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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수능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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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이 벌써 수능 전날이라고 하네요. 어제 마지막 야자는 잘 마치셨나요. 칠판 한 쪽의 디데이를 써 놓은 곳은 D-1이 됐겠군요. 아, 혹시 모교가 수능 시험장이라면 모두 지워야만 했겠지만요. ‘수능 예비소집일’이라는 표현도 익숙하시리라 믿습니다. 학교는 일찍 끝났겠네요. 수능 시험 볼 장소는 한 번 슥 둘러보고 오셨나요. 혹시 지금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한 번 산책 삼아 둘러보고 오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오늘이 빼빼로데이라는데, 빼빼로는 많이 받으셨나요. 고3 수험생들에게는 항상 선물이 넘쳐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사람 만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도, 엿이나 초콜릿 같은 선물을 너무 많이 받아서, 수능 끝나고 한 달 뒤까지 초콜릿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작년에 수능을 본 대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운이 좋게도 수능을 한 번만 볼 수 있었죠. 그래서일까요, 오늘 하루는 내일 수능을 보지 않는 저에게도 특별히 느껴집니다. 지나가다가 고3으로 보이는 학생들을 몇 봤는데, 저까지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것은 왜일까요.


 저도 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제가 수능을 보기 전날이 기억이 납니다. 뻣뻣하게 긴장된 상태에 수많은 감정들이 나를 감싸는데, 대부분의 감정은 아마 ‘불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수험생활을 잘 해 왔는지에 대한 불안, 내일 수능을 잘 볼지에 대한 불안, 수능 이후에 대한 불안까지 말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수험 생활을 그렇게 성실하게 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불안감이 더 드는 것은 그래서였을까요. 팟캐스트 몇 번씩 반복해서 듣지 말고 공부를 했어야 하는 걸까, 아침에는 라디오을 듣지 말고 책을 폈어야 하는 걸까, 밤에 트위터 하는 것보다는 공부를 할 걸 그랬나, 자습 시간에 도망이 일상이 된 것은 너무했던 걸까, 뭐 이런 저런 생각들이요.




 묻고 싶은 질문이 많습니다. 지금쯤 1년 동안의 수험 생활을 온전히 돌이켜보고 있을 여러분은, 어떤 수험 생활을 보내셨나요. 공부는 열심히 하셨나요. 목표의식은 뚜렷하셨나요. 그리고 무엇보다, 1년 동안 즐거우셨나요.


 하지만 지금은 다른 질문은 제쳐두고 한 질문만 던지기로 하겠습니다. 1년 동안 여러분은 내일을 위한 지식을 쌓으셨나요, 아니면 평생을 위한 지식을 쌓으셨나요.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판단으로 수능에 도전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을 위한 지식’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사람인지라, ‘내일을 위한 지식’을 쌓는 일만 1년을 하기에는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지요.


 ‘평생을 위한 지식’이 ‘내일을 위한 지식’과 일치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더랍니다. 수학 공식이나 과학 원리를 ‘덕질’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더랍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는, 오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1년 동안 나는 얼마만큼의 ‘내일을 위한 지식’과 ‘평생을 위한 지식’을 쌓았는지 말이죠.


 여러분 답이 어느 쪽이든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대로의 합리적 균형을 찾으셨겠죠. 그게 합리적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판단해서도 안 되는 부분입니다.


어떤 분은 ‘내일을 위한 지식’에만 몰두하셨겠지요. 열심히 하셨네요. 저라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은 데 말이지요. 대단합니다. ‘평생을 위한 지식’에만 몰두하신 분도 있겠지요. 역시나 열심히 하셨을 겁니다. 세상의 눈을 피하는 것과 세상의 말을 견디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텐데 말입니다. 가운데에 계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현명하신 분이지요. 둘 모두를 선택해 진행한다는 일은 제겐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아무튼, 모쪼록 여러분이 여러분 나름의 균형을 잘 찾으셨기를, 하고 바랄 따름입니다.


 제 이야기를 하나 꺼내 보겠습니다.


 수능을 본 지 꽤나 시간이 흐른 분들은 의외로 잘 모르시던데, 수능 시험장에는 시계가 없습니다. 자기가 직접 손목시계를 챙겨 가야 합니다. 그래서 수능 시험이 다가오면 선생님들이 항상 시계 챙겨라, 시계 챙겨라 백만 번은 말씀하시죠. 수험표는 안 챙겨가도 임시수험표 발급이 가능하고, 필기구는 시험장에서 준다지만 시계는 그게 안 되거든요.




 그런데도 시험장에 시계를 안 챙겨간 붕신이 있으니, 그게 바로 접니다. 시험장에 가서 그걸 알았는데, 아, 멘붕이더군요. 뭐, 그래도 별 수 있습니까. 그냥 남은 시간을 모르고 시험을 봤습니다. 다행히 시간 때문에 시험을 망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수능 시험을 마치고 저는 한참을 걸었습니다. 왜인지 모르게 그냥 그 밤거리가 걷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강변을 지나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모두들 시계 챙겨라, 시계 챙겨라 하면서 시계 없이는 수능을 보지 못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 시계를 챙기지 않고도 무리 없이 시험을 치를 수도 있더라구요.


 어쩌면 삶 전체를 이 시험에 비유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학벌이 필요하다, 스펙이 필요하다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허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험장에 들어서는 여러분이 쓸데없는 곳에 각오를 걸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의 이유로 시험장에 들어가고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험장에 들어가지는 않으시리라고 믿습니다.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을 위해 가장 현명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하셨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꿈으로 향하는 수많은 길이 있고, 여러분은 그 길 중 하나를 선택하셨던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선택한 그 길이 우연히도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알려진 길이었을 뿐이지요.


 그러니 우선은 이 길을 건너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되, 길이 막히더라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한 길이 막히면 다시 한 번 머리를 굴리면 되지요. 다른 길을 선택해 볼까, 아니면 다시 한 번 이 길을 뚫어볼까, 하구요. 다시 합리적 판단을 하시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아주 잘 해냈던 그것을 말이지요.


 자기는 원하는 대학에 간 주제에 말이 많다고 생각하시나요. 뭐 그렇게 생각하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맞는 말이니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는 골방에 찌그러져서 여러분의 건투를 조용히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지금 오늘, 수능 전날에 다다르셨더라도, 수고 정말 많이 하셨습니다. 수능을 목표로 1년을 준비한다는 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적어도 저의 경험은 그랬습니다.




 수능이 끝나면 무얼 하실 생각이신가요.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3개월 동안은 온전히 여러분의 시간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너무 시간이 많아 무료하기도 하고,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잉여로운 시간이지요. 한국에서 죄책감 없는 잉여로움을 얻기는 참 어려운 일인데, 지금까지 잘 해낸 보상 정도로 받아들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3개월 동안 어떤 일을 할지 찬찬히 고민해 보는 것도 오늘 하루를 보내는 좋은 방법이실 겁니다. 공부를 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눈앞에 있는 해방의 고지를 바라보며 하루를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실 겁니다. 저는 수능 전날, 전주에서 고등학교 3년을 보내며 눈앞에 두고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경기전에 다녀왔습니다. 여러분도 잠깐 어디를 다녔다 오는 것도 좋겠습니다. 1년 동안 마땅한 여가를 즐기시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어떤 응원을 보내야 할지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단순히 “수능 잘 보세요”라고 말하기에는 무책임합니다. 수능은 어쨌든 상대평가인지라 모두가 잘 보면 안 되는 시험이지요. 잔인하지만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노력한 만큼 성적이 나오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조금 양심에 찔립니다. 사실 저는 노력한 것 이상으로 수능 성적이 잘 나온 케이스였거든요. 그렇다고 “노력한 것 이상으로 잘 나오기를 바랍니다”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죠.


 그냥 이렇게 끝내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생각해 찾아온 답이 ‘수능을 잘 보는 것’이라면, 저는 여러분의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답이 수능이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한다면, 저는 다시 그 쪽으로 방향을 틀어 힘껏 박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너무 큰 결기나 결심, 각오를 품고 가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세상에는 수능보다 멋진 일이 아주 많고, 결기와 결심과 각오는 아껴 두었다가 더 멋진 일에 사용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시험장에 들어가신 이상, 열심히는 해 봅시다. 세상에 잘 봐서 욕먹는 시험은 운전면허 필기시험 말고는 없더라구요.


 모쪼록,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내일 저처럼 뭐 하나 빠뜨리고 가시는 일은 없으셨으면 좋겠네요. 수험표, 신분증 그리고 시계는 꼭 챙기시고, 무엇보다 이성의 끈은 꼭 챙겨서 붙들고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추신.


제목을 뭐라고 정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3들에게”라고 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수능을 보지 않는 고등학교 3학년도 얼마나 많은데요. 제 주변에도 한 명이 있네요.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열아홉에게”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습니다. 수능을 보는 이들 중에는 열아홉 살이 아닌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조기졸업을 예정하고 있는 학생들도 있을 거고, 무엇보다 재수생과 삼수생들이 있지요. 제 친구들 중에도 아마 많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수능생들에게”라고 제목을 정하긴 했지만 사실 별로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수능을 보는 이들에게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세상에는 수능을 보지 않고도 나름의 멋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요.


 거기에 이번에는 수능을 보지 못하고 떠나가 버린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된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와 주었다면 지금쯤 수능을 함께 보고 있었을 겁니다. 함께 웃고 떠들다가 긴장된 표정으로 시험장에 입장했겠지요. 누군가는 시험을 잘 봤다며 웃고, 누군가는 시험을 망쳤다며 울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니 슬픔이 더욱 생생해집니다. 올해 수능생이 가장 줄어든 도시가 경기도 안산이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도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응원이 필요할 때는 응원을, 위로가 필요할 때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응원이 필요한 이에게는 힘껏 박수를,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는 함께하는 눈물을 보내주고 싶은 오늘, 수능 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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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 보내는 편지

(*2012107일 띄운 편지의 K와 같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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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7. 당신께 보내는 편지를 처음 연 것은 당신, K를 향한 편지였습니다. 그 날, 얼마나 큰 슬픔 속에 잠겨 편지를 썼는지, 당신이 낭송해준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란 시를 듣고 또 들으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또 흘려야만 했었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당신이 그곳으로 가게 만든 사회에 저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얼마나 괴로웠던지요.

당신이 그 곳으로 가기 하루 전, 그냥 슥 지나쳐버릴 수 있는 한 학생의 메일을 지나치지 못하고 답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쪽지를 남겨 주셨습니다. 당신이 없었던 다섯 달, 저는 그 쪽지를 보고 또 보며 버텼습니다.

그랬던 당신이 내일이면 권력이 당신을 가둔 그 곳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당신의 해방이 확정되는 순간부터, 29, 29.... 얼마나 손꼽으며 기다렸던지요. 며칠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꼽으면 꼽을수록 왜 또 시간은 그리 늦게 가는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내일, 내일이면 당신은 다시 우리 곁으로 옵니다.

 

그렇지만 이런 슬픔들, 이제는 모두 기억의 저편으로 치워 버리렵니다. 당신의 첫 모습을 보면, 이런 슬픔들은 모두 던져버리고 오로지 기쁨과 반가움으로만 맞아 주렵니다.

 

이제, 이제 더 큰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 안에서도 아셨겠지만, 당신이 그 안에 있었던 다섯 달 사이 대한민국은 더 많은 실망을 안았고, 더 많은 절망을 얻었고, 더 많은 가능성을 잃었습니다.

다시 독재는 시작되고, 다시 장악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시, 참교육의 희망은 저 멀리 떠나가 버릴 것입니다. 당신이 떠나고 당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은 이미 그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K, 다시 당신이 이 나라의 희망이 되어 주었으면 합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 험난한 길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고난의 길도 희망과 가능성으로 가득 찬 길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들려줬던 <봄길>이란 시, 저는 아직도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길이 끊어진 곳에서 길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K, 당신은 말했습니다. 제 가슴을 울렸던 것은 그때 당신이 말한 문장이 과거형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앞으로는 그러지 못할 것 같은.

하지만 K, 아닙니다. 이 문장을 우리 함께 현재형으로 만들고, 미래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 희망을 피워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길이 끊어진 곳에 서 있습니다. 갈림길에서 선택하는 문제라면 더 쉽겠지만, 우리에게 그런 호사따윈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 길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역사는 늘 그 길을 만드는 곳에서 출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만드는 일을 위해 살았고,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 대한민국은, 다시 역사의 길을 만드는 과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더 치열해져야 합니다. 더 결기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더 유쾌해야 합니다. 그렇게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길을 만들어온 이들과, 앞으로 길을 만들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러기 위해 K, 당신이 필요합니다.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함께, 길을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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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zahir*~ 2013.03.29 02:12 신고

    함께 가야지요. 더디더라도, 느림의 미학을 가슴에 품고, 진보는 게으름을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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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H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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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주 문득 걷고싶어지는 밤이 돌아왔습니다.

날씨는 추워도 이 아름다운 길이 내 앞에 펼쳐져 있기에,

나는 그 길을 걷고 싶은 충동을 자제할 수 없습니다.

한달, 두달 또 지나다 보면 눈이 내리겠고,

하얗게 덮인 눈 위를 걸어가고 싶은 마음은

오늘의 그것보다 더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걸을 수 없습니다.

내가 선택하지도 않았던,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무언가는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를 붙잡고 내게 그 길을 걸을 여유조차 허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 나는 H,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이런 구속을 못견뎌할 사람이지요.

그래서 당신은 이런 곳을 선택하지 않겠지요.

그리고 당신은 그 자유를 찾아 나설 용기가 있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어느 곳에도 구속받지 않고 살아가날만 한 사람이지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요.


당신은 나에 대해 가끔 이야기하곤 합니다.

당신은 나를 부러워한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나를 일종의 선망과 같은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과연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가? 하고 말이지요.


나는 오히려 당신이 부럽습니다.

당신의 그 자유가 부럽습니다.

당신의 그 용기가 부럽습니다.

어느날 문득 마주칠 내가 어느 권위에 소속되어

나의 자유를 모조리 헌납하고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는 그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나는 당신의 길을 가 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이미 걸었던 길을 나의 눈밭에서 재현해내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발자국을 따라 걷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당신이 걸어간 모양을 내가 나만의 방법으로 만들어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길을 이 앞에 재현해낼 수 있다면,

나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그것을 행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서 있는 이유는

그것을 위해 잃어야 할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홀로가 좋습니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오직 나 혼자 만들어낼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나는 너무도 사랑합니다.

하지만 문득 나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가끔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때에 내가 둘러야 하는 옷은 철갑입니다.

누구에게나 강해져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당신이 부러워한다는 것이 이 홀로됨을 사랑하는 일이라면,

당신이 언젠간 닿게 됭 것이 이 홀로됨이라면,

당신은 나처럼 철갑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나도 이제는 버려야 하는 것이겠지만,

당신은 처음부터 두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말하던 강함은 그 철갑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이겠지요.

강해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사랑하시길. 홀로됨, 그리고 당신을, 세상을.


이천십이년 십일월 팔일 목요일

누군가는 초조를, 누군가는 불안을, 누군가는 확신을, 연민을, 설렘을... 느껴내고 있을,

2012년 수능 전 마지막 새벽에,

H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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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P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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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가끔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사실 나는 지금도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문득,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느날인가부터 당신은 내게 당신의 이야기를 털어높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당신에게 무언가를 느끼곤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당신을 포기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그 자체로 당신입니다.

누구도 당신에게 당신을 포기하기를 강요할 순 없습니다. 그건 폭력입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강요가 아닌 하나의 조언으로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가능한 일도, 원하는 일도, 좋은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좋지 않은 면은 분명 포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분명 당신 또한 그것을 포기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위해 수없이 노력해 보았다는 사실도 압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지금의 당신은 그 노력조차 포기해 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나는"

"나는 그렇지 않아서"

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파리하게 떨리는 나의 손끝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 노력조차 포기한 당신 앞에서 내가 무언가를 해야 했기 떄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신 앞에서 내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던 것은

나 또한 당신처럼 그 노력에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지치고 지친 상황이 당신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당신에게 다시 힘을 쥐어짜내

그 속으로 걸어가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둘 모두가 그랬습니다.

옆에서보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뒤에서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나는 오늘 여기서 당신에게 편지 한 통을 띄우고 있습니다.

나도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나는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를 힘을 짜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발자국 나아가려고

이제까지 지쳤던 것들 모두 내어던지고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편지 한 통을 띄웁니다.

당신은 스스로가 무언가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열등감. 피해의식.

당신이 지적한 당신의 감옥은 이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둘은 모두 내가 이제까지 말한 당신이 스스로 만든 벽일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자만할 정도로 자신해도 좋습니다.

자만하다 실패하고, 또 열등의식을 느끼다 실패하며

자만과 자신의 사이, 열등감과 겸손의 사이에서

정확한 균형을 찾아내는 것은

삶 전체를 걸고 해야하는 일일 것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한 발자국 나아가고,

그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일 것입니다.


함께 걸어갑시다.

한 발자국 내딛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지치운 일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나아야만 합니다.

서로를 부여잡고 걸어냅시다.

- P에게, W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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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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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보내는 편지'의 첫번째 받는이로 당신을 선택하기로 한건 며칠 전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아주 작은 편지 하나가 가장 필요한 것이 어쩌면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당신, K라는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예전의 자리에서 내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언제나 나는 당신을 당신의 이름이 아닌 당신이 앉아 있던 의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당신 앞에 어느 수식어도 붙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편지는 그 의자에 앉아있는 당신이 아닌

K, 바로 당신, 그 자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쩌면 당신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한 지점을 걷고 있는지 모릅니다.

부정의(不正意)와 부도덕(不道悳)에 맞선 정의와 도덕의 싸움,

그리고 정의와 도덕의 아픈 패배.

그 정점에 바로 당신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당신의 삶의 발자국을 따라가본 일이 있습니다.

당신의 삶은 제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내게 가르쳐준 정의는 바로 내 자신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바로 그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것이 당신을 위협해와도 당신에게는 K라는 당신 자신이 있었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의 마지막 보루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것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내 앞에는 닥쳐오는 실존적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 실존적 위협 앞에서 제가 지키려 한 것은 제 앞의 자신이 아닌 남 앞의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가 걸어야 할 길은 바로 그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나! 그것이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연한 진실을 당신 K는 삶 전체를 통해 내게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제 자신을 향한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저를 비쳐보는 거울은 당신이 될 것입니다.


K, 말했듯이 당신은 그런 당신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을 걷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아프지만 졌습니다. 정의는 부정의 권력에 대항해 패배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의 영원한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패배는 일시적 패배일 뿐입니다.

당신이 부정에 대항해 분명 승리할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언젠가 당신의 삶이 다시 영광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당신의 삶이 영광을 되찾은 후에, 당신 옆에는 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의의 승리 옆에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삶은 거울입니다.

힘을 내어 빨리 승리의 날을 함께 맞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날이 꼭 오리라 믿습니다.




      -K에게, W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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