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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6일. 열차 / 선조 본문

시간을 읽다/[오늘] 월화수목금토일 (終)

2015년 3월 16일. 열차 / 선조

Widerstand365 2015.03.16 06:00

2015년 3월 16일.



[오늘의 음악] 열차


 기차를 탄다. 지나치는 정거장 하나 없이 타박타박 한 정거장, 한 정거장 모두 서서 승객을 기다리는 무궁화 호. 서울에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갈 때마다 내리는 승객은 늘고 타는 승객은 준다. 아직 밖이 밝을 때 출발했던 열차는 해가 다 지고, 어둠이 세상을 덮을 때에야 나를 내려놓고 떠난다.


 기차를 타는 일을 좋아한다. 버스를 타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낭만이 있다지만, 나는 차를 타고도 갈 수 있는 도로를 달리는 버스보다는, 보지 못한 풍경, 볼 수 없는 풍경을 안은 기차의 차창 밖을 더 좋아한다. 기차의 덜컹거림에는 버스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생각해 보면, 역마다 들려 늘 새로운 사람들을 쏟아내고 받아내는 열차의 모습도 마음에 든다. 한 번 탄 사람들이 끝까지 내리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모두 쏴 하고 헤어지는 고속버스보다는, 들리는 역마다 마지막의 아쉬움과 처음의 설레임, 나와 다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열차의 일이 즐겁다.


 가끔은 열차를 사람에, 열차에 타는 사람들은 그가 받아들이는 담론으로 연결지어보기도 한다. 열차에 사람들이 타고 또 내리듯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담론들이 들어와 머릿속을 헤집기도 하고, 결론지어져 깔끔하게 내려가기도 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열차는 표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건 어쩌면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표를 가진 모든 담론들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라는 것. ‘표를 가졌다’는 건 아마 ‘기본적인 자격’을 의미할 수 있겠지. 인권과 윤리라는 아주 기본적인 것, 있잖나.


 민주주의라는 것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구성원들이 모여야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실패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출발해야 맞고, 어쩌면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는 가장 절대적인 체제일 수도 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충실히 지키는 법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다. 그저 남의 의견을 잘 들을 수만 있으면 된다. ‘표를 가진’ 의견에 대해서 반박하고, 때론 설득하고, 또 때로는 설득당해 나의 의견을 바로잡고. 그 과정이 민주주의를 이행하는 데에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가끔은 누군가의 의견을 듣지도 않은 척 지나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스스로가 민주주의 사회의 이행에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언제나 열차의 원칙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표를 가진 담론은 아무리 허무맹랑해 보여도 반드시,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오늘의 음악, 손병휘의 ‘나란히 가지 않아도’로 준비했다. 꼭 발맞추어 걷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함께 걷고 있는 것. 민주주의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굴러간다고 하더라.




[오늘의 역사] 선조


 1608년 3월 16일,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사망했다.


 ‘선조’라는 것은 왕이 죽은 뒤에 붙이는 묘호이니 사실 그의 일생 궤적을 설명할 때 그를 ‘선조’라 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만, 일단 다들 ‘이연’이라는 그의 본명보다는 ‘선조’라는 묘호가 어울릴 테니, 편의상 그렇게 칭하기로 하자.


 선조는 사실 왕위에 오를 만한 집안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물론 왕족은 왕족이었지만, 선조는 중종의 9번째 아들인 덕흥군의 3번째 아들이었다. 선조의 바로 윗대 왕이었던 명종이 중종의 아들이었으니, 선조는 명종의 조카였던 셈. 덕흥군이 서자였고, 덕흥군이나 선조나 장자가 아니다보니 왕위 계승은 사실 선조에게는 가능성이 없었다.


 그런데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하고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족 중에서 어느 한 명을 왕으로 옹립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명종이 평소 선조를 아끼기도 했었고, 선조의 어머니가 별로 대단한 집안 출신이 아닌 점이 메리트로 작용하기도 해, 왕실은 선조를 명종의 양자로 입적시킨 후 선조를 즉위시킨다. 적자 직계로만 내려오던 조선 왕실이, 최초로 서자 방계 출신을 왕으로 즉위시킨 경우였다. 이 점은 아마 즉위 후 선조의 행동에도 꽤나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 당시 선조의 나이는 어렸다. 16살 정도 됐으려나. 그래서 당연히 즉위 초반에는 수렴청정에 들어갔었고. 하지만 선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림 인사를 대거 등용하고, 이 신하들을 이용해 시국을 수렴청정이 아닌 친정(親政)에 가깝게 돌본다. 결국 1년 정도가 지난 후 수렴청정은 끝이 나고, 자신의 즉위에 걸림돌이 되었던 심통원 등의 부패를 이이가 고발하자 즉시 숙청하고, 심의겸 등의 중진 정치인도 어렵지 않게 축출한다. 왕을 어리다고 무시하던 신하들은 소년 왕의 정치적 수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의 주변에는 유달리 인재가 많기도 했다. 그가 인재를 다루는 능력이 좋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유성룡, 이이, 이황,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이산해, 이순신, 권율, 정인홍, 성혼, 허준 등 역사계에 길이 남을 인재들의 상당수가 선조 대에 났고, 선조의 눈에 들어 관직 생활을 했었다. 허준이라는 서민 출신 의사의 탁월함을 알아보고 동의보감 저술에 핵심적 기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것도 선조였고, 이황, 이이, 성혼 등의 대유학자와 선조는 철학적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정치적 수완도 그렇고, 인재를 등용하는 능력도 그렇고. 선조의 군주로서의 능력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는 붕당 정치를 조정하며 명분과 실리를 둘 다 챙기는 데도 능했다. 정철과의 합작으로 이루어낸 기축옥사의 경우, 당 사건으로 4대 사화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정치적으로 숙청당했음에도 사건의 실질적 배후인 선조는 비판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필요에 따라 편을 바꿔 붙으며 피해자처럼 행세했다. 이 숙청 사건으로 선조의 입지는 더욱 강화된다.


 물론 이건 순전히 정략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당시 기축옥사에 연루된 사람은 억울한 사람들도 대다수였고, 선조가 벌인 대규모 숙청극은 신하들이 선조에게 복종하게는 만들었어도, 신하들이 선조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어쩌면 선조의 정치적 술수의 한계는 바로 여기. 거기에 기축옥사가 3년째 진행되던 와중에 터진 임진왜란은 이 역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방계 출신이라는 콤플렉스가 크게 작용한 것 같은데, 선조는 신하들을 잘 신임하지 않았고, 거의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의심과 질투심이 심했다. 자신의 왕 자리가 늘 위태롭다고 생각한 면도 있는 것 같고. 이런 성향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더욱 증폭된다.


 자, 그럼 임진왜란의 발발부터 보자. 뭐 선조라고 국방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다. 성을 쌓는 작업도 종종 있었고, 전쟁 준비가 너무 심하다고 상소까지 올라온 적이 있다. 하지만 국방에 그리 유능한 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비변사의 제언이기는 했지만 비변사는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맞붙을 생각을 벌인다. 물론 이순신 등의 반대로 수군 폐지론은 불발됐지만, 돌이켜보면 아찔한 순간이었다.


 전쟁이 막상 일어나자 육군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한다. 왜군이 북진하는 상황에서도 선조는 신립의 육군 주력부대가 왜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신립이 패배하자 상황은 시급해졌고, 결국 선조는 의주로의 피신을 결정한다.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권한을 위임한 뒤, 선조는 의주로의 길을 떠난다.


▲ 피란가는 선조의 어가 행렬.


 어쨌든 현실적인 선택이기는 했다. 일단 왕이 붙잡히면 전쟁은 끝인 거니까. 다만 의주로 피난한 후 한양에 남은 백성들이 궁궐을 태운 사건 등을 봤을 때는 백성에게 그리 성군은 아니었던 듯싶다. 이순신을 향한 견제나, 의병장들이 세력을 규합해 자신을 위협할 거란 의심도 끊지 못했다. 병사를 다루는 데도 그리 능숙하지 못했고.


 뭐 그 혼란의 와중에도 선조의 첫째, 둘째 아들인 임해군과 순화군은 각지에서 온갖 민폐는 다 끼치고 다녔다. 결국 함경도의 백성들이 임해군과 순화군을 직접 붙잡아 왜장 가토에게 바쳤을 정도. 광해군만큼은 백성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조의 눈에는 이마저 위협적으로 느껴졌는지, 이 세자 때문에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나야 할 상황이 오진 않을지 늘 불안해했다.


 전쟁이 끝나고,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을 얻는다. 스스로 방계 출신이라는 점에서 콤플렉스가 심했던 선조는 적자 영창대군이 왕위에 오르기를 내심 바랐는지도 모르겠지만, 영창대군이 장성하기 전 선조는 사망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다.


▲ 조선 선조가 묻힌 목릉.


 한평생 불안에 시달렸던, 유능할 수 있었던 왕 선조는 그렇게 1608년 오늘 생을 마감했다. 역사를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 선조는 대차게 까이는 분위기지만, 사실 나는 선조에게서 무언가 연민의 감정을 본다. 그의 정치적 면모가 불안이나 의심 없이 성장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누군가를 신뢰하고, 그 위에서 정치적 교분을 쌓는 정상적인 과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혈통으로 불안해야 하는 사회가 아닌, 능력으로 확신해야 하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16세에 왕위에 올라 영민한 정략적 판단을 능숙하게 해냈던 저 정치가가 방해요소 없이 더 성장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능력본위 사회는 생각보다 많은 성장의 기점을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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