 새누리당에서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후보로 낼 가능성이 거의 100%이다. 박근혜는 모태 보수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박근혜 위원장이 당선된다면, 기회주의 보수의 몰락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당선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나마 말 통하는’ 모태 보수까지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진보진영이 집권한다면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과거청산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치적 생명은, 끝이다.

그렇다면 진보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진보진영은, 연대해야 한다. 진보의 양당인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관계에서, 민주통합당은 보수에 가깝고, 통합진보당은 진보에 가깝다. 대한민국 정치의 이상은 이 두 정당이 보수와 진보의 자리를 차지하고 경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정당의 연대가 아닌 통합은 또 다른 불화와 분열의 씨앗을 심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경쟁태세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들이 공통적 적수인 새누리당을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그 이후에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의 경쟁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이미 최초의 전국적 총선 야권연대에 합의한 바가 있다. 기세를 이어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야권연대를 실현해야만이 진보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수진영에는 외부세력들이 넘쳐난다. 검찰이, 경찰이, 언론이, 기업이 저들의 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진보진영의 외부세력이 되어줘야 한다. 그들의 외부세역이 되어 권력기관을 등에 업은 보수진영과 효과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단기적 관심이나 짧은 주목으로는 불가능하다.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지지와 관심, 주목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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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 희망

-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읽고…….

참여정부 시절, 우리는 일종의 유행어처럼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가 떠난 지금도, 우리는 ‘노무현 때문에’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때와 자금은, 두 ‘노무현 때문에’는 다르다. “노무현 때문에 정치가 이 모양이다.”에서 “노무현 때문에 정치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됐다.”로, “노무현 때문에 정치에서 관심을 돌렸다.”에서 “노무현 때문에 투표를 작심했다.”로 시민들은 변화했다. 이와 같이, 집권기의 노무현과 지금의 노무현은 다르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는 이 ‘달라진’ 노무현을 알아볼 수 있던 책이었다.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모든 이들은 이에 슬퍼하였고, 나도 그들과 함께였다. 이후 나는, 그와 같은 인권 변호사와 정치인의 길을 걷기로 다짐했다. 이와 함께, 나는 노무현에 대하여 알 필요를 느꼈다. 특히 노무현의 생애보다는 그의 사상을 알고 싶었고, 그래서 이 책을 선택했다.

독서는, 한 인간의 사상을 가장 깊숙해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다. 독서를 통하여 나는, 노무현의 사상을 알 수 있었다.

노무현은, 국민의 눈높이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의 눈높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또 사랑하고 있었다. 국민들 내부에 흐르는 깊은 물결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그는 ‘바보’가 되었다. 이득을 취하지 않는 바보. 그가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말처럼, 그는 살아있는 물고기가 되어 물을 거슬러 올랐고, 큰 붕새가 되어 바람을 거슬러 날았다. 이익을 향한 순풍을 타지 않고, 정의를 향한 역류와 역풍을 감수하는 바보가 되었다.

노무현은, 시민이 되고 싶었다. 정치권력의 최정상에서 그는 시민 권력이라는 더욱 거대한 권력을 보았다. 노무현은 스스로 그 거대한 권력에 동화됨으로써 그 권력의 힘을 알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국 시민들은 ‘기울어진 축구장’의 관중이 되어버렸다. 보수가 위를, 진보가 아래를 차지하는 기울어진 축구장. 그곳에서 시민들은 기울어진 축구장의 축구를 보고도 열광했다. 그것을 바로잡을 이는 그 속의 시민뿐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고, 정치권력의 정상에서 소리쳤으나 시민들은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속으로 가고 싶었다. 시민 속에서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해 나가고 싶었다.

독서는, 죽은 이와 재회하는 문이다. 독서하는 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 독서를 통해 나는, 노무현과 함께일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책의 서문에서 “노무현, 그대는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라고 했다. 노무현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당신이 말한 ‘행동하는 양심’에 빗대면서 그를 죽어서도 죽지 않게 만들어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했다. 우리가 그를 살리는 방법은, 그와 끊임없이 함께 하는 것 이라고 말하였다.

이 책에서도 제시되었듯이, 김 전 대통령과 노 점 대통령은 많이 닮아있다. 독재에 항거했고, 약자를 위해 싸웠다. 또한 그 둘 모두 50년 금단의 선을 넘어 평화를 향해 다가섰다.

노 대통령은 그 금단의 선이 지워지길 희망하였다. 그것이 그가 한 민족과 대화하는 방식이었고, 국민과 소통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는 여태까지의 정치인과는 근본적으로 소통의 방식이 달랐다. 그의 소통은 통섭이었다. 그는 자신과 국민을 하나로 보았다. 그는 한 명의 국민과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넘나들었다. 국민 속에서 국민과 소통하였다.

하지만 그가 딱 한 가지 넘나듦을 허락하지 못한 것이 있다. 정치계와 경제계다. 그는 CEO들의 정계 입문을 반대했다. 경제계는 승자와 승자의 화합이라면, 정치계는 승자의 패자 포용의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노무현이라는 인물을 아주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모두 문제를 발견했다. 오연호 대표의 문제점은 과장된 해석이다. 실제 한나라당 대연정 이야기를 할 때, 노무현의 패배주의로 기록하여 노무현이 시정 요청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문제점은 복지다. 복지정책에 관해서는 말을 해주시지 않는다. 참여정부가 복지에 상대적으로는 과감했으나, 노무현 개인의 기준으로써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는 귀향 이후 노 전 대통령이 후회한 부분 중 하나이다.

노무현은 한명숙이 부러웠다. 그녀가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신뢰가 그것으로부터 창출된다고 믿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내가 부드러워지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내가 그의 얼굴을 당당히 마주볼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가 김구와 링컨, 김대중을 공부했듯이, 나도 그를 공부하며 그의 민주적 태도를 사랑하여 그가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것들을 제대로 해내 제 2의 노무현이 되어 그의 얼굴을 당당히 마주보고 싶었다.

이 책은 서거 당일 오연호 대표가 실제 만난 ‘스무 살 희망 씨’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고, 또다시 편지로 끝을 맺는다. 내가 그 희망이 되기를, 민주주의와 대한민국과 저 멀리서 날 지켜볼 노무현의 ‘열여섯 살 희망 씨’가 되어가기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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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제] 『연금술사』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표현 기법을 통해 논하여라

 

『연금술사』는 파울로 코엘료를 세계적 작가의 대열에 오르게 해준 책이다.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책’으로 기네스에도 오른 책이다. 이 책은, 주인공 소년 ‘산티아고’의 여행 이야기이다. 그 속에서 나타나는 세상과 꿈에 관련된 내용이다.

 이야기는 스페인의 한 오래된 교회에서 시작한다. 그 교회 앞에 양을 묶고 있는 산티아고는 양치기이다. 신부가 되기 위하여 열여섯 살 까지 신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마음속 항상 잠재되어있던 여정에 관한 꿈을 실행에 옮기기로 하여, 열여섯에 양치기가 되어 세상을 떠돈다. 그러던 중, 산티아고는 피라미드 주위에서 보물을 찾는 꿈을 꾸게 되고, 노파와 살렘의 늙은 왕, 멜키세댁을 만나고 그들의 말에 따라서 무작정 양들을 팔고 사막을 건너기 위해 아프리카로 간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양을 판 돈을 모두 도둑맞은 산티아고는 크리스털 가게에서 일한다. 그 크리스털 가게의 주인은 무슬림이라서 언젠가 꼭 메카에 가야 하는데, 크리스털 가게를 핑계로 가지 않고 있었다. 결국 1년이 흘러 산티아고는 가게를 번창시킨 후 떠나지만, 크리스털 가게 주인은 메카를 향해 떠나지 않는다. 그 후 사막을 건너가며 영국인과 친해져 연금술을 접하고, 후에는 위대한 연금술사를 만난다. 연금술사와 함께 사막을 건너며 만물의 언어와 자아의 신화에 대해 깨닫고, 후에는 바람으로 변하기까지 한다. 그 후에 피라미드에 도착하고, 연금술사는 납을 금으로 만들어 그 전날에 묵을 곳을 준 수도승에게, 연금술사 자신에게, 산티아고에게 줄, 그리고 비상 자금을 위하여 수도승에게 맡길 것으로 네 등분 한다. 그 후 산티아고는 피라미드 앞을 파헤치다 무장한 병사에게 들켜 연금술사가 준 금덩이를 빼앗긴 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병사들은 산티아고에게는 자신들이 빼앗아간 것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자리를 뜬다. 그러면서 우두머리가 말한다.

 “나 역시 그 자리에서 너처럼 두 번이나 같은 꿈을 꾼 적이 있지. 스페인의 한 오래된 교회에서 보물을 파는 꿈이었지. 하지만 그런 꿈을 되풀이해 꾸었다고 사막을 건널 바보는 없어. 명심해!”

 이야기의 시작 위치인 그 곳으로 산티아고는 돌아가고, 보물을 발견한다.

 이 책에서는 여러 단어를 조어(造語)한다. 고로, 이 조어된 파헤치면 내용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자아의 신화’이다. 자아의 신화란, 쉬운 말로 꿈을 의미한다. 산티아고에겐 보물이, 연금술사에게 납으로 금을 만드는 일이 자아의 신화이다. 작품에서 늙은 왕은 자아의 신화를 이루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유일한 의무라고 말한다.

 둘째, ‘표지’이다. ‘표지’란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기 위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신이 우리에게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 내려준 힌트와 같은 것이다. 이 표지를 통해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 표지는 굴러온 돌 혹은 나비와 같이 사사로이 볼 수 있고,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코엘료는 우리에게 작은 것을 작게 보지 말라는 교훈을 남기고자 한다. 늙은 왕이 해주는 이야기 속에서, 한 광부는 999,999개의 돌을 에메랄드를 찾기 위해 깼지만, 찾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그가 10만 번째로 깨뜨려야 할 돌을 멀리 던졌고, 10만 번째 돌 속에 있는 에메랄드는 그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돌 하나이지만, 그가 이 돌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가 그가 자아의 신화를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가 걸리게 되고, 결국 돌에 투영된 ‘작은 것’을 작게 본이는 영영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을 볼 수 없을 것이고, ‘작은 것’을 크게 본이는 그가 본 크기만큼의 에메랄드빛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셋째, ‘마크툽’이다. 마크툽이란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다’라는 말로, ‘운명이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마크툽이라는 말을 통해 파울로는 사랑, 사람, 세상, 신 모두를 투영해보이고자 했다. 산티아고가 오아시스에서 파티마를 만나고 사랑에 빠졌을 때 외친 ‘마크툽’을  통해 사랑을, 크리스털 장수를 통해 ‘마크툽’이란 말을 알게 된 날을 통해 사람을, 크리스털 장수와의 세상에 관한 대화 속에서의 ‘마크툽’을 통해 세상을, 종교적 의미로, ‘마크툽’을 사용하며 신을 투영해보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넷째, ‘만물의 언어’이다. 만물의 언어는 모든 자연과 정기를 통하여 대화하는 언어이다. 사막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언어가 다른 사람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러한 언어이다. 만물의 언어를 통하여 산티아고는, 부족장들의 회의실 안에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산티아고가 연금술사와 함께 사막을 건너다 붙잡힌 군대의 사령관에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사막과, 바람과, 해와 , 모든 것을 기록하신 손과 만물의 언어로, 만물의 정기로 바람에, 사랑에, 인간에 그리고 연금술에 대하여 이야기한 끝에 바람으로 변한다. 이처럼,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행해지게 할 수 있는 것이 만물의 언어이다.

 이와 같은 조어된 언어를 통해 『연금술사』의 내용을 파헤쳤다. 『연금술사』는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이야기지만, 결국 자아의 신화와 사랑, 사람, 삶, 신 모두에 대해 논하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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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노무현, 노무현재단, 유시민, 돌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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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제] <운명이다>라는 제목에서 말하고자 한 ‘운명’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은 굴곡진 인생이었다.

 그의 굴곡진 인생은 그의 사법고시 합격에서부터 있다. 그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에 형마저 잃었던 아픔을 겪은 바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법고시 합격은 그의 힘없는 삶을 목표있는 삶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그 후 정치계로 진출한 그는, 당선과 낙선을 여러번 반복하였다.

 본격적으로 그의 굴곡진 삶이 시작된 것은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준 ‘5공 청문회’에서부터였다. 5공 청문회에서 노무현은 ‘청문회 스타’로 자리매김하며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5공 청문회에서 이름을 알리고 나서도 그는 당선과 낙선을 반복하며 달콤한 축배와 쓰디쓴 고비를 모두 마시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후에 그가 대선에 출마한 때에도 그의 굴곡진 인생이 드러난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를 이끌며 소위 ‘노풍’이라 불리우는 신드롬을 창조해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맥주거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그의 신드롬에 대한 비웃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욱더 거세지는 노풍의 힘을 등에 업고 새천년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지목되었다.

 대선 중 지지율은 이회창 후보 39.2%, 정몽준 후보 20.9%, 노무현 후보 20.5%, 권영길 후보 3.5%로 이회창 후보가 큰 격차로 선두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때,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계획을 내놓고, 무산 위기를 극복한 후 2002년 11월 18일 노 후보가 단일 후보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대선 하루 전, 정 후보는 노 후보에 대한 지지 철회를 선언한다. 샘솟던 기쁨의 샘물이 멈추고 다시한번 노 후보의 삶은 불행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난관을 겪고도 노 후보는 출구조사 결과 이회창 후보와 2.3%격차로 앞서나갔다.

 개표중에도 그의 삶의 전형적 굴곡은 계속되었다. 초반에는 이 후보가 앞서나갔으나, 9시를 넘어서며 노 후보더 점점 앞서나갔다. 이렇게 노무현 후보는 노무현 당선자가 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으로의 취임까지 마쳤다.

 대통령 당선으로 정치권력의 정점에 오른 그에게는 끝날줄만 알았던 굴곡이 계속되었다. 2004년 3월 12일 오전 11시 55분, 노 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날치기로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국민들이 촛불집회까지 열어가며 노 대통령을 변호하였고, 노 대통령이 직무정지 상태에 있던 2004년 4원 15일 진행된 총선에서 국민들은 여당 열린우리당에게 299석 가운데 152석을 몰아주었다. 결국 헌법재판소도 2004년 5월 14일 대통령 탄핵소추안 기각을 결정한다.

 이렇게 우여곡절 많았던 대통령의 임기를 모두 무사히 끝마치고 나서도 굴곡진 인생을 계속되었다. 노건평 씨와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이 검찰에 출두한 이후, 노무현 자신마저도 검찰에 불려다니는 신세로 국민들의,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그의 말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 문화라는게 확립되지 못한 국가에서, 너무 유럽 전직 대통령처럼 살았던’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생을 스스로 마감하게 되었다.

 사후에는 모두가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그는 이렇게 한 많고 탈 많던 삶을 마감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운명’은 그를 행복 속에서 끄집어내어 불행 속에 가둔 힘이자, 그를 불행의 끌자락에서 행복으로 끌어올려 준 힘이다. 국민이 그의 이름에 투표하게 한 힘이다. 그가 청문회 스타가 되게 한 힘이다. 그에게 떨어진 탄핵안을 기각시킨 힘이다. 또한, 그를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리게 한 힘이다.

 이와같은 ‘운명의 힘’에 나는 부정적인 입장을 표한다. 운명 덕분에 그는 모든 일을 성공했지만, 이 때문에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을 버리게 되었다. 이 힘으로 우리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되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말한 추도사 중, ‘다시 태어나면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하였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그는 어쩌면, 운명의 힘을 벗어날 수 있었더라면, 인권변호사 노무현으로 사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를 앗아간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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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 이 말은 어느 한 곳의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거대한 태풍으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학과는 어쩌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용어는 자연과학 분야보다도 오히려 사회학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트레버』가 바로 이 나비효과를 이야기로 풀어 쓴 것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 트레버는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로 모든 사람이 각자 3명씩을 돕고, 그 3명이 또다시 3명씩을 돕는다는 발상을 내놓았다. 3명. 인류 60억에 비하면 턱도없는 수치지만,3명이 9명, 9명이 27명, 27명이 81명이 되기까지는 그리 큰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트레버』에서 트레버가 시작한 운동을 통하여, 트레버 한 사람의 내면의 아름다음을 3명의, 9명의, 곧 60억의 내명의 아름다움으로 확산시켜 나갈 것이고, 60억의 아름다운 인류는 또한 아름다운 후손을 또한 창조해내는 '나비효과'가 불러 일으켜질 것이다.

 또한 『트레버』에는 나비효과를 제외하고도 여러 사회학적 문제와 현상을 짚어주고 있는 것이 보인다. 특히나 이러한 것들은 트레버와 아이들이 발표를 하는 장면에서 많이 드러난다. 어떤 아이는 좋은 계획을 내놓는다. 그러나, 실천에 있어서는 스스로 하기보다는 도움을 빌려서, 내가 행동함으로써 행복를 얻기 보다는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보며 행복을 얻는다. 결국, '나'보다 '남'의 시선을 더욱 의식하여 진정한 실천의 의미를 벗어나서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싱행하려 하고 있는 점에서 사회의 부정적 현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제간의 관계도 짚어줄만 하다. 현실 속 교육에서의 교사는 학생에게 단기적인, 내일에 급급한 교육만을 하는데에 비하여, 『트레버』 의 교사는 1년짜리 장기 프로젝트를 내 준다는점에 비쳐 보아, 천리안적인 사고방식으로 학생을 가르치며, '세상을 위한 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또한, 트레버가 처음에는 숙제를 완료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계책은 빨리, 눈에 띄게 성장하는 것을 원하는 이가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느림의 미학을 즐길 수 있는 이가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트레버』에서의 트레버와 같이, 우리 모두가 세상을 변화시킬 계책을 생각하여 트레버와 같은 태도로 실행시키다 보면, 결국 아름다운 물결의 세상을, 인류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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