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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더슈탄트, 세상을 읽다.

비더슈탄트, <죽음에 관하여>에 관하여 본문

그들을 읽다/[독서] 책장을 덮고

비더슈탄트, <죽음에 관하여>에 관하여

Widerstand365 2013. 2. 24. 12:45


 대한민국 도서시장은 몰락했다. 누구나 아는 얘기다. 훌륭한 인문한 서적이 500부도 못 팔리는 경우가 많다. 소설책? 초판 나가기도 힘들다. 뭐 20대는 출판시장에선 아예 ‘없는 계층’이고, 독서문화따위는 사라지고 말았다. ‘도서관’ ‘독서실’하면 뭐가 떠오르는 지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다. 분명 이름은 도서관이고 독서실인데 우린 여기서 뭐, 책을 펴기는 편다. 그게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같은 교양서나 <파우스트> 같은 고전이 아니라 <해커스토익>이라는게 문제지.

 진짜 팔려야 될 책은 안 팔리고 ‘사회의 잘못? 웃기지 마. 닥치고 반성이나 해’하며 죄책감이나 파는 자기계발서나 팔리는 사회가 우리 사회다. 그런데 2010년 이런 출판시장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400쪽이 넘는 미국 최고의 철학자의 인문학 서적이 100만부가 넘게 팔린 것이다. 그렇다. <정의란 무엇인가>다. 이 책, 100만명이 읽을 정도로 쉬운 책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정의란 무엇인가>가 많이 팔린 것이냐. ‘정의’가 결핍된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2012년 말과 2013년 초, 우리 사회에 히트를 친 (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솔직히 이 말을 확신하진 못한다. 주변에서 이 책들을 읽거나 산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다만 분명 이 책 중 하나는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랐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 연재 당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연재가 끝나기도 전에 단행본을 출간했다.) 두 권의 책이 있다. 한 권은 요즘 읽고 있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다. 다른 한 권은 웹툰으로 연재되었던 <죽음에 관하여>다. 아주 화제가 되고 입에 오르내리진 못했지만 나는 분명 이 두 권을 관통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 오늘의 화제는 ‘죽음’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사회의 부정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죽음에 관하여>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모두 죽고 싶은 것인가. 분명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람들은 처절하게 살아남고 싶은 것이다. 죽음의 논함을 통해 삶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정의’에서 ‘죽음’으로 연결되는 2010년에서 2013년, 우리 사회는 ‘사회’에서 ‘그 속의 개인’으로 눈을 돌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현상에 대한 옳고 그름의 문제는 판단하지 않겠다. 결국 사회를 바꾸는 것은 개인이고, 개인을 바꾸는 것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것과 개인의 변화는 어느 하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둘이 같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 뿐이지.


 


앞이 너무 길었다. 이제 잊어왔던 제목을 보시라. <죽음에 관하여에 관하여>다. 나는 여기서 개인과 사회를 논하려 하는 것도, 의문과 반론 투성이에다가 아직 다 읽지도 못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에 관하여>다.

 <죽음에 관하여>를 들어본 적 있는가. 당신이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꽤나 있다. 하지만 이 정도만은 알아두자. <죽음에 관하여>는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은 네이버의 웹툰이다. 그리고 설령 당신이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이 작품은 네이버 웹툰 안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작품은 완결을 맞았다.


 그런데 이 작품, 하나하나 의미를 파악해 보자. 아, 주제 너무 단순하다. “거짓말 하지 마라” “약속을 지켜라”하는 얘기를 정언명령이니 가언명령이니 하며 복잡하게 말하는 칸트에게 헤겔은 말한다. “저친구 뭐 저렇게 다 아는 얘기를 하고 있어? 유아적이야.” 내가 이 작품의 주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느끼는 감정과 똑같다. 돌리고 돌리고 돌려서 말하지만 결론은 ‘친구는 소중하다’라거나 ‘가족은 소중하다’ ‘자살하지 마라’같은 이야기 하고 있다. 다 옳은 이야기지만 이렇게 어렵게 말 안해도 우린 다 안다. 물론 중요한 얘기도 있다. ‘삶 속에서 죽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 그런데 이런 얘기는 또 너무 직접적이다. 작품 속에서 유추하고 사고하고 느껴서 알아야 할 주제를 그냥 말해버린다. 너무 밋밋하다. ‘표면적 이야기밖에는 없다’는 혹자의 비판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도 난 이 작품의 애독자다. 난 네이버 웹툰의 초기부터 웹툰이란 걸 봐왔다. 그런데 내가 (그리 길지도 않지만) 생애 처음으로 사본 만화책이란 것이 <죽음에 관하여> 단행본이었다. 왜 그럴까. 나는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는 어쩌면 ‘뻔한’ 이야기도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다 아는 얘기라고? 맞는 비판이지만 치명적 약점이 있다. 다 아는 얘기가 왜 필요없는 이야기인가? 다 아는 얘기는 그만큼 그 속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끊임없이 되새기지 않으면 그 속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놓친다면? 거기서 잘못된 선택과 실수가 시작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를 들어보자. ‘친구가 소중하다.’ 그래, 다들 하는 얘기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 얘기 안하는 사람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깨닫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아니라면 왜 인류는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 똑같은 말만 하고 있을 꺼냐는 얘기다.

 고전(古典)을 읽어본 적 있는가? 내가 묻고도 어이없다. 안 읽어본 사람 어디 있겠냐. 뭐 다들 한 권쯤은 읽어 봤겠지. 그런데 난 다른걸 묻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읽어본 적 있냐고 묻고 있다. 그 고전의 글자를 읽은 게 아니라 뜻을 읽은 적 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뭐, 그런 적 있다고 치고 진행해 보자. (불행하게도 나는 이 ‘가정’ 속에 포함되는 사람보다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꺼라는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이 이분법을 사용하련다. 아직 ‘책 읽는 사회’를 위한 작은 희망쯤은 갖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그 작품에서 말하는 ‘뜻’은 무엇이던가. 결론은 초월적 가치다. 사랑. 정의. 희망. 뭐 이런 것들 아니던가. ‘뻔’하지 않은가. 다들 하고 있는 얘기를 어떻게하면 다시 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가끔.

 자 그럼 여기서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 분명 생길 것이다. “고전의 뛰어난 내면 묘사와 같은 기법들은 괜히 있냐. 주제가 같아도 내용은 다르다. <죽음에 관하여>의 내용은 표면적이고 단편적인 파편과 같다.”라며. 그런데 바로 위 문단을 봐라. 난 여러분에게 <죽음에 관하여>의 내용 전달 기법이나 세세한 내면 묘사 따위가 훌륭하다고 말한 적 없다. 그것들은 ‘글자’에 불과하다. 다 걷어치우고 ‘핵심’만 바라보면 달라질 것은 없다. <죽음의 관하여>의 3화나 <파우스트>나 사랑을 이야기한 점에 대해선 다를 게 없고, <죽음의 관하여>의 자살 관련 작품이나 다른 고전 작품의 자살 관련 작품이나 순전히 주제만 놓고 보면 달라질 게 없다는 거다.

 그럼 내가 <죽음의 관하여>가 <파우스트>보다 낫다고 생각하냐, 전혀 아니다. 괴테가 60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 <파우스트>와 28회짜리 웹툰 <죽음의 관하여>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그건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난 분명 위에서 주제의 면에선 달라질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럼 왜 <파우스트>가 더 명작이라는 것이냐. 그건 ‘내용’의 측면 때문이다. 한 작품에는 주제만이 중요한가? 절대 아니다. 그럴꺼면 “자살하지 말라” 한 줄 써서 책으로 내는게 가장 위대한 책일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독자가 얼마나 그 주제를 느끼고,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냐와 직결되는 부분이다. 즉, 주제를 파악했다는 전제 하에 그 작품의 내용은 독자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거다.

 <죽음의 관하여>의 문제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내용이 너무 단촐하다. <파우스트>의 사랑 이야기는 수백 쪽에 달하는 내용 전체다. 하지만 <죽음의 관하여>의 사랑 이야기는 단 두 편의 짧은 만화로 이루어져 있다. 상식적으로, 어떤 작품을 읽을 때 당신은 사랑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겠는가? 단연 전자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쉽게 풀어낸다. 너무 쉽게 풀어내서 독자로 하여금 그리 중요한 것 같지도 않게 넘어가버리도록 만든다.

 그런데 묻자. 그렇다고 <죽음의 관하여>가 저질 3류 작품인가? 절대 아니다. 두 명의 신인 작가가 이렇게 짧은 내용에 이정도로 한 주제에 대해 잘 풀어내기란 쉬운 일은 전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내 느낌은 이렇다. 작가가 독자에게 하나의 주제를 얼마나 잘 설명해내고 묘사해내서 각인시키냐는 물론 작가의 능력이 1차적으로 중요하다. 그렇지만 또 한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독자의 능력 아닐까? 여기서 나는 이 작품의 진의(眞意)를 중요히 생각해보지 않고 넘어가버린 독자의 능력을 직접적으로 탓할 수는 없다. 그건 작가의 능력 부족일 가능성이 미미하게나마 더 크니까. 하지만 작가는 분명 최선을 다해 최고에 가까운 결과를 내놓았고, 독자의 능력 부족도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라고 나는 본다.


 자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서론에서 우리는 ‘사회’에 관심있던 이들이 ‘개인’으로 관심을 돌렸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그래, 죽음은 개인의 문제다. 내가 ‘죽음 신드롬’을 말할 떄 이들이 실은 죽음을 이해하며 처절하게 삶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라는 점도 이미 이야기했다. 이 ‘삶’도 개인의 문제다. <죽음에 관하여>라는 작품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걸 안겨주고 떠나고 있다. <죽음에 관하여>를 읽어본 이는 알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의 기본은 죽음이다. 하지만 그 위에는 삶과 희망과 꿈이 있고, 그보다 더 위에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사회가 있다.

 생각해내기 어려운가? 예를 들어보자. 우선 모든 회차는 다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것도 많지만) 5화를 보라. 5화는 죽음을 통해 삶과 꿈,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음은 19화 등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 (막상 예를 들자니 딱 잡히는게 없다. 예시가 없어서가 아니라 전부 다 예시가 될 수 있어서다. 원한다면 1화부터 28화까지 모두 의미를 분석해줄 수도 있다.)

 그렇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열광과 <죽음에 관하여>에 대한 열광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사회를 직접 말했다면, <죽음에 관하여>는 개인을 통해 사회를 말한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난해한 이야기를 난해하게 풀어낸 책이 있다면, <죽음에 관하여>처럼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풀어내는 책도 필요한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는 결론적으로 죽음을 통해 삶을, 삶을 통해 사회를 논하고 있는 작품이며,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도 당연하게 써내려가고 있는 책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써 나가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이 작가의 문제일지, 나와 당신같은 독자의 문제일지는 개인이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    비더슈탄트, 한 발자국 더.

 사실은 중간에 작가에 대한 언급을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글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따로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죽음에 관하여>의 스토리 작가는 ‘시니’, 그림 작가는 ‘혀노’다. 웹툰으로 올라갈 때마다 같이 올라가는 BGM을 만드는 ‘squar’도 있다. 스마트폰에선 들리지 않는 이 음악을 들으려 항상 인터넷으로 보는 정도지만, 작품 자체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니 일단 차치하도록 한다.

 작가인 ‘시니’와 ‘혀노’는 신인(新人)작가다. 트위터로 아주 가끔 멘션을 주고받거나 트윗을 보면서 느끼는 그들의 캐릭터는 대충 이렇다. 성격 좋고 재밌고, 개드립 좋아하고 친구인 작가 둘끼리 싸우는 척, 놀리는 척 하지만 서로 뗼 수 없는 사이인, 투표는 하고 꿈은 중시하지만 정치에 대해 잘 알거나 관심이 있지 않고, 투표독려도 딱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20대. 물론 저 중에 대부분이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난 저 사람들을 한 번도 본적 없고, 오직 트위터와 만화, 거기에 내 상상을 보태 만든 인간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도 저 중 몇몇은 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저렇게 가정하고 말해 보자.

 그리고 다시 한번 만화를 보자. 놀랍다. 이런 ‘전형적인’ 20대에게 이런 작품이 나왔다. 본문에서 우리는   <파우스트>와 <죽음에 관하여>를 비교해본 적이 있다. <파우스트>의 저자 괴테는 평생을 사유와 철학적 생각 속에서 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의 시니와 혀노는 웃고 드립이나 치며 이런 작품을탄생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파우스트>보다 이 작품이 위대하다거나, 괴테보다 이 작가들이 더 위대하다거나, 작가들이 전혀 진지한 모습 없이 작업을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물론 ‘웃고 드립이나 친다’는 것도 위에서 말한 내 가정일 뿐이다. 틀릴 가능성이 더 많은.)

 난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대한민국 20대의 전형이 만들어낸 전혀 ‘전형’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들. 나는 여기서 작가인 시니와 혀노가 앞으로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내리라 확신할 수 있고, 더 크게는 눈 앞만 바라보고 달리던 대한민국, 그리고 대한민국 20대에게 하나의 횃불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Comments
  • 프로필사진 Be 2013.02.24 13:08 <죽음에 관하여>가 내겐 더 어려웠다는 거. 너무 단순해서 어려웠다고 해야 하나? 아마도 웹툰이란 장르에 대한 부족한 마음 때문이기가 더 맞지ㅇ싶ㅇ거든. 다 보고 읽고 만난 생각은 이십대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의식만큼의 표현이구나. 죽음의 이쪽 저쪽의 경계를 죽음이란 시선으로 보았구나*~
    비더슈탄트의 글을 읽으니 내가 여기는 죽음의 의미가 확연하게 파고 든다고 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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