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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 번째 위기

소멸과 변화의 갈림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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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 기독교 탈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주 영국 <가디언> 지는 세인트 메리 대학교의 연구 결과를 인용, 영국 내 무교도가 기독교도의 수를 앞질렀다고 전했다.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였던 영국에서, 종교를 버리는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에서 집계된 무교 인구는 전체의 48.5%였다.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를 모두 합한 기독교 인구는 43.8%였다. 근소한 차이로 무교 인구가 앞선 것이다.


 특히 무교 비율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2011년에 집계된 무교 비율을 보면, 25% 정도에 그친다. 몇 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성장한 것이다. 기독교도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특히 성공회의 경우 신도 유출이 심각한 수준이어서, 새로 1명의 신도가 유입될 때마다 12명의 신도 유출이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기독교의 몰락은 최근에 와서야 벌어진 일은 아니다.




 기독교의 첫 번째 위기는 18세기 후반에 있었다.


 18세기는 흔히 ‘계몽의 세기’라고 불리지만, 사실 18세기 전반은 기독교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서 그랬다.


 가톨릭의 사례를 보자. 전체 인구 대비 성직자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헝가리에선 수도원의 수가 50년 만에 거의 두 배로 성장했고, 폴란드에선 3분의 2가 늘었다. 1750년대에 프랑스에만 8천 개가 넘는 수도원이 있었다.


 거대한 순례객의 행렬도 줄지 않았다. 1600년대에 매년 평균 12만 명 정도가 찾던 오스트리아의 성소 ‘마리아첼’을, 1753년에는 37만 명이 찾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언장에, 수도원에의 기부와 본인을 위한 미사 봉헌을 부탁했다. 출판되는 도서도 대부분 종교서적이었다.


 신교도 다를 바 없었다. 종교개혁의 열정이 쇠퇴하며 신도들의 열성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독일에서는 ‘경건주의(Pietism)’가, 영국에서는 ‘감리교(Methodism)’가 성장하며 신교를 다시 한 번 부흥시켰다.


 특히 영국 감리교의 역할은 대단했다. 평민들을 대상으로 종교 운동을 펼친 감리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10만 명 넘는 추종자를 끌어들였다. 경건, 노동, 자기수양 등 신교의 교리는 대중에게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문제는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나타났다. 종교적 회의주의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예수회의 몰락’은 주목할 만하다. 가톨릭 종교개혁을 주도하며 종교적 경건성의 최전방에 섰던 예수회는, 가장 강력한 가톨릭 국가라는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각국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종교가 관장하던 수많은 부분을 이제 국가가 관리하기 시작했다. 문화적으로도 바로크 양식의 쇠퇴가 시작됐다. 종교적 강력함을 표현하던 바로크 양식은, 장식적이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대체되었다. 교육도 이젠 교회가 아니라 학교의 몫이 되었다. 유언장에서도 이젠 종교가 아니라, 유산 상속권 문제가 가장 중요해진다. 거대한 계몽주의의 물결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 그것은 기독교가 맞은 첫 번째 위기였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기독교의 몰락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여전히 민중들은 기독교적 문화를 내면까지 흡수하고 있었으며, 시민 사회에서는 오히려 종교적 신심이 강화되고 있었다. 특히 종교가 국가와 분리되면서 각국이 신앙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 중요했다.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더 활발해졌다.


 여전히 신학교의 영향력은 강력했고, 작은 마을에서 성직자가 가진 영향력은 거대했다. 기독교의 문화적 전통은 무너지지 않았고ㅡ 오히려 확장되고 있었다. 무신론과 이신론이 확대되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주 습관처럼 교회에 나갔다.


 기독교의 국가적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기독교도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기독교도의 수가 직접적으로 줄어든 것은 양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인류 사상 가장 끔찍한 재앙이었다는 세계대전은 말 그대로의 전면전이었다. 온 국민이 하나 빠짐없이 전쟁에 참여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갔고, 그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후방에서 전쟁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병사만 1천만에 달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병사는 2천 5백만에 달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선 민간인 피해도 극심해서, 5천만 명 가까운 민간인이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종교적 회의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사망한 사람들은 제대로 미사도 받지 못하고 숨졌다. 전쟁터에 죽음을 위로할 수 있는 신부가 얼마나 있었겠는가. 교리에 따르면, 그들은 지옥에 가야 했다. 최소한 연옥에 가야 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다 전쟁터에서 학살당한 군인들이 지옥에 가야 한다니.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다. 대체 하나님이 있다면 우리는 왜 이런 끔찍한 고통을 겪고 살아가는가. 그 고통 속에서 죽어간 이들을, 성사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원한 불구덩이에 넣는 신은 대체 어떤 신인가. 그는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는가. 사회 전체에 회의주의가 짙게 배어들었다.


 유럽에서 기독교도의 수가 직접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때로 완전히 종교를 버렸고, 때로는 새로운 종교를 찾아갔다. 유럽에서 불교도가 생겨났고, 신흥 종교가 힘을 얻어갔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힘은 약화됐다. 유럽의 탈기독교화가 가속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두 번째 위기는 양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기독교는 세 번째 위기를 맞고 있다.


 세 번째 위기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리버럴의 확장’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권위를 부정하고, 최소한의 억압만을 원하고, 구시대적 윤리관념을 떨쳐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움을 원하는 세대가 등장했다.


 그동안 종교가 세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종교는 이제까지, 새로운 신자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다. 기독교도인 부모를 따라 자식 세대도 자연스럽게 예배에 참석했다. 기독교는 세습됐다. 그 세습만으로도 크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세인트 메리 대학교의 연구 결과를 다시 끌어와 보자. 부모가 성공회 교도일 경우, 자녀가 종교를 이어받은 경우는 52%에 불과했다. 41%는 무교를 택했다. 가톨릭 신도의 자녀 역시 38%가 무교를 택했다.


 새로 등장하는 세대는 종교의 권위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습득한 윤리관에 의해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한다. 만약 종교가 자신의 윤리관을 고치라고 강요한다면, 그들은 윤리관이 아니라 종교를 버린다. 종교가 새로운 세대의 사상을 따라가지 못하는데, 종교의 영향력마저 줄어들다 보니 사람들이 얼마든지 종교를 떠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동성 결혼 허용 논란, 낙태 허용 논란, 이혼 허용 논란, 안락사 허용 논란에서 종교가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됐다. 젊은 세대는 이런 윤리적 잣대를 원하지 않는데, 기독교 입장에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문제가 이것들이다. 젊은 세대와 교회 사이의 결별에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이유다.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원하지 않는 자유주의의 확산이, 기독교의 세 번째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기독교는 그렇게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마음에 위안을 주기도 하고,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윤리 강령을 제시해 사회가 유지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사람들이라고 종교의 그런 역할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종교는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기독교의 근거지였던 유럽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사람들은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 주는지 알면서도, 자유주의를 택하고 있다. 영국에서 기독교 인구를 무교 인구가 앞질렀다는 것은 어떻게 봐도 놀라운 신호다.


 기독교의 보수성이 젊은 세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미래가 점점 더 어두워질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시간이 갈수록 기독교도는 줄어들 것이며, 이 세 번째 위기가 끝날 때 즈음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도가 남아있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기독교에게도,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멸과 변화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시간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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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과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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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사회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지표가 무엇일까? 역사라는 것이 어차피 사후 평가기 때문에, 사실 모든 숫자는 어떻게 끼워 맞추기만 하면 해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언제나 인구론 쪽에서 나오는 것 같다. 왜, 소련의 멸망을 예견한 유일한 사회학자는 ‘에마뉘엘 토드’라는 인구학자였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사실, 중세에서 근대까지 유럽 인구는 한참동안 거의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자녀는 두 명 남짓이었다. 평균으로 따지면 2.1명에서 2.2명 정도 됐는데, 이 0.1~0.2 정도 되는 근소한 차이는 몇 번쯤 유럽 대륙을 쓸어나갔던 전염병에 의해서 상쇄되었다.


 사실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지 못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만한 충분한 식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종 수십 년 동안 한참이나 인구가 증가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러고 나면 꼭 뒤에 흉작이 들어 자연스럽게 인구가 조절되곤 했다. 우리는 ‘인구 조절’이라는 간단한 말을 썼지만, 따지고 보면 대규모 아사가 발생했다는 의미다.




 결국 유럽 인구의 그래프는 상승과 하강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평시에는 인구가 서서히 증가하다가, 전염병이나 기근이 닥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이다.


 사실 전쟁은 인구 감소에 직접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아직 전면전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이라, 전쟁 중에 칼에 찔려 죽는 사람의 숫자가 유럽 인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는 힘들었다. 다만 전쟁 중에는 전염병이 훨씬 잘 퍼지고, 군대 유지로 인해 세금을 많이 걷어가거나 농지가 황폐화되면서 기근이 발생하기는 했다.


 그렇게 보면, 굶주림은 인간에게 언제나 일상이었다.


 이런 자연스러운 균형은 18세기까지 별다른 무리 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18세기쯤 되면 이 인구 조절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유럽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데도, 사람들이 더 이상 죽어나가지 않는 것이다. 인구의 증가세는 오히려 가속화된다.


 의료나 위생에서의 발전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농경에서의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이 시기 농업에서는 두 가지 변화가 벌어졌다.


 첫째, 신대륙에서 감자와 옥수수가 들어왔다. 흔히 ‘구황작물’이라고 하는 작물로, 이들은 척박한 토양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잘 자라는 식물들이다. 흉작이 들었을 때에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기를 수 있다.


 특히 옥수수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밀은 한 알을 심었을 때 20-30알 정도를 수확할 수 있는 반면, 옥수수는 200-300알 정도의 수확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빵을 먹지 못해 죽을 일은 없었다. 옥수수를 먹으면 되니까.




 둘째, 농업 기술에서 혁신이 일어났다. 흔히 ‘농업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중세 사람들은 ‘삼포제’라는 농업 기술을 활용했다. 유럽이 흔히 먹는 ‘밀’이라는 작물은 상당히 많은 지력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다. 요즘이야 화학비료도 있고 농약도 있지만, 그 때에는 그런 게 없었으니 무엇보다 ‘지력의 유지’가 밀 농사의 핵심이었다.


 지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가장 좋은 방법은 비료를 쓰는 것이다. 말했듯 당시에는 화학 비료가 없었으니, 비료는 곧 동물의 배설물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러려면 동물을 키워야 하고, 그러려면 또 많은 양의 목초지가 필요했다. 비료를 만들자고 농경지를 목초지로 바꿀 수는 없으니, 사람들은 그냥 농사를 짓지 않고 한참 동안 땅을 그냥 놓아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결국 이들은 지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땅을 ‘봄에 농사짓는 땅’ ‘가을에 농사짓는 땅’ ‘휴경지’로 나누어 번갈아가며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18세기쯤 오면 이 삼포제에 변화가 생긴다. 삼포제 자체가 훨씬 더 정교하게 진화한 것은 물론이고, 동물을 먹이면서도 지력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클로버’나 ‘순무’ 같은 작물을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휴경지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휴경지에는 클로버나 순무를 심고 동물들을 사육하면 되니까.


 농업의 생산량이 그렇게 획기적으로 뛰어올랐고, 사람들은 더 이상 아사할 필요가 없었다. 인류를 늘 괴롭혀 왔던 아사의 굴레에서 일대 탈출의 기운이 보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류가 완전히 아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농업 혁명과 구황작물 도입에도 한계는 있었으니까. 인구가 더더욱 많이 증가하면, 어쨌든 인류는 다시 또 한 번 아사의 물결에 휩쓸려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사건이 더 벌어진다.


 상상해 보자. 원래 하루 종일 일해서 겨우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벌던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제 생산성이 늘어나면서, 하루 종일 일하면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여유 있게 벌 수 있다. 약간의 비축분 정도야 저장해 두겠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남으면 어떻게 될까. 시장에 가져다 팔면 된다.


 당시 유럽은 어느 정도 시장 경제가 발달되어 있던 상태였다. 최소한 농민들이 나가서 밀을 팔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이들은 나가서 밀을 팔았고, 대가로 귀금속을 받았다. 주로 은화였다. 이 은화를 쌓아두지만은 않았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사들였다.


 이맘때쯤 중세 유럽의 서민 가정에는 다양한 가구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달력이나 거울과 같은 ‘사치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윤택해졌다.


 이걸로 끝일까? 아니다. 시장경제의 맛을 본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기 시작한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이들은, 노동 시간을 늘리기 시작한다.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노동 시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꼭 농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결국 이런 추세는 도시에까지 확장되고, 농업 노동자를 포함한 유럽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시장에 팔기 위한 물건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이걸 ‘근면 혁명 (Industrious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면 유럽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부의 양이 늘어난다. 유럽 사회는 농업 혁명에 이은 또 한 번의 혁명을 겪었다. 이제, 유럽이 아사 없이 품을 수 있는 인구의 숫자는 조금 더 늘어났다.




 하지만 근면 혁명의 영향력 역시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노동 시간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는 거니까. 이 사회가 가질 수 있는 부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고, 인구가 더 늘어난다면 다시 인류는 아사의 굴레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사건이 벌어진다.


 우선 근면 혁명이 발생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잉글랜드에서 농업 인구 비중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놀라운 수준이었다. 사람들의 절반이 농사를 짓지 않았음에도 먹고 살 수 있었다. 도시에는 일자리가 있었고, 그 일자리에서 돈을 벌면 식량은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임금도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


 수많은 노동력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 도시 중 일부 지역에는 이미 선진적인 금융 체제가 자리잡고 있었고, 자본력을 대줄 수 있는 은행이 발달해 있었다. 교역로도 대단히 발전한 수준이라, 운송료도 많이 받지 않고 농촌의 식량을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었다.


 핵심이 된 지역은 잉글랜드, 특히 런던이었다. 런던은 이 모든 조건을 한 몸에 가지고 있던 땅이었다. 토지도, 노동도, 자본도 싼 값에 구할 수 있었던 땅. 주변에 석탄 광산이 많아 동력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충분히 실험을 감행할 수 있었다. 실패해도 얻는 패널티가 적었으므로.


 그리고 한 차례의 실험이 있었고, 그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산업혁명이었다.


 ‘산업 혁명 (Industrial Revolution)’은 산업의 모양새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기계의 발명과 특허의 발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기계는 운영비가 저렴했을 뿐 아니라, 때때로 물건의 품질도 혁신적으로 개선시켰다. 기계의 등장은 사소한 원가의 차이나 운송비의 차이 정도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혁신이었다.




 이제 생산성은, 이전 두 차례의 혁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뛰어올랐다. 인류는 아사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산업혁명의 본질은 생산성의 증가였다. 농업 혁명이나 근면 혁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효율성이 이전의 두 혁명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을 뿐이었다.


 산업혁명 이전과 현대에서 종종 유사성을 발견하곤 한다. 혁명, 이제는 아사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하지만 인구가 늘어날수록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불안감의 엄습.


 200년 전의 인류는 산업혁명으로 그것을 이겨냈다. 그 혁명의 힘으로 200년 넘는 동안의 인류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이제는, 그 동력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자리의 끝없는 감소, 전 인류적으로 나타나는 서로에 대한 증오, 극우의 득세, 기계로부터의 위협, 철학의 실종. 21세기가 문을 연 지 20년도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세기 말에 서 있는 기분이다.


 200년 전 이맘때에는 산업혁명이 벌어졌다.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총동원한 혁명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혁명의 가능성이 있는가. 산업혁명과 같은 거대한 자원 혁명은 불가능하다. 농업에서의 혁신도 크게 벌어질 수 없고, 더 이상의 근면 혁명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런 것들이 인류에 거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는 이미 지나버렸다. 또한 우리는 지구 위에 놓인 자원에 대해서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으며, 토지도 자본도 노동도 한계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어쩌면 이제 다시,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인류 안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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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신뢰,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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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르네상스 이후로 시작된 근대는 대부분 ‘합리의 시대’나 ‘이성의 시대’로 표현된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막상 실상을 들여다보면 별로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어제는 사전에서 ‘defenestration’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이 길고 복잡해 보이는 단어는 ‘(사람·사물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기’라는 의미다.


 문득 예전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어렸을 때 영어 학원에 다녔었는데, 2층에 있는 강의실에 원어민 선생님 한 분이 한글로 이런 문구를 붙였었다.


 “나는 나쁜 아이를 먹어요.”


 나쁜 학생들은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겠다는 (...) 농담 섞인 말이었다. 그게 왜 지금까지 기억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기억 덕분에 그냥 넘겨버릴 수 있는 단어 하나에 대해 공부를 좀 해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1618년 보헤미아 땅에서 발생했다. 종교개혁이 확대되고 유럽이 근대를 향한 걸음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이다.


 당시 유럽은 수많은 갈등 요인을 갖고 있었지만, 그중 가장 거대했던 것은 신교과 구교 사이의 갈등이었다. 특히 보헤미아처럼 한 국가 내에 신교과 구교의 세력이 비슷한 경우에 큰 문제가 되었다.


 보헤미아에서는 1608년 ‘복음 연방(Evangelical Union)’이라는 신교 영주 동맹이 구성되었고, 이듬해에는 구교 영주들이 이에 대항해 ‘가톨릭 동맹(Catholic League)’을 결성했다. 상황이 이렇게 위험하다 보니, 이제까지의 보헤미아를 다스리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이 지역에서의 광범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황제가 죽고 차기 황제를 뽑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였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귀족들이 선거로 뽑았는데,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였던 ‘페르디난트’라는 인물은 가톨릭 광신도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결국 제국에게 위협을 느낀 신교도 귀족들이, 프라하에 있는 보헤미아 왕궁에 침입했다. 이 왕궁에서는 황제가 파견한 지사 두 명과 비서 한 명이 있었는데, 귀족들은 이 세 사람을 잡아다가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Defenestration! 세 사람은 10m 높이에서 창밖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떨어진 세 사람은 죽기는커녕 별다른 부상도 입지 않고 도망쳤다. 구교 측은 이것이 천사들의 도움이라고 주장했고, 신교 측은 비료로 쓰려고 쌓아 놨던 동물 배설물 더미에 떨어졌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 전 유럽이 뒤숭숭해졌다. 천사의 도움인가, 아니면 배설물의 도움인가! 이것을 두고 보헤미아 내부에서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 페르디난트는 예상대로 제위에 올랐고, 그는 이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보헤미아 신교 군대는 황제에게 저항했지만 힘에서 밀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덴마크 측에서 이들을 지원했고, 스웨덴에 이어 프랑스까지 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30년 전쟁이라는, 유럽 근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 하나가 발발하고 말았다.


 이 전쟁의 핵심 전쟁터였던 독일 지역의 피해는 그야말로 극심했다. 수많은 마을이 폐허가 되었고, 통상 이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굶주림으로 독일 인구의 3분의 1에서 3분의 2가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물론 수많은 이유들이 기저에 깔려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이 엄청난 학살전은 천사냐 배설물이냐의 논쟁에서부터 촉발된 것이다.





 다른 재밌는 사례 하나가 마녀사냥이다. 흔히 마녀사냥을 중세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마녀사냥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광범위한 근대 현상이다. 마녀사냥의 ‘전성기’는 1570년-1630년이라는 근대 초기였다.


 마녀사냥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다. 이 책의 1부는 마녀에 대한 논증, 2부는 마녀의 사례, 3부는 마녀에 대한 기소 방법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참 가관이다.


 이런저런 내용이 들어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대체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마녀라는 존재가 있도록 허락하신 것일까?” 이들은 악이 존재함으로서 선이 더 빛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인이 악한 사람들에 의해 순교함에 따라, 그의 이름이 더욱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넘어가자.


 “대체 악마는 왜 직접 인간에게 개입하지 않고 마녀를 이용하는 것일까?” <마녀의 망치>는 악마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 직접 상호작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녀는? 마녀도 인간이잖아? 그런 하찮은 걸 신경 쓰면 지는 거다.


▲ <마녀의 망치 (Malleus Maleficarum)>



 그런데 여기서 또 결정적인 문제가 또 있다. 성경 <욥기>에 보면, 악마가 직접 욥에게 고통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녀의 망치>는 이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하지만, 저자들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말꼬리 잡지 말고 핵심을 보라!”


 “악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화장실에 가시는가?” “악마는 앞을 볼 수 있는가?” “악마에게는 눈이 있는가?” 이런 걸 대단히 진지하게 논리적으로 따져가며 논의한다.


 마녀사냥의 실제는 어떨까? 가장 핵심적인 마녀의 증거는 자백이다. 그리고 자백을 받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문이다. 고문을 시작하기 전에 몇 번 자백을 요구하는데, 자백을 하면 사형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때 자백하면 정말 살 수 있는가? <마녀의 망치>는 아주 자랑스럽게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실제로 사형을 면하게 해 줄 수도 있다. 가둬두고 평생 죽음을 면할 정도의 빵과 물만을 주며 살려두기도 한다. 아니면 이런 대안도 제시한다. “일단 살려준 후 몇 달 있다가 사형시키면 된다!” 혹은 “다른 재판관이 와서 사형을 시키면 하등의 문제가 없다!”




 다른 방법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마녀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마녀 혐의자를 재판장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울어라!”


 이때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마녀다. 만약 눈물을 흘리면 어떻게 될까? 울으라고 한 때에 정확하게 울 수 있다니! 악마의 도움이다!


 이렇게 처형된 사람만 최소 5만 명이었다.




 소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근대 사람들이 서로에게 자행한 일들이다.


 이것들은 아주 단편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근대가 무르익은 다음이라고 다를까? 양차대전은 어땠는가. 베트남 전쟁은 또 어땠는가. 세상에 인간이 합리와 이성 따위 치워버리고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눈 적이 겨우 이런 사례들뿐이겠는가?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 위해서,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서로가 적어도 어느 정도의 선은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에 주는 에너지는 엄청나다. 그 선이 조금씩 앞으로 나갈수록, 세상은 조금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해 보자. 심지어 이성과 합리의 시대, 신성을 넘어선 인간성의 시대라는 근대에서 자행된 일들만 해도 끔찍한 수준을 넘어선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여성을 향한 증오범죄. 그리고 추모를 향한 ‘남혐’ 프레임 씌우기. 진심어린 추모조차 할 수 없는 세상. 그 추모 행사를 기획한 게 ‘워마드’라는 성소수자 혐오 커뮤니티라는 사실은 이 사회에 대한 조소마저 벅차게 만든다.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게 이 땅에서 가능할까?


 불신과 공포의 시대,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사는 반복, 오로지 반복이다.


▲ 결국 믿어야 할 것은, 죽음 앞에 눈물을 보일 수 있는 수많은 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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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 뒤바뀐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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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8세기는 여러모로 재밌는 측면이 많은 세기다. 새로운 집권 세력이 나타나고, 새로운 경제 주체가 나타난 시기다. 세계 각지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끓어오르던 시기이며, 또 그만큼이나 많은 꿈이 좌절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세기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 하나가 있다. ‘상업’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전 세계가 하나의 교역망으로 통합되기 시작한다. 포르투갈에서 출발한 배가 유라시아의 동쪽 끝까지 도달했고, 동남아시아가 해상 무역 중심 기지로 성장했다. 신대륙에서 막대한 재화가 쏟아져 들어왔고, 서양과 동양이 대규모로 무역을 벌이며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던 역동적인 시기다.


 그렇다면 세계를 돌아다니던 이 무역선들이 싣고 돌아다니던 물건들은 무엇일까? 많은 것들이 있었다. 향신료가 오가기도 했고, 도자기가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은 분명 은(銀)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역시 전 세계적으로 통용할 수 있는 화폐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 환전소가 도시 곳곳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니, 사실 화폐제도 자체가 발달되지 못한 시대였다.


 그렇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어떤 것을 가지고 교역을 했을까? 단순한 물물교환으로 이런 체계가 유지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고안된 화폐가 바로 ‘은(銀)’이었다.


 금이나 은이나 동은 아주 예전부터 인류와 함께했던 귀금속들이다. 그런데 이들 중 금은 너무 비싸고 희소해 무역에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동은 반대로 너무 가치가 낮아서, 국내 거래 정도에는 쓰여도 대규모 국제 무역에 쓰기는 부적절했다. 가장 적절한 세계화폐로 은이 선택된 이유다.




 은이 중요했던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전 세계 경제의 절반 가까이를 괴물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던 국가, 바로 중국의 존재였다. 중국은 명대부터 ‘일조편법’이라고 해서, 세금을 반드시 은으로 내도록 강제했다.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이 중국에게 바치는 조공 역시 은을 다수 포함하게 했다.


 당시 중국과 그 조공 무역망에 포함된 인구를 따지면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 된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은을 반드시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 동아시아가 가지고 있던 은에 대한 수요는 엄청났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높은 수요로 인해 은의 값이 폭등했는데 그 결과 중국의 은 가격이 서양의 은 가격의 두 배였다고 전해진다. 약 두 세기 동안 서양의 은이 무지막지하게 중국으로 유입된다.


 말하자면 은은 세계 화폐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서양 상인들에게는 훌륭한 재테크 수단이었던 것이다.





 자, 그런데 그렇다면 이 많은 은들은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우선 많은 양이 유럽에 위치한 은광에서 나왔을 것이다. 유럽이라고 은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유럽의 은으로 이 역동적인 세기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래서 새롭게 떠오른 지역이 신대륙이었다. 신대륙은 막대한 귀금속을 서양에 전달해 주는 말 그대로의 보물창고였다. 특히 멕시코 지역에서 나오는 은은 세계 경제 전반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었다. 오죽하면 모든 건물을 금으로 세웠다는 ‘엘도라도’ 같은 전설까지 나왔을까.





 그런데, 사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은광은 동방에도 존재했다. 일본에 위치한 ‘이와미 은광’이라는 녀석이 있다. 지금도 시마네 현 오다 시에 보존되어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은광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 보자.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이 은광은 당시 전 세계에서 나오는 은의 3분의 1을 생산했던 은광이다. 이 막대한 은의 대부분은 중국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서양에 팔려나갔다.


 이 시기를 중심으로 일본은 점차 상업화를 이루게 되었고, 수많은 서양과의 교역이 바로 이 은광에서 나오는 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을 이끌던 힘은 이와미 은광이었다.


▲ 이와미 은광 (石見銀鑛)




 그런데 이와미 은광에서 이렇게 은을 많이 생산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이 은광에 은이 많아서는 아니다. 이와미 은광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선진적인 은 제련 기법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연은 분리법’이라고 불리는 방법이다.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은을 분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은광석은 채취하면 납과 은이 섞여서 나오는데, 핵심은 납에서 은을 분리하는 방법이다. 그래야 순수한 은을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원래 사용되던 방법은 그냥 이 은광석을 한 번에 녹인 다음에, 녹은 재 속에서 순수한 은을 찾아내는 방법이었다. 은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워서 생산량도 많지 않았고, 그 품질도 좋지 못했다. 그런데 이와미 은광에서 찾아낸 방법은 은과 납의 녹는점 차이를 이용해서 효과적으로 은을 분리해낼 수 있었다. 기술의 발전이 경제를 이끈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기술은 그냥 이와미 은광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이 아니다. 이 기술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의외로 조선 땅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 9년 5월 18일 계미일 기사를 하나 전한다.




양인 김갑불과, 장예원 노비 김검동이 납으로 은을 분리해 바치며 아뢰었다.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분리할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재(灰)를 둘러 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이면 분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시험해 보라 전교했다.




 여기서 ‘납’은 ‘은광석’ 정도로 바꾸어 해석해도 좋다. 납에서 은이 나올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 이와미 은광에서 사용하던 연은분리법.

16세기 조선을 드나들던 일본 상인들이 배워 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술은 이와미 은광에서 사용하던 연은 분리법과 일치하고, 곧 조선에서 이 분리 기술이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조선에서는 후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은광을 국가에서만 관리하고 있었고, 저 기술을 개발한 이들이 양인(아마 중인이었을 것으로 추정)과 천민이었기 때문에 크게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랬던 기술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렇게 이와미 은광이 탄생했다. 세계 은의 3분의 1을 생산하고, 일본의 상업화를 이끌었던 그 은광이 말이다.

 

전국시대에 접어든 일본은 이와미 은광을 가지고 쟁탈전을 벌인다. 결국 이와미 은광을 차지한 것은 도요토미 가문이었고, 도요토미 가문은 일본 전역을 성공적으로 차지한다. 도요토미 가문은 이 은광을 이용해 서양과 적극적으로 무역했고, 총도 이 과정에서 일본에 들어왔다. 그리고 은으로 축적한 자본력은 곧 임진왜란의 전쟁자금에까지 사용된다.


 조선이 가진 지하자원의 양은 결코 다른 나라에 밀리지 않았다. 한반도 북쪽은 ‘동방의 엘도라도’라고 불릴 정도로 지하자원이 풍부했던 것이고,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는 금광부자도 많이 탄생했었다. <조선일보> 가문의 방응모 사장이 대표적인 금광 부자 아니었던가.


 하지만 기술을 대하는 두 나라의 태도가 달랐다. 조선은 경직된 경영으로 그 기술을 잠재웠으며, 일본은 그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조선과 일본이 만들어졌고 말이다.


 어쩌면 이와미 은광이라는 단편적인 사례는, 두 나라의 뒤바뀐 운명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나가사키에 위치한 데지마 섬. 일본과 서양의 무역 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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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일.



[오늘의 음악] 다시, 시작


 송구영신(送舊迎新). 오래된 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는다는 의미다. 오늘이야말로 그런 날이다. 낡은 해를 버리고 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2015’라는 미래적인 숫자의 조합이 이제야 좀 익숙해질 법 한데, 벌써 2016년이 다가왔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진부하다. 매년 그런 표현을 안 들어본 때가 없는 것 같다. 365일이라는 긴 시간에 많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올 한 해는, 참 다사다난했다.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습격당했다. 롯데가에서는 분쟁이 있었다. 성완종 게이트로 정권의 부정부패가 드러났지만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가 1주기를 맞았다. 메르스가 대유행했지만 정부는 철저하게 무능했다. 국정원이 해킹 프로그램을 구매해 내국인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드러나고, 국정원 직원이 자살했지만, 밝혀진 것은 없었다. 민중총궐기가 열렸지만 정부는 국민의 소리를 무시했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으로 민중을 폭력 진압했다.


 서부전선에서 지뢰가 폭발하고 포격이 벌어졌지만 정부는 피해 장병에게 보상금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고 청문회를 열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지침이 발표됐다. 국회법 파동과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도 빼놓을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내분을 겪었다. 정부가 노동개편에 고삐를 당겼다. 대통령이 국민을 IS에 비유했다. 마지막까지 시끄러웠다. ‘위안부’ 협상이 책임있는 배상 없이 타결되었다. 여야가 선거구 협상에 실패하며 온 나라의 지역구가 무효화됐다.


 나는 2015년 처음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했고, 대학교에 들어왔다. 개인적으로도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은 한 해였다. 많이 배우기도 했고, 무엇보다 많은 글을 쓴 한 해였다.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 대학교 1학년이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 세상이다. 웃으며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언젠가부터 ‘새해’라는 것에 대한 실감이 사라지는 것 같다. 그것이 단지 시간이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졌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화가 많아진 것 같다. 비웃음과 헛웃음을 제외하고는 웃음 지을 기회가 많지 않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된다. 또 한 번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 한 해가 될 것 같다. 결코 기대감에 가득차거나, 희망을 품어보거나 하지 않는다. 절망감이나 처절함과 같은 마음도 없다. 이제는 무뎌진 것 같다. 평범함이 사치라는 것을 너무도 빨리 알아버리는 세상이다.


 어쨌든 새로이 시작되는 한 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란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복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별로 기분 좋은 한 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갈수록 ‘당연한 것들’이 많이들 사라지는 것 같다.


 아무튼 다시 새로 시작되는 한 해도 서로를 붙들고 열심히 버텨 보기로 하자. 때로는 찌질하게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일에 웃음을 터트리고, 때로는 감정을 꽁꽁 숨기기도 하고. 늘 그렇듯 늘 그런 한 해로 서로를 붙잡고 버텨 보자.


 한 해를 보내기 위한 ‘망년회’라는 모임을 많은 사람들이 갖는다. 지난 한 해를 잊어버린다는 의미다. 그래도 너무 많이 잊어버리지는 말기로 하자. 고마워해야 할 일, 미안해야 할 일, 기뻐해야 할 일, 분노해야 할 일. 너무 많이 잊어버리지는 말기로 하자.


 오늘의 음악, N.EX.T의 ‘힘을 내!’로 골랐다.





[오늘의 역사] 중미 관계


 1979년 1월 1일, 중국과 미국이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중미 관계의 역사는 중국이 아직 청나라라는 전제군주제 국가를 유지하고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1700년대 중반부터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의 상인들이 중국 항로 개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84년 2월, ‘중국황제호’라는 배가 중국 무역을 위해 최초로 뉴욕항을 떠났다. 이 배는 8월에 광둥 항에 입항했다. 이 배는 미국에서 모피, 인삼 등을 가져가 중국에서 차,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하며 큰 이익을 봤다. 그러면서 미국 상인들은 중국을 상대로 한 무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중미 무역이 상당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미국은 이후 중국에 진출한 다른 열강과 마찬가지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중국은 미국을 외교 우방으로 대우했으며, 상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사실 중국 내에서 외국인들의 지위가 안정적이지는 못했지만, 미국 상인들은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해 냈다.


 이후 미국은 청나라에 영향력을 가하는 열강으로 성장했다. 태평천국운동이나 아편 전쟁, 의화단 운동 등에서도 미국은 서양 연합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열강으로서의 지위를 얻어냈다. 이권 침탈에도 적극적으로 동조했고, 다양한 권한을 가져가게 되었다. 왕샤 조약 등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 치외법권 등을 인정받기도 했다.


▲ 왕샤 조약이 체결된 마카오 관음당.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은 지방에서 다양한 군벌들이 자신만의 정권을 수립하며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졌다. 다만 중국을 지배하는 공식적인 정부는 쑨원이 세운 ‘중화민국’이라는 정부였고, 미국은 중화민국과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중화민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군벌들을 몰아내고 중국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 일본의 침략 등으로 중국의 정국은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졌다.


 중화민국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미국 역시 두 차례 모두 연합군으로 참전했기에, 양측은 시간이 지날수록 상당한 신뢰감을 쌓고 강력한 우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국이 일본에 대적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기에, 미국과 중화민국은 같은 전선을 공유하며 일본에 대응하기도 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 중국은 일본은 몰아냈다만 이번에는 내분에 휩싸였다.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힘을 합쳤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한 번 분열해 싸움에 접어든 것이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국공 내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권의 맹주였던 미국이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전쟁에서 누구를 지지했는지는 뻔한 일이다. 미국은 비공식적으로 국민당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미국의 의지와는 다르게 국공 내전에서는 공산당이 승리했다.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낸 공산당이, 병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던 국민당에게 기적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미국이 지지하던 국민당은 타이완 섬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했고, 공산당은 중국 본토에 남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식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고, 중화민국과만 외교를 계속했다. 특히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공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냉전의 기류가 조금씩 풀리면서 이들의 관계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1971년 미국의 탁구 선수단이 미국을 방문한 ‘핑퐁 외교’부터 관계가 달라졌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며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 마오쩌둥을 만난 닉슨.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과 국교를 맺은 국가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 모두와 국교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결국 UN은 중화민국을 UN에서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받아들였으며, 미국도 1979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관계를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 이제는 G2라는 이름으로 세계 양강이 되어버린 국가들이다. 이 둘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1979년 1월 1일, 공산주의권의 중국과 자본주의권의 미국이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양측 사이에 다리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 ‘다리’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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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1일.



[오늘의 음악] 마지막


 벌써 1년 가까이 왔다. “마지막의 시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오늘의 음악]이 벌써 시간을 지나고 지나 “마지막의 마지막”이라고 할 법한 날을 맞았다. 이제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글이 쌓여 있다.


 열 달 동안 글에 치여 살았다. 아침에 한 편, 새벽에 한 편. 생각보다 쓰는 시간은 오래 걸렸다. 아침과 새벽에 일정이 있으니 가운데 낮 시간은 조금 비어 있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어찌어찌 지나가다 보면 그게 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고 뭐 그런 건 아니더라.


 뭐 그렇다고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않을 마음은 없다. 신년이니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지만, 그래도 이런 애매한 포지션이 늘 내 역할인 것을 뭐 어쩌겠나. 또 고민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후회하겠지만, 늘 그런 게 나의 역할이었던 것을 뭐 어쩌겠나.


 아무튼 오늘은 2015년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그리고 다시, 2016년을 시작하는 날이다. 마지막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잊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다시 새로운 시작을 맞는 오늘의 음악, 신해철의 ‘절망에 관하여’로 골랐다.





[오늘의 역사] 예종


 1496년 12월 31일, 조선 8대 국왕 예종이 족질로 숨을 거뒀다.


 ‘예종’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없다. 없는 게 맞다. 예종은 인종에 이어서 조선시대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에 속한다. 고로 기억나는 게 없어야 맞다. 사극 등의 방송과 역사서에서도 세조에서 성종, 연산군으로 넘어가는 데 끼어 있는 군주일 뿐이다. 주목받지 못하는 군주다.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막상 예종이 가진 정치적 역량은 꽤나 괜찮았던 듯 보인다. 예종 시기에 가장 중요하게 떠올랐던 문제는 ‘구(舊)공신 청산’ 문제였다.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던 ‘계유정난’ 때 공신으로 책봉됐던 이들의 힘이 강해지며, 왕권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종은 세자 때부터 이런 정세에 눈을 뜨고 있었다.


 특히나 계유정난 공신들은 왕을 바꾸는 정변을 한 번 일으켜본 인물들 아닌가. 예종 입장에선 그들을 편하게 놔둘 수 없었다. 우선 가장 먼저 예종은 구공신들이 선왕의 묘호로 올린 ‘신종’이라는 묘호를 거부하고 자신이 구상한 ‘세조’라는 묘호의 선택을 강행한다.


 상징적 의미인 묘호를 강행 채택한 것만으로 그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남이의 옥사라고 할 수 있겠다. 세조의 곁에서 대표적으로 빠르게 출세한 인물이 바로 ‘남이’였는데, 바로 그 남이를 일단 병조판서에서 좌천시킨 후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고문 끝에 죽였다.


 신권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이와 같은 일 말고도 그는 내치에도 힘썼다. 병영에 딸려 있는 작은 국가 소유의 땅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정치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또 한 가지, 예종의 업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국대전의 완성이라 할 수 있겠다. 세조 자신이 경국대전 집필을 지시하긴 했지만 뒤로 갈수록 경국대전의 집필은 지지부진하고 있었는데, 이의 나머지 부분 집필을 명령하고 완성시킨 사람이 예조였다. 물론 예조 대에 완성은 됐지만 그의 급사로 공표가 미뤄졌고, 후대인 성종 때에 공표되면서 경국대전의 완성은 성종으로 기록되게 되었지만 말이다.


▲ 경국대전.



 이후 예종은 죽기 전날까지 멀쩡하다가 하루 만에 족질로 사망한다. 족질이라는 것은 발에 난 종기를 말한다. 조선 시대 대부분의 왕이 종기로 죽었으니 그리 이례적인 사인은 아니지만, 워낙 젊은 나이와 갑자기 일어난 죽음에, 한명회가 그를 죽였다는 설도 제기되기는 한다. 근거가 없는 음모론일 뿐이니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다.


 예조의 업적과 태도를 잘 보면 엄격하고 원칙주의적인 군주였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세조는 신하들과 자주 어울리고 벗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예조는 굳이 신하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나쁘게 말하면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죽이고 사소한 부분에 집착하던 왕이지만, 또 좋게 말하면 직관이 있고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부분을 보는 천재형 군주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래저래 신하들에게 인기가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만, 가끔 그가 지배하는 조선의 모습은 어땠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그것이 부질없는 상상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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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0일.



[오늘의 음악] 뒤돌아보다


 연말이 다가오니 TV에서는 시상식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연예대상이니, 연기대상이니 하는데 어떻게 매년 서로 스케줄이 겹치지도 않는지 비슷한 사람들이 나와서 상을 받아 가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상을 받는 이들은 또 즐거운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안고서는 시상식장을 나선다. 하지만 또 그만큼 상을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카메라는 언제나 상을 받은 이들만을 비추는 모양이니 후자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지 못하겠다.


 뭐 그런데 딱히 연말 시상식이 아니더라도 연말은 언제나 모든 것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한 해를 돌아보다 보면 누군가는 웃으며 자리를 뜨기도 하고, 누군가는 울며 자리를 뜨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또 언제나 한 해를 돌아보다 보면 우는 때도 있고 웃는 때도 있는 법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다만 울든 웃든 추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낸 한 해가 내게도 생겼다는 것. 언제나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 않던가.


 또다시 다가오는 내일이 있다. 그리고 그 내일들이 모여 또다시 다가오는 내년이 있다. 삼백 예순 다섯 번의 날이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2016년을 돌아보며 앉아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떤 일들을 회상하고 있을 것인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것. 오늘의 음악은 여행스케치의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로 준비했다.





[오늘의 역사] 호세 리살


 1896년 12월 30일,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호세 리살이 처형당했다.


 호세 프로타시오 리살 메르카도 이 알론소 레알론다 (1861.6.19 ~ 1896.12.30)



 호세 리살은 1861년 6월 19일, 에스파냐가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던 시절, 필리핀의 칼람바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호세 리살은 특별한 총명함을 보였고, 성장한 이후에는 의사가 되기 위해 에스파냐로의 유학길에 오른다.


 호세 리살이 처음으로 유명세를 탄 것은 유학을 하던 도시인 마드리드에서 발표한 소설 때문이었다. <놀리 미 탕그레>라는 이 소설에서 그는 에스파냐의 식민지 차별 정책과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소설은 당시 자유주의적 사상에 물들어가던 에스파냐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호평을 받고 유명해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에스파냐 사회에서는 자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 여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에스파냐 정국은 호세의 서적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했고, 호세 리살에게는 추방령을 내렸다. 호세 리살은 이에 따라 모국 필리핀으로 쫓겨났다.


 결국 에스파냐 당국의 추방령에 따라 그는 의사의 꿈을 접고 모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대신 돌아온 호세 리살은, 다시 한 번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그것은 조국 필리핀을 해방시키려는 열망이었다. 그는 곧 필리핀 민족동맹을 결성해 에스파냐의 식민지 통치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호세 리살은 필리핀 민중이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에 의해 노예 상태에 놓여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의 저서와 활동을 통해 필리핀 민중은 식민 지배의 현실에 대해서 점차 깨닫기 시작했고, 민족의 자각과 해방의 기운은 점점 드높아져 갔다.


 이후 1892년 그는 필리핀 독립 운동의 지도 기구격이 되는 ‘필리핀 연맹’을 결성한다. 하지만 이내 에스파냐 정부는 그의 독립 운동을 주시하게 되고, 그는 필리핀을 다스리는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섬으로 유배되었다.


 필리핀 독립운동도 역시 우리 독립 운동처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많았다. 누구는 비폭력을 주장했고, 누구는 폭력 혁명에 의한 직접 투쟁을 주장했고, 누구는 자치론을 주장했으며 누구는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자치론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조금 덧붙이기로 하자.


 호세 리살은 비폭력을 주장한 운동가였다. 그의 행동이 완전히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모르겠지만, ‘카티푸난’이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어 무장 봉기를 일으킨 필리핀의 또 다른 독립운동가 ‘안드레스 보나파시오’와 같은 노선은 분명 아니었다.


 폭력 혁명을 주장한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하지만 호세 리살을 체포한 총독부는 그가 마치 모든 무장 독립 운동가의 배후인 듯 몰아갔다. 결국 수감된 호세 리살은 1896년, 에스파냐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필리핀 혁명’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같은 해 12월 30일, 마닐라 시내에서 공개 총살형을 당해 숨을 거둔다.


 그의 죽음은 필리핀 독립 운동의 한 불씨가 되었다. 이후 반 에스파냐 운동과 반미 운동의 선봉에 섰던 독립운동가 에밀리오 아기날도나, 이후 독립하는 필리핀의 헌법 초안을 작성해 ‘혁명의 뇌’라 불리는 독립운동가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경우에도 그의 죽음을 보고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럼 이제는 아까 얘기했던 자치론에 대해서 이야기해봐야겠다. 호세 리살도 필리핀의 에스파냐로부터의 자치론을 주장했던 독립 운동가 중 하나다. 우리 역사에는 이광수가 대표적으로 자치론을 주장한 이로 꼽힌다. 하지만 호세 리살은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꼽히고, 이광수는 변절의 아이콘으로 꼽힌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과연 둘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누가 민중을 바라봤고, 누가 자신만을 바라봤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호세 리살의 자치론은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에스파냐로부터 일정 정도부터 자치권을 얻어내고, 그렇게 점차 환경을 개선해 나가자는 생각. 그것은 어쩌면 이대로 민중이 버텨내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절박함의 발로였다.


 하지만 이광수는 달랐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을 뿐,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의 이후 행보만 봐도 충분하다. 우리 역사에서 민중을 위해 자치를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자치론이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는 것은 일단 논외로 치기로 하자. 굳이 따지자면 이건 호세 리살과 이광수 모두가 간과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을 간과한 동기는 둘 사이의 차이가 있으라리고 생각한다.


 외국의 독립운동 사례를 보면 볼수록, 우리 독립운동 사례를 연구하면 할수록 무언가 독립운동에 대한 철학이 정립되어야 함을 느낀다. 반 에스파냐 운동과 반미 운동의 선봉에 섰지만 이후 미국에 협조하자고 주장하고 일본에 협조해 수감 생활까지 겪은 아기날도는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 이후 독립한 혁명 정부는 아기날도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했다.


 폭력 혁명과 비폭력 혁명, 자치론과 완전 독립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두고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그 철학에 대한 논의가 분명 필요하다. 일제는 무조건 나쁘고 독립운동가가 어떤 일을 했든지 정당화된다고 가르친다면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역사와 국가는 중태에 빠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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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9일.



[오늘의 음악] 지나간 것


 요즘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잘 나간다고 한다. 케이블 드라마가 잘 되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응답하라’ 시리즈의 성공을 보면 조금 놀라운 감이 있다. 배경이 되는 시대는 1997년, 1994년, 1988년. 30년도 되지 않은 시점의 이야기들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역사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엄연한 역사극이다. 다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때의 역사를 다루는 시대극일 뿐이겠지.


 “사는 기쁨의 절반이 추억”이라는 말은 언젠가도 한 번 인용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사는 기쁨의 절반은 추억이고, 나머지 절반은 경험이겠지. 경험은 곧 추억이 되는 거겠고, 시간이 지날수록 추억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겠지.


 경험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이 아주 작은 일상의 경험이든, 혹은 여행이나 사랑과 같은 아주 중대한 경험이든, 관계없이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을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추억을 곱씹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도 결코 두렵지는 않다. 많은 경험을 쌓았다는 성취감을 그런 방식으로 향유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언젠가 어두운 방에 앉아 흘러가는 음악과 함께 과거를 되짚는 것도 꿈꿀 만한 미래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래도 괜찮은 과거였다”는 생각이 들 때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성공을 보며, 추억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게 된다. 나야 1997년이나 1994년, 1988년의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떤 과거를 떠올리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곤 한다. 10년쯤 뒤라면 나도 비슷한 무게의 과거를 회상할 수 있을까.


 오늘의 음악, 들국화의 ‘걱정말아요 그대’로 골랐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겠지.





[오늘의 역사] 이구


 1931년 대한제국의 황태손이었던 이구가 탄생했다.


 여기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 채야 맞다.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1910년 한일병탄조약으로 그 끝을 맞았다. 그런데 1931년 태어난 ‘이구’라는 사람이 어떻게 왕세자의 자리를 가질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든다.


 이구와 부인 줄리안 여사



 그렇게 되면 일본이 경술국치 이후에 대한제국 황가를 대우했는지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일제는 경술국치 이후 황실 일원에게 ‘왕공족’이라는 신분을 부여한다. 왕공족은 일본의 황족에 준하는 신분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황가의 일원은 그 계통에 따라 자신들을 ‘황태자’ ‘황태손’ ‘황사손’ 등의 호칭으로 칭했고, 이를 일제에서도 ‘이왕세자’ ‘이왕세손’ 등의 명칭으로 부르며 이들이 계보를 잇는 것을 허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 순종 황제에 의해 황태자로 선정된 이는 흔히 ‘영친왕’이라 부르는 의민태자다. 1910년 대한제국이 몰락하고,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된 뒤에도 이왕가의 형식적 수장은 순종이었다. 순종이 1926년 사망한 이후에는 의민태자가 형식적 수장의 역할을 맡아, 해방을 넘어 1970년까지 이왕가를 이끌었다.


 의민태자 이은은 일본 제국 육군 중장의 자리까지 올랐고, 일본인인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이에 따라 이은의 조카인 이구가 대한제국의 황실 수장이 되어 1970년부터 대한제국 황실을 이끌었다. 이구는 미국에서 줄리아 멀록이라는 여성과 가족의 반대를 이기고 결혼했다.


 이구는 해방 이후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시도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구는 일본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역시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다시 이구의 조카인 이원을 이구의 양자로 입적시켜 2005년 이구가 사망한 이후 그 계통을 잇게 하고 있다.


 2006년부터는 이 계통과 다르게 이구와 남매간인 이해원을 문화대한제국 여황으로 추대하고 대한제국의 황실을 복원하자는 운동을 벌이는 ‘대한제국 황족회’라는 단체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원



 망국의 후손들이다. 그 행보가 조금이라도 상식적이면 이해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망한 뒤, 그 황가와 후손들이 택한 길은 너무나도 당연한 친일의 길이었고, 민족적 자존심과 국가적 위상을 짓밟을 대로 짓밟고선 해방이 되자 외치는 것이 황실의 권위다.


 국가를 망조로 이끈 황실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비판할 의도는 없다. 그것은 이미 죽은 그들 선조의 몫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대한제국의 멸망에 대해 일말도 자신 선조들의 책임이라고 느끼지 않는 듯한 권위주의적 태도를 가졌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문화대한제국 여황”이라 칭하는 이해원이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마지막 꿈이 경복궁에 들어가 관광객을 맞으며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것을 본 적이 있다. 황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받으려면 존경받을만한 행동을 하시라. 여전히 당신들이 황족과 황실을 운운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아직 경술국치 이후 황실의 행동이 어떠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일 뿐이다.


 전제 군주제를 스스로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도입한 부탄의 왕실이 떠오른다. 너무 큰 기대였을까, 이 나라에서 모두의 존경과 존중을 받을만 한 상징적 인물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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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8일.



[오늘의 음악] 새로운 것


 어제는 갑자기 메일로 ‘다급한 일’이라여 메일이 왔다. 놀라서 열어보니 어떤 사이트의 운영자가 내 글을 표절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체 이 작은 블로그에까지 들어와서 표절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웠다.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니 완전히 가져다 베낀 것은 아니고, 내 글을 주로 참고해 글을 썼는데 출처 명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비공개 카페라고 하니 들어가서 확인해볼 수는 없었지만, 안에서 적당히 처리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다만 다음부터는 출처 표기를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고만 의사를 전달했다.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참 양질의 정보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이 블로그였을지, 그게 놀라웠다. 거기에 완전히 똑같지도 않은 글을 어떻게 찾아서 나에게 알려 줬는지, 그런 일에 수고해 주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과연 내 글을 가져가는 게 잘못된 일인지, 문득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나는 대체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나의 글도 에세이 부분이나 구성은 내가 직접 하지만, 주된 내용은 다른 사람이 연구한 내용을 참조해서 가져오는 게 대부분이다. 물론 참조문헌 표시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은 없다. 누군가가 나의 글을 참조해 글을 썼다는 이야기에 별로 놀라거나 불쾌하지 않았던 것은, 그게 사람들이 글을 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참조문헌을 기입하는 것도,  인터넷 글쓰기에서는 일일이 기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관례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 전달을 하는 것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베껴온 것도 아닌데 ‘참조문헌을 표시하지 않았다’며 일일이 비판할 수 없다는 현실도 존재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만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글이 ‘새롭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글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최대한 밝히려고 노력하는 것이 글쓴이가 가진 책무이리라, 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나는 ‘나의 글’을 쓰지만, 그것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남의 것’을 어디서 어떻게 빌려왔는지 밝히려고 하고,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해내려고 노력한다.


 다만 사람들이, 그런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노력은 해 주었으면 하는 단순한 바람이다.


 오늘의 음악, 유니크의 ‘Born to Fight’로 골랐다.





[오늘의 역사] 류샤오보


 1955년 12월 28일, 류샤오보가 탄생했다.


 류샤오보는 중국 지린 성 창춘에서 태어났다. 지린 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했고, 이후 베이징 사범대학에서 중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문예창작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학자가 되기 위한 길을 충실하게 밟고 있었다.


 당시 그는 상당히 촉망받는 학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작가로서도 또 학자로서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스위스와 미국으로 넘어가 중국 철학과 중국 문화에 대해 교수 자격으로 강의를 할 정도였다. 그는 학자로서 상당히 괜찮은 길을 가고 있었다.


 류샤오보는 1989년에도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연구원 자격으로 체류하고 있었다. 문제는 당시 중국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중국의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들의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천안문 사태’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 중국 천안문 항쟁.



 류샤오보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저항이 벌어지고, 이들이 천안문 광장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자마자 중국으로 급거 귀국했다. 류샤오보는 천안문 광장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고, 시위대 대표로 중국 정부와의 협상에 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 정부는 천안문 광장에 모인 시위대를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다.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사망자가 나왔고, 류샤오보는 학살의 피해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학살의 목격자가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인권 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류샤오보는 단식 투쟁을 벌이며 천안문 사태의 진상 조사를 요구했고, 전공을 살려 각종 집필 활동을 개시했다. 주로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내용이었다. 그는 가장 투쟁적인 활동가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그런 그를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천안문 사태 직후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감옥 생활을 맞는다. 20개월 동안의 구속 생활이었다.


 구속에서 풀려난 뒤에도 그는 반체제 인권운동을 계속했고, 1996년에는 천안문 사태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노동 개조형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다시 세 번째 감옥 생활에 들어갔다.


▲ 류샤오보 (刘晓波, 1955.12.28 ~ )



 그는 출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권 운동에 투신했다. 2008년에는 중국의 반체제 학자, 법률가, 기자 등 303명을 규합해 ‘08 헌장’이라는 것을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의 민주와 개혁을 요구하고, 새로운 정당을 창당해 중국 공산당에 대항하자는 의미로 발표된 헌장이었다. 물론 중국 당국은 이를 내란 선동으로 규정했고, 그는 국가 권력 전복 선동 혐의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네 번째 수감 생활에 들어갔다. 2009년부터 수감되었던 그는 현재까지도 중국 랴오닝 성 진저우 시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류샤오보는 이미 중국 민주화의 상징이 되어버렸기에 중국 당국은 그를 죽이지도, 석방하지도 못하고 그저 가둬두고만 있는 상황이다.


 다만 그가 감옥에 있던 사이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010년, 노벨 평화상의 수상자로 류샤오보가 선정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노벨 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항의했지만, 중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 수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결국 감옥에 있는 류샤오보 본인은 물론, 류샤오보의 모든 가족과 친적, 측근 인권운동가 수백 명을 무더기로 출국 금지 조치했다. 류샤오보의 노벨 평화상 대리수상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노벨 위원회 측에서는 타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 인권운동가를 통해 대리 수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 빈 의자에 노벨 평화상 메달을 수여했다. 이는 나치 독일 시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국 정부는 이에 항의해 ‘공자 평화상’이라는 상을 만들어 노벨 평화상에 대항하겠다는 의지를 표했다. 2010년에 초대 공자 평화상 수상자로는 대만의 롄전 전 부총통이 선정되었지만, 롄잔은 이를 거부했다. 2011년에는 2대 공자 평화상 수상자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을 선정했지만, 푸틴은 이를 무시했다. 중국은 중국에 유학 온 러시아 유학생 한 명을 섭외해 대리 수상을 시켰다. 결국 2회 만에 이 상은 초라하게 폐지되었다.


 이후 중국은 2012년에 모옌이 노벨 문학상을 받자, 류샤오보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이 모옌이 중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고 발표했다. 사실 ‘가오싱젠’이라는 중국인 작가가 앞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었지만, 그는 반체제적인 소설을 썼다가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 시민권을 획득한 상황이었기에 중국인으로 보지 않았다. 모옌이 반체제 인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중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의 인권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중국은 그를 은폐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중국 인권 운동의 심장으로 남아 있다. 오늘의 마지막 부분은, 류샤오보가 참석하지 못한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서 노벨상 위원회장이 했던 연설의 일부로 갈음하겠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국가도, 국가 내부의 주류 집단도 무제한적인 권력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인권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권력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제연합의 모든 회원국이 따라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전 세계적인 선언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 중국의 헌법조차도 기본적인 인권을 인정합니다. 중국 헌법 35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민들은 연설, 언론,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보장받는다'라고 규정합니다. 41조는 시민들에게 국가기관을 비판하거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류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고,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류는 석방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이작 뉴턴은 생전에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긴 세월동안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서 우리에게 자유를 이끌어낸 수많은 이들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많은 이들이 돈을 세면서 눈앞의 국익만을 좇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다시금 우리 모두를 위해 싸워준 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류샤오보의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류의 시각이야말로 결국에는 중국을 굳건하게 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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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7일.



[오늘의 음악] 여행


 어린 시절, 소풍 가는 전날 밤 잠을 설치던 기억까지는 꼭 되짚어 돌아가지 않아도 좋다. 언제나 여행의 전날 밤은 설레기 마련이다. 아주 짧은 여행이라도 그렇고, 돌아오지 않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라도 그렇다. 잠을 설치는 정도를 넘어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결국 해 뜨는 것까지 보고야 마는 사람도 있고, 마음 편히 일찍 잠들었다가 일찌감치 일어나 해 뜨는 것을 보는 사람도 있다. 여행의 종류도, 그리고 설렘의 종류도 사람마다 가지각색이다.


 나는 여행 가는 일을 즐긴다. 뭐 사실 아침에 일어나 그 귀찮음을 떨쳐버리는 게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서울에 올라온 뒤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을 즐기게 됐다. 궁궐대모험을 떠나기도 하고, 참배대모험을 기획하기도 한다.


 아까 잠을 설치는 사람도 있고, 일찍 잠들었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나는 어떤 종류냐면, 반반이다. 늦게 잠들고선 일찍 일어난다. 밤에는 글을 써야 하니 늦게 자게 되고, 아침에는 일찍 나가야 하니 일찍 일어나게 된다. 피곤함만 더해간다.


 하지만 그 피곤함 속에서도 묻어나오는 무언가가 있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 하늘과 푸르게 요동치는 하늘 사이를 가로지르는 황금빛 경계, 그리고 그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저 해 뜨고 해 지는 매일의 일상이라는 듯 가로지르고 있는 한 무리의 구름. 아무 것도 아닌데 경이롭다.


 설렘까지 느껴지지는 않는다. 뻔하디 뻔한 사람들과 가는 뻔하고 뻔한 여행, 기대할 거리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오늘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낸 것은 그 ‘뻔하디 뻔한 사람’이 내겐 너무도 소중한 사람인 이유일까.


 당신은 어느 누구와 어떤 여행을 떠나는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어느 유명한 광고 카피도 있다지만, 뭐 또 딱히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면 어떤가. 세상 전체가 여행이고 살아있는 모두가 여행 중인데.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저기 직선으로 반듯이 그어진 구름은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인가.


 오늘의 음악, 김동률의 ‘출발’이다.





[오늘의 역사] 유신


 1972년 12월 27일, 유신 헌법이 최종적으로 제정되어 효력이 발생되기 시작하였다.


 유신 헌법을 발표하는 청와대 당시 김성진 대변인


 유신 헌법의 배경부터 살펴보자. 1960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후, 그는 1963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67년에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3선 출마를 제한하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1969년 3선 출마 가능으로 바꾸는 ‘3선 개헌’을 강행했다. 장기집권을 막기 위한 대통령제의 관례인 3선 제한을 파괴한 것이다. 결국 헌법은 개정되었고, 박정희는 1971년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 돌입한다.


 그렇게 치러진 제 7대 대통령 선거.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맞붙은 이는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였다. 당시 43세의 김대중은 ‘40대 기수론’을 이끌고 나와 경선에서 김영삼에 역전승을 거두고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인물이었다. 국민의 여론은 더 이상 박정희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박정희는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선거전을 펼쳤고,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용할 수 있는 권력을 최대한 이용했다. 물론, 이 표현에는 ‘부정선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언론에 대한 통제는 독재 정권의 당연한 수순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다.


 박정희 후보는 “여러분께 다시는 나를 찍어달라고 하지 않겠다.”는 말로 호소했다. 3선 개헌은 있었지만 4선에 출마하지는 않을 거라는 의도였다. 이에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 후보가 헌법을 고쳐 총통이 되려 한다.”고 맞붙었다.


 선거 결과는 박빙이었다. 박정희 후보가 53.2%, 김대중 후보가 45.2%. 표차는 백만 표도 나지 않았다. 백만 표, 박정희 입장에서는 등골이 서늘했을 것이다. 만약 공정한 언론기반 위에서, 공작과 지역감정 조장 없이 정치를 했다면 대한민국의 7대 대통령은 김대중으로 기록되었을지 모른다.


 다음 선거는, 이라는 생각까지 이르렀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아찔했을지 모르겠다. 잠깐만, 다음 선거? 박정희 대통령은 스스로 4선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 이행 뭐 그러거 없었다. 결국 선거에서는 질 것 같고, 정권은 잡아야 하겠고. 그러다보니 당연히 민주주의를 무시하며 만들어진,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헌법, 유신 헌법이 탄생하게 된다. 사람들은 “다시는 나를 찍어달라고 하지 않겠다”는 박정희의 예언과 “총통이 되려 한다”는 김대중의 예언이 모두 맞았다며 자조했다.


 유신 헌법은 한태연, 갈봉근과 같은 헌법학자들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들은 당시 이 헌법을 자신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안에 자신이 만들었다고 서명을 강요당한 방식이었다고 변명한다. 이들의 변명을 모두 믿을 수는 없겠지만, 아마 당시 유신 헌법을 만든 주역은 당시 공안검사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김기춘일 것으로 추정한다. 스스로도 별 부정은 하지 않고 있고.


 유신 헌법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결국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동시에 모든 정당과 정치인의 정치 활동을 중단시켰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었고, 계엄사령부는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모두 금지하고, 언론ㆍ출판ㆍ방송ㆍ보도가 사전 검열을 받도록 했다. 전국의 대학교에는 모두 휴교령이 떨어졌다.


 국회가 해산되었으니, 대통령 특별선언에 따라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 헌법은 열흘 뒤인 10월 27일 의결되었다. 11월 21일 국민 투표에 부쳐져 투표율 91.9%에 찬성 91.5%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통과되었고, 12월 27일 최종적으로 헌법이 공표되고 시행되었다.


 물론 유신 헌법이 그렇다고 절차적 정당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애초에 ‘대통령 특별선언’이라는 것이 헌법적 근거가 없는데다가, 일단 국민의 지지를 받아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야당이 있는 국회를 해산했다는 것은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1월 21일 국민 투표가 있었고, 논란이 지속되자 다음 해 재신임 투표를 벌였지만 결과는 모두 찬성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진정 국민의 의견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비상계엄으로 당장 군인들이 경찰을 대신해 치안을 담당하고 있고, 국민의 기본권마저 제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론은 검열된 보도만을 내보냈고, 애초에 정치활동 자체가 금지돼서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내용 측면에서도 그 정당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치해 대통령에 대한 간접 선거를 실시했다. 간접 선거가 민주적인 체제 하에서 잘 운용되어도 부작용이 많은데, 독재 체제에서는 어땠겠는가. 국민 하나하나는 포섭할 수 없어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몇 백 정도는 손쉽게 포섭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장은 대통령 박정희가 맡았다.


 국회의원 3분의 1은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의 추천을 거부하면? 찬성할 때까지 다시 투표한다. 대통령에게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해, 초헌법적 권력이 대통령에게 부여됐다. 실제 이 긴급조치를 박정희는 9호까지 발령했다. 국회 해산권과 법관 전부에 대한 임명권과 파면권을 대통령에게 주어 3권 위에 대통령이 군림하게 되었다.


 유신 헌법 치하에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던 수많은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혹은 ‘합헌적으로’ 탄압당했다. 대표적인 사건인 ‘김대중 납치 사건’의 피해자였던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유신의 최루탄 속을 거닐던 이들은 여전히 정치계에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유신의 뒤뜰을 거닐던 이는 대통령이 되었고, 유신 헌법을 만들었던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실장이 되었다. 시대는 과연 어디까지 퇴보할 수 있는가. 유신 헌법이 발효되었던 날, 우리가 역사 앞에 참회하는 마음으로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 밀려날 것인가.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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