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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읽다/[독서] 책장을 덮고

아직도, 아직도 10억년

Widerstand365 2015. 2. 1. 19:10

아직도, 아직도 10억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이르까지/보리스 스뚜르가츠끼 형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은 우리에게 꽤나 생소한 작품이다. 도스도예프스키나 톨스토이를 제외하고는 이름도 몇 들어보지 못한 러시아 소설이 주는 이질감을 이 책은 그대로 끌어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망설이지 않고 손에 쥐게 되는 것은 이 책이 지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품은 레닌그라드200년만에 찾아온 폭염 속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말랴도프는 최근 ‘M-캐비티라는 항성 역학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인데, 이상하게도 이 연구를 손에 잡으려고만 하면 전화가 울리고, 초인종이 울리고, 시키지도 않은 음식이 배달되면서 연구의 진전을 막는다. 그리고 연구를 방해받는 현상은 이웃 물리학자인 스네고보이, 동료인 비안가르텐, 자하르에게도 마찬가지로 벌어진다. 갑자기 여자들이 몰려든다던지, 자신의 연구를 포기하는 대가로 연구소 소장 직을 제안 받는다든지 하는.

그리고 그러던 중 비안가르텐에게는 빨간 머리의 남자가 찾아온다. 그 남자는 자신이 그의 연구를 방해한 주범이라고 밝힌다. 그는 비안가르텐에게 그의 연구가 어떤 4차원 문명에 의해 감시받아 왔으며, 연구가 진행되면 지구 문명이 4차원 문명을 위협할 세력으로 성장할 첫걸음이 되니 당장 연구를 폐기하라고 명령한다. 그 대가로 연구소 소장 직등 모든 속물적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으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최후 수단을 강구할 것임을 암시하며, 이런 감시를 받는 사람은 그를 제외하고도 동료 세 명이 더 있다고 말하고 떠난다.

어쩌면 황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설정이다. 어쨌든 ‘4차원 외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된 비인간적 힘, 절대적 힘 앞에 소설 속 인물들은 대응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소설 속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늘 닥치는 상황이다. 우리는 과학자도 아니고, 4차원 외계 문명이 우리를 찾아올 일도 없겠지만, 우리는 삶 속에서 많은 순간 거대한 힘, 비안간적 힘의 위협에 대응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는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소설 속 인물과 우리는 단 두 갈래만이 나 있는 길 위에 서게 된다. 순응하고 굴복하거나, 저항하고 싸우거나. 서로 다른 두 길로 뻗어나가는 그 갈림길 위에서 단 하나의 길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순응하고 굴복하는 것도 분명 하나의 길이다. 작품 속에서는 비안가르텐, 자하르, 주인공 말랴도프에 동양학자 글루호프까지 모두 순응의 길을 걷는다.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합리화로, 각자의 비겁함으로 각자는 각자의 굴복을 겪고야 만다. 이 작품 속에서 만나는 인물들 중 굴복을 선택한 인물의 수가 보여주듯이, 우리들 중 이 길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를 지키기 위해, 혹은 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너를 팬케이크처럼 납작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휘황찬란한 새 연구소의 소장직에 앉히거나 둘 중 하나야. 내 선배 과학자 두 명이 얻고 싶어 몸부림치다 떨어져나간 자리야. 그 연구소에서 나는 노벨상 감의 실험을 열 가지 쯤 할 거야. 알아들어? 나쁜 일이 아니라고. 그건 일종의 내 생득권같은 거야. 비안가르텐의 권리. 학문적 호기심에 대한 자유

 

“20세기는, 동지, 계산의 시대야. 감정은 없어 나한테 가장 소중한 건 나와 내 가족과 친구야. 나머지는 내 책임의 한계 밖이야. 투쟁? 물론. 나 자신과 내 가족, 내 친구를 위해서. 하지만 인류를 위해서? 은하계의 위신을 위해서? 모조리 얼어 죽을 헛소리야!”

 

나한테는 토론할 것이 없어.” 나는 말했다. “내겐 보브까가 있을 뿐이야.”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선택했고, 그 대가로 세상의 미래를 좌우할 수도 있는 연구를 포기한다. 말랴도프는 세상을 등지고 자신의 아들인 보브까를 선택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순응을 선택한 이들에게 한가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진정으로 를 지켰는가? 그들이 버린 것은 진정 세상의 미래였을까?

단선적으로는 그렇다. 그들은 나와 내 가족과 친구를 지켰고, ‘인류은하계의 위신은 내팽개친다. 하지만 그 이면에 들어가면 그들이 진정 버린 것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비안가르텐과 자하르를 다시는 못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만나는 것이 너무도 당황스럽고, 또 서로의 꼴만 봐도 넌덜머리가 날 것이다. 그리고 당황스러움과 넌덜머리를 잊기 위해 보드까와 포트와인을 사야 할 것이다. 물론 그래도 내겐 이르까가 있으며 보브까는 무사히 자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절대로 내가 바라던 형의 청년으로 자라지 못할 것이다. 내겐 이미 그 아이가 그래 주길 바랄 권리가 없어졌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절대로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중대한 발견을 할 수도 있었지만 너를 위해서……한 아빠일 것이니까. 내 머리통 속에 그 빌어먹을 M-캐비티가 떠오른 순간을 나는 영원히 저주하리라.

 

그렇다. 그들이 버린 것은 그들 자신이었다. 그들이 버린 것은,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바로 그 대상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랴도프가 한탄처럼 읊조린 저 대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말랴도프는 아들 보브까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 아이가 자신이 바라던 형의 청년으로 자라 주길 바랄 권리는 이미 그에게 없음을 인지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랴도프는, 순응하는 자들은 그 길을 간다. “지금은 저들이 너무 강력해 순응하지만 살아남아 다음번에는 꼭 저항하리라.”라는 스스로도 믿지 못할 약속만을 남긴 채로.

스스로도 믿지 못할 약속만을 남기고 후회와 함께 자신을 등지고 싶지 않다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길 한 갈래가 남아 있다. 저항하는 길. 우리의 양심을 우리 스스로 지켜내는 길이 우리 앞에는 펼쳐져 있다.

어쩌면 이 길을 간다는 것은 바보같은 일일 지도 모른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 지도 보장할 수 없는데, 심지어는 이 길의 끝에 다다른다는 보장조차 없다. 아니, 오히려 다다르지 못할 거라는 보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굴곡지고 고난한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들이 이 길을 걷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에게 이 소설은 그들이 길 위를 걷는 것은 길 끝이 아니라 길 위자체에 목적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순응과 굴복의 길 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자신, 저항의 길 위에는 있다고, 저항의 길 위를 한 발짝이라도 내딛은 이에게는 있다고 이 작품은 말해주고 있다.

작품 속에서 결국 저항을 선택하게 되는 단 한 사람은 베체로프스끼이다. 그는 위협을 받은 네 명의 과학자에 포함된 인물이 아니다. 그는 그저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입장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도망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나는 아직 연구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았다고, 기뻐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겁함을 선택하진 못했다.

절망에 빠진 말랴도프가 너는 결코 길 끝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라 말할 때, 그는 이렇게 대답 아닌 대답을 한다.

 

차분하고 불그스름한, 확신. 모든 것은 순리되로 되어야만 한다는, 그리고 그 밖에는 아무 다른 해결책도 없다는 확신. 그는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계속 말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서둘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의 세월이 있다고 그가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10억 년 동안 많은 일들이,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4차원 외계 문명의 이형(異形)으로 다가오는 비인간적 힘의 유형에는 여럿이 있을 수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조상에게는 일제가 그랬고, 독일인들에게는 나치가 그랬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이고 굵직한 힘이 아니고서라도, 우리 곁에 이러한 들은 산재해 있다. 작중에서 베체로프스끼가 지적하듯이, ‘그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 우리가 당장 당면하고 있는 사회의 현실일 수도 있고, 구조적 부조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힘에 대항한다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스스로만 희생시키는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불의에 대항하라는 명징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가 당장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더라도, 우리 앞에는 10억 년의 세월이 있다고.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10억년 동안 많은 일들이,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우리는 그 ‘10억 년의 길 위에 서 있는 존재들이다. 일제에 항거한 조상들이 없었더라면, 불의에 맞서 싸운 선배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곳에 이 모습으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10억년의 길 위에서 다시 한 번 갈린 길. 우리는 바로 그 갈림길 위에 서 있다. 굴복을 위한 한 발자국이냐, 저항을 위한 한 발자국이냐의 선택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물려받은 10억년의 길목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보브까들에게 어떤 길을 물려줄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떤 10억년의 길을 만들 수 있을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바로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 내딛는 한 발자국에게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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