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비더슈탄트, 세상을 읽다.

인간에 대한 신뢰, 가능한가? 본문

시간을 읽다/[역사] 뒤돌아서 오늘을 보다

인간에 대한 신뢰, 가능한가?

Widerstand365 2016. 5. 19. 22:03

-

인간에 대한 신뢰, 가능한가?

-




 근대. 르네상스 이후로 시작된 근대는 대부분 ‘합리의 시대’나 ‘이성의 시대’로 표현된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막상 실상을 들여다보면 별로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어제는 사전에서 ‘defenestration’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이 길고 복잡해 보이는 단어는 ‘(사람·사물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기’라는 의미다.


 문득 예전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어렸을 때 영어 학원에 다녔었는데, 2층에 있는 강의실에 원어민 선생님 한 분이 한글로 이런 문구를 붙였었다.


 “나는 나쁜 아이를 먹어요.”


 나쁜 학생들은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겠다는 (...) 농담 섞인 말이었다. 그게 왜 지금까지 기억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기억 덕분에 그냥 넘겨버릴 수 있는 단어 하나에 대해 공부를 좀 해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1618년 보헤미아 땅에서 발생했다. 종교개혁이 확대되고 유럽이 근대를 향한 걸음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이다.


 당시 유럽은 수많은 갈등 요인을 갖고 있었지만, 그중 가장 거대했던 것은 신교과 구교 사이의 갈등이었다. 특히 보헤미아처럼 한 국가 내에 신교과 구교의 세력이 비슷한 경우에 큰 문제가 되었다.


 보헤미아에서는 1608년 ‘복음 연방(Evangelical Union)’이라는 신교 영주 동맹이 구성되었고, 이듬해에는 구교 영주들이 이에 대항해 ‘가톨릭 동맹(Catholic League)’을 결성했다. 상황이 이렇게 위험하다 보니, 이제까지의 보헤미아를 다스리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이 지역에서의 광범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황제가 죽고 차기 황제를 뽑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였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귀족들이 선거로 뽑았는데,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였던 ‘페르디난트’라는 인물은 가톨릭 광신도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결국 제국에게 위협을 느낀 신교도 귀족들이, 프라하에 있는 보헤미아 왕궁에 침입했다. 이 왕궁에서는 황제가 파견한 지사 두 명과 비서 한 명이 있었는데, 귀족들은 이 세 사람을 잡아다가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Defenestration! 세 사람은 10m 높이에서 창밖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떨어진 세 사람은 죽기는커녕 별다른 부상도 입지 않고 도망쳤다. 구교 측은 이것이 천사들의 도움이라고 주장했고, 신교 측은 비료로 쓰려고 쌓아 놨던 동물 배설물 더미에 떨어졌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 전 유럽이 뒤숭숭해졌다. 천사의 도움인가, 아니면 배설물의 도움인가! 이것을 두고 보헤미아 내부에서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 페르디난트는 예상대로 제위에 올랐고, 그는 이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보헤미아 신교 군대는 황제에게 저항했지만 힘에서 밀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덴마크 측에서 이들을 지원했고, 스웨덴에 이어 프랑스까지 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30년 전쟁이라는, 유럽 근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 하나가 발발하고 말았다.


 이 전쟁의 핵심 전쟁터였던 독일 지역의 피해는 그야말로 극심했다. 수많은 마을이 폐허가 되었고, 통상 이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굶주림으로 독일 인구의 3분의 1에서 3분의 2가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물론 수많은 이유들이 기저에 깔려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이 엄청난 학살전은 천사냐 배설물이냐의 논쟁에서부터 촉발된 것이다.





 다른 재밌는 사례 하나가 마녀사냥이다. 흔히 마녀사냥을 중세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마녀사냥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광범위한 근대 현상이다. 마녀사냥의 ‘전성기’는 1570년-1630년이라는 근대 초기였다.


 마녀사냥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다. 이 책의 1부는 마녀에 대한 논증, 2부는 마녀의 사례, 3부는 마녀에 대한 기소 방법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참 가관이다.


 이런저런 내용이 들어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대체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마녀라는 존재가 있도록 허락하신 것일까?” 이들은 악이 존재함으로서 선이 더 빛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인이 악한 사람들에 의해 순교함에 따라, 그의 이름이 더욱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넘어가자.


 “대체 악마는 왜 직접 인간에게 개입하지 않고 마녀를 이용하는 것일까?” <마녀의 망치>는 악마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 직접 상호작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녀는? 마녀도 인간이잖아? 그런 하찮은 걸 신경 쓰면 지는 거다.


▲ <마녀의 망치 (Malleus Maleficarum)>



 그런데 여기서 또 결정적인 문제가 또 있다. 성경 <욥기>에 보면, 악마가 직접 욥에게 고통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녀의 망치>는 이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하지만, 저자들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말꼬리 잡지 말고 핵심을 보라!”


 “악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화장실에 가시는가?” “악마는 앞을 볼 수 있는가?” “악마에게는 눈이 있는가?” 이런 걸 대단히 진지하게 논리적으로 따져가며 논의한다.


 마녀사냥의 실제는 어떨까? 가장 핵심적인 마녀의 증거는 자백이다. 그리고 자백을 받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문이다. 고문을 시작하기 전에 몇 번 자백을 요구하는데, 자백을 하면 사형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때 자백하면 정말 살 수 있는가? <마녀의 망치>는 아주 자랑스럽게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실제로 사형을 면하게 해 줄 수도 있다. 가둬두고 평생 죽음을 면할 정도의 빵과 물만을 주며 살려두기도 한다. 아니면 이런 대안도 제시한다. “일단 살려준 후 몇 달 있다가 사형시키면 된다!” 혹은 “다른 재판관이 와서 사형을 시키면 하등의 문제가 없다!”




 다른 방법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마녀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마녀 혐의자를 재판장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울어라!”


 이때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마녀다. 만약 눈물을 흘리면 어떻게 될까? 울으라고 한 때에 정확하게 울 수 있다니! 악마의 도움이다!


 이렇게 처형된 사람만 최소 5만 명이었다.




 소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근대 사람들이 서로에게 자행한 일들이다.


 이것들은 아주 단편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근대가 무르익은 다음이라고 다를까? 양차대전은 어땠는가. 베트남 전쟁은 또 어땠는가. 세상에 인간이 합리와 이성 따위 치워버리고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눈 적이 겨우 이런 사례들뿐이겠는가?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 위해서,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서로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선은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에 주는 에너지는 엄청나다. 그 선이 조금씩 앞으로 나갈수록, 세상은 조금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해 보자. 심지어 이성과 합리의 시대, 신성을 넘어선 인간성의 시대라는 근대에서 자행된 일들만 해도 끔찍한 수준을 넘어선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여성을 향한 증오범죄. 그리고 추모를 향한 ‘남혐’ 프레임 씌우기. 진심어린 추모조차 할 수 없는 세상. 그 추모 행사를 기획한 게 ‘워마드’라는 성소수자 혐오 커뮤니티라는 사실은 이 사회에 대한 조소마저 벅차게 만든다.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게 이 땅에서 가능할까?


 불신과 공포의 시대,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사는 반복, 오로지 반복이다.


▲ 결국 믿어야 할 것은, 죽음 앞에 눈물을 보일 수 있는 수많은 인간성.







0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