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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일. 다시, 시작 / 중미 관계 본문

시간을 읽다/[오늘] 월화수목금토일 (終)

2016년 1월 1일. 다시, 시작 / 중미 관계

Widerstand365 2016. 1. 1. 09:00

2016년 1월 1일.



[오늘의 음악] 다시, 시작


 송구영신(送舊迎新). 오래된 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는다는 의미다. 오늘이야말로 그런 날이다. 낡은 해를 버리고 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2015’라는 미래적인 숫자의 조합이 이제야 좀 익숙해질 법 한데, 벌써 2016년이 다가왔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진부하다. 매년 그런 표현을 안 들어본 때가 없는 것 같다. 365일이라는 긴 시간에 많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올 한 해는, 참 다사다난했다.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습격당했다. 롯데가에서는 분쟁이 있었다. 성완종 게이트로 정권의 부정부패가 드러났지만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가 1주기를 맞았다. 메르스가 대유행했지만 정부는 철저하게 무능했다. 국정원이 해킹 프로그램을 구매해 내국인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드러나고, 국정원 직원이 자살했지만, 밝혀진 것은 없었다. 민중총궐기가 열렸지만 정부는 국민의 소리를 무시했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으로 민중을 폭력 진압했다.


 서부전선에서 지뢰가 폭발하고 포격이 벌어졌지만 정부는 피해 장병에게 보상금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고 청문회를 열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지침이 발표됐다. 국회법 파동과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도 빼놓을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내분을 겪었다. 정부가 노동개편에 고삐를 당겼다. 대통령이 국민을 IS에 비유했다. 마지막까지 시끄러웠다. ‘위안부’ 협상이 책임있는 배상 없이 타결되었다. 여야가 선거구 협상에 실패하며 온 나라의 지역구가 무효화됐다.


 나는 2015년 처음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했고, 대학교에 들어왔다. 개인적으로도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은 한 해였다. 많이 배우기도 했고, 무엇보다 많은 글을 쓴 한 해였다.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 대학교 1학년이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 세상이다. 웃으며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언젠가부터 ‘새해’라는 것에 대한 실감이 사라지는 것 같다. 그것이 단지 시간이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졌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화가 많아진 것 같다. 비웃음과 헛웃음을 제외하고는 웃음 지을 기회가 많지 않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된다. 또 한 번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 한 해가 될 것 같다. 결코 기대감에 가득차거나, 희망을 품어보거나 하지 않는다. 절망감이나 처절함과 같은 마음도 없다. 이제는 무뎌진 것 같다. 평범함이 사치라는 것을 너무도 빨리 알아버리는 세상이다.


 어쨌든 새로이 시작되는 한 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란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복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별로 기분 좋은 한 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갈수록 ‘당연한 것들’이 많이들 사라지는 것 같다.


 아무튼 다시 새로 시작되는 한 해도 서로를 붙들고 열심히 버텨 보기로 하자. 때로는 찌질하게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일에 웃음을 터트리고, 때로는 감정을 꽁꽁 숨기기도 하고. 늘 그렇듯 늘 그런 한 해로 서로를 붙잡고 버텨 보자.


 한 해를 보내기 위한 ‘망년회’라는 모임을 많은 사람들이 갖는다. 지난 한 해를 잊어버린다는 의미다. 그래도 너무 많이 잊어버리지는 말기로 하자. 고마워해야 할 일, 미안해야 할 일, 기뻐해야 할 일, 분노해야 할 일. 너무 많이 잊어버리지는 말기로 하자.


 오늘의 음악, N.EX.T의 ‘힘을 내!’로 골랐다.





[오늘의 역사] 중미 관계


 1979년 1월 1일, 중국과 미국이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중미 관계의 역사는 중국이 아직 청나라라는 전제군주제 국가를 유지하고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1700년대 중반부터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의 상인들이 중국 항로 개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84년 2월, ‘중국황제호’라는 배가 중국 무역을 위해 최초로 뉴욕항을 떠났다. 이 배는 8월에 광둥 항에 입항했다. 이 배는 미국에서 모피, 인삼 등을 가져가 중국에서 차,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하며 큰 이익을 봤다. 그러면서 미국 상인들은 중국을 상대로 한 무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중미 무역이 상당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미국은 이후 중국에 진출한 다른 열강과 마찬가지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중국은 미국을 외교 우방으로 대우했으며, 상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사실 중국 내에서 외국인들의 지위가 안정적이지는 못했지만, 미국 상인들은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해 냈다.


 이후 미국은 청나라에 영향력을 가하는 열강으로 성장했다. 태평천국운동이나 아편 전쟁, 의화단 운동 등에서도 미국은 서양 연합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열강으로서의 지위를 얻어냈다. 이권 침탈에도 적극적으로 동조했고, 다양한 권한을 가져가게 되었다. 왕샤 조약 등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 치외법권 등을 인정받기도 했다.


▲ 왕샤 조약이 체결된 마카오 관음당.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은 지방에서 다양한 군벌들이 자신만의 정권을 수립하며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졌다. 다만 중국을 지배하는 공식적인 정부는 쑨원이 세운 ‘중화민국’이라는 정부였고, 미국은 중화민국과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중화민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군벌들을 몰아내고 중국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 일본의 침략 등으로 중국의 정국은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졌다.


 중화민국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미국 역시 두 차례 모두 연합군으로 참전했기에, 양측은 시간이 지날수록 상당한 신뢰감을 쌓고 강력한 우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국이 일본에 대적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기에, 미국과 중화민국은 같은 전선을 공유하며 일본에 대응하기도 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 중국은 일본은 몰아냈다만 이번에는 내분에 휩싸였다.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힘을 합쳤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한 번 분열해 싸움에 접어든 것이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국공 내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권의 맹주였던 미국이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전쟁에서 누구를 지지했는지는 뻔한 일이다. 미국은 비공식적으로 국민당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미국의 의지와는 다르게 국공 내전에서는 공산당이 승리했다.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낸 공산당이, 병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던 국민당에게 기적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미국이 지지하던 국민당은 타이완 섬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했고, 공산당은 중국 본토에 남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식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고, 중화민국과만 외교를 계속했다. 특히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공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냉전의 기류가 조금씩 풀리면서 이들의 관계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1971년 미국의 탁구 선수단이 미국을 방문한 ‘핑퐁 외교’부터 관계가 달라졌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며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 마오쩌둥을 만난 닉슨.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과 국교를 맺은 국가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 모두와 국교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결국 UN은 중화민국을 UN에서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받아들였으며, 미국도 1979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관계를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 이제는 G2라는 이름으로 세계 양강이 되어버린 국가들이다. 이 둘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1979년 1월 1일, 공산주의권의 중국과 자본주의권의 미국이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양측 사이에 다리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 ‘다리’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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