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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3일. 더블린: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더블린 성, 트리니티 칼리지, 오코넬 다리 본문

공간을 읽다/[여행] 2016 영국&아일랜드

2016년 2월 23일. 더블린: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더블린 성, 트리니티 칼리지, 오코넬 다리

Widerstand365 2019.06.19 13:36

 더블린에서의 하루가 시작된다. 더블린 역시 에든버러처럼 전차가 다닌다. 더블린도 과거에 전차가 있었다가 사라진 도시 중 하나였는데, 2004년부터 다시 트램을 깔아 운영에 들어갔다. 다만 더블린 전차는 길이도 더 길고, 나중에 지하철을 만들 계획도 세워져는 있다고 한다. 어쨌든 여기도 비슷한 정도의 금액이 들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1조원 짜리, 당연히 거스름돈은 주지 않는 트램을 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도착한 곳은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맥주 브랜드인 '기네스' 사의 공장이 있는 곳이다. 일부 공간은 전시실로 꾸며 두어서, 더블린에 오는 여행자들은 많이들 들리는 곳이다. 공장 자체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전시장은 2000년부터 열었다고 한다.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안에는, 기네스 맥주의 생산 공정을 포함해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네스 맥주의 수출과 확장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기네스 사는 여러 배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 아일랜드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지은 것 같다. 여기 보이는 캐슬녹Castleknock이라는 이름 역시 더블린 교외에 있는 지명이다.

 오래 전부터 맥주라는, 온도에 민감한 물품을 생산하다 보니 운송 시스템에 대한 고민은 많았던 모양이다.

 사실 기네스는, 맥주 자체로도 유명하지만 그 광고 기법 덕분에 더 유명하기도 하다. 우리 모두 '기네스'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은 맥주보다는 '기네스 북'이 먼저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네스 북은, 기네스 맥주 설립자의 4대손인 휴 비버Hugh Beaver라는 사람 덕분에 만들어진 책이었다. 이 분께서 친구와 사냥을 나갔다가, 새를 계속 놓치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민망하셨던지, 함께 사냥에 나섰던 친구에게 변명을 하기 시작하셨다. 내가 놓친 저 새가 유럽에서 가장 빠른 새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더 설득력 있는 변명을 위해 휴 비버 선생께서는 여러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으나, 관련된 내용을 찾을 수 없으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궁금증에 대한 답을 모아 둔 책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셨고, 결국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기네스 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금수저 아저씨의 한량스러움을 한껏 드러내는 에피소드로 보인다. 뭐 그래도 결국 기네스라는 회사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으니 그저 만고불변 될놈될의 원리를 깨우칠 뿐이다.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의 최상층에서는 기네스 생맥주를 한 잔 씩 제공한다.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다. 맛에 대해서야 문외한이지만, 아무튼 만족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사람이 좀 많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렇다.

 그리고 이 최상층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다. 더블린 시내의 360도 전경을 모두 볼 수 있다. 유리 위에는 보이는 유적지에 대한 짧은 설명이 적혀 있으니, 일정에 참고해도 좋다.

 아무튼 이렇게 맥주를 한 잔 하고 밖으로 나온다. 이제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당시 한창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던 시절이라, 열심히 모 의원님의 연설을 보면서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다음으로 향한 목적지는 더블린 성Dublin Castle이었다. 이 성은 1204년 잉글랜드 존 왕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성이다. 당시 잉글랜드 왕은 더블린을 비롯한 아일랜드 섬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성을 지은 것이다. 물론 지금 남아있는 것들은 대부분 18세기 정도에 지어진 것들이다.

 더블린 성은 아일랜드의 중심지에 위치한 성 답게, 지속적으로 아일랜드 정치의 중심지로 기능해 왔다. 잉글랜드 왕이 아일랜드 섬 일부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에도 영지 행정의 중심이었고,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아일랜드 전역을 지배하고 '아일랜드 왕국'을 세워 스스로 아일랜드 왕위에 올랐던 때도 왕국 행정의 중심이었으며, 아일랜드 왕국이 합병되어 대영 제국의 일부가 되었을 때도 식민지 행정의 중심이었다.

 물론 아일랜드가 독립해 아일랜드 자유국, 이후 아일랜드 공화국을 꾸렸던 때에도 독립된 정부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예전에는 아일랜드 총독 관저가 있었던 곳이고, 지금도 더블린 시청이 위치해 있다. 대통령궁과 정부청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지만, 아직도 대통령 취임식은 이 곳에서 열린다. 나머지 공간들은 박물관이나 도서관으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는 가까운 곳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 들렸다. 이름은 칼리지지만 종합대학이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대학 가운데 하나다. 원래 더블린에는 중세 시대에 교황의 명령으로 지은 대학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그 대학은 종교개혁 당시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다시 대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더블린 시민들의 여론에 따라 엘리자베스 1세의 명령을 받아 트리니티 칼리지가 만들어졌다.

 원래는 엘리자베스 1세가 세운 대학이었던 만큼 성공회 신자만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었다. 뭐 당시 아일랜드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은 모두 성공회 신자들의 것이었으니까. 1592년,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하던 시절에 만들었던 이 대학은, 설립 200년이 지난 1793년부터 가톨릭 신자의 입학을 받게 되었다.

 연구 실적 만큼이나, 도서관의 장서가 상당히 훌륭한 수준이라고 한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다. 특히 '켈스 서The Book of Kells'라는 책이 유명하다. 방문했던 당시 마침 특별 전시 같은 걸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켈스 서는 아일랜드 켈스 라는 곳에 위치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던 책이다. 9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책으로 추정되며, 당연히 책의 내용은 성경이다. 라틴어로 쓰여진 불가타 성경을 쓴 것인데, 내용상 더 오래된 라틴어 번역본도 섞여 있기는 하다. 오래된 책이기도 하지만, 책의 장식이 화려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켈스 서의 가장 유명한 페이지는 이 부분이다. 그리스어 알파벳 카이(Χ)와 로(Ρ)를 쓴 것이다. '카이 로'라고 불리는 이 표식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ΧΡΙΣΤΟΣ)'라는 말의 앞 두 글자를 딴 것이다. 흔히 합쳐셔 '☧' 같은 표식으로 쓰기도 한다.

  물론 모든 페이지가 이런 식으로 쓰여져 있지는 않고, 이 페이지는 특별히 장식된 페이지다. 장식되어 있는 패턴이, 켈트 족의 전통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종이나 안료가 대단히 비싼 물건이었을 테니,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화려하게 장식을 한 것이다.

 대학교 건물 내부도 이렇게 잘 만들어져 있다. 건물 내에도 일부 구간은 외부인도 들어올 수 있도록 오픈되어 있다. 학교에 학생보다 관광객이 많은 것 같아서, 오히려 학생들이 불편을 느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별로 오래 있지 못했다. 결국 켈스 서도 보지 않고 빠르게 캠퍼스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 돌아다니다 보니, '물리학의 도시 더블린'이라는 기호가 보였다. 대체 물리학과 더블린은 무슨 관계일까....를 고민해 보았다. 찾아보니 그냥 트리니티 칼리지 물리학과에서 하던 캠페인이었다고 한다. 도시 생활 속에서 물리학의 원리를 찾아 보자는 캠페인을 2015년 말쯤에 하셨다고 한다.

 조금만 더 걸으면 오코넬 다리O'Connell Bridge라는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동상들이 늘어서 있는 광장이 있다. 중앙우체국 앞 광장이다. 더블린에서 가장 큰 광장이고, 아일랜드 독립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진에 보이는 동상이 오코넬 다리가 이름을 따온, 대니얼 오코넬Daniel O'Connell이다.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당시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에 성공회 신앙을 강요했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봤던 것처럼,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여러 차별이 잇따르고 있었다. 대학 입학이 어려웠던 것은 물론이고, 재산 취득의 자유도 제한되었고, 직업 선택의 자유 역시 크게 제약되었다.

 대니얼 오코넬은 이러한 가톨릭 교도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인물이었다. '가톨릭 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가톨릭 교도에 대한 차별 금지를 위해 노력했고, 본인이 직접 하원의원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1828년에는 심지어 당선까지 되었지만, 성공회 주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를 거부해 실제 의원이 되지는 못했다.

 오코넬의 이런 움직임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노예 해방을 비롯한 관용주의의 물결 위에서 가톨릭 차별에 대한 재검토도 이루어졌다. 결국 1829년, 영국 의회는 영국과 식민지 전역에서 가톨릭 교도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오코넬은 이후 아예 대영제국과 아일랜드를 통합시킨 '연합법'을 폐기시킬 것을 요구하며, 아일랜드가 영국과 별개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물론 그의 생전에 이런 움직임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코넬의 행동과 승리의 경험은, 이후 아일랜드 독립 투쟁에 꽤나 영향을 준 모양이다. 짧더라도, 승리의 경험은 잊을 수 없는 법이다.

 아일랜드 시민들은 의회 진출 운동과 무장 투쟁을 병행했고, 의회의 결의를 통해 자치권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자치법은 현재의 북아일랜드 지역에는 시행이 유예되었고, 완전한 독립을 허락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결국 무장 투쟁 세력은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며 봉기하게 된다. 이것이 1916년 '부활절 봉기'고, 이 부활절 봉기 당시 아일랜드 독립 선언문이 낭독된 곳이 이 중앙우체국 앞 광장이었다.

 물론 이 부활절 봉기는 실패했지만, 이 봉기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은 오히려 영국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분리주의자들은 다음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당선된 분리주의자 의원들은 웨스트민스터 출석을 거부하며, 완전한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고 선언한다. 당연히 영국은 이를 제지하려 전쟁을 시작했으나, 이제는 봉기에 대한 진압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전면전이었다.

 전쟁은 예상 외로 늘어졌고, 영국 내에서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는 여론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결국 1921년, 영국은 조약을 통해 아일랜드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남았고, 새로 세워진 국가는 영국과 상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국가 원수 역시 영국 국왕이었으며, 실권은 없지만 영국에서 총독도 파견되었다. 지금의 캐나다 같은 상황이지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운 아일랜드군에게는 불쾌한 일이었다.

 이러한 점에 반발한 아일랜드군 일부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다시 한 번, 이제는 아일랜드 자유국을 향한 게릴라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독립한 아일랜드는, 이제 내전을 치르게 되었다. 물론 승리는 정규군을 가진 아일랜드 자유국의 몫이었다. 내전은 1923년에 끝났다. 물론 1937년, 아일랜드 자유국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영국과의 상징적인 관계 역시 청산해 완전히 독립된 국가가 되었다. 반군이 피를 흘리며 주장하던 완전한 독립은, 정작 그들을 진압하던 아일랜드 자유국의 법안 개정으로 허망할 만큼 빠르게 관철되었다.  무엇을 위해 흘린 피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역사다.

 그러나 여전히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으며, 아일랜드 통일주의자의 움직임은 여전히 거세다. 내전에서의 패배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의 전환 이후 많은 통일주의자가 무장 노선을 포기했지만, 최근까지 IRA라는 무장 단체가 활동하기도 했다. 브렉시트 역시 북아일랜드 문제로 정체 중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한 것 같다.

 영국의 식민지배가 만든 원죄라고 생각한다. 영국은 그 값을 충분히 치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광장을 거닐며, 여러 독립운동가의 동상 앞에 서며, 슬플 정도로 높이 솟은 국기 게양대를 보며,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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