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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 번째 위기

소멸과 변화의 갈림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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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 기독교 탈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주 영국 <가디언> 지는 세인트 메리 대학교의 연구 결과를 인용, 영국 내 무교도가 기독교도의 수를 앞질렀다고 전했다.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였던 영국에서, 종교를 버리는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에서 집계된 무교 인구는 전체의 48.5%였다.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를 모두 합한 기독교 인구는 43.8%였다. 근소한 차이로 무교 인구가 앞선 것이다.


 특히 무교 비율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2011년에 집계된 무교 비율을 보면, 25% 정도에 그친다. 몇 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성장한 것이다. 기독교도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특히 성공회의 경우 신도 유출이 심각한 수준이어서, 새로 1명의 신도가 유입될 때마다 12명의 신도 유출이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기독교의 몰락은 최근에 와서야 벌어진 일은 아니다.




 기독교의 첫 번째 위기는 18세기 후반에 있었다.


 18세기는 흔히 ‘계몽의 세기’라고 불리지만, 사실 18세기 전반은 기독교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서 그랬다.


 가톨릭의 사례를 보자. 전체 인구 대비 성직자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헝가리에선 수도원의 수가 50년 만에 거의 두 배로 성장했고, 폴란드에선 3분의 2가 늘었다. 1750년대에 프랑스에만 8천 개가 넘는 수도원이 있었다.


 거대한 순례객의 행렬도 줄지 않았다. 1600년대에 매년 평균 12만 명 정도가 찾던 오스트리아의 성소 ‘마리아첼’을, 1753년에는 37만 명이 찾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언장에, 수도원에의 기부와 본인을 위한 미사 봉헌을 부탁했다. 출판되는 도서도 대부분 종교서적이었다.


 신교도 다를 바 없었다. 종교개혁의 열정이 쇠퇴하며 신도들의 열성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독일에서는 ‘경건주의(Pietism)’가, 영국에서는 ‘감리교(Methodism)’가 성장하며 신교를 다시 한 번 부흥시켰다.


 특히 영국 감리교의 역할은 대단했다. 평민들을 대상으로 종교 운동을 펼친 감리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10만 명 넘는 추종자를 끌어들였다. 경건, 노동, 자기수양 등 신교의 교리는 대중에게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문제는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나타났다. 종교적 회의주의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예수회의 몰락’은 주목할 만하다. 가톨릭 종교개혁을 주도하며 종교적 경건성의 최전방에 섰던 예수회는, 가장 강력한 가톨릭 국가라는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각국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종교가 관장하던 수많은 부분을 이제 국가가 관리하기 시작했다. 문화적으로도 바로크 양식의 쇠퇴가 시작됐다. 종교적 강력함을 표현하던 바로크 양식은, 장식적이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대체되었다. 교육도 이젠 교회가 아니라 학교의 몫이 되었다. 유언장에서도 이젠 종교가 아니라, 유산 상속권 문제가 가장 중요해진다. 거대한 계몽주의의 물결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 그것은 기독교가 맞은 첫 번째 위기였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기독교의 몰락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여전히 민중들은 기독교적 문화를 내면까지 흡수하고 있었으며, 시민 사회에서는 오히려 종교적 신심이 강화되고 있었다. 특히 종교가 국가와 분리되면서 각국이 신앙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 중요했다.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더 활발해졌다.


 여전히 신학교의 영향력은 강력했고, 작은 마을에서 성직자가 가진 영향력은 거대했다. 기독교의 문화적 전통은 무너지지 않았고ㅡ 오히려 확장되고 있었다. 무신론과 이신론이 확대되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주 습관처럼 교회에 나갔다.


 기독교의 국가적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기독교도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기독교도의 수가 직접적으로 줄어든 것은 양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인류 사상 가장 끔찍한 재앙이었다는 세계대전은 말 그대로의 전면전이었다. 온 국민이 하나 빠짐없이 전쟁에 참여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갔고, 그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후방에서 전쟁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병사만 1천만에 달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병사는 2천 5백만에 달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선 민간인 피해도 극심해서, 5천만 명 가까운 민간인이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종교적 회의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사망한 사람들은 제대로 미사도 받지 못하고 숨졌다. 전쟁터에 죽음을 위로할 수 있는 신부가 얼마나 있었겠는가. 교리에 따르면, 그들은 지옥에 가야 했다. 최소한 연옥에 가야 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다 전쟁터에서 학살당한 군인들이 지옥에 가야 한다니.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다. 대체 하나님이 있다면 우리는 왜 이런 끔찍한 고통을 겪고 살아가는가. 그 고통 속에서 죽어간 이들을, 성사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원한 불구덩이에 넣는 신은 대체 어떤 신인가. 그는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는가. 사회 전체에 회의주의가 짙게 배어들었다.


 유럽에서 기독교도의 수가 직접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때로 완전히 종교를 버렸고, 때로는 새로운 종교를 찾아갔다. 유럽에서 불교도가 생겨났고, 신흥 종교가 힘을 얻어갔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힘은 약화됐다. 유럽의 탈기독교화가 가속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두 번째 위기는 양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기독교는 세 번째 위기를 맞고 있다.


 세 번째 위기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리버럴의 확장’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권위를 부정하고, 최소한의 억압만을 원하고, 구시대적 윤리관념을 떨쳐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움을 원하는 세대가 등장했다.


 그동안 종교가 세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종교는 이제까지, 새로운 신자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다. 기독교도인 부모를 따라 자식 세대도 자연스럽게 예배에 참석했다. 기독교는 세습됐다. 그 세습만으로도 크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세인트 메리 대학교의 연구 결과를 다시 끌어와 보자. 부모가 성공회 교도일 경우, 자녀가 종교를 이어받은 경우는 52%에 불과했다. 41%는 무교를 택했다. 가톨릭 신도의 자녀 역시 38%가 무교를 택했다.


 새로 등장하는 세대는 종교의 권위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습득한 윤리관에 의해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한다. 만약 종교가 자신의 윤리관을 고치라고 강요한다면, 그들은 윤리관이 아니라 종교를 버린다. 종교가 새로운 세대의 사상을 따라가지 못하는데, 종교의 영향력마저 줄어들다 보니 사람들이 얼마든지 종교를 떠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동성 결혼 허용 논란, 낙태 허용 논란, 이혼 허용 논란, 안락사 허용 논란에서 종교가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됐다. 젊은 세대는 이런 윤리적 잣대를 원하지 않는데, 기독교 입장에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문제가 이것들이다. 젊은 세대와 교회 사이의 결별에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이유다.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원하지 않는 자유주의의 확산이, 기독교의 세 번째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기독교는 그렇게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마음에 위안을 주기도 하고,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윤리 강령을 제시해 사회가 유지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사람들이라고 종교의 그런 역할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종교는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기독교의 근거지였던 유럽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사람들은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 주는지 알면서도, 자유주의를 택하고 있다. 영국에서 기독교 인구를 무교 인구가 앞질렀다는 것은 어떻게 봐도 놀라운 신호다.


 기독교의 보수성이 젊은 세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미래가 점점 더 어두워질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시간이 갈수록 기독교도는 줄어들 것이며, 이 세 번째 위기가 끝날 때 즈음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도가 남아있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기독교에게도,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멸과 변화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시간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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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과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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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사회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지표가 무엇일까? 역사라는 것이 어차피 사후 평가기 때문에, 사실 모든 숫자는 어떻게 끼워 맞추기만 하면 해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언제나 인구론 쪽에서 나오는 것 같다. 왜, 소련의 멸망을 예견한 유일한 사회학자는 ‘에마뉘엘 토드’라는 인구학자였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사실, 중세에서 근대까지 유럽 인구는 한참동안 거의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자녀는 두 명 남짓이었다. 평균으로 따지면 2.1명에서 2.2명 정도 됐는데, 이 0.1~0.2 정도 되는 근소한 차이는 몇 번쯤 유럽 대륙을 쓸어나갔던 전염병에 의해서 상쇄되었다.


 사실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지 못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만한 충분한 식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종 수십 년 동안 한참이나 인구가 증가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러고 나면 꼭 뒤에 흉작이 들어 자연스럽게 인구가 조절되곤 했다. 우리는 ‘인구 조절’이라는 간단한 말을 썼지만, 따지고 보면 대규모 아사가 발생했다는 의미다.




 결국 유럽 인구의 그래프는 상승과 하강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평시에는 인구가 서서히 증가하다가, 전염병이나 기근이 닥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이다.


 사실 전쟁은 인구 감소에 직접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아직 전면전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이라, 전쟁 중에 칼에 찔려 죽는 사람의 숫자가 유럽 인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는 힘들었다. 다만 전쟁 중에는 전염병이 훨씬 잘 퍼지고, 군대 유지로 인해 세금을 많이 걷어가거나 농지가 황폐화되면서 기근이 발생하기는 했다.


 그렇게 보면, 굶주림은 인간에게 언제나 일상이었다.


 이런 자연스러운 균형은 18세기까지 별다른 무리 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18세기쯤 되면 이 인구 조절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유럽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데도, 사람들이 더 이상 죽어나가지 않는 것이다. 인구의 증가세는 오히려 가속화된다.


 의료나 위생에서의 발전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농경에서의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이 시기 농업에서는 두 가지 변화가 벌어졌다.


 첫째, 신대륙에서 감자와 옥수수가 들어왔다. 흔히 ‘구황작물’이라고 하는 작물로, 이들은 척박한 토양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잘 자라는 식물들이다. 흉작이 들었을 때에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기를 수 있다.


 특히 옥수수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밀은 한 알을 심었을 때 20-30알 정도를 수확할 수 있는 반면, 옥수수는 200-300알 정도의 수확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빵을 먹지 못해 죽을 일은 없었다. 옥수수를 먹으면 되니까.




 둘째, 농업 기술에서 혁신이 일어났다. 흔히 ‘농업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중세 사람들은 ‘삼포제’라는 농업 기술을 활용했다. 유럽이 흔히 먹는 ‘밀’이라는 작물은 상당히 많은 지력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다. 요즘이야 화학비료도 있고 농약도 있지만, 그 때에는 그런 게 없었으니 무엇보다 ‘지력의 유지’가 밀 농사의 핵심이었다.


 지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가장 좋은 방법은 비료를 쓰는 것이다. 말했듯 당시에는 화학 비료가 없었으니, 비료는 곧 동물의 배설물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러려면 동물을 키워야 하고, 그러려면 또 많은 양의 목초지가 필요했다. 비료를 만들자고 농경지를 목초지로 바꿀 수는 없으니, 사람들은 그냥 농사를 짓지 않고 한참 동안 땅을 그냥 놓아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결국 이들은 지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땅을 ‘봄에 농사짓는 땅’ ‘가을에 농사짓는 땅’ ‘휴경지’로 나누어 번갈아가며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18세기쯤 오면 이 삼포제에 변화가 생긴다. 삼포제 자체가 훨씬 더 정교하게 진화한 것은 물론이고, 동물을 먹이면서도 지력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클로버’나 ‘순무’ 같은 작물을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휴경지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휴경지에는 클로버나 순무를 심고 동물들을 사육하면 되니까.


 농업의 생산량이 그렇게 획기적으로 뛰어올랐고, 사람들은 더 이상 아사할 필요가 없었다. 인류를 늘 괴롭혀 왔던 아사의 굴레에서 일대 탈출의 기운이 보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류가 완전히 아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농업 혁명과 구황작물 도입에도 한계는 있었으니까. 인구가 더더욱 많이 증가하면, 어쨌든 인류는 다시 또 한 번 아사의 물결에 휩쓸려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사건이 더 벌어진다.


 상상해 보자. 원래 하루 종일 일해서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벌던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제 생산성이 늘어나면서, 하루 종일 일하면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여유 있게 벌 수 있다. 약간의 비축분 정도야 저장해 두겠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남으면 어떻게 될까. 시장에 가져다 팔면 된다.


 당시 유럽은 어느 정도 시장 경제가 발달되어 있던 상태였다. 최소한 농민들이 나가서 밀을 팔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이들은 나가서 밀을 팔았고, 대가로 귀금속을 받았다. 주로 은화였다. 이 은화를 쌓아두지만은 않았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사들였다.


 이맘때쯤 중세 유럽의 서민 가정에는 다양한 가구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달력이나 거울과 같은 ‘사치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윤택해졌다.


 이걸로 끝일까? 아니다. 시장경제의 맛을 본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기 시작한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이들은, 노동 시간을 늘리기 시작한다.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노동 시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꼭 농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결국 이런 추세는 도시에까지 확장되고, 농업 노동자를 포함한 유럽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시장에 팔기 위한 물건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이걸 ‘근면 혁명 (Industrious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면 유럽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부의 양이 늘어난다. 유럽 사회는 농업 혁명에 이은 또 한 번의 혁명을 겪었다. 이제, 유럽이 아사 없이 품을 수 있는 인구의 숫자는 조금 더 늘어났다.




 하지만 근면 혁명의 영향력 역시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노동 시간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는 거니까. 이 사회가 가질 수 있는 부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고, 인구가 더 늘어난다면 다시 인류는 아사의 굴레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사건이 벌어진다.


 우선 근면 혁명이 발생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잉글랜드에서 농업 인구 비중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놀라운 수준이었다. 사람들의 절반이 농사를 짓지 않았음에도 먹고 살 수 있었다. 도시에는 일자리가 있었고, 그 일자리에서 돈을 벌면 식량은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임금도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


 수많은 노동력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 도시 중 일부 지역에는 이미 선진적인 금융 체제가 자리잡고 있었고, 자본력을 대줄 수 있는 은행이 발달해 있었다. 교역로도 대단히 발전한 수준이라, 운송료도 많이 받지 않고 농촌의 식량을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었다.


 핵심이 된 지역은 잉글랜드, 특히 런던이었다. 런던은 이 모든 조건을 한 몸에 가지고 있던 땅이었다. 토지도, 노동도, 자본도 싼 값에 구할 수 있었던 땅. 주변에 석탄 광산이 많아 동력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충분히 실험을 감행할 수 있었다. 실패해도 얻는 패널티가 적었으므로.


 그리고 한 차례의 실험이 있었고, 그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산업혁명이었다.


 ‘산업 혁명 (Industrial Revolution)’은 산업의 모양새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기계의 발명과 특허의 발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기계는 운영비가 저렴했을 뿐 아니라, 때때로 물건의 품질도 혁신적으로 개선시켰다. 기계의 등장은 사소한 원가의 차이나 운송비의 차이 정도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혁신이었다.




 이제 생산성은, 이전 두 차례의 혁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뛰어올랐다. 인류는 아사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산업혁명의 본질은 생산성의 증가였다. 농업 혁명이나 근면 혁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효율성이 이전의 두 혁명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을 뿐이었다.


 산업혁명 이전과 현대에서 종종 유사성을 발견하곤 한다. 혁명, 이제는 아사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하지만 인구가 늘어날수록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불안감의 엄습.


 200년 전의 인류는 산업혁명으로 그것을 이겨냈다. 그 혁명의 힘으로 200년 넘는 동안의 인류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이제는, 그 동력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자리의 끝없는 감소, 전 인류적으로 나타나는 서로에 대한 증오, 극우의 득세, 기계로부터의 위협, 철학의 실종. 21세기가 문을 연 지 20년도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세기 말에 서 있는 기분이다.


 200년 전 이맘때에는 산업혁명이 벌어졌다.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총동원한 혁명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혁명의 가능성이 있는가. 산업혁명과 같은 거대한 자원 혁명은 불가능하다. 농업에서의 혁신도 크게 벌어질 수 없고, 더 이상의 근면 혁명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런 것들이 인류에 거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는 이미 지나버렸다. 또한 우리는 지구 위에 놓인 자원에 대해서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으며, 토지도 자본도 노동도 한계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어쩌면 이제 다시,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인류 안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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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신뢰,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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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르네상스 이후로 시작된 근대는 대부분 ‘합리의 시대’나 ‘이성의 시대’로 표현된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막상 실상을 들여다보면 별로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어제는 사전에서 ‘defenestration’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이 길고 복잡해 보이는 단어는 ‘(사람·사물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기’라는 의미다.


 문득 예전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어렸을 때 영어 학원에 다녔었는데, 2층에 있는 강의실에 원어민 선생님 한 분이 한글로 이런 문구를 붙였었다.


 “나는 나쁜 아이를 먹어요.”


 나쁜 학생들은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겠다는 (...) 농담 섞인 말이었다. 그게 왜 지금까지 기억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기억 덕분에 그냥 넘겨버릴 수 있는 단어 하나에 대해 공부를 좀 해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1618년 보헤미아 땅에서 발생했다. 종교개혁이 확대되고 유럽이 근대를 향한 걸음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이다.


 당시 유럽은 수많은 갈등 요인을 갖고 있었지만, 그중 가장 거대했던 것은 신교과 구교 사이의 갈등이었다. 특히 보헤미아처럼 한 국가 내에 신교과 구교의 세력이 비슷한 경우에 큰 문제가 되었다.


 보헤미아에서는 1608년 ‘복음 연방(Evangelical Union)’이라는 신교 영주 동맹이 구성되었고, 이듬해에는 구교 영주들이 이에 대항해 ‘가톨릭 동맹(Catholic League)’을 결성했다. 상황이 이렇게 위험하다 보니, 이제까지의 보헤미아를 다스리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이 지역에서의 광범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황제가 죽고 차기 황제를 뽑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였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귀족들이 선거로 뽑았는데,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였던 ‘페르디난트’라는 인물은 가톨릭 광신도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결국 제국에게 위협을 느낀 신교도 귀족들이, 프라하에 있는 보헤미아 왕궁에 침입했다. 이 왕궁에서는 황제가 파견한 지사 두 명과 비서 한 명이 있었는데, 귀족들은 이 세 사람을 잡아다가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Defenestration! 세 사람은 10m 높이에서 창밖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떨어진 세 사람은 죽기는커녕 별다른 부상도 입지 않고 도망쳤다. 구교 측은 이것이 천사들의 도움이라고 주장했고, 신교 측은 비료로 쓰려고 쌓아 놨던 동물 배설물 더미에 떨어졌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 전 유럽이 뒤숭숭해졌다. 천사의 도움인가, 아니면 배설물의 도움인가! 이것을 두고 보헤미아 내부에서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 페르디난트는 예상대로 제위에 올랐고, 그는 이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보헤미아 신교 군대는 황제에게 저항했지만 힘에서 밀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덴마크 측에서 이들을 지원했고, 스웨덴에 이어 프랑스까지 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30년 전쟁이라는, 유럽 근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 하나가 발발하고 말았다.


 이 전쟁의 핵심 전쟁터였던 독일 지역의 피해는 그야말로 극심했다. 수많은 마을이 폐허가 되었고, 통상 이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굶주림으로 독일 인구의 3분의 1에서 3분의 2가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물론 수많은 이유들이 기저에 깔려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이 엄청난 학살전은 천사냐 배설물이냐의 논쟁에서부터 촉발된 것이다.





 다른 재밌는 사례 하나가 마녀사냥이다. 흔히 마녀사냥을 중세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마녀사냥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광범위한 근대 현상이다. 마녀사냥의 ‘전성기’는 1570년-1630년이라는 근대 초기였다.


 마녀사냥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다. 이 책의 1부는 마녀에 대한 논증, 2부는 마녀의 사례, 3부는 마녀에 대한 기소 방법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참 가관이다.


 이런저런 내용이 들어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대체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마녀라는 존재가 있도록 허락하신 것일까?” 이들은 악이 존재함으로서 선이 더 빛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인이 악한 사람들에 의해 순교함에 따라, 그의 이름이 더욱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넘어가자.


 “대체 악마는 왜 직접 인간에게 개입하지 않고 마녀를 이용하는 것일까?” <마녀의 망치>는 악마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 직접 상호작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녀는? 마녀도 인간이잖아? 그런 하찮은 걸 신경 쓰면 지는 거다.


▲ <마녀의 망치 (Malleus Maleficarum)>



 그런데 여기서 또 결정적인 문제가 또 있다. 성경 <욥기>에 보면, 악마가 직접 욥에게 고통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녀의 망치>는 이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하지만, 저자들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말꼬리 잡지 말고 핵심을 보라!”


 “악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화장실에 가시는가?” “악마는 앞을 볼 수 있는가?” “악마에게는 눈이 있는가?” 이런 걸 대단히 진지하게 논리적으로 따져가며 논의한다.


 마녀사냥의 실제는 어떨까? 가장 핵심적인 마녀의 증거는 자백이다. 그리고 자백을 받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문이다. 고문을 시작하기 전에 몇 번 자백을 요구하는데, 자백을 하면 사형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때 자백하면 정말 살 수 있는가? <마녀의 망치>는 아주 자랑스럽게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실제로 사형을 면하게 해 줄 수도 있다. 가둬두고 평생 죽음을 면할 정도의 빵과 물만을 주며 살려두기도 한다. 아니면 이런 대안도 제시한다. “일단 살려준 후 몇 달 있다가 사형시키면 된다!” 혹은 “다른 재판관이 와서 사형을 시키면 하등의 문제가 없다!”




 다른 방법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마녀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마녀 혐의자를 재판장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울어라!”


 이때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마녀다. 만약 눈물을 흘리면 어떻게 될까? 울으라고 한 때에 정확하게 울 수 있다니! 악마의 도움이다!


 이렇게 처형된 사람만 최소 5만 명이었다.




 소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근대 사람들이 서로에게 자행한 일들이다.


 이것들은 아주 단편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근대가 무르익은 다음이라고 다를까? 양차대전은 어땠는가. 베트남 전쟁은 또 어땠는가. 세상에 인간이 합리와 이성 따위 치워버리고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눈 적이 겨우 이런 사례들뿐이겠는가?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 위해서,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서로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선은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에 주는 에너지는 엄청나다. 그 선이 조금씩 앞으로 나갈수록, 세상은 조금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해 보자. 심지어 이성과 합리의 시대, 신성을 넘어선 인간성의 시대라는 근대에서 자행된 일들만 해도 끔찍한 수준을 넘어선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여성을 향한 증오범죄. 그리고 추모를 향한 ‘남혐’ 프레임 씌우기. 진심어린 추모조차 할 수 없는 세상. 그 추모 행사를 기획한 게 ‘워마드’라는 성소수자 혐오 커뮤니티라는 사실은 이 사회에 대한 조소마저 벅차게 만든다.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게 이 땅에서 가능할까?


 불신과 공포의 시대,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사는 반복, 오로지 반복이다.


▲ 결국 믿어야 할 것은, 죽음 앞에 눈물을 보일 수 있는 수많은 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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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 뒤바뀐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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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8세기는 여러모로 재밌는 측면이 많은 세기다. 새로운 집권 세력이 나타나고, 새로운 경제 주체가 나타난 시기다. 세계 각지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끓어오르던 시기이며, 또 그만큼이나 많은 꿈이 좌절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세기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 하나가 있다. ‘상업’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전 세계가 하나의 교역망으로 통합되기 시작한다. 포르투갈에서 출발한 배가 유라시아의 동쪽 끝까지 도달했고, 동남아시아가 해상 무역 중심 기지로 성장했다. 신대륙에서 막대한 재화가 쏟아져 들어왔고, 서양과 동양이 대규모로 무역을 벌이며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던 역동적인 시기다.


 그렇다면 세계를 돌아다니던 이 무역선들이 싣고 돌아다니던 물건들은 무엇일까? 많은 것들이 있었다. 향신료가 오가기도 했고, 도자기가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은 분명 은(銀)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역시 전 세계적으로 통용할 수 있는 화폐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 환전소가 도시 곳곳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니, 사실 화폐제도 자체가 발달되지 못한 시대였다.


 그렇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어떤 것을 가지고 교역을 했을까? 단순한 물물교환으로 이런 체계가 유지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고안된 화폐가 바로 ‘은(銀)’이었다.


 금이나 은이나 동은 아주 예전부터 인류와 함께했던 귀금속들이다. 그런데 이들 중 금은 너무 비싸고 희소해 무역에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동은 반대로 너무 가치가 낮아서, 국내 거래 정도에는 쓰여도 대규모 국제 무역에 쓰기는 부적절했다. 가장 적절한 세계화폐로 은이 선택된 이유다.




 은이 중요했던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전 세계 경제의 절반 가까이를 괴물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던 국가, 바로 중국의 존재였다. 중국은 명대부터 ‘일조편법’이라고 해서, 세금을 반드시 은으로 내도록 강제했다.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이 중국에게 바치는 조공 역시 은을 다수 포함하게 했다.


 당시 중국과 그 조공 무역망에 포함된 인구를 따지면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 된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은을 반드시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 동아시아가 가지고 있던 은에 대한 수요는 엄청났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높은 수요로 인해 은의 값이 폭등했는데 그 결과 중국의 은 가격이 서양의 은 가격의 두 배였다고 전해진다. 약 두 세기 동안 서양의 은이 무지막지하게 중국으로 유입된다.


 말하자면 은은 세계 화폐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서양 상인들에게는 훌륭한 재테크 수단이었던 것이다.





 자, 그런데 그렇다면 이 많은 은들은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우선 많은 양이 유럽에 위치한 은광에서 나왔을 것이다. 유럽이라고 은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유럽의 은으로 이 역동적인 세기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래서 새롭게 떠오른 지역이 신대륙이었다. 신대륙은 막대한 귀금속을 서양에 전달해 주는 말 그대로의 보물창고였다. 특히 멕시코 지역에서 나오는 은은 세계 경제 전반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었다. 오죽하면 모든 건물을 금으로 세웠다는 ‘엘도라도’ 같은 전설까지 나왔을까.





 그런데, 사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은광은 동방에도 존재했다. 일본에 위치한 ‘이와미 은광’이라는 녀석이 있다. 지금도 시마네 현 오다 시에 보존되어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은광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 보자.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이 은광은 당시 전 세계에서 나오는 은의 3분의 1을 생산했던 은광이다. 이 막대한 은의 대부분은 중국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서양에 팔려나갔다.


 이 시기를 중심으로 일본은 점차 상업화를 이루게 되었고, 수많은 서양과의 교역이 바로 이 은광에서 나오는 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을 이끌던 힘은 이와미 은광이었다.


▲ 이와미 은광 (石見銀鑛)




 그런데 이와미 은광에서 이렇게 은을 많이 생산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이 은광에 은이 많아서는 아니다. 이와미 은광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선진적인 은 제련 기법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연은 분리법’이라고 불리는 방법이다.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은을 분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은광석은 채취하면 납과 은이 섞여서 나오는데, 핵심은 납에서 은을 분리하는 방법이다. 그래야 순수한 은을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원래 사용되던 방법은 그냥 이 은광석을 한 번에 녹인 다음에, 녹은 재 속에서 순수한 은을 찾아내는 방법이었다. 은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워서 생산량도 많지 않았고, 그 품질도 좋지 못했다. 그런데 이와미 은광에서 찾아낸 방법은 은과 납의 녹는점 차이를 이용해서 효과적으로 은을 분리해낼 수 있었다. 기술의 발전이 경제를 이끈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기술은 그냥 이와미 은광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이 아니다. 이 기술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의외로 조선 땅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 9년 5월 18일 계미일 기사를 하나 전한다.




양인 김갑불과, 장예원 노비 김검동이 납으로 은을 분리해 바치며 아뢰었다.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분리할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재(灰)를 둘러 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이면 분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시험해 보라 전교했다.




 여기서 ‘납’은 ‘은광석’ 정도로 바꾸어 해석해도 좋다. 납에서 은이 나올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 이와미 은광에서 사용하던 연은분리법.

16세기 조선을 드나들던 일본 상인들이 배워 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술은 이와미 은광에서 사용하던 연은 분리법과 일치하고, 곧 조선에서 이 분리 기술이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조선에서는 후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은광을 국가에서만 관리하고 있었고, 저 기술을 개발한 이들이 양인(아마 중인이었을 것으로 추정)과 천민이었기 때문에 크게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랬던 기술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렇게 이와미 은광이 탄생했다. 세계 은의 3분의 1을 생산하고, 일본의 상업화를 이끌었던 그 은광이 말이다.

 

전국시대에 접어든 일본은 이와미 은광을 가지고 쟁탈전을 벌인다. 결국 이와미 은광을 차지한 것은 도요토미 가문이었고, 도요토미 가문은 일본 전역을 성공적으로 차지한다. 도요토미 가문은 이 은광을 이용해 서양과 적극적으로 무역했고, 총도 이 과정에서 일본에 들어왔다. 그리고 은으로 축적한 자본력은 곧 임진왜란의 전쟁자금에까지 사용된다.


 조선이 가진 지하자원의 양은 결코 다른 나라에 밀리지 않았다. 한반도 북쪽은 ‘동방의 엘도라도’라고 불릴 정도로 지하자원이 풍부했던 것이고,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는 금광부자도 많이 탄생했었다. <조선일보> 가문의 방응모 사장이 대표적인 금광 부자 아니었던가.


 하지만 기술을 대하는 두 나라의 태도가 달랐다. 조선은 경직된 경영으로 그 기술을 잠재웠으며, 일본은 그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조선과 일본이 만들어졌고 말이다.


 어쩌면 이와미 은광이라는 단편적인 사례는, 두 나라의 뒤바뀐 운명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나가사키에 위치한 데지마 섬. 일본과 서양의 무역 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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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더슈탄트, 1987, 뜨거웠던 그 해의 여름을 말하다 3

 

다시금 전두환 정부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기는 이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크나큰 위기였다. 백만 명. 수많은 경찰 병력의 배치와 군대 투입 엄포에도 거리로 쏟아져 나와 희망을 노래하는 백만 명의 군중은 전두환에게는 정권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안위까지 걱정하게 하는 위협 그 자체였다.

 

4.13 호헌 조치와 같은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발표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백만의 군중을 보는 순간 전두환은 물리력과 입장 고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전두환이 빼든 카드는 민주화였다. 시민들이 그렇게 원하는 민주화라는 것, 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몰리고 몰린 정부가 토해낸 것이 바로 ‘6.29 선언이었다. 100만인이 모인 6.26 국민평화대행진 후 3일만에 정부는 민주화 선언을 해 버린 것이다. 6.29 선언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한지 39년만에 실질적인 민주화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2월 평화적 정권이양

대통령 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관련 사범들의 석방

인간 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자유언론의 창달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정당의 건전할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과연 6.29 선언이 진정으로 전두환이 시민에게 몰려 어쩔 수 없이 내놓은 항복 선언이었나에 대해서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전두환이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택한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는 전두환이 택한 조치가 항복이되 항복이 아니고, 선택이되 선택이 아닌 아주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줄타기는 바로 전두환 자신이 아닌 대선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를 통해 민주화 선언을 시킨 것이다. ‘노태우가 전두환을 배신하고 민주화를 선언했다.’는 정도의 프레임으로 사건을 이끌어 나가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보수 진영에서는 노태우를 배신자 취급하겠지만,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반 전두환 세력은 노태우를 영웅으로 받들게 된다.

(후일 주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에 의해 밝혀지기로는 노태우가 전두환의 명령을 받고 이 선언을 했다고 한다. 물론 핵심적지배층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을 테고, 그러니 실은 전두환의 권력 행사에 문제가 생길 일도, 노태우가 보수진영에서 왕따를 당할 일도 없었다.)

 

▲ 6.29 선언을 하는 노태우

 

전두환의 이 교묘한 조치에 국민들은 환호했다. 민주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사실이고, 그 희열에 가려 뒤에 숨겨진 전두환의 꼼수를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승리했고, 정권이 항복 선언을 했다는 시민들의 환호 뒤에서 전두환은 몰래 웃음짓고 있었을지 모른다.

 

전두환이 웃었든, 6.29 선언이 항복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대안의 하나였을 뿐이었든, 민주화는 왔다. 이것마저 부정할 순 없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화는 6월 광장에 모였던 시민과, 그리고 전두환의 선택덕분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가자. 나는 전두환이 민주화를 선택했다고 해서 전두환을 민주화 열사쯤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민주화를 이룩한 핵심 세력은 당연히 민주화라는 대안을 선택의 반열에 올린 시민들이며, 전두환은 오히려 그 선택을 선언 직전까지 외면해 왔다. 그리고 전두환이 계속해서 이 선택을 외면했다면 시민들은 분명 민주화를 자신들의 손으로 이끌어 왔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다만 팩트는 전두환의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말만 번지르르한 선언문이 아니었다, 6.29. 지금 우리가 그래도 민주화라는 것을 누리며,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고, 표현의 자유를 논할 수 있고, 공정하고 자유롭게 선거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6.29의 산물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6.29 전에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저 권리를 우리가 누리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뜨거웠던 6월의 열기와 6.29 선언으로 전두환의 8차 개정헌법으로 수립된 제 5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6.29 선언 직후부터 국회는 개헌 논의에 착수하고, 곧 개헌안을 내놓아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 출석의원 2/3 이상의 찬성이라는 기준을 가뿐히 통과하고 국민 투표에 이 개헌안을 부치게 된다. 1027일 실시된 이 국민 투표에서 93.1%라는 높은 찬성률로 개헌안을 통과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헌법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법체계 가장 상위에 존재하는 제 9차 개정 헌법, 10호 헌법이다. (이전의 <헌법을 말하다> 시리즈는 바로 이 ‘10호 헌법을 분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 헌법, 그냥 개정수준이 아니었다. 국민 기본권 따위 제쳐놓고 내가 왕이여!”를 외치던 유신 헌법에서 약간의 기본권 내용만을 추가한 5공 헌법이었으니 (그것마저 지켜지지도 않았지만.) 이 헌법은 거의 제정수준에 가까웠다고 봐도 되겠다. (제헌헌법이나 초기의 헌법은 그래도 독일 등 여러 (‘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선진국의 조항을 따와 괜찮은 헌법이었으니 복원이라고 봐도 되려나.)

 

직선제 5년 단임제가 (이전에는 7년 단임제) 확립되었으며, 국회에 국정감사권을 주었으며, 헌법에 정부가 평화통일을 추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명시하였고, 표현의 자유 조항이 강화되었다. 보통·비밀·직접·평등선거라는 선거의 4대 원칙이 헌법에 명시되기도 했다. 대통령이 헌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비상조치권을 폐지하였고, 대통령제 하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을 폐지하였다. 이렇게 많은 기본권을 헌법에 명시하였으니 자랑스럽다!고 생각할 일은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건국 후 40년 동안 우리는 저런 기본권도 없는 헌법 아래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헌법 뿐 아니었다. 선거법도 고쳐지고, 부정선거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고 할 순 없지만 현저히 줄어들었다. (, 물론 여전히 그 잔재는 남아있었다. 그 이야기는 아래서 하기로 하자.) 이 선언과 그 후속 조치가 어느 정도 완결될 무렵 1216일에 예정된 13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게 된다. 선거법도 고쳐졌고, 이번 선거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었던 제 7대 대통령 선거 이후 20여년 만에 부활한 대통령 직선제로,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선거였다. 대단한 의의를 지닌 선거였다.

 

이때 선거로 나온 후보는 총 여덟 명이었다. 기호 순으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 사회민주당 (얼마전에 물뚝심송 딴지일보 정치부장이 트위터에서 진보정의당이 사회민주당으로 이름을 개칭하면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민주당이란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는 취지의 말을 했는데, 안타깝게도 사실이 아니다. 이때 이미 사회민주당이 있었다. 정확히 하자면 최초로 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원내에 진입한 사례일 것이다.”쯤 되겠다.) 홍숙자 후보, 일체민주당 김선적 후보, 한주의통일한국당 신정일 후보, 무소속 백기완 후보였다.

 

▲ 13대 대통령 선거의 포스터

 

사실 이 때 분위기는 (아무리 전두환이 머리를 써서 띄워주려고 했어도) 노태우는 쳐다보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배신을 했어도 (선거에 들어갔을 당시에는 그것이 배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이들이 많았지만) 민주화 운동에 선봉에 섰던 김영삼과 김대중 중의 선택이라는 생각을 많은 사람이 하고 있었다. (, 물론 이 선택은 투표장에서의 선택이 아니었다. 당내 경선장에서의 선택이고, 선택된 후보가 대선에 나가 무조건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선거 입후보 때만 해도 김영삼과 김대중은 같은 정당, 신한민주당 소속이었다. 당시 김영삼이 총재직을 맡고 있었고, 김대중은 고문이었다. 물론 두 후보 모두 출마선언을 했고, 당내 경선을 치러야 할 상황이 온다. 두 후보의 캠프가 모여 경선 일정 논의를 시작하게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총재 김영삼과 고문 김대중, 당내의 패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는 뻔했다. 김영삼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김영삼이 제의한 의견은 아주 빠른 시일 안에 대의원 선거로 경선을 하자는 것이었다. 당내 패권을 김영삼이 쥐고 있으니 대의원도 김영삼 편이 많을 테고, 그래도 시간을 많이 주면 어떻게 설득해 보겠는데 시간까지 없으니, 김대중 입장에선 그냥 자리를 내놓으라는 제안 같이 보였으리라.

 

당연히 김대중은 반대했다. 전체 당원 선거로, 거기에 선거운동 기간을 길게 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김영삼 입장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 경선 협상의 판을 깨버린다. (과격한 선택이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단일화 협상 판에선 밀당이 오고가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지난 대선 당시 안철수 후보가 판을 깨고 나갔지만 결국 단일화는 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김대중의 반응은? 탈당이었다. (이것도 과격하다. 더 기다리고 더 회유하면 될 것을. 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제시했다는 것만으로 판을 깨버린 후보와는 더 이상 단일화 논의를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분명 옳은 생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자신의 계파 (소위 동교동계’) 소속 의원과 함께 탈당을 하고 나와서 평화민주당 (약칭 평민당)을 창당한다.

 

▲ 이렇게 함께 웃는 시절도 있었지만



▲ 뭔가 손을 꽉 쥐고 있을 것 같은 악수에 이어


▲ 요렇게 멀어지고 만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역사는 우리 현대사에서 상징하는 바가 많다.


▲ 평화민주당 창당대회

 

물론 민주화 세력은 계속해서 단일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결국 단일화를 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가던 와중에, KAL기 폭파사건이 터진다. 북측 공작원이 바그다드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던 우리 비행기 대한한공 HL7406기를 폭파한 것이다. (이 비행기에 타 있던 승객과 승무원은 115명 전원 사망했다.) 정부의 조작이다, 아니다 말이 많지만 적어도 이것이 노태우 후보에 유리한 일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북한이 우리 측에 위협을 가하면 안보에 문제가 생기고, 이런 때에 정권이 교체되는 혼란기가 오면 위험하다는 논리였다. (북풍의 원조격쯤 되겠다.)

 

▲ KAL기 폭파사건


▲ 체포되는 "KAL기 폭파사건"의 범인 김현희.

자살을 막기 위해 재갈을 물렸다.

이후 김현희는 책도 내고 언론에도 나오며 뭐 그냥 잘 사는 듯 하다.

자국의 국민을 죽인 북측 공작원은 잘 살아가고 멀쩡한 사람은 간첩으로 몰리는 현실이다.

 

이것 뿐 아니다. 위에서 분명 부정선거가 줄어들었다고 했는데, 그건 도시 이야기이다. 시골에서는 아직도 부정 선거가 횡행하고 있었다. 재떨이, 고무신 등의 물건을 돌리기도 하고, 동네 이장이 와서 돈을 찔러 넣기도 하고, 뭐 그런. 이게 한두 건이면 실무자가 의욕에 넘쳐서 저지른 실수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해명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이 규모가 상상을 뛰어넘는다. 지금 대선 후보 한 명이 쓸 수 있는 자금이 500억 정도로 상한선이 되어 있는데 (물론 합법적 돈으로 합법적 일에 사용해야 한다.), 당시 선거에 사용된 금액이 최소 3,000억 이라고 한다. 많으면 1조 정도 된다는 추측도 있다. 당시 돈으로 이정도면 집 수백 채, 많이 잡으면 수천 채로도 환산될 수 있다. 이렇게 돈을 수천 억 풀어대니 시중에는 선거 특수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상황은 점점 노태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단일화는? 한 발자국도 진척되지 못했다. 김대중 후보 캠프는 4명의 후보(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가 모두 나오면 김대중이 무조건 승리한다는 ‘4자 필승론이 돌았고, 김영삼 후보는 점점 지지율이 올라가자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진척이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선거는 이런 상태에서 치러지고 만다. 개표 중간에 개표부정 시비도 있었다. 서울 구로구 을 선거구에서 봉인되지 않은 투표함을 가지고 시위대가 모여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무력으로 해산하고, 시위대가 가지고 있던 투표함을 44시간만에 회수받는다. 이 투표함은 시시비비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해서 결국 개표하진 못하고 25년간 봉인된 상태로 현재까지도 중앙선관위에 남아 있다.

 

▲ 25년 간 봉인된 투표함 (출처: 아이엠피터)


 

이렇게 치러진 1216일의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후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정당

민주정의당

신한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득표수

8,282,738

6,337,581

6,113,375

1,823,067

득표율

36.6

28.0

27.0

8.1

기호

1

2

3

4

후보

신정일

홍숙자

김선적

백기완

정당

일체민주당

사회민주당

한주의통일한국당

무소속

득표수

46,650

(중도사퇴)

(중도사퇴)

(중도사퇴)

득표율

0.2

(중도사퇴)

(중도사퇴)

(중도사퇴)

기호

7

5

6

8

 

▲ 당시 김대중 후보 포스터


 ▲ 김영삼 후보 포스터. 우측이 14대 대선, 좌측이 13대 대선.



▲ 당시 노태우 후보 포스터



 

노태우 후보의 당선이었다.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표를 단순비교해 보자. (물론 선거 때 단일화가 되면 이탈인원도, 시너지도 있지만) 단순비교만으로 보면 55.0%. 노태우 후보의 36.6%를 가뿐히 넘을 수 있는 수준이다. 이 패배에 대한 두 가지 원인 분석을 해 보고자 한다.

 

가장 첫 번째로 떠오르는 원인은 민주화 세력이 선거에 서툴렀다는 것이다. 직선제를 한 것이 20년이 지났다. 당시 대선 후보로 나왔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아직도 정치권에 남아있지만, 그들의 계파, 그들의 측근은 직선제경선이라는 것을 정치인생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어떻게 협상을 이끌어야 하는지, 어떻게 선거를 주도해야 하는지 이들은 몰랐던 것이다.

(비난하자는 건 아니지만, 당시 대부분의 야권과 재야인사는 김영삼 지지혹은 김대중 지지를 선언했다. 사실 이런 선언은 정치인들이 해야 할 선언이고, 재야인사들은 야권단일후보 지지정도로 단일화를 촉구하는 편이 옳았다. 누구를 지지한다는 선언은 협상이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언론환경이었다. 수천억을 들여서 부정선거를 해도, 조작의 의혹이 있는 KAL기 폭파사건으로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해도, 어떤 언론도 그 내용을 기사로 써서 시민들에게 전달해주지 못했다. 어떤 신문도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두 후보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이 본질적인 패인이었다.

 

어찌 됐든 노태우의 당선이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지지하던 천 2백만 명의 시민과 거리에 나온 백만 명의 시민은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절망에 빠지고, 희망을 잃어 낙담하는 사람들 사이에 하나 둘 본질적 패인을 깨닫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외친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절망에 빠진 이들, 자신의 슬픔과 절망을 어느 곳에도 표현할 수 없었던 이들은 이 한 마디의 말에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많은 사람이 다시 공정한 언론이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적 절망에서 피어난 국민의 희망, 그 출발에 걸맞게 국민주 형태로 만들어진 신문사, 한겨레신문은 이렇게 창간되었다. (실은 한겨레신문 창간에는 더 많은 사정이 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같은. 하지만 지금 다룰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피어난 <한겨레>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을 한번 생각해 보자. (정치인들이 싼 똥을 국민들이 치워주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어쨌든) 한겨레는 우리 사회가 진보하는 데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진실의 길 가장 앞에 서 있던 언론지는 언제나 바로 그 <한겨레>였다. 한겨레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한겨레가 우리 사회에 끼친 그 막대한 긍정적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른 일로 비판을 하더라도, 이것은 분명 전제를 하고 들어가야 한다.

(잘 모르겠으면 한 번 생각해 보자. MBC의 정수장학회 관련 사항을 단독 보도했다가 압수수색을 당한 기자는 어느 신문사의 기자지? 전두환의 재산을 찾자고 시민과 연대해 정보를 캐내고 있는 언론사는 누구지? 이것 외에도 많다.)

 

역사는 왜 배우는가에 대한 내용을 1편에서 쓴 바가 있다. 안타깝게도 1987년의 시민과 지금의 시민은 딱히 다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 2012년 겨울, 다시 한 번 국민적 절망이 찾아온다. 모든 사람이 다시 또 절망 속에 빠져있을 무렵, 25년 전과 같이 희망을 노래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번의 패인도 언론환경이었던 만큼, 새로운 언론이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

 

국민TV, RTV, GobalNews, 뉴스타파……. 많은 형태로 사람들은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부터 내가 결론으로 이끌어내고 싶었던 것은 국민TV였다. 진정으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방송이라는 꿈을 향해 (조합원이 사주가 되는) 협동조합의 형태로 출범한 언론, 국민TV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다시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 다양한 대안언론. 이외에도 팩트TV, RTV 등을 말할 수 있다.

(프레시안은 요즈음 나온 대안언론은 아니지만, 최근 주식회사 체제에서 협동조합 체제로 전환했다.)

 

이런 (느끼기에 따라선) 유치한 결론을, 일차적인 결론을 내게 돼서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하겠다. 희망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고, 그 노래를 나는 따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의 노래만이 우리가 지금 이 절망을 극복할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희망의 노래에 동참할 방법은 하나다. 함께 희망을 노래하자. 그리고 모두가 같은 꿈을 꾸면 그 꿈은 현실이 됩니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우리 함께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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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e 2013.06.06 20:52 신고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다만 상황을 비껴가게 해 줄 뿐이다. 역사는 돌고 돌아도 이내 제 길로 간다. 그 시간을 미래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비더슈탄트, 1987, 뜨거웠던 그 해의 여름을 말하다 2

어떤 특별한 조치 없이는 난국을 돌파할 길이 없었던 전두환, 그가 빼든 카드는 호헌(護憲)’이었다.

 

▲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와 민주화의 열기를 보지도 못한 듯이 413, 전두환은 호헌 조치를 단행한다. ‘호헌.’ 언뜻 들으면 긍정적으로까지 들리는 이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닥쳐!” 쯤 되겠다. 민주화 요치를 묵살하고 간선제 헌법으로 계속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 선거는 간선제로 하고, 직선제 논의를 이번 대선이 끝난 후에 하자는 선언이었다. 직선제를 주겠다고 한 것도 아니니, 그저 말 뿐인 직선제 논의를 하자는 선언이었던 것이다.(국민의 직접선거를 두려워하는 정치세력이 무려 집권여당이라니. 그 과정이 알만하다.)) 똥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쯤의 생각으로 벌인 일이었겠지. 하지만 전두환은 여기서 똥개가 누구고 기차가 누군지를 헷갈렸던 것 같다.

아마 전두환은 호헌을 강력하게 주장하면 시위대가 주춤할 것이고, 그 때 군대나 경찰을 투입해 강력하게 진압하면 제 풀에 지쳐 열기는 꺼져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달랐다. 물대포로 불은 끌 수 있어도 민주화의 열기는 끌 수 없었다. “똥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말은 이제 전두화의 생각에서 나왔을 때와는 완전히 역할이 뒤바뀐 상태가 되어버렸다. 호헌 조치는 오히려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더욱 끓게 만들었고, 최루탄과 곤봉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 물론 몇몇 주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는 이민우 구상이라는 타협안을 내놓는다. ‘이민우 구상이 뭔가 하면, 대통령이 민주화 조치를 하면 내각제 개헌을 하겠다는 것이다. (뭔가 너무 친절한 것 같지만 일단 설명하자면) 내각제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선거제도가 아니라,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는 선거제도이다. 지난 2.12 총선 때 봤듯이, 신민당이 아무리 돌풍을 일으켜도 (선거구의 왜곡 등의 이유로) 얻은 국회 의석은 민주정의당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후일 커지긴 했어도 제 2당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각제라는 것은 전두환에게 호재다. 물론 민주화라는 전제를 걸기는 했어도, 민주화가 선거구를 재편시켜 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 이민우는 민주화라는 이름과 전두환의 집권연장이라는 것을 두고 딜을 시도했던 것이다. (전두환 세력이 연장되면 그건 민주화인가. 쿠데타 세력이 민정 이양한답시고 전역해서 대통령 되는 걸 우린 절대로 민주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민우는 신민당의 총재로서 어떤 수를 써서든 전두환 세력의 연장을 막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독재세력이 판치는 이름만 민주화를 이루려 했던 것이다. 민주당 뻘짓하는 건 역사가 깊다.) 여기에 이철승 등이 동의하기까지 한다.

 

▲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는 이민우 당시 신민당 총재


▲ 이민우 당시 신민당 총재


▲ 이철승의 현재 모습 (회고록 출간 기념식장에서)


▲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는 이철승 헌정회장

(가카가 왠지 그리워서 넣은 것은 아니다.)

 

이에 김영삼, 김대중 등은 70여명은 의원들과 함께 신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 (약칭 통민당)의 창당을 계획했다. 분열로 주춤하는 민주화 세력. 이제 전두환은 강력한 진압을 보여줘야 했다. 420일부터 424일까지 통일민주당의 20여개 지구당에 조직폭력배가 난입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당원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여졌다. 이에 창당대회는 인근 식당 등에서 약식으로 치르게 되었고, (무려)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조직 폭력배에게 쫓기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건은 정부에서 직접 한 일은 아니다. 통민당 측에서는 정부의 비열한 정치공작이라고 말했으나. 경찰은 신민당의 이택희, 이택돈 의원이 청부폭력을 지시했다고 결론지었다. 후일 재조사를 했고, 강력한 야당의 출현을 막기 위해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이 이택희, 이택돈 의원에게 5억원을 주고 청부폭력을 청부하라고 한 사실이 드러났다. (말하자면 청부청부폭력쯤 되겠다.))

(하지만 결국 통일민주당은 김영삼을 총재로 해 창당되고, 103명 의원 중 74명 의원이 탈당해 통일민주당에 가입하였으며, 잔류해 있던 신한민주당은 이후 88년 총선에서 모두 낙선해 정당법에 의해 자동 해산된다.)

 

▲ 통일민주당 서울 관악지구당에 조직폭력배가 난입해 훼방을 놓고 있다.


▲ 당시 폭력을 의뢰받은 김용남 씨, 일명 '용팔이.'

현재는 개과천선해서 광고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봉사활동과 종교활동을 한다고 한다.

장소는 자택 지하의 기도실이며, 벽에 붙은 쪽지는 전부 성경 구절이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국민들은 주춤하지 않았다. (정치인이 주춤하고 타협할 때 국민들은 나라를 위해 일어났다. 이렇게 보면 이 나라의 정치인은 실은 얼마나 한 일이 없는 것인가.)온 나라의 각계각층에서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내고, 2200여 명의 발기인이 모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국본)을 만들었다. 국본 측에서는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식이 있기도 한 역사적인 날, 610일에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 조작 및 호헌 철폐 요구 국민대회를 대규모로 열기로 결정한다.

(여기서 내가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한 것은 610일은 역사적으로 거대한 민중 집회들이 열렸던 날이기 때문이다. 지금 말하는 6월 민주화 항쟁은 물론이고, 거슬러 올라가면 6.10 만세운동, 아래로 내려오면 가장 큰 규모의 촛불집회(2008), 대규모의 반값 등록금 집회, 희망 버스가 있기도 한 날이다.)

 

국본은 65일에 6.10 국민대회의 행동요강을 발표하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61018시의 국기 하강식을 기해 전 국민은 애국가를 부르고, 애국가가 끝나는 즉시 국민들은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고, 성당과 교회, 사찰에서는 타종을 실시한다. 국미들은 민주헌법 쟁취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외칠 수 없는 국민들은 제자리에서 1분간 묵념을 하고 여성들은 흰 손수건을 흔든다.

국민들은 21시부터 10분간 소등을 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써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항의한다.

경찰이 폭력적으로 대회 진행을 막더라도 국민들은 이에 비폭력으로 대항하며, 폭력적 대응이나 기물 파손 등을 행하는 사람은 국민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인으로 규정한다.

 

국본이 이렇게 6.10 국민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자, 정부 측에서는 610일이 오기 며칠 전부터 시위를 막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국민대회를 불법 시위로 규정하고 경찰 병력을 총동원하기로 하였으며, 주요 대도시의 검문과 검색을 강화하는 한편, 전단지 살포를 막기 위해 인쇄소에 대한 수색과 감시를 강화했다. 또한 국민들이 6시의 태극기 하강식과 애국가를 기점으로 행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오후 6시의 애국가 옥외 방송을 금지시켰다. (이렇게 보면, 도대체 누가 애국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시위대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애국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은 애국가를 금지하고.) 대회 전날인 69일에는 민주 인사들을 가택에 연금시키고 전국 110여개 대학을 수색하여 시위 용품을 압수하기도 한다.

 

610일이 오기 전에도 간헐적이고 소규모로 시위는 있었다. 시위를 하면 경찰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최루탄을 쏘는데, 대부분 사용하는 것은 SY44라는 최루탄으로, 총과 같은 발사 기구에 최루탄을 끼우고 공중으로 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공중으로 쏘아진 최루탄이 터지면서 최루가스나 최루액을 사방으로 흩뿌리는 것이다(‘총류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최루탄을 공중에 쏘지 않고 사람들에게 직접 쏘면 최루액이나 최루가스를 맞는 것이 아니라 최루탄을 직접 맞게 돼서 맞은 사람에게는 마치 둔기에 맞는 것 같은 효과가 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반적인 최루탄의 눈물, 콧물이 나고 얼굴이 따가운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된다. (너무도 당연하게) 생명까지 위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망치같은 둔기를 총으로 쏴서 머리를 쳤다고 생각해 봐라.)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법적으로 규정된 지상과의 각도 45°를 지키기 위해 안전장치를 하고 공중으로 쏘아올린다.

 

▲ 최루탄을 발사하는 기계.

(사진은 이화여대 앞에서 시위대가 최루탄 발사기를 부수는 사진)

 

그런데 69, 연세대 앞에서 있던 시위에서는 달랐다. 시위대 진압이 어려워지자 경찰이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사람에게 직접 최루탄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명백한 불법이고, 잘못하면 맞은 사람은 죽을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그런 속에서 시위대 중 한 남학생이 쓰러졌다. 이 최루탄에 맞은 것이다. 이 남학생의 이름은 이한열. 이한열 열사는 긴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중태에 빠졌다. 최루탄을 공중에서 쏘면 떨어질 때 속도가 매우 느리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피하게 되고, 맞는다 하더라도 중태에 빠질 정도는 아니다. 이한열 열사가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만으로도 시민들은 경찰이 최루탄을 직접 쏘았음을 알 수 있었다.

 

▲ 이한열 열사의 어린시절 사진


▲ 이한열 열사의 어린시절 사진.


▲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 열사.

이 사진은 당시 <New York Times>의 1면에 나오기도 했다.


▲ 해양 훈련을 왔다가 시내를 관광하는 독일인. 최루탄 냄새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이 당시 서울의 시내는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곤 했다.

 

어쨌든 610일의 아침은 밝았다. 오전 1115분부터 시작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는 예정된 수순대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표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이 할 수는 없었다.) 군인 박정희에서 군인 전두환으로, 그리고 다시 군인 노태우로. 5.16 쿠데타 세력의 집권 연장을 위한 이 형식적 절차가 이루어지는 동안, 시계는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 민주정의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열두시가 되는 순간 성공회 대성당의 대형 종탑이 울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 종탑 꼭대기에 유시민 전 대표 (라는 것은 곧 현 백수)의 누나인 소설가 유시춘과 지선 스님이었다. 지섬 스님은 바로 그 종탑 위에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유시춘과 지선 스님은 저녁 6시에 예정된 국민대회의 성공을 직감했다.

 

▲ 대한성공회 성당



▲ 유시춘


 

드디어 오후 6시가 왔다. 국민들은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인가, 아니면 다시 나약한 국민으로 돌아가 독재 정권 앞에 무릎 꿇을 것인가. 그 결단의 순간에 우리 국민은 역사의 물줄기를 부정할 수 없었다. 오후 6시가 되는 순간 자동차는 일제히 경적을 울렸고, ‘호헌 철폐민주 수호를 외치는 거대한 함성 소리가 온 나라를 뒤덮었다. 흰 손수건이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먼저 거리를 메운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학생들이었다. 원래 국민대회가 예정되어 있던 곳은 대한성공회성당이었다. 그런데 경찰이 그걸 알고도 이 장소를 가만 두었을 리가 없다. 성당으로 가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성당에 병력을 집중 배치한다.

 

그런데 그런 것 따위 민주화를 향한 열망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공회성당을 제외하고도 시위를 할 곳은 많았다. 여기서 학생들은 도로점거시위를 벌이기 시작한다. 차가 조금 적은 때를 노려서 많은 수의 학생들이 몰려가 도로의 출입을 막고, 도로 위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이다. 그럼 그 길을 가던 자동차는? U턴을 해서 돌아가야 한다. 운전자의 입장이라면, 그래, 짜증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은 그렇지 않았다. 학생들을 칭찬해주고, 구호도 외쳐주고, 노래까지 불러주며 그들은 흔쾌히 차를 돌렸다.

 

▲ 6.10 항쟁 당시


▲ 6.10 항쟁 당시

 

밥을 먹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로 위에서 시위를 하다 보면 위에서 무언가가 날아온다. 최루탄? 아니다. 주변 빌딩에서 던져주는 먹을거리 들이다. 빵이나, 우유 같은 것들. 먹어가면서 하라는 응원의 메시지였다. 이렇게 모든 국민이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시위에 동참하고 있었다.

 

경찰의 연행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복 경찰이나 시위 진압 전문 경찰인 백골단을 이용해 진압을 시도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시위 인원이 너무 많아 주변 경찰서가 모두 포화상태였다. 데려가도 넣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연행하고는 멀리 떨어진 교외에 버려놓고 오곤 했다. 그럼 또 그 학생들은 버스를 타고 올라와 다시 시위를 하고, 뭐 이런 식이었다. 또 학생들을 연행하려고 하면 주변 시민들이 나서서 제지하고, 어른들은 연행되려는 학생의 지인인 척 하며 자신이 직접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데려가기도 했다. 경찰 입장에서도, 어차피 넣을 곳도 없었기에, 그냥 놓아 주곤 하는 것이었다.

 

6.10은 성공적이었다. 전국 22개 대도시에서 24만여 명이 참여했고,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도시락이나 물을 가져다주는 등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어졌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열기는 더욱 타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약 8백만여명의 학생이 철야 농성을 감행한다. 이 철야 농성을 할 때 큰 도움을 준 곳이 명동성당이었다. 철야 농성을 할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자리를 내 준 것이었다. 아무리 폭력적인 정부라도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엔 군대가 투입되지만) 대학이나 종교건물 안에는 군대나 경찰을 들여오지 않기 때문이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철야농성은 10일 밤부터 15일까지 56일간 진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남대문 시장의 상인들, 주변의 회사원들 등 많은 시민이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더 큰 도움이 됐던 이들은 명동성당 옆 계성여고의 학생들이었다. 이 학생들이 도시락, 물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성금과 편지를 보내 준 시민들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민주화를 향한 희망의 열기는 시민 한 명 한 명의 가슴 깊은 곳까지를 울리고 있었다.

 

▲ 명동성당

 

15, 명동성당 농성을 마치고도 시민들의 열기는 꺼질 줄을 몰랐다. 18일 최루탄 추방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26일에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이라는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는 데 이른다. 이 계획이 나오자 정부 측에서는 군대 동원까지 운운하고, 행진 당일에는 6만 명이라는 거대한 경찰 병력을 투입하였으나 610일 시위에 참여한 인원의 3, 거의 100만에 가까운 시민들 (통계에 따라 다르고, 180만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있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시위를 막을 순 없게 되었다. 특히 이 날부터는 학생들 중심이었던 시위에 넥타이 부대라고 불리는 직장인들과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가 참여하게 되면서 학생 운동에서 비로소 시민 항쟁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전국에서 100만의 시민이 모이고 시위의 열기가 날로 더해가자, 여기서 정부는 다시 또 하나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전의 중대한 결정이었던 4.13 호헌 조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런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국민평화대행진 당시


▲ 국민평화대행진 당시

 

-여기서 1987, 뜨거웠던 그해의 여름을 말하다 2편을 마칩니다. 3편에서는 6월 항쟁의 마무리와 그 이후, 그리고 통렬해던 패배의 아픔을 다뤄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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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e 2013.06.01 20:00 신고

    1987년 6월.. 이방인들 중의 1인으로 바라보던 서울은 더욱 견고한 달팽이집을 만들게 해 주었던 여름이었지.
    '정부'의 존재 자체를 완전 무시하며 지독한 개인주의로 세상을 버렸던 이십대..... . 철저한 혼자였다.
    그 세상을 향해 다시 애정의 눈길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그대, 고맙다^^
    지치지않고 멈추지 않을 힘이 필요해!!

오을부터 총 세 편으로 구성된 <비더슈탄트, 1987년, 뜨거웠던 그 해의 여름을 말하다>를 연재합니다.


비더슈탄트, 1987년, 뜨거웠던 그 해의 여름을 말하다 1


역사는 왜 배우는가역사 속에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인간이 싸우고 갈등하고 서로를 비난하는 이유는 알고 보면 과거와 그리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정치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사회 전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관료제와 상명하복식 지배구조 사이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듯 하다.

 

민주화를 얘기하면 빨갱이’ 취급을 받던 때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진짜 웃긴다민주주의 공화국에서 민주화를 외치면 공산주의자라니.) 하지만 우리는 지금 너무도 당연하게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그래서 오늘은 6월 항쟁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어떤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이렇게 보편적인당연히 최고로 인정받는 가치로 만들어 냈을까?”하는 물음에 6월 항쟁이 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그리고 그 답을 가지고 우리는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에서다시 민주주의를 사회 전반으로 확장시켜 나갈 투쟁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역사 속에서 찾아낸 실마리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 확신한다.

 

서론은 이만 하고 시작한다전두환 정권이 있었다(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소설을 쓰는 것 같다.)

 

어쨌든 그것은 사실이었다전두환은 대통령이 되었고이 나라의 권력이란 권력은 모두 한 사람의 발아래 복속하고 있었다특히 5월의 광주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난 후에는 더욱 그랬다간헐적으로 시위가 일어나긴 했지만 늘 그렇듯이 폭력적으로 진압되고그러고 나면 또 한동안 조용하다가 시위를 일으키고그냥 그런 날들이었다저 단단한 권력은 아무리 달려들어도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자만한 것일까진심일까술수일까이런 상황 속에서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을 강하게 옥죄던 정책들을 하나하나 풀어주며 어느 정도 유화책을 펴고 있었다프로야구를 만들고, 3S라는 미디어 정책을 수립한다이것은 사실 국민들의 관심을 그 방향으로 쏠리게 해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하려는 계책이었다그런데 거기다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다시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까지 한다물론 언론 통폐합을 통해서 이미 언론을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어 논 상황이었지만 말이다국민의 관심도 돌리고비판도 완화시키면서 권력은 그대로 유지하는그런 술책이었다(뭔가 처음에 질문을 던져놓고 내가 답을 다 내버린 것 같다.)

 

프로야구에 빠져 정치는 관심도 없고살짝 보더라도 통제된 언론이 내보내는 소식이니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자유롭게 해 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두환은 생각했을 것이다야권 정치인들이 가택연금 상태의 김영삼과 미국 망명 중이던 김대중의 지원을 받아 신민당을 창당했을 때에도 그래봐야 무슨 큰일이라도 나겠어?”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 1986년의 신민당 행사 사진


그런데 여기서 전두환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진다신민당의 인기가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것이다거기다 미국에 있던 김대중이 총선이 있기 4일 전인 2월 8일에 귀국하자 신민당의 인기는 절정을 달린다(전두환은 이 소식을 듣고 꽤나 당황했을 것이다김대중이 돌아올 때의 파장은 상상 이상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정부에서는 김대중에게 신변이 위험하다며 귀국하지 말기를 권유하기도 하고투옥하겠다는 협박하기까지 한다하지만 김대중은 귀국이라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다.)





▲ 김대중 귀국을 환영하는 인파



▲ 김대중의 귀국 당시 사진


▲ 김대중 대통령의 안전귀국을 대한민국 정부에 요청하는 미국 국회의원들의 편지와 서명


▲ 김대중의 안전귀국을 요청하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편지

(쪽팔린다. 우리나라 민주화 인사의 안전을 미국이 지켜줘야 하다니.)



야권의 또 다른 거목이었던 김영삼은 가택에 연금된 상태였는데정치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김영삼은 가택에 연금된 상태였으며김영삼의 정치활동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1987년 8월 8일의 일이다지금 논하는 85년엔 김대중과 김영삼을 제외한 다른 몇몇 야권 정치인의 정치활동만 자유로워진 상태이다.)에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간다단식 농성 중에 야권 정치인들이나 지인들이 자택으로 찾아오려 하자 전두환은 지인 등 70여명을 가택에 연금시켜 버리고단식을 시작한지 8일 만에 병원으로 강제 이송한다병실로의 출입을 통제해 언론에 기사가 나거나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강제 이송될 때 김영삼이 한 말은 대단히 유명하다.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게 김영삼이 먼저 한 말은 아니긴 하지만멋진 말인 건 틀림없는 듯하다.

▲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영삼의 집 앞.


▲ 단식중인 김영삼


 

(김영삼이 보름달빵을 몰래 먹다가 문익환 목사님께 걸리긴 했어도) 이 단식과 김대중의 귀국은 야권을 단단히 결집시킨다그렇게 2월 12일 총선은 다가온다다음은 당시 총선에 출마한 정당 (민주정의당신한민주당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신사당) 중 3개 정당의 결과와 총 수를 나타낸 표이다.

당명

민주정의당

신한민주당

민주한국당

지역구 ()

87

50

26

184

전국구 ()

61

17

9

92

의석수 ()

148

67

35

276

득표율 (%)

35.2

29.3

19.7

100

 

▲ 신민당의 선거 승리를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에는 고결한 역사의 흐름이 있다아주 가끔 민중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역사를 후퇴시키기도 하지만 민중은 역사를 언제나 양의 방향으로 끌어가려고 노력했다그리고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둘 때마다 역사는 한 단계씩 발전했다그리고 2월 12일 이 날에 이르러고결한 역사의 흐름은 다시 밖으로 드러나 결실을 거두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말하는 게 과대해석처럼 들릴 수 있다과반을 차지하기는커녕 민주정의당 의석의 절반도 차지하지 못한 신한민주당이니 말이다그런데 그 당시와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우선 왜곡된 선거구와 비례대표제도 (당시에는 전국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때문에 의석수가 많이 줄긴 했지만 득표율만을 보면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때와 지금을 단순 비교할 수 없는 이유는 정치 환경의 차이도 있다지금이야 정보기관의 선거개입금품수수언론 통제와 같은 것이 없지만 (이라고 말은 했지만 없다고 말은 못하겠다어쨌든 강도는 그때가 훨씬 센 것만은 사실이다.)그 당시에는 만연했던 일이었고그 척박한 토양을 딛고 29.3%의 지지율을 얻은 것은 사실 이미 국민의 마음이 기울 징조가 보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것 뿐 아니었다일부 지방에서는 무소속이나 다른 당으로 출마해 당선되면 신민당에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지금도 적지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다시 신민당에 합류하고관제야당 (야당이 없으면 이상하니 그냥 형식적으로 만들어놓은 야당)이었던 민주한국당의 몇몇 의원 등이 신민당으로 들어와 나중에는 헌정 사상 야권이 가져간 최대의 의석인 103석이라는 큰 수를 차지해 거대 야당이 되기도 했다이 거대 야당을 바탕으로 민주화 세력은 자신의 목소리를 더 힘주어 낼 수 있었다.


민주화 세력이 원했던 것은 그럼 무엇일까무엇보다 민주화다그럼 그 민주화의 선행 조건은민주 시민들은 그것을 직선제 대통령 선거로 보았다당시에는 국민이 대통령선거인단이라는 이름의 대통령을 뽑아주는 선거인을 뽑았고그 선거인이 대통령을 뽑는 제도였다물론 결국 국민이 뽑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런 질문이 내게 들어온다면 이런 식으로 대답하겠다. “전두환이 5000만 국민의 경우엔 하나하나 이름을 체크하고 누가 반대하고 누가 찬성하는지 일일이 찾아내 앞길을 가로막을 순 없다하지만 3000명 선거인단에 대해선 그럴 수 있다.”라고미국도 간접선거지만 미국과 당시 대한민국은 사정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공정한 선거와 깨끗한 마무리가 없는 선거에서 선거인단은 권력이 있는 쪽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뭐 대통령 선거인단과 그 전신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인단과 딱히 다를 것 없는 조직이었다.)의 선거 기록만 확인해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무효표 1, 2많아야 5표 말고는 전부 여당 표이며, 12대 대통령 선거는 조금 낮긴 했지만 진짜 야당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전두환이 90% 넘는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 86년에 있었던 민주화 운동. 당시 민주화 세력이 요구한 주요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103석이라는 거대한 의석을 확보한 신민당은 서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처음엔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시작했는데김영삼이 “1000만으로 하자고 제안하자 1000만으로 늘려 (통도 크시다!!) 10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인다(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거 대단히 웃기는 일이다글을 따라가 보면 알겠지만 103석이라는 거대 의석을 기반으로 신민당이 한 일은 서명운동밖에는 없다그것 말고 대보라면 이민우 구상이나 야권 분열’ 같은 뻘짓밖에는 없다그게 뭔지는 그때 가서 설명하자.)

 

그러던 중 몇 가지 사태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요약하자면 5.3 인천사태부천서성고문사건건국대 농성사건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4가지 정도가 될 수 있겠다우선 5.3 인천사태부터 시작하자신민당에서 실시한 1000만 서명운동을 위해 발족한 학생단체를 결성하는 대회였던 ‘1000만 서명운동 인천 및 경기지부 결성대회를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다조용히 있었으면 결성대회 하고시위 조금 하다가 돌아갔을 학생들을 경찰이 일부러 진압을 한 사건이 벌어진다.

 

 ▲5.3 인천사태 당시의 사진



사실 이런 사건은 비일비재했다시위하고 진압하고 시위하고 진압하는그런 일상의 일에 하나였을지 모르는 사건이었다하지만 내가 굳이 이 사건을 꺼낸 것은 후에 발생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라는 것 때문이다. ‘권인숙이라는 여성이 있었다학생운동을 하던 사람인데시위를 하다 부천경찰서로 연행된다그곳에서 취조를 받던 도중경찰서의 문귀동 경감이 이 여학생을 5.3 인천사태의 배후로 몰다가 성고문 (말이 성고문이지 그냥 강간이다.)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 당시 사건에 연루된 권인숙 씨의 현재모습. 현재는 명지대학교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다.


▲ 당시 권인숙 편에 섰던 유일한 변호사, 조영래


권인숙멋진 여자였다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하지만 그녀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이 사건을 폭로했다법정에서 당당히 사실을 밝혀내던 그녀의 모습은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다물론 정부는 운동권 여학생이 자신의 성()마저도 투쟁의 도구로 사용했다고 발표하고문귀동 경감은 불기소 처분을 받는다(6.29 선언 이후에 다시 5년 징역형을 선고받기는 한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국민은 어떤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이 사건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언론에게 보도지침을 쏟아냈다신문의 앞에 위치하는 정치면에서 뒤에 위치하는 사회면으로 기사를 옮길 것기사를 축소 보도할 것성폭력이나 성고문 등의 어휘가 아닌 성모욕(한글 문서로 쓰고 있는데이 단어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없는 단어라는 거다창조력도 대단하시다.)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도록 한다출처도 기관명도 없는 보도지침을 언론은 그대로 따른다여기서 국민이 깨달은 것이결국 언론과 정부그리고 또 다른 권력기관 모두가 정부 하에 완벽히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국민 외에는 믿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권인숙씨는 이후 여성운동가가 되어 지금까지도 여성 운동을 하고 있다.)

 

▲ 당시 성고문을 했던 부천경찰서의 문귀동


▲ '성모욕' 어휘를 사용한 경향신문 기사. 내용은 문귀동 경장은 파면과 정상참작으로 인한 기소유예 내용이며,

제목에는 '성적 모욕'이라고 사용하고, 내용에는 '성모욕'이라고 사용하는 등 '성추행','성희롱'이나 '성폭행'이란 단어는 없었다.


다음 사건은 건국대 농성사건이다. 1986년 10전국의 29개 대학 학생들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학생운동 단체를 결성하려고 하는 결성식을 여는데이 행사에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자 경찰들이 진압한 사건이다말로는 별 것 아니어 보이지만 실은 꽤나 큰 사건이었다경찰이 건국대학교 전부를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오자학생들은 건국대 내 5개 건물로 나누어 숨는다경찰이 각 건물을 포위하자 농성을 시작하고경찰은 포위 상태에서 안으로 음식도물도 반입하지 않다가 (제네바 협정에 의하면 전쟁포로한테도 이렇게는 못하게 되어 있다.)건물 내에 침입하여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는데이 과정에서 1500명이 넘게 체포되었고, 1300명 가까이가 구속되었으며총 398명이 기소 처분되었다이는 단일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 당시 경찰에 연행되는 학생들


다음 사건은 1987년 1월 14일에 발생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다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었던 박종철 군이 민주화 운동을 하던 친구 (박종운 군)의 소재를 대라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들의 요구에 불응하다가 고문을 당하고결국 사망하게 되는 사건이다이 사건은 묻힐 뻔 했지만 여러 관계자들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이 사건을 다시 덮기 위해 치안본부장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중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라고 발표하였으며같은 자리에 있던 치안본부 대공 담당 차장은 책상을 ’ 치니 박군이 하고 쓰려졌다.”는 말을 하였다(“누드사진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검색해 봤다.”던 심재철 의원이나청문회장에서 모르겠습니다.”와 ㅋㅋㅋ만 반복하다 장관이 된 윤진숙이나뭐 이런 분들보고 요즘은 창조적이라고 하던데그 정도로는 발끝도 못 따라온다이 정도는 돼야 창조적인 거다미래를 창조하겠다는 박근혜 정부는 잘 보고 배우기 바란다.)

 

이 때 박종철 군의 아버지가 장례식에서 했던 말도 꽤나 유명해졌다.

종철아잘 가그래이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가슴을 울리는 한 마디였다혁명그것은 가슴을 울리는 한 마디의 말과 한 소절의 음악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당시 물고문이 있었던 현장


▲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관련 시위


▲ 박종철 군 아버지의 말을 인용한 현수막


이 네 가지 사건 (사실은 이 외에도 더 많은 사건이 벌어지지만 주요한 것이 이 네 가지다.)으로 민주화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져 간다직선제 요구는 날을 갈수록 더해 가고전두환 정권은 어떤 특별한 조치 없이는 돌파할 수 없을 정도의 난국을 맞는다.

 

1편은 이만 마칩니다. 1편에서는 6월 항쟁의 배경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는데, 2편에서는 6월 항쟁의 경과를, 3편에서는 6월 항쟁의 의의와 그 뒤의 이야기를 다루어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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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랏빛꿈 2013.05.25 19:17 신고

    본문 중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에는 고결한 역사의 흐름이 있다. 아주 가끔 민중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역사를 후퇴시키기도 하지만 민중은 역사를 언제나 양의 방향으로 끌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둘 때마다 역사는 한 단계씩 발전했다.'
    ......그 노력들이 멈추지 않기를*~

  2. 허허허 2016.09.30 19:56 신고

    김대중 똘만이 문익환이가 단식하는 김영삼이가 보름달 빵을 몰래 먹었다는 거짓말을 햇다. 기왕 먹을 바에야 단식하다가 빵을 몰래 먹었겠는가 차라리 영양죽을 먹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개같은 놈들
    문익환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가? 민주화를 위해서 아것도런 한 것이 없으면서 민주화영웅 대접을 받는 대중이가 미국에 가서 놀고 있는데 영삼이가 민주화 투쟁에 깃발을 휘날리게 되면 큰일이다 싶었거든
    영삼이와 대중이가 같이 민추협을 통해 시민당을 만들어 2.12 총선 승리를 하였다고 하는데 형식은 맞는데 실상은 영삼이 인기가 높아지자 허겁지겁 귀국하여 민한당 승리를 위해 정대철 등 자기 똘만이 당선을 위해 활동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말하다 3

 

지난번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차마 역사라고 할 수 없는) 기록을 살펴봤다. 그럼 지금부터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 속으로 들어가 진정한 역사를 논해 보기로 하자.. 논의를 간편히 하기 위해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가본다. 자아분열 인터뷰(혹은 일베와의 인터뷰)라고 생각하고 보면 되겠다.

 

Q1. 광주 시민군도 무기고를 탈취하고 계엄군을 사살하는 등 폭력 행위를 저질렀다. 이는 민주화 운동이라고 할 수 없다.

 

A. 맞다. 지난번에 봤듯이 광주 시민들도 무기고를 탈취했고, M2 중기관총을 설치했고, 시가전을 벌였고, 버스에 깔려 죽이기까지 했다. 이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폭력은 물론 정당화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말이다,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많이 올라갈 필요는 없고, 1980년 광주에서 50년 정도만 거슬러 올라가서 보자. 일제시대다. 백범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등등. 모두 폭력을 사용했고, 이는 정당화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을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한다.

 



뭐 글의 진행상 곡 필요한 사진들은 아니지만 넣어 봤다. 그래도 뭐, 보면 좋잖아.

어차피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U0Bc9e00U6E#!

요기 들어가면 윤봉길 의사 의거 당시 실제 영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영상이다.

 

다시 넘어가서


왜일까? 원래는 전제를 하나 깔고 들어가야 하는데, 우선은 이유부터 설명하겠다. 전제는 이유를 모두 설명한 이후에 말할테니 앞부분만 읽고 욕하지 마시라. 첫째는 전시에 테러라는 행위를 과연 절대악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테러라는 것은 일종의 비정규전이다. 따지고보면 일본이 군인을 동원해 조선 국민들을 학살한 정규전 (정확히는 한쪽만 정규전이지. 그리고 이런 한쪽만 정규전을 우리는 도륙이나 학살이라고 말한다.)과 독립운동가의 비정규전. 어떤 게 더 악()이라 불려 마땅한가? 비정규전은 일제의 폭압에 맞서,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우리가 선택했던 전쟁의 방식이다. ‘테러는 언제나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전쟁이라는 것과, 그들의 독립운동이 독립과 (독립운동가라지만 미국 대통령에게 임시정부를 대신 다스려 달라고 했다가 신채호 선생에게 이완용보다 더 나쁘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저 자는 없는 나라를 판다.”는 말을 들었던 남쪽 사람 하나와, 독립운동가라고도 하지만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남쪽을 침략해 전쟁을 일으킨 북쪽 사람 하나에 의해 처절하게 짓밟히긴 했지만 일단은)평화의 시대를 훨씬 앞당겼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만은 기억해야 한다. 광주도 마찬가지다. 광주의 민주화 운동에서 나타난 폭력을 절대악이라 말할 수 있는가? 대검을 차고 골목마다 돌며 사람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여성의 유방까지 도려낸 계엄군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우발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광주의 시민군을 비교나 할 수 있을까?

▲ 어머, 손이 미끄러져서 사진이 들어가버렸다. 평화를 짓밟은 이들이 이들이라는 말은 절대 안할꺼다.


둘째는 그들의 뜻이 높아서 그렇다. 누가 봐도 옳은 뜻을 위해 그들은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고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 그리고 자주(自主)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그들의 한 몸을 바쳤기 때문이다. 광주의 시민들이 외친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의! 평화! 자주! 그리고 민주주의! 그들이 외친 구호는 돈을 달라는 것도, 명예를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민주주의의 회복, 그 가치를 위해 광주의 시민들은 죽음을 향해 기꺼이 달려 나갔다.

 

그리고 더 중요한 셋째는, 그들의 행동이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배반한, 혹은 방관한 이들 보다는 정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안 쓰고 나라를 판 이완용이 있고, 폭력을 쓰고 나라를 구한 백범이 있다. 누가 더 위대한지는 자명하다. 광주도 마찬가지다. 독재에 영합하고, 반민주에 위탁해 자신의 배만 불리려 했던 세력들, 그들보다는 광주의 뜻이 더 위대할 수밖에는 없는 거다.

 

, 이제 저 세 담론의 전제를 설명하겠다. 독립운동의 테러도, 광주의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들이 권력과 야합한 세력보다 뜻이 높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 물론 인정한다. 광주에 폭력이 없었더라면 5월의 광주를 우리가 더 위대하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조차 없었다면 그날 광주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줄 알지만 그래도 외쳐보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외쳤던 민주주의의 회복을 효과적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래, 문제는 효과적인 것이었다. 백범 선생은 위대하다. 하지만, 비폭력의 간디는 더욱 위대하다. 이 사실을 나는 인정하지만, 전자가 분명 뜻을 관철시키기에는 효과적(효율성은 생명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고, 간디가 더 위대하다는 전제가 붙은 거다.)일 수 있다는 거다. 특히 상대방이 일본과 계엄군처럼 강력한 폭력으로 맞설 때, 이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의 비폭력은 곧 몰살을 의미하므로.

 

실수하기 좋은 큰 담론은 얘기하다 보니 자꾸 단서가 달려서 말이 길어진다. 사실은 단서를 백 번은 다시 말해도 모자라겠지만, 설명은 이정도로 한다. 덧붙이자면, 폭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는 건 말도 안 되는 논리다. 폭력과 민주화운동은 병존이 가능한 말이다. “우리 아버지는 교사다.”라는 문장하고 똑같다. 우리 아버지인 것과 교사인 것은 충분히 병존할 수 있는 거다. (주제와 상관없지만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걸 수십년동안 어떻게 아버지가 교사일 수 있어? 하나만 선택해야 해.”라는 말을 듣는다면 진짜 그런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걸 천재적으로 이용한게 괴벨스 아닌가.)폭력이 있으면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 레지스탕스는 독일에 저항하지 않았다.” “4.19는 혁명이 아니다.” “프랑스혁명은 시민혁명이 아니다.”……. 또 뭘 댈껀가? 폭력적인 방법의 저항도 분명히 가능하다. (또 말이 길어지기는 싫으니 단서는 그만 달도록 하자.) 민주화 운동은 비폭력 불복종 운동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Q2. 그럼 계엄군도 똑같은 거 아니냐. 그들의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지 않느냐.

 

A. 여기서 확실히 좀 하고 가자. 계엄군이나 공수부대나 나는 솔직히 그들도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뭐 실제로 광주 시민들을 빨갱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을 테지만 그 판단의 근거는 전부 독재정권에 의해 왜곡된 정보였을 것이다. 광주에 북한이 들어왔다느니 하는 뭐 그런 소리들 말이다. 그럼 여기서 질문을 바꾸는 게 낫겠다. “그럼 독재정권도 똑같은 거 아니냐. 그들의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지 않느냐.

 

이렇게 보면 첫 번째 질문에서 살짝 다뤘던 내용으로 돌아왔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다만, 폭력이 타협보다 위대해질 수 있다, 때로는. 그 전제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폭력을 사용하는 상황이 충분히 그럴 만 해야 하고, 그 폭력의 목적이 옳아야 하고, 그 폭력의 대상이 옳지 못해야 한다.

묻자. 전두환은 어째서 광주 시민을 폭력으로 진압했는가. 그리고 광주 시민은 어째서 그들의 전두환 세력을 대변하는 계엄군에게 폭력으로 대항했는가. 전자는 자기 세력의 유지를 위해서였다. 후자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였다. 무엇이 더 옳은 목적이라 보는가? 개인의 사리사욕과 민주주의의 회복.

 

그리고 생각해 봐라. 어떤 목적이던 간에 폭력에는 정도가 있어야지. 그래야 타협보다 위대한 것이라 말할 근거가 생기는 거 아니냐. 항쟁 중 사망자가 165(14세 이하도 8, 15-19세가 36명이다.), 행불이 65, 부상이 3139(이후 사망추정자 376), 구속 및 구금 1589. (사실 이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추정치에 불과하다. 위의 수치들은 광주광역시, 국방부, 5.18 유족회에서 나온 자료들이다.) 당시 광주 인구가 70만 정도라고 해도, 수백명의 사망자와 수천명의 부상자가 국민을 지키겠다는 국군에 의해 나온 것은 충분히 부끄러운 역사다. 이들 중 구속 및 구금된 이들은 보안대에서 김대중이 내란 음모를 꾸몄다는 말에 동의하도록 허위 자백을 강요받는다. 여기서 강요라는 말은 고문과 동의어다. 말하기도 싫은 정도의 고문이다. “군화로 얼굴 짓밟기” “담뱃불로 눈동자나 얼굴을 지지기” “발가락을 대검날로 찍기” “사람을 가득 모아놓고 최루탄 뿌리기” “몽둥이로 가슴 때리기” “며칠동안 물 한 모금 안주고 오줌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 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후벼파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이 피해자들 중 55% 이상이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고, 일반인의 500배 가까이 되는 10.4%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계엄군 사망자는? 경찰 4, 군인 22명이다. 그중에서 군인 9명은 시민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오인 사격으로 숨졌다. (실은 이것도 가슴아픈 일이다. 세계사적으로 전쟁을 병사들이 일으킨 적은 없다. 하지만 죽는 건 늘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군인 최초의 사망자가 나온 버스 사건에서도, 실은 버스 몰고 돌진하면 총 맞아 죽는다. 버스 안에 있는 조종사가 군인의 총에 맞아 숨지고, 무게중심이 옮겨지며 핸들이 꺾여서 군인이 죽은 것으로 보는 게 맞을 듯 하다.

 

 

Q3.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후에 대해선 어떠냐. 김대중이나 북한이 개입됐다는 거 말이다.

 

A. 김대중은 광주 민주화 운동 하루 전 새벽 2시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되었다는 말은 이미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김대중이 광주 민주화 운동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것인가? , 가능한 가설은 하나 있다. 김대중을 취조하던 합동수사본부가 실은 그의 편이어서, 그의 뜻을 그대로 광주 시민들에게 전달한 거다. (그렇다면 합동수사본부에서 그에게 가한 고문은 사랑싸움이었던 것일까!) 이 믿기 힘든 가설 하나를 제외하고는 없다. 물론 김대중이 떠나기 전 유언처럼 내가 떠나면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해라!”라고 전달하고 갔을 수도 있지.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된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발생 경과를 보면 믿기는 힘들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걸 배후조정이라고 하나? 배후조정이라는 건 사건 전체를 뒤에서 조종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적게 조종해도 그 사건의 시작 정도는 뒤에서 조종해야 되는 건 아닌가. 히틀러가 만약에 내가 죽어도 다시 나치를 부활시켜 달라고 해서 네오나치가 일어났다고 하자. 그렇다고 우리는 네오나치를 히틀러의 배후조종이라고 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북한 개입설은 199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진 광주에 북한군이 들어와 폭동을 일으켰다( A)라던지 혹은 반대로 광주 시민을 죽인건 국군이 아니라 북한군이다(가설 B)라던지 하는 설로, 처음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고, 지금은 광주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걸 반대하기 위해 사용되는 논리다. 그래서인지 조갑제나 김황식 국무총리 등 보수 인사들도 북한군 개입설은 부정하고 있는 현실이다. (뭐 요즘은 광주는 폭동이다!”하고 일베에서 외칠 것 같은 사람들이 장관 후보자로 나오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실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당시 광주에 있었던 사람이 하나도 없다. 좌천된 북한 간부가 그랬다더라, 탈북자가 들은 이야기라더라 하는 것들이지. 그리고 북한군이 국내에 침투했는데 전두환 정권에서 이걸 가만 보고 있었겠냐. 그런데 이들 중 가설 B는 더 쉽게 무너지는 게, 국군의 작전보고에 시민을 살해했다는 기록이 이미 있다. 그리고 이 군인들 훈장까지 받았고 뭐.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운동 사망자로 둔갑했다면서 지목한 인물은 실제로 민주화 운동을 한 고등학생 임모 군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당시 광주에 있던 군인의 증언도 있고 말이다. 이 가설은 반박할 증거가 너무 많아서 문제다.

 

가설 A도 그리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 당시 육군의 보고에 따르면 북한의 특이 동향은 관찰되지 않았다. 게다가 5.18을 전후해서 김일성은 루마니아에 나가 있었다. 북한군을 남한에 투입하는 데 김일성이 외국에 있는게 말이 되냐. 전쟁상황인데. 그렇다면 북한이 저 작은 전남의 한 소도시에 북한군을 미리 투입시켜 놨을 리는 없고(당시 일개 시였던 광주는 군사적으로 가치도 없을뿐더러 광주에 개입한다고 해서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결국 남는 가설은 북한군이 5.18 소식을 듣고 군인을 남파했다는 정도인데, 대대 규모 북한군이 휴전선을 넘어 내려왔다면 들키지 않을 리 없고(극소수만을 데리고 내려온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도 신고에 의해 걸리지 않았는가. , 생각해보니 요즘에는 휴전선을 넘어서 국방부에 노크만 안하면 안 들킬 수도 있겠다.), 그럼 해안을 통해 왔을 텐데 당시는 계엄상태로 모든 해안과 항만이 막혀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빨라야 20, 아니면 21, 22일 쯤 도착했을 텐데 그때는 이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고 광주로 가는 모든 길목이 철통같이 막혀있던 상황이다.

 

그리고 광주에서 멀지 않은 군산에 주한 미군의 공군 베이스캠프가 위치하고 있고(그렇다고 광주가 북한이 침입할만한 전략적 요충지인 것은 아니다. 이걸 노렸으면 군산에 직접, 아니면 옆에 익산쯤에 잠복했겠지), 당장 시내에서 20마일 정도 떨어진 광주 송정동에도 수는 적지만 미군이 주둔한 상황인데, 북한이 개입되었다면 미군이 보고만 있었겠냐. 그리고 아주 만약에 북한군이 들어왔다고 쳐도 말이다, 북한군이 국군 7명 죽이고 돌아갔겠냐.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들어왔다면 사망자가 그 정도로 그칠 리 없다. 그리고 북한군이 정말 광주에 들어왔다면, 광주 민주화운동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면 어떻게 되는거냐. 생각해 보면 진압에 실패했다면 그건 국가전복이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북한 개입을 알고도 진압을 27일까지 늦춘 거라면, 이건 국가전복 위기를 방관한 거 아닌가. (그때 광주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구호 중 하나는 김일성은 오판 말라였다.)

 

그리고 난 말이다, 오히려 미국이 문제라고 본다.

 

 

Q4. 미국이 문제라니 무슨 말이냐.

 

A. 미국은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초기에는 방관적이었지만 후에는 이 사건에 대해 경악하고 있다며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등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평화적으로 이끌어 나가려고 한 것으로 겉으로는보인다. 그런데 조금만 들어가 보자. 우선 미국 정부는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대한민국 의결기관의 승인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5.17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턴은 58일 전두환과 최규하를 만나기 전 워싱턴에 메시지를 보낸다.

 

한국 정부가 군대를 투입하는 데에 미국 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다.”

 

라고. 워싱턴에서 온 답장은 이랬다.

 

미국 정부는 법과 질서유지를 위한 한국 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데 동의한다.”

 

심지어

 

주한 미군사령부는 포항의 해병 1사단이 대전과 부산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있으며 해병 1사단은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 있으므로 병력이동에는 미국 당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아직 한국 군부로부터 병력 이동에 대한 아무런 요청이 없지만 만일 요청이 오면 미군사령부는 동의할 것이다.”


라는 외교 전문도 보낸 바 있다. 또한 미국은 특전사 대신 20사단의 투입에 동의했는데, 이는 전두환의 충신인 박준병이 사단장으로 있는 20사단을 보냄으로써 더 확실한 명령 수행을 기대한 것뿐이다.

▲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를 미국이 미리 알았다고 보도한 한겨레 기사


▲ 당시 한국으로 입항한 코럴시 호

또한 글라이스턴 미국 대사는 원래 진압 계획은 25일 이었지만 미국의 평화를 위한 노력으로 27일로 미뤄졌다고 말한다. 너무 평화를 사랑한 나머지 오늘 죽일 사람을 내일 모레 죽이다니. 이런 생명주의자가 또 있을까! 그리고 사실 이 속에는 또 하나의 음모가 숨어있다. 미국은 광주 진압을 위해 일본에 있던 미드웨이 호와 필리핀에 있던 코럴시 호를 한국으로 보내는데, 이 코럴시 호의 도착이 25일 이후로 예상되면서 진압 계획을 늦춘 것 뿐이다. 게다가 주한 미군은 미국 시민의 보호를 위해 출동 준비를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미군의 증언은 다르다.

 

"광주항쟁이 시작되자 내가 근무한 부대는 일상 업무를 중단한 채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갔으며 폭동진압훈련을 받았다. 그 대상은 일반 시민이었으며 광주상황이 악화되면 추가로 미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1980년 경기도 포천군 험프리 공군기지에서 근무했던 앨렌 바필드)

 

게다가 광주 시민들의 미국을 통한 중재 시도를 내정간섭이라며 거부하기도 했다

.

물론 미군의 영향으로 서울에서 일어날 뻔 한 이 사건을 그래도 작은 광주(이런 말 쓰기 좀 그렇다. 어떻게 숫자가 적다고 해서 그들의 죽음이 다행일 수 있단 말인가)로 옮겨진 것이나, 후일 김대중 석방을 위해 노력하거나 하는 긍정적 측면도 존재한다. 그리고 실은 미국은 신군부를 돕고 싶었다기 보다는 아프가니스탄에 소련군이 들어오는 등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민주화되는 과정의 혼란이 발생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꺼라는 추측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광주의 학살이 미군의 지지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Q5. 뭐 다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전두환이 광주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다.


왜 나만 갖고 그래

A.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뭐 당시 전두환은 계엄사령관도, 대통령도 아니었고 그냥 보안사령관 이었으니까. 하지만 전두환은 당시 광주 상황을 인식하고 황영시 육참총장을 통해 이희성 사령관에게 공수부대 파견을 요청하고 강경진압에 반대하는 윤흥정 사령관을 소준열로 교체하고 정웅 사단장을 지휘계통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당시 전두환은 대통령 이상의 권력이었다. 실제로 얼마 뒤 대통령 최규하에게 하야를 받아내고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당시 지휘계통의 가장 위에 있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전두환이 12.12 쿠테타를 통해 몰아낸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후임으로 직접 앉힐 정도였으니 말이다.(당시 전두환의 계급은 소장이었지만 10.26에 대한 수사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걸 이용해서 정승화가 10.26과 관련이 있다며 보내버리고 자기의 가신인 대장 이희성을 앉힌 것이다. (소장이 대장을 임명하다니! 호연지기가 엿보인다.)) 또 여러 문서에 따르면 () 각하께서 자위권 발동을 강조하셨다.”는 말이 나온다. 기무사에서 보존하고 있는 육군총장 비서실 문건에 따르면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실제로 광주 진압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며,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는 직접 강경 진압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또한 527일의 재진압을 논의하는 회의에서도 전두환은 참여하여 작전 시행을 결정하기도 했다.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계엄사령관을 몰아내고 자기 충신을 앉히고(5.16의 장도영같은 역할이라 보면 되겠다.) 한달도 안되서 대통령이 될 것이 확실한 사람보다 높은 자리가 어디 있겠냐. 그리고 그 사람의 허락 없이 진압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냐.(물론 명령 없는 발포는 몇 있었다. 그리고 발포한 군인들은 전두환에 의해 훈장을 받는다.))

 

그리고 전두환이 자기 입으로 말했다. “광주는, 하나의.... .... 폭동이야.” 저 뒤에 생략된 말이 그래서 내가 진압하라고 명령했어.”그래서 내가 진압하지 말고 폭도들이 나라를 점령하도록 놔두라고 했는데 자기들이 발포를 했어.” 중에 무엇이 상식적인 지는 알아서 판단하시길 바란다. 다만, 당시 발포한 군인은 전두환의 이름으로 훈장을 수여받았다는 점만 다시 강조하기로 한다.

 

뭐 이정도면 논의가 마무리될 듯하다. 뭐 이미 거짓임이 밝혀진 시민군에 의한 사상자가 국군에 의한 사상자보다 많다는 이야기나, “시민군이 북한이 사용하는 소총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따로 다루지 않겠다. 한 가지 이야기로 끝마치자. Outro정도로 생각해주면 되겠다.

 

위에는 쓰지 않았지만 그 해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다른 지역의 민주화 운동이나 6.10 항쟁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고, “세계적으로 본받을만한 사례라는 평을 여러 곳에서 듣고 있다. 전국적으로 연대하지 못한 국지적 투쟁의 한계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광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참 뒤에나 알게 한 그 강력한 언론통제 하에서 어떻게 연대가 가능했겠나.) 그런데 내가 위에서 딱히 그 의의를 써내려가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이 아픈 과거가 의의를 갖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에서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광주가 영향을 줘야 할 만한 독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당시 광주에 있었던 수많은 증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진압군에게서 술냄새가 났다고 한다. 이는 광주 시민들 뿐 아니라 당시 진압에 참여한 한 준장의 증언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을 학살하던 독일 군인들은 마약 없이는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민주화 운동이 필요할 만한 독재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 의의를 쓰지 않을 정도까지 온 것은 저 이야기가 생각나서 그렇다. 민주화 운동 세력과 군인. 촛불을 든 시민과 전경. 실은 모두가 무엇이 잘못된건지 알고 있다. 실은 모두가 무엇을 고쳐야 하는 지 알고 있다. 그래서 실은 모두가 누구를 향해 그 총구를 겨눠야 하는 지 알고 있다. 무엇이 옳은 일인 줄 모두는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누군가는 총구를 반대로 겨눠야만 한다. 세상의 모든 힘이란 힘은 그에게 저 반대쪽에 총구를 겨누라 명령하고 있으므로.

 

전두환 정권도 없고, 박정희도 없고, 어떤 독재적 권력도 없는 이날 대한민국에서 다시금 이것을 꺼내드는 것은, 이 아픈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마무리는 당시의 사진으로 하겠다.


▲ 구타당하는 시민


▲ 출소 후 망월동 묘지를 찾은 김대중.

▲ 망월동 5.18 희생자 묘지


▲ 5.18 민주항쟁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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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zahir 2013.04.14 00:34 신고

    그 때 그곳에 있었던 23살의 특전사는 죽을 때까지 나그네로 떠돌며 결국엔 이 땅과 결별 선언하고 그렇게 날아갔지. 그의 영혼은 그 건장한 몸과 반대로 너덜너덜해져서 멈추어 있지 못했거든. 그는 스스로를 부정하느라 별로 길지 않은 삶을 마감했지. 국가라는 이름으로 한 개인을 난도질해 놓구서는 그게 애국하는 거라구?

  2. 2013.04.14 00:49

    비밀댓글입니다

  3. 모르세 2013.04.19 01:29 신고

    오늘 하루도 빛과 사랑으로 엮어가는 시간이 되세요

지난번에는 과잉 진압으로 분노하기 시작한 시민까지 이야기했다. 계속 이어가보자. 여기서부턴 시간 순서로 배열해본다. 날짜를 달고 이어질 다음 내용들은 어쩌면 비겁한 중립 노선을 택할 것이다. 그냥 덤덤히 팩트만을 전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 비겁함을 탈피하는 건 팩트를 전한 다음의 일이 될 것이다.

 

518

앞서 이야기했던 정치인 연행, 가택연금, 전남대 학생 시위와 과잉진압이 지나고, 오후 340분 경에 청각장애인 김경철이 구타당하고, 대학생 중심이던 이 시위는 일반 시민의 공분을 불러 일으킨다. 이에 계엄사령부는 시위를 막기 위해 통금 시간을 9시로 앞당긴다고 발표한다. 그 시간이 정확히 오후 72. 아마 그 시간에도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들은 닥치는대로 시민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쯤 되어가니 광주 시민들은 분노는 더욱 커진다. 그리고 그 속에 섞인 절망적 불안은 이 분노를 더 키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시민들은 대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기 시작한다.

 

전남대학교 앞에서 시위하는 대학생


519

새벽 3시경 병원으로 후송된 청각장애인 김경철이 사망하는 한편 광주로 증원군이 도착한다. 아침이 밝자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가 시위를 시작했고, 누문동 파출소를 방화한다. 점점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의 수가 많아지자 금남로에서는 투석전이 전개되었고, 증원군으로 온 11 공수여단 천여 명이 대검을 차고 시위 현장에 투입된다. 여전한 강경 진압으로 칼에 찔리는 사람이 속출한다. 3~4명이 한 조가 되어 거리를 누비며 골목마다 보이는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다. 이에 광주시의 기관장들과 유지들이 진압을 완화해 달라는 청원을 보내지만 오히려 고등학생 한 명이 최초의 실탄 사격으로 총격 부상을 입을 뿐이었다. 8시경이 되자 더 많은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하여 수만 명이 구호를 외친다.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 사망 조서


시민을 구타하는 계엄군


520

점점 시위대가 불어나고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참여하자 광주시 및 전남 지역 일부 학교에 휴교령을 내린다. 열 시쯤 되자 카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은채로 끌려나와 구타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속옷 바람으로 연행되는 시민


오전과 오후 내내 이같은 공수부대의 시민을 향한 무차별 폭력이 계속된다. 여기서 택시와 버스가 시위에 합류한다. 오후 640, 모든 택시와 버스가 동시에 도청을 향해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시작한다. 경적 시위로 시작된 버스와 택시의 시위 참여는 8시가 되자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진입을 가로막는 사건까지 이른다. , 이제 버스와 택시 200여대를 사이에 두고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대치하기 시작한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3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에 실탄이 분배된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진압대와 버스·택시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버스에 깔려 진압대 4명이 숨졌다. 이 사건 이후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MBC 방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밤 11시 경,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은 실탄을 발포한다. 결국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가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입는다.

경찰을 향해 돌진하는 버스


521

새벽 1235분경 광주역에서 계엄군이 대검과 곤봉 등을 이용해 시위대 2명을 살해한다. 218분 시외전화가 두절되고, 4시 경에는 광주역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시민들이 금남로에 등장한다. 아침에는 시위대와 진압대 간 협상의 자리가 있었으나 끝내 결렬되었다. 시민들은 광주 KBS 건물을 방화하고,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또다시 진압대와 충돌한다.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차량을 탈취한 시민들과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를 앞세운 진압대가 도청 앞에서 대치하고, 대형 헬기까지 동원된다. 이 시각이 1110분이다. 동원된 헬기를 통해 전남도지사는 정오까지 계엄군 철수를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1210분 경 공수부대원에게 밀린 시위대는 1km 가량 후퇴한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4명이 숨진다. , 그리고 1259, 아시아자동차에서 탈취한 장갑차 한 대가 기습 진출한다.

구타당해 피를 흘리는 와중에 연행되는 시민


이것을 계기로 1시 정각부터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된다. 공수부대원들 또한 옥상에 올라가 조준 사격을 가한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광주 시내의 120여개 병원과 보건소, 3개의 종합병원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환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집단 발포에 경악한 시민들은 화순, 나주 지역의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해 무장을 하기 시작한다. 348분 경 공수부대원들은 또다시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한 조준 사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4시경 화순, 나주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가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M2 중기관총 2대를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하자 군대는 철수한다. 철수한 군대들은 광주를 완전히 포위해 완전히 고립시킨다. 시민들은 도청을 점거한다

.

당시 전라남도청의 외관

 

522(해방 광주)

이날부터 광주는 시민군이 점령하게 된다. 시민군이 점령하는 기간에도 독재 반대 시위는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해방 광주의 시기 동안 광주는 안정을 찾아간다.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확보했다.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을 벌이는 한편, 전라남도부지사를 비롯한 공직자들은 정상 출근하여 행정 업무에 적극적 역할을 했으며, 빈 자리는 시민군이 메웠다. 이 기간 동안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고, 단 한 건의 약탈도 일어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의 높은 시민의식을 보여주는 상징적 기간이다. 하지만 6시 경에는 진입로 확보를 위해 전진하던 계엄군에 의해 주민 8명이 총격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한다.

 

523(해방 광주)

시민들은 청소에 협조하고 무기를 자진 반납하고, 사망자를 찾기 위해 활동하는 등의 행동을 보인 반면에 공수부대는 소형 버스에 총격을 가해 시민 17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524(해방 광주)

공수부대가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던 소년들에게 총격을 가해 4명이 사망한다. 또한 계엄군끼리 오인 사격 사건이 발생해 계엄군 9명이 사망한다. 이 사건 직후 계엄군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을 처형한다.

 

525(해방 광주)

김수환 추기경이 구호대책비 천만 원을 전달하였고, 학생수습대책위원들은 치안 유지와 식량 공급, 청소 방법을 논의한다.

 

526(해방 광주)

새벽부터 계엄군이 압박해오자 시민군은 죽음의 행진을 감행한다. 계엄군 바로 앞까지 가서 시위를 벌이는 것이다. 이후 시민군은 이날 밤 계엄군이 침공할 가능성이 큼을 인지하고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한다. 그리고 자정, 시내전화가 일제히 두절된다.

 

527

새벽 2,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한다.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는 시각이 3, 이 때 시내 가두방송으로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새벽 4시경 도청 주변이 완전히 포위되고, 10분 뒤 계엄군이 사격을 시작한다. 5, 결국 생존자들은 자수하고 나머지 시민군들은 전부 사망. 시내 전체를 계엄군이 장악하고, 850분 시내전화 통화가 재개되며 광주 진압 작전은 종료된다.

 당시 광주의 계엄군 모습.


 

518일부터 527일에 이르는 그날, 광주의 역사를 기록으로만 살펴봤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역사. 역사에 주관이 완전히 배제된다면 그것은 자료연표에 지나지 않는다. 자료의 경중과 해석이라는 주관을 자료속에 불어넣어주는 이가 역사가다.

그렇다. 저 위에 쓰인 것은 역사가 아닌 거다. 그렇다면 이제, 저 자료에 숨을 불어넣어 역사로 만들 일만 남았다. 3편에서는 그것을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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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zahir 2013.04.06 14:07 신고

    장황하게 쓴 댓글을 날려버리고 나니, 맥이 빠져서 간단하게 써야 하겠네. 역사의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는 개인의 몫이겠지. 이런 지점에서 늘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고. 훌륭합니다^^

 # 오늘부터 비더슈탄트, 5월의 광주를 말한다를 연재합니다.  총 3부작으로 연재되며, 매주 토요일 연재될 계획입니다.



지난 해 박근혜 후보가 대선에 출마하면서 유신이나 박정희같은 말들은 많이 떠돌아다녔고, 박정희의 친일과 좌익 경력, 그리고 유신의 배경과 실체까지 낱낱이 파헤친 글과 방송도 많이 나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정희에 관해서는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비중으로 문제가 되면서 (사실 같은 시기는 아니다. 이게 이슈로 떠오른 시점은 대선 이후 일베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이다.) 방송이나 글에서 자주 다뤄지지 않은 사건이 하나 있다. 5.18이다.

 

광주는 폭동이다!” 한 유저가 글을 올린다. 그럼 일베로가 수백 개, ‘민주화가 수십 개 쯤 달린다. 여기서 민주화를 누르는 사람들의 심리는 다 아는 얘기를 뭘 또 하느냐는 심리다. 그래,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 얘기다. 우리가 오늘 논할 것은 그 사이트에 대한 것이 아니다. 누구는 폭동이라 비하하고, 누구는 민주화 운동이라며 희생자를 추도하는, 그러면 또 어디선가는 국가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인정했다는 낭설이 퍼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얘기다.

 

우선 5.18의 배경부터 이야기해 보자.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유신 헌법의 시대가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으로 가고, 정권이 혼란스러워질 무렵 군대 내에서는 떠오른 한 명의 장군이 있었다. ‘각하, 군대 내에도 충신은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며 박정희의 정치 참여 권유를 뿌리치고 군대에 남은 그, 전두환이다. 전두환은 12.12 쿠테타로 군대 내 실권을 장악하고, ‘북괴남침설등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정권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민당과 (심지어) 공화당 등 정치권은 민주화를 위한 개헌 일정을 앞당기며 개헌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게다가 5월이 되며 서울의 봄이라는 학생들의 시위가 봇물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디테일은 후일 관심이 사라질 때 즈음 쓰게 될 유신의 역사의 뒷부분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서울의 봄 당시의 사진


▲ 서울역 앞에 모인 10만여명의 시민


이정도 해 두고 515일로 간다. 515, 서울역 앞에서는 10만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계엄 해제와 민주 회복을 외쳤다. 그래, 그 날은 서울의 봄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집회가 8시를 넘기자 운동권의 핵심 멤버들은 회의에 들어갔다. 너무 많은 인원이 모여 통제가 어렵고, 시간이 늦으면 시위대의 귀가 시 안전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회의에 참가한 대표적 멤버는 심재철 (서울대 학생회장), 신계륜 (고려대 총학생회장), 형난옥 (숙명여대 총학생회장), 이해찬 (서울대 복학생 대표), 유시민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이수성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등이다. 지금의 정치권에서도 듣기 어려운 이름들이 아니다. 여기서 매파유시민과 비둘기파심재철의 주장이 나뉜다.

   

▲ 서울의 봄 당시 심재철 서울대 학생회장


예상했던 것 보다 너무 많은 인원이 모였다.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대로 청와대로 진군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심재철)

 

▲유시민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여기서 해산하자는 것은 자살하자는 것과 같다. 여기서 물러나면 신군부가 어떤 보복 행위를 할지 모른다. 이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결단코 오늘 밤,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유시민)


여기서 심재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야겠다. 뭐 읽다보면 알겠지만 이 심재철이란 사람의 퇴각 찬성 입장이 앞으로 어떤 참사를 불러오는 지 똑똑히 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제부터 할 이야기에 우리가 가진 책임보다 그가 가진 책임이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이 사건 이후 심재철은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증인으로 서게 된다. 당시 법정에 선 모든 증인이 (김대중이 내란 음모를 꾸몄다는) 자신의 자백이 고문으로 조작되었다는 것을 밝혔지만, 심재철만이 이를 밝히지 않고 김대중이 내란 음모를 꾸몄다는 자신의 증언을 이어나간다. (이때 심재철이 가장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고문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심재철의 이 증언만으로 김대중의 내란 음모죄는 성립되어 사형이 (구형도 아니고) 선고된다.

이때 김대중은 말했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 달라


▲ 연행된 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 사형 선고를 받는 김대중. 문익환 목사의 모습도 보인다.


이 말은 바다를 건너 지미 카터 대통령의 귀에, 로마 교황청의 귀에, 국제엠네스티의 귀에 들어간다. 퇴임하는 카터 대통령은 로날드 레이건 차기 대통령에게 김대중만은 석방시켜 달라.”고 말했고, 교황청과 엠네스티도 김대중의 석방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김대중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다.

 

, 그리고 이제 심재철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리고는 본회의장에 들어가 누드 사진을 검색해 본다. 새누리당의 그 심재철 의원이 바로 이 심재철이다.

 ▲ 국회 본회의장에서 '누드 사진'을 검색해 보는 심재철 의원


, 물론 인정한다. 심재철이 없었더라면 그날 밤, 10만명의 군중은 신군부의 총탄에 희생되었을지도 모르지. 이 일을 두고 몇몇 사람들은 심재철이 대한민국을 구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틀린 말이다. 심재철은 대한민국을 구한 적 없다. 심재철이 구한 건 신군부의 독재 정권이고, 대한민국 민주화의 퇴보였다. 만일 그 날 군중들이 돌아가지 않았다고 해도 신군부가 총을 쏠 확률은 낮았다. 미국이 원치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나면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을 지는 뻔히 보이지 않는가. (생각해 보면 515일 밤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 다시 돌아가자. 어찌됐든 심재철의 의견은 결국 관철된다. 이에 따라 이수성은 내무부 장관과 총리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모든 시위 군중들의 안전귀가를 약속받는다. 그렇게 심재철은 해산을 선언한다. 이 사건이 바로 서울역 회군이며, 서울역 회군으로 짧지만 강렬했던 서울의 봄은 끝난다. 516일부터는 정상수업을 받으며 시국을 관망하기로 전국총학생회장단은 결정한다. 그리고 하루만에, 전두환 세력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5.17 쿠테타를 일으키며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다음날 김대중 등의 정치인은 연행되었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가택 연금되었으며, 2600여명의 재야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비상계엄령 뿐 아니라 정치금지령, 언론 검열령과 휴교령이 함께 내려진다. 이에 군대가 대학교 내에까지 들어오게 된다. 전북대에서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 잡아들여 폭행했으며, 이에 쫓기던 농학과 2학년 이세정은 옥상에서 떨어져 추락사한다. 전남대에서는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한다. 이 시위를 전두환 세력은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의도적으로 과잉 진압한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참여한 회의에서 과잉진압을 요구한 기록이 남아있다.) 전남대학교 진압 작전, 작전명 '충정'이었다.

 



 5월 17일 연행되어 감옥에 들어간 김대중 대통령과 면회를 온 이희호 여사

▲ 붉은 수인 번호 9번의 김대중. 붉은 수인 번호는 사형수에게 붙히는 색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두환은 이때 대통령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최규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군 보안사령관, 합동수사본부장,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등을 맡고 계엄사령관 이희성을 실질적으로 조종하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5.18 관련 재판에서 전두환이 무기징역을 받은 것과 달리 이희성은 7년형 밖에 받지 않은 점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12.12 이후 군부 내 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1인자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었으며, 5.18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자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91일 취임한다. 대통령이 아니라고 그가 명령을 내린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는 대통령보다 위에 있었다. 최규하가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사실상 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계엄 사태에서는 대통령보다 계엄사령관의 권력이 우위에 있는 측면이 있다. 국가권력의 1인자, 신군부의 1인자, 계엄 상황을 총괄하는 계엄사령관을 조종하고 보안사령관까지, 그가 5.18을 지시-주도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뭐 전두환과 5.18이 직접 관련이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끝에 가서 다시 하기로 하자.

 

뭐 어찌됐든 이날 진압은 너무 과했다. 시민이라면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어도 곤봉 등으로 때리고, 특히 청각장애인 김경철은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귀가하다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구타당하고 뇌출혈로 사망했다. 시민들을 모아놓고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군용 트럭으로 올라타라고 말했으나, 청각장애인이었던 그는 이 말을 듣지 못하고 트럭에 오르지 못하고, 이 때문에 곤봉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이쯤 되니 시민들은 점점 분노하기 시작했다.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과잉 진압으로 점점 일이 커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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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zahir*~ 2013.03.30 16:09 신고

    앎으로 세상은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진보할 수 있으리라. 그 믿음이 희망이 된다. 이런 글을 피력할 수 있는 그대를 바라보며 다시, 조금 더 나아질 세상, 모두의 아름다운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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