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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9일. 단순한 것 / 파쇼다 사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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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9일. 단순한 것 / 파쇼다 사건

Widerstand365 2015.09.19 09:00

2015년 9월 19일.



[오늘의 음악] 단순한 것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게 있다. 흔히 ‘오컴’이라고 불리는 ‘오컴의 윌리엄’이 주장한 내용이다.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까지 많은 것을 가정하면 안 된다.”와 “보다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우지 말라.”의 두 가지 원칙이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면, 두 가지 중에서 가장 단순한 쪽을 선택하라는 말이다. 설명은 가장 간단한 수록 좋다는 것, 가장 적은 가정을 가지고 완벽하게 현상을 설명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들판에 까맣게 그을린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벼락에 맞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누군가가 이 나무를 완전히 태워버리지 않고 적당히 그을릴 정도만 태운 뒤에,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오컴의 면도날에 따르면, 전자의 의견을 채택해야 맞다.


 물론 당연히 오컴의 면도날이 모든 경우에 참인 것은 아니다. 복잡한 논리라고 해서 거짓이라고 할 수 없고, 단순한 논리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컴의 면도날에 합치되는 사례도 상당히 많이 존재하지만, 예외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오컴의 면도날은 논리성의 한 가지 원칙을 제기해주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다시 들판의 나무로 돌아가 보자. 첫 번째 가설은 “벼락이 떨어졌다”는 단 한 가지의 가정만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첫 번째 가설의 지지자들은 얼마 전에 비가 왔었고, 누군가 들판에 벼락이 치는 것을 봤다는 사실만 들고 나오면 된다.


 하지만 두 번째 가설은 “누군가가 나무를 태웠다” “태웠지만 완전히 태우지는 않고 그을리기만 했다”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세 가지의 가정을 가지고 있다. 이 각각의 가정을 모두 증명해내야 하고, 그렇다면 첫 번째 가설보다는 진실일 가능성이 떨어진다. 듣는 사람에게 설득력이 있지도 않다.


 철학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달해 오면서 대단히 복잡한 이론들을 많이 남겨두고 갔다. 사실 그것은 철학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학문이든 이론적인 분야에서는 상당히 복잡한 이론과 규칙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숫자를 다루는 학문도 그렇고, 사람을 다루는 학문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종종 ‘오컴의 면도날’을 생각해보곤 한다. 불필요한 가정들을 면도날로 잘라버리던 논리성을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런 면도날이 있다면 조금은 더 단순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보곤 한다.


 단순하다는 것은 꼭 무지하다는 것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오히려 명쾌하다는 의미로 다가올 때가 많다. 쓸데없는 것을 면도날로 잘라낸 명쾌한 논리. 복잡한 용어와 가설과 구조를 따지는 사람들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오늘의 음악, 스메타나의 현악 4중주 1번 ‘나의 생애로부터’로 골랐다.




[오늘의 역사] 파쇼다 사건


 1898년 9월 19일, 파쇼다 사건이 일어났다.


 19세기 말은 말 그대로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산업혁명의 성공과 자본주의의 발달은 극한에 다다랐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원료를 수입하고, 나라에 쌓인 재고품을 처리하기 위한 시장을 물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손에 잡힌 나라들이 식민지가 됐다. 강제적으로 원료는 싼 값에 사 갔으며, 완성품은 비싼 값에 들어왔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가 국가의 경제적 주권이 서방 세계로 넘어가면 점점 군사적ㆍ정치적 침략을 강화해서 식민지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런 시장에 빨리 발을 들인 두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원래 가장 먼저 식민지 무역에 발을 들인 나라는 에스파냐였는데, 이 과정에서 들어오는 자금이 기간산업에 투자되지 못했고 산업 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해 서서히 몰락해갔다. 에스파냐 이후에 제해권을 장악했던 네덜란드 역시 비슷했다.


 결국 19세기 말에 이르러서 패권국은 영국과 프랑스로 압축되었다. 당시는 한창 아프리카 대륙 무역이 번창하고 있던 시기였다. 몇몇 탐험가들의 아프리카 탐험이 이어졌고 아프리카의 광활한 대륙에 서구인의 손이 본격적으로 닿기 시작했다.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흔히 ‘종단 정책’이라고 불리는 정책을 폈다. 영국은 아프리카 북단의 이집트 카이로를 가지고 있었고, 아프리카 남단의 케이프타운을 가지고 있었다. 이 양단을 중심으로 아프리카를 세로로 돌파하겠다는 것이 영국의 종단 정책이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반대로 ‘횡단 정책’이라고 불리는 정책을 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서단의 알제리를 가지고 있었고, 아프리카 동단으로는 마다가스카르를 가지고 있었다. 이 양단을 중심으로 아프리카를 가로로 돌파하겠다는 것이 프랑스의 횡단 정책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프랑스와 영국이 충돌을 할 수밖에 없다.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은 각각 세로축과 가로축을 이루며 아프리카 전체에 십자 모양을 그리게 되는데, 이 양측이 충돌하는 십자의 중심부가 분명 있을 터였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이 두 세력이 만나는 사건이 1898년에 벌어진다. 당시 수단이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이때 수단에서 영국의 지배에 항의하는 반란이 벌어졌다. 영국의 장군 허버트 키치너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수단에 철도를 깔기 시작한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로 횡단 정책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1894년에 프랑스는 수단의 일부를 점령했는데, 이곳과 아프리카 동쪽 해안의 ‘지부티’라는 도시를 연결하기 위한 철도 건설에 착수했던 것이다. 이 계획의 선두에는 장 밥티스트 마르샹 대위가 섰다.


▲ 프랑스 선봉에 섰던 장 밥티스트 대위.



 1898년 7월, 마르샹 대위는 파쇼다에 도착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남수단 북부에 위치한 도시다. 먼저 도착한 마르샹 대위는 파쇼다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은 당황했다. 횡단 정책을 위해 필수적으로 지나야 할 관문인 파쇼다를 프랑스가 먼저 선점해버린 것이다.


 키치너 장군은 파쇼다로 급히 달려갔다. 마르샹 대위와 만난 키치너는 마르샹에게 철수를 부탁했다. 하지만 마르샹 대위로서는 이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마르샹은 부탁을 거절했다.


 군사적 긴장 상태가 시작됐다. 반드시 파쇼다를 차지해야 하는 키치너와 반드시 파쇼다를 지켜야 하는 마르샹의 대결이었다. 물론 둘 사이에 물리적인 충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양측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 파쇼다 사건을 풍자한 신문 삽화.



 상황이 난국이 되자 문제는 본국 정부로 송환됐다. 프랑스 정부와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두고 장기간의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1899년 결국 프랑스가 파쇼다를 영국에게 양보하는 쪽으로 타협이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들의 관계는 대단히 가까워졌고, 1904년 영불 화친협정을 맺기에 이른다.


 두 국가가 식민지를 두고 경쟁했다. 물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긴장감은 고조됐다. 하지만 한 쪽의 양보로 피해를 입는 사람 없이 사건은 종결될 수 있었다. 둘은 급격히 친해졌다. 이제 해피엔딩인가?


 이 이야기에는 빠진 사람이 있다. 원래 그 땅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빠져 있다. 이 땅의 주인은 영국도 프랑스도 아니다. 파쇼다의 주인은 파쇼다에 살던 수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영국과 프랑스가 점령을 논하고 양보를 논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것일까.


 영국도 프랑스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양보라며 건네는 것은 무엇이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받아드는 것은 무엇인가. 제국주의의 본질이 이 사건으로 흐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중요한 것은 강대국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아니다. 프랑스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파쇼다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맞는 거다. 당연하다는 듯이 식민지를 빼앗고 훔치는 강대국의 민낯을 강조하고 싶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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