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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0일. 뒤돌아보다 / 호세 리살 본문

시간을 읽다/[오늘] 월화수목금토일 (終)

2015년 12월 30일. 뒤돌아보다 / 호세 리살

Widerstand365 2015. 12. 30. 09:00

2015년 12월 30일.



[오늘의 음악] 뒤돌아보다


 연말이 다가오니 TV에서는 시상식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연예대상이니, 연기대상이니 하는데 어떻게 매년 서로 스케줄이 겹치지도 않는지 비슷한 사람들이 나와서 상을 받아 가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상을 받는 이들은 또 즐거운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안고서는 시상식장을 나선다. 하지만 또 그만큼 상을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카메라는 언제나 상을 받은 이들만을 비추는 모양이니 후자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지 못하겠다.


 뭐 그런데 딱히 연말 시상식이 아니더라도 연말은 언제나 모든 것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한 해를 돌아보다 보면 누군가는 웃으며 자리를 뜨기도 하고, 누군가는 울며 자리를 뜨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또 언제나 한 해를 돌아보다 보면 우는 때도 있고 웃는 때도 있는 법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다만 울든 웃든 추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낸 한 해가 내게도 생겼다는 것. 언제나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 않던가.


 또다시 다가오는 내일이 있다. 그리고 그 내일들이 모여 또다시 다가오는 내년이 있다. 삼백 예순 다섯 번의 날이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2016년을 돌아보며 앉아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떤 일들을 회상하고 있을 것인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것. 오늘의 음악은 여행스케치의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로 준비했다.





[오늘의 역사] 호세 리살


 1896년 12월 30일,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호세 리살이 처형당했다.


 호세 프로타시오 리살 메르카도 이 알론소 레알론다 (1861.6.19 ~ 1896.12.30)



 호세 리살은 1861년 6월 19일, 에스파냐가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던 시절, 필리핀의 칼람바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호세 리살은 특별한 총명함을 보였고, 성장한 이후에는 의사가 되기 위해 에스파냐로의 유학길에 오른다.


 호세 리살이 처음으로 유명세를 탄 것은 유학을 하던 도시인 마드리드에서 발표한 소설 때문이었다. <놀리 미 탕그레>라는 이 소설에서 그는 에스파냐의 식민지 차별 정책과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소설은 당시 자유주의적 사상에 물들어가던 에스파냐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호평을 받고 유명해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에스파냐 사회에서는 자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 여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에스파냐 정국은 호세의 서적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했고, 호세 리살에게는 추방령을 내렸다. 호세 리살은 이에 따라 모국 필리핀으로 쫓겨났다.


 결국 에스파냐 당국의 추방령에 따라 그는 의사의 꿈을 접고 모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신 돌아온 호세 리살은, 다시 한 번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그것은 조국 필리핀을 해방시키려는 열망이었다. 그는 곧 필리핀 민족동맹을 결성해 에스파냐의 식민지 통치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호세 리살은 필리핀 민중이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에 의해 노예 상태에 놓여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의 저서와 활동을 통해 필리핀 민중은 식민 지배의 현실에 대해서 점차 깨닫기 시작했고, 민족의 자각과 해방의 기운은 점점 드높아져 갔다.


 이후 1892년 그는 필리핀 독립 운동의 지도 기구격이 되는 ‘필리핀 연맹’을 결성한다. 하지만 이내 에스파냐 정부는 그의 독립 운동을 주시하게 되고, 그는 필리핀을 다스리는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섬으로 유배되었다.


 필리핀 독립운동도 역시 우리 독립 운동처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많았다. 누구는 비폭력을 주장했고, 누구는 폭력 혁명에 의한 직접 투쟁을 주장했고, 누구는 자치론을 주장했으며 누구는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자치론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조금 덧붙이기로 하자.


 호세 리살은 비폭력을 주장한 운동가였다. 그의 행동이 완전히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모르겠지만, ‘카티푸난’이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어 무장 봉기를 일으킨 필리핀의 또 다른 독립운동가 ‘안드레스 보나파시오’와 같은 노선은 분명 아니었다.


 폭력 혁명을 주장한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하지만 호세 리살을 체포한 총독부는 그가 마치 모든 무장 독립 운동가의 배후인 듯 몰아갔다. 결국 수감된 호세 리살은 1896년, 에스파냐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필리핀 혁명’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같은 해 12월 30일, 마닐라 시내에서 공개 총살형을 당해 숨을 거둔다.


 그의 죽음은 필리핀 독립 운동의 한 불씨가 되었다. 이후 반 에스파냐 운동과 반미 운동의 선봉에 섰던 독립운동가 에밀리오 아기날도나, 이후 독립하는 필리핀의 헌법 초안을 작성해 ‘혁명의 뇌’라 불리는 독립운동가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경우에도 그의 죽음을 보고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럼 이제는 아까 얘기했던 자치론에 대해서 이야기해봐야겠다. 호세 리살도 필리핀의 에스파냐로부터의 자치론을 주장했던 독립 운동가 중 하나다. 우리 역사에는 이광수가 대표적으로 자치론을 주장한 이로 꼽힌다. 하지만 호세 리살은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꼽히고, 이광수는 변절의 아이콘으로 꼽힌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과연 둘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누가 민중을 바라봤고, 누가 자신만을 바라봤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호세 리살의 자치론은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에스파냐로부터 일정 정도부터 자치권을 얻어내고, 그렇게 점차 환경을 개선해 나가자는 생각. 그것은 어쩌면 이대로 민중이 버텨내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절박함의 발로였다.


 하지만 이광수는 달랐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을 뿐,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의 이후 행보만 봐도 충분하다. 우리 역사에서 민중을 위해 자치를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자치론이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는 것은 일단 논외로 치기로 하자. 굳이 따지자면 이건 호세 리살과 이광수 모두가 간과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을 간과한 동기는 둘 사이의 차이가 있으라리고 생각한다.


 외국의 독립운동 사례를 보면 볼수록, 우리 독립운동 사례를 연구하면 할수록 무언가 독립운동에 대한 철학이 정립되어야 함을 느낀다. 반 에스파냐 운동과 반미 운동의 선봉에 섰지만 이후 미국에 협조하자고 주장하고 일본에 협조해 수감 생활까지 겪은 아기날도는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 이후 독립한 혁명 정부는 아기날도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했다.


 폭력 혁명과 비폭력 혁명, 자치론과 완전 독립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두고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그 철학에 대한 논의가 분명 필요하다. 일제는 무조건 나쁘고 독립운동가가 어떤 일을 했든지 정당화된다고 가르친다면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역사와 국가는 중태에 빠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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