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후기.


 계절을 돌아 1년이 지났습니다. 겨울,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오늘은 12월 1일, 이제 다시 겨울의 시작입니다. 그러고 보니 벽 1편이 연재된 것이 딱 1년 전 오늘이었습니다.

 어쩌다 이 소설을 시작했느냐고 묻는다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동기도, 그 의미도 불분명했죠. 캐릭터의 설정이나 플롯도 확실한 구성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고, 첫 편은 그저 생각나는 이야기를 쓴 것뿐이었습니다. 그게 제 일상이기도 했구요.

 시간이 지나면서 구성이나 캐릭터 설정은 확실히 해 보려고 했는데, 도움이 됐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목적만큼은 분명히 잡고 갔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스무살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저는 주혁과 승우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얽히고설켜 도통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를 정도죠. 그래서 결말을 내면서도 꼭 완전히 ‘매듭’을 푼다기보다, 그저 가능성 하나만을 암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쓴 장면의 마지막은 승우가 앉아 있는 자리에 주혁이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도, 그 뒤의 상황도 불분명합니다. 저는 하나의 가능성을 암시했지만, 읽는 사람들은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겠죠. 그럴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상상 속에 있는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다는 것. 그저 이름만 존재하는 이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일에 대한 중독을 저는 아마 끊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1년 동안의 연재 동안 그것만은 확실히 느낀 것 같습니다.

 언젠가 새로운 글을 써서 돌아오겠죠. 보다 발전될 것이라는 장담은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제가 새로운 글을 가지고 돌아온다면, 보다 즐거운 글이기에 다시 돌아왔을 것이라는 확신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겨울입니다. 언젠가 제가 ‘마지막의 시작’이라고 칭한 적 있는 12월 1일입니다. <벽>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12월 1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처럼, 오늘은 또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언젠가 또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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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가을. 끝


by / 이창우


 


  11월의 가을비가 지나면 겨울일거야. 캠퍼스 안에 대형 커피숍이 자리잡아 학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길이었다. 우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던 나는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이 비를 맞고 가야할지 어찌할지 주저하다 들어온 공간이다. 인문대를 걸어 나오다 스윽 둘러보긴 했던 이곳에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창에 길게 늘어진 테이블에 앉아 어둠이 내리는 순간을 바라본다. 이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따끈한 커피를 마시고 나서면 가을비를 맞으며 어느 정도는 버틸 거야. 학교를 나설 때부터 우산을 잡을까 말까 고민하던 내가 배시시 웃는다. 까짓것 가을비쯤이야 감당할 수 있거든. 창으로 바라보는 빗줄기는 주변의 가로등과 멀리서 번져오는 빌딩이 내뿜는 빛으로 여러 빛을 발하며 땅으로 추락한다. 경사진 도로에 스르르 저들끼리 어울려 아래로 아래로 흐른다. 테라스에는 접힌 파라솔과 텅 빈 진한 갈색의 나무의자들이 비를 맞고 있다. 


몇 시나 된 건지 이미 배터리가 나간 핸드폰을 꺼내려다 실내의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이미 넘어 있었다. 더 거세지기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할 것 같아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서며 후드를 뒤집어쓴다. 길은 빗물로 부드럽게 윤기를 내고 있다. 늘어선 은행나무의 노란 잎들이 쌓여 두둑하게 발을 감싼다. 정거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흠뻑 젖은 나는 계속 길을 걷기로 한다. 여러 색의 우산들이 가득 모여 있는 정류장을 지나친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 그저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정오가 막 지나면서 보낸 문자에 답이 없었고 수업 중일까 조심스레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서너번 신호음이 가고 나서 핸드폰을 닫았다. 배터리가 거의 끝나갈 때까지 그는 연락하지 않았고 별로 그 다음은 궁금하지 않았다. 고의인지 피하는 건지 어떤 이유인지 상관 없었다. 망설이다 언젠가 다시 기억이나 할까 싶은 마음이었다. 아무래도 비는 밤새 내릴 것같다.  


비가내리는 길은 자동차의 마찰음이 묘하게 어우러져 혼자 걷는다는 생각을 떨쳐내게 한다. 비 오는 날에 더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 이런 이유였을까. 한편으론 알아차리지 못하는 두려움이 빗소리에 빨려 들어가곤 했다. 지나는 차들의 불빛들로 빛난다. 하지만 보도블록 위 뒹굴지 못한 채 밟히는 수북한 은행잎은 노랗게 풀어놓은 그림물감 덩어리 같다. 바닥에 시선을 둔 나의 눈빛도 흐리멍텅하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아마도 영원히 알아차릴 수 없을 거야. 이 거리의 안락함이 광장의 암울함과 유리되어 있다는 생각, 내가 서 있는 세상이 수많은 시선으로 분산되어 초점 잃은 눈동자를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겠다. 나의공간이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다시 되돌아가려 한다. 오후 내내 나를 가두고 고문했던 상념과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핸드폰은 꺼져 있고 비는 오고 우산은 여기 이렇게 있고, 도대체 무슨 일이야?”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퍼붓는 금지의 말에 갑작스레 한기를 만난다.  


“그대로야. 네 말대로 핸드폰은 배터리가 없었고 우산은 두고 갔고 나는 비를 맞고 이렇게 왔지. 왜?” 


“걱정했다고.” 


 


금지의 짧은 대답과 한숨소리와 방안을 가득 채운 음식의 혼합된 냄새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마에 주름을 금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내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그냥 집에 있는 걸로 찌개 끓이고 밥만 해놨어.”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금지의 서툰 변명도 아무렇지 않다.  


 


“그래, 지금은 배고프지 않아서 너는?” 


“나, 다시 일자리 구했거든. 야간 일이지만 그래도 다른 건 괜찮아. 이제 준비하고 나가야 돼.” 


“그럼 아침에 들어와?” 


“으응. 새벽에 끝나서 근처 선배 네에서 자는 날이 많을 거야. 택시타고 어쩌고 하면 남는 게 없잖아.” 


“견딜 수 있겠어?” 


“이정도야 끄떡없지. 걱정 말아. 넌 별 일 없는 거지?” 


“응, 아무 일도 없는데.”


 


내 안에서 기어 나오곤 하는 것을 나도 모르겠는데 뭘. 분명한 것은 알겠다. 이 나라의 이 시간대가 정상은 아니라는 거. 헛갈린다. 지명이 바뀌면 세상도 달라져 있어서 서쪽에 몸을 누이며 사는 나와 동쪽의 평화로운 공간에서 반나절을 지내는 나는 낯선 여행자 같기만 하니까. 제 각기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이질감을 만난다. 여기에 있으면 나에게 물어 오는 수많은 물음에 심장박동이 거세진다. 학교에 가면 눈부신 태양 아래 환한 사람들로 넘친다. 거리로 나서면 답답한 문구의 플랜카드가 여기 저기 목을 맨 채 늘어져 있다.


 


  철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공부하는 이 시간이 어쩐지 현실과 너무도 괴리되어 있다는 생각에 무력감이 쌓인다. 이 세계에 사상이 존재할 수나 있을까. 방안을 둘러본다. 빼곡하게 벽을 둘러싼 책들이 무덤처럼 누워있다. 그래, 이 책들과 지나온 나의 시간들이 지금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 내가 왜 여기에서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거지?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 사상의 부재 시대에서 무엇이 나를 이끌어가든 그것은 현실적으로 무해하기에 작은 의미를 던져줄 것이라 생각했었다.


비를 맞고 돌아온 후 며칠을 감기몸살로 앓고 그동안 꺼진 채 있던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한다. 비몽사몽간에 금지가 들락거렸던 것 같다. 어지럽게 놓인 약봉지들이 놓여있는 방바닥은 한차례 들끓던 오열이 지난 후 내팽겨친 식은 내 몸뚱아리의 한 조각 같다. 서윤에게서 몇 번의 전화가 왔었다. 지금은 아니다. 누구와도 말을 할 수 없어.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지치고 있어. 커튼을 내려놓아서겠지. 아직 어둠 속에서 원두를 내린다. 아, 향기로운 방으로 변하고 있다. 이 시간 안에서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같아.


“여러분은 휴머니스트인가요?”


비를 맞으며 걷던 거리 위에서 내 머리 안에서 부유하며 계속 되뇌곤 했던 여성학 시간, 교수의 물음이었다. 강의가 끝나갈 즈음 교수는 도리스 레싱의 소설 속 인용구를 던지며 강의를 끝맺었다.  


‘휴머니즘은 우주의 모든 것에 대해 가능한 한 의식적이 되고 책임감을 가지려고 분투하는 인간들 전체, 개인들 전체를 의미하는 거예요.’ 


교수의 물음에 답은 각자의 몫이었다. 부리나케 강의실을 나가는 움직임들에서 생각은 끊겼고 다른 시선으로 걷고 있는 내가 밀어두었던 의식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인도 위에 널브러져 납작하게 눌린 젖은 낙엽들이 나처럼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 안에서 작은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나를 갉아먹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통증을 가져다 준다. 상상력의 산물인지 현실에서 일어나는 현상인지 가늠할 수 없어.


 


  핸드폰의 벨소리에서 현실 감각을 되찾는다. 내 몸과 마음이 분리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외부를 통해 전해지는 소리이다. 바깥 공기를 맡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그와 서둘러 약속을 잡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에 약간의 어지럼증을 가늠하다 욕실로 들어간다. 거울 속에 내가 있다. 익숙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낯선 얼굴이 빼꼼히 나를 바라본다. 뜨거운 수증기로 거울 속의 나는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서둘러 길을 나서다 문턱에 걸려 헛발질을 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며칠째 나를 휘어감고 있는 무거운 공기가 계속이다. 가을비를 만만하게 여긴 탓이려니 하면서 돌아 나오려다 욕실의 전등빛에 다시 운동화를 벗는다. 왜 이러지? 나를 기다리는 거울 속의 그 사람이 멀뚱멀뚱 시선을 준다. 미친 사함같아. 아직 덜 마른 긴머리는 산발한 것처럼 늘어져 있다. 저 머리 좀 어떻게 자르던지 하지. 결국 늦겠군.


초저녁의 시간인데 거리는 벌써부터 밤을 향해 빛을 발산한다. 아, 이 골목도 이제 싫증이 난다. 매일 밤 깜빡이는 이름들, 삶을 기억하게 하는 진득한 음식 냄새들, 찌든 알콜 냄새, 구역질이 난다. 나와 반대로 비껴가는 많은 사람들의 옆모습에서 또 다른 나를 본다. 차라리 집으로 들어오라 할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면서 카페 입구를 밝히는 보랏빛 글자가 눈 앞에 나타난다. 하필 이곳을 선택하다니. 창이 밖으로 나지 않은 곳인데.            


   


 


“장례식장은 올거지?”


 


실내의 주황빛에 서윤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보인다. 광장에서 총궐기를했다고 했는데 그 영향일까. 푸욱 꺼진 그의 두 눈이 낯설다.


 


“무슨 장례식?”


“너, 정말 모르고 있던 거야? 며칠 전 비 오는 날 있었지? 음주운전으로 지하도 입구 기둥을 들이받았대. 즉사했다더군.” 


 


가라앉은 서윤의 목소리가 끊겼다 다시 이어졌다 한다.


 


“지금 누구 말하는 거야?”


“이상하지. 형이 출국 결정하고 친구들 만나 만취해서 대리운전기사까지 불러 갔다는데 사고 당시에는 본인이 운전대에 있었대.”


"경연 오빠?"


 


그 날이었다. 빗속에서 휘청거리던 그날이었다. 나의 핸드폰에는 나타날 수 없었던 그가 연락을 했었던 걸까. 갑자기 명치 아래께를 아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순간 숨이 딱 멈추는 것 같았다. 나를 대신한 것만 같은 엉뚱한 사람의 죽음이 내 삶에 자리 잡아 똬리를 틀려고 한다. 삶은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 채워지곤 하는 것일지도 몰라. 적당히 뒤틀린 정신. 스스로 고통받아야 자기 존재를 알아차리는 인간. 그가 날린 한 방은 KO 펀치였다. 나를 향해 던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 우연한 죽음이,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야 하는건가, 그 목소리가  나를 결박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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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가을. 12


/by. Widerstand



 사실 왜 여기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 끝을 맺을 때에는 언제나 그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끝을 두려워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모든 것의 끝인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도 그랬냐고 묻는다면 나도 그랬다. 언젠가 한강 다리 위에 서서 흘러가는 물을 보면서 나는 그 마지막이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그 위에서 가만히 걸음을 돌려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을 두려워한다. 몇 년마다 한 번씩 도는 지구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보면 더더욱 그렇다. 무슨 종교 단체에 의존해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나는 솔직히 그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세기말적인 기분이다. 벤치에 나 홀로 앉아 있고,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멀리선가 공사장에서 나는 소리 같은 소리가 나는 것 같기는 한데, 워낙 멀리서 들리는 소리라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왜인지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집에 내려왔다. 재인과 주혁, 함께 앉아 있는 그들을 보며 나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저 단순히 그걸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을 뿐.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취기라고 치부할 수 있도록 술이라도 마실 걸 그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순간이 돌아온다고 해도 술은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맨 정신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휴대폰은 며칠 전부터 꺼 두었다. 몇 번이고 걸려오는 주혁의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차피 대답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받지 않고 싶었다. 하지만 아주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스스로가 있었다. 그렇기에 받고 싶었다.


 존재하지도 않을 것 같은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스스로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나에게 올 중요한 연락 같은 것은 없었다. 휴대폰으로 오는 문자가 광고 문자밖에 없었던 때가 언제부터였더라, 고민했지만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휴대폰을 껐다. 더 이상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다. 약간의 아쉬움, 조금의 허전함, 그리고 그 모두를 찍어 누르고 있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날, 주혁과 이야기를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잘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그날 밤, 많이 취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던지.


 주혁은 나에게 혼잣말하듯 말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해. 사람을 만나는 게 재미있어 진 것 같다고.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소통하는 일은 어떤 쪽이든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더라고. 뭐 여전히 싫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잘 못 하겠지만,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서 익숙해지고 그 사람의 의견을 듣는 일은 그래도 재밌는 것 같긴 하더라.”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했다.


 “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쪽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것은 재밌는 일이긴 하지.”


 돌이켜보면 나는 그 때 대화에 별로 집중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집중하고 싶지 않았던 거였는지도 모르겠고.


 “네 덕분일 거야, 아마.”


 주혁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나?” 나는 순간 놀라 물었다.


 “뭐랄까 나는 온전히 내 세상에 살던 사람이거든.”


 나는 주혁의 말을 끊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주혁은 듣더니 말을 이었다.


 “뭐 반대로 말하면 내 세상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지도 몰라.”


 주혁은 그러더니 잠시 말을 골랐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가는 게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사실 나는 그런 삶에 별다른 회의를 느껴본 적 없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스스로 만족하는 것 외에 삶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그렇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야. 그렇게 사는 삶을 나는 진심으로 동경하기도 해.”


 “그런데?” 내가 물었다.


 “나는 그 속에서는 발전할 수 없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세상에는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사람도 있더라.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은 못 되더라고. 내 세계의 벽을 낮춰야만 발전할 수 있는 것 같아서. 물론 발전하겠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강박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주혁은 말을 마쳤다. 무어라고 대답해야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만이 들렸다. 집으로 향하는 길, 걸어가는 걸음이 마치 모래시계처럼 느껴졌다. 이 걸음이 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왜인지 그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애써 웃음을 띄워보았지만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은 변한다. 때로 그것이 예상했던 방향일 때도 있고, 예상하지 않았던 방향일 수도 있다. 때로 그것이 급격할 수도 있고, 아주 천천히 일어날 수도 있다. 때로 그것은 좋은 방향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방향일 수도 있다.


 너는 변했다. 예상했던 방향이었고, 언젠가는 예상했던 정도였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잘 된 일이었다. 잘 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스스로를 애써 감추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질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는 것에 대한 초라함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나름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주혁처럼 발전하는 것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타입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앞서가는 것은 이미 너무 많이 겪어 두려움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밝아진 너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다. 오히려 너는 뭘 해도 잘 될 것 같은 막연한 낙관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까지 내가 네 옆에 남았던 것은 그 낙관 때문이라는 것이 나의 왠지 모를 직관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한 독점욕이었을까. 세상과 너를 연결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을까. 이기적이다. 생각보다 많이 치졸하다.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나는 최대한 억누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흐르는 침묵을 주혁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래서 더욱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모래시계의 모래는 전부 떨어졌다. 나는 집 앞에 도착했고, 주혁과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무언가 한 쪽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벽의 문제를 해결했지만 매듭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 매듭을 풀 수 있는 최초이자 마지막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지듯 잠에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기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문자를 쓸 때 상당히 주의를 기울였던 것 같다. 뭐 그래 봐야 거칠게 쓴 문장은 잘 정리되지 않았다. 처음 쓴 것과 비슷한 문자를 보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결기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별다른 결기로 그 글을 보냈던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상황이 이랬으니 내가 할 일이 유일하게 이것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상황에 대한 인식이 명확해지자 그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별다른 내용은 담지 않았다. 그냥 지금 나의 상황과 생각을 담담하게 전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멀어져가는 것은 언제나 불안한 것이라는 생각만을 전했다. 막힐 때일수록 간단한 것이 해법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쓰다 보니 글이 길어진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이렇게 장황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별 수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나는 너의 대답을 직감했다. 그래서 전화를 받지 않았고, 결국에는 전화를 껐다. 학교에 갈 때면 너를 만날까 주변을 둘러보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결국 주말이 다가왔고, 나는 본가에 내려왔다. 대학에 간 뒤로 자주 내려오지 않는 곳이었지만 왜인지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밤이다. 해질녘이었던 시간은 어느새 상념에 사로잡히다 보니 이미 깜깜한 밤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에 이 벤치 앞을 지나가는 사람도 몇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자리가 싫지 않았다. 어쩐지 세상과 유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자 편안해졌다. 나는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가로등이 있는 자리다. 영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착각했던 가로등이 있던 자리다. 그 착각은 진짜 착각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의 의지박약인 걸까.


 아니, 어쩌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몰라. 나는 다시 한 번 희망을 걸어보지만, 그 희망을 짓누르는 절망의 힘을 결코 무시하지 못한다.


 어쩌면 끝이라는 생각, 어쩌면 다시 시작이라는 생각.


 나는 벤치에서 일어난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걸까, 왠지 다리가 휘청거린다.


 가로등을 한 번 올려다본다. 섬광 때문인지 순간 눈이 어두워져 길옆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무도 없었던 길에 누군가 서 있는 느낌이다. 나는 눈을 비비고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 한다. 너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왜인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네가 올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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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가을. 11.


by / 이창우


 


 


  "아까 재인이가 전화했던데 같이 가보지 않을래?"


모처럼 고등학교 친구들과 나눈 시간은 유쾌했다. 술이 달콤하게 목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란 이런 것인가 싶다. 주혁은 술자리가 이렇게 늦게까지 진행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 너무 늦지 않았나?"


주혁은 승우의 목소리가 가끔은 너무 냉소적으로 들린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에게도 이렇게 들릴 정도면 타인들이야 말해 뭐할까 싶을 만큼 차갑다.


 "왠지 가보는 게 좋겠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서 말이지."


주혁은 혼자서라도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형식적으로 물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같이 갈 수 있다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허허, 너도 누구 닮아가냐? 기운으로 뭔가를 결정하게."


 "그러게. 취하진 않았잖아? 뭐, 너무 늦어서 문전박대하면 그냥 돌아오더라도."


 "그러자, 뭐 금지도 같이 있을 테니 거리낄 거는 없잖아?"


 


  한쪽으로 담쟁이 벽이 끝없이 이어진 길이다. 버스를 타고 가다 그 벽을 발견하고 어디인지 모르는 정류장에 발을 디뎠다. 그래 이 길을 따라가 보자. 적어도 내 시야가 미치는 곳까지는 담쟁이 벽이다. 이 길을 지나는 사람은 없구나. 초록빛 담쟁이와 갈색 잎의 담쟁이는 서로 뽐내며 하늘로 가까이 벽을 타고 오른다. 이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 거지? 그렇게 오르다 저 벽이 끝날 때 너는 어찌할 거니? 그때쯤이면 겨울이 될 테니. 스르르 말라비틀어져 오르다 떠나는 거니. 그것을 위해 오르는 건지도 모르지. 소멸.


귀가 뜨거웠던 지난밤은 여전히 환청처럼 나를 감싸고 있다. 그가 날 왜 그토록 원하는지 알겠는데 마음으로 다가와 주질 않는다. 그를 느낄 수가 없다. 서로 알아온 시간이야 다른 누구보다 오래되었지만, 그와 교감하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더욱 난감했다. 어쩌면 알코올 기운일지 몰라. 맨정신으로 그토록 많은 말들을 쏟아놓지는 않았을 것 같거든. 두 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면서 팔도 아프고 귀도 뜨겁고 힘든 시간이었다. 이런 것은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집착이야. 아, 오래도록 알아왔다고 모든 사람이 연인이 되는 건 아니잖아.


저녁 바람이 차갑다. 겨울이 가깝다는 거겠지. 버스정류장에 놓인 긴 의자에 앉는다. 한 정거장이 이렇게 짧은 거였나. 그냥 버스를 타고 지나던 길가에 놓인 이 사물이 덩그러니 나를 기다린 것처럼 반가웠다. 바람을 막아 주는 투명칸막이에 붙어 존재를 드러내는 광고물들과 안내판들이 어디로든 갈 길을 정해보라는 듯 있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 내뿜는 하얀 연기는 이내 공기 사이 어디론 가로 흩어진다. 흔적도 없다. 순간 타들어 가는 담배 정도였으면 싶다. 자연스레 엘리트 근성이 덕지덕지 배여 있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경연 오빠의 얼굴이 생각나질 않는다. 좋은 사람이다.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의 말이 허공에 흩뿌려진다. 가로등이 어느새 길을 밝히는 시간이구나. 어둠이 너무 빨리 찾아오는 계절이다. 다음 정거장에서 다시 버스를 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담쟁이 벽은 이제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널 사랑한다구, 원한다구, 그거면 충분하지 않니?” 그의 목소리와 함께 떠오르는 그의 표정이 없다. 내겐 그저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뿐, 그의 얼굴이 몸이 가슴이 없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를 온몸으로 느껴야 그가 날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목소리만 있다.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


사랑에 충분한 것은 무엇일까.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충만해질 때 다가오는 감정 아닐까.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는 자신만만하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너무 일방적이잖아. 아니지 사랑은 일방적인 거야. 하지만 서로 일방적일 때 그 둘 사이에서 번지는 거 아닐까. “이건 아무래도 운명적인 거야. 내가 너를 만나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확신했다는 거야.” 대꾸할 수 없는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문제겠지.  


 


 겨울이 좋은 것은 바로 이런 거야. 내 공간으로 들어올 때 느껴지는 따스함, 밖에서 시달린 차가움에 진정되도록 다가오는 친근한 이 기운이야. 너무 많이 걸어서 다리가 무겁다. 내가 일어난 자리가 고스란히 침대에 남아있다. 코트를 벗고 주저앉아 있다. 내 시야에 들어온 책 무더기의 열에서 삐죽 튀어나온 것을 빼내 본다. 세월. 마이클 커닝햄. 세 명의 댈러웨이 부인. 그리고 나. 푸르다. 아니 파랗다. 그래 두 색의 틈에서 볼 수 있는 색이라 해야 할까. 책에 입힌 옷은 내용만큼이나 차갑진 않았다. 나도 그렇게 되고 말 것 같아. 댈러웨이 부인처럼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어. 이제는. 표현할 수 없는 색의 이 책을 다시 맨 위로 올려놓는다. 툭 튀어나와 관심을 끌다니. 


 ‘오늘 밤도 못 들어갈 거야. 선배네에서 지낼 것 같거든.’


내 안의 소리를 내야 하겠는데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느낌이다. 무얼 하려는 거지? 지금 같은 시간이 낯설게 나를 둘러싸고 있다니 이건 뭐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럼 어떻게 있어야 하는 건가. 침대에 누워 천장의 작은 꽃무늬를 세어야 하는 걸까. 금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요즈음 계속 밖에서 지낸다. 아직은 메시지를 보내는 마음을 잊지 않았나 보다.


차라리 그녀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했나 봐. 그녀의 부재가 이렇게 크게 느껴지다니 뜻밖의 감정이다. 도대체 내가 왜 그의 마음에 대해 이토록 지루하게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이런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생각이 진전되지 않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누가 있었지? 누구와 이야기를 했으면 싶은데 말이지. 전화기를 들어 주소록을 넘기다 눈에 들어오는 번호를 누른다. 신호음이 도착하자마자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왜?"


처음부터 튀어나온 말이다. 딱히 이유를 말하기 어려운 이 상태에 맞는 적절한 말이 없다.


 "나, 지금 친구들과 만나는 중이라 그런 거야. 밖으로 나갈게. 기다려."


 "아, 아니야. 다음에 통화하지 뭐."


 


그래. 가만 생각해 보면 누군가 필요해서 손을 내밀면 이런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모든 일의 결정은 혼자 해왔던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 그래, 내 문제인데 누가 제대로 알아줄 수 있겠어. 이미 답은 알고 있는 걸. 그래도 혹시나 내게로 주는 그의 마음을 되뇔 필요는 있었지.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는 나를 확인하고 싶었던 걸 거야. 경연 오빠와 지냈던 시간을 거슬러 생각해 보려 하는 데 좋은 기억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과외 선생이라는 위치에서 독단적이고 잘난 체 쟁이였고 엘리트주의에 깊이 절은 인간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부족한 것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배경의 소유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너무 오만했다. 이쯤 되면 엄마까지 떠오른다. 내 인생에 개입된 그의 존재는 엄마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엄마에게라도 그 탓을 돌리고 싶은 나의 못된 마음인 거지. 


학교를 때려치우고 새로운 이 기회를 잡아보는 것은 어때? 내 안에서 아주 작게 울리는 목소리까지 기어 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 기회가 나의 숨통을 조여 결국에는 파멸로 이르게 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아, 이런 시간을 마주하고 있는 나란 인간은 얼마나 한심한가. 아닌 건 아니야. 생각해 보면 세상은 참 재밌는 곳이긴 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잘 돌아간다. 내가 없다 해도 이곳에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테니. 


지금이 지나면 달라지지 않을까. 인간의 마음이란 변덕스러우니까 잘 지나가 주지 않을까. 하기는 경연 오빠는충분히 잘 살아갈 사람 아닌가. 왜 이리도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에게 거절한 사실을 되씹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는 상태에서 이 방의 공기가 나를 짓누른다. 창으로 들어오는거리의 빛이 암흑의 이 공간에 희미하지만 사물의 존재감을 드러나게 해주고 있다.


 


 "이거 놔요." 


그의 우악스러운 손이 나를 잡아 이끌며 뒷모습만을 보인 채 마구 앞으로 달려간다. 나는 몇 번이고 넘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진다.  


 "잠깐만요, 얘기 좀 해요. 이러지 말고."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 벼랑 끝까지 와 있다. 


 "뭐하는 짓이에요? 오빤 미쳤어. 미쳤다구."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지르다 깨어났다. 가느랗게 그림자를 만들던 창밖의 사물들을 바라보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아직 바닥에 널브러진 코트와 가방을 제자리로 옮기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인기척과 벨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누구세요?"


 "나야, 승우랑 같이 왔어."


 "어어, 그래. 잠깐만."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였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그건 우리가 할 말 같은데."


승우의 목소리는 유리알 구르는 소리처럼 적막을 가르는 파열음처럼 들린다.


 "자다 일어난 거야?"


 "으응, 잠들었나 봐, 좀 전에 깼어. 근데 왜?"


 "이 친구가 가봐야 한다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왜 혼자야?"


승우의 목소리는 너무 일직선으로 꽂히는 화살 같아. 아무런 잡음 없이 쌩-하니 과녁을 맞추는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너무 차가워.


  "금지는 선배네에서 자고 있을 걸. 암튼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


  "아까 전화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뭐, 궁금도 하고 해서." 주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한다.


  "다시 전화하지 그랬어?"


  "이재인, 전화 몇 번 왔었나 한 번 보고 말하지 그래."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와 있었다. 그런데 계속되는 승우의 목소리가 주는 느낌이 몹시 거슬렸다.


 "아, 그랬군. 여기까지 왔으니 뭐 마실래?"


 "난 됐는데 주혁아 넌?"


 "어, 나도 뭐, 딱히."


 "별일 없는 것 같은데 늦었으니 가는 게 낫지 않나?"


승우의 목소리는 가면을 쓴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키는 것 같다. 무엇이 언짢은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승우는 몹시도 이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어 했다. 그런 마음이면 뭐하러 따라온 거지? 어떤 이유에서건 둘은 여기로 와 있는데 그 행위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승우의 오만한 모습에 쓸쓸함이 밀려온다. 이런 승우는 처음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려니 하면서도 살갑지 않은 그에게 건 작은 기대감마저도 무너지는가 보다 생각하니 은근 화가 치밀기도 한다. 어쩌겠어. 저리 생겨먹은 인간인 것을.  


 "그래, 어쨌든 와 주어 확인까지 해주시니 고맙네. 고생했어. 주혁, 그냥 걸었던 거야.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승우, 너두."


 "뭐, 미안할 것 까지야. 주혁아 재인이 쉬게 가자."


승우는 말을 하면서 먼저 일어나더니 어느새 현관문 가까이 움직인다. 주혁의 난감한 듯 눈짓을 보내는 표정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배웅했다. 내가 걱정이 되었다는의미였겠지. 그런데 하나도 고마운 마음이 들진 않아. 자동적으로 입에서 튀어 나온 고맙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겠지만. 대상을 향한 착각은 자유라 하지만 나는 어쩌면 내 주변인과 내 삶 자체를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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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가을. 10

/by.Widerstand

 



 “웬일이야?” 승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묻는다.


 “둘이 어떻게 같이 들어와?” 서준이 물었다.


 “앞에서 만났어.” 내가 말한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승우도 알고 나도 알지만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는다. 나는 이런 종류의 의미 없는 거짓말을 즐긴다.


 승우의 웬일이냐는 질문에 서준은 아직 답하지 않았다. 잠자코 남은 한 명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다 시계를 보고는 내가 묻는다.


 “왜 이렇게 늦어?”


 “우리야 학교가 가깝지만 걔는 머니까. 30분 정도는 기다려줘야 하지 않겠어?” 서준이 말한다.


 “자, 그럼 5분 남았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시계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시계에만 눈을 맞추는 모습이 재밌었는지 둘이 웃기 시작한다.


 “뭐, 늦은 사람은 늦는 대로 놔두고. 안주는 미리 시켰어?” 승우가 묻는다.


 “응, 뭐 적당히.” 서준이 답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현이 들어온다. 그러고 보면 졸업한 뒤로 처음 만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학교도 멀고 서로 바쁘다보니 연락도 뜸했다. 종종 문자를 나누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는 끝. 대화의 단절은 벽과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높아지는 벽.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벽을 부수는 일은 더 어려워진다.


 나는 애써 어색한 기색을 감추며 상현에게 인사를 건넨다. 상현은 서준 옆에 앉는다.


 “오랜만이네? 그러고 보니.” 상현이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려워졌었다. 특히 오래 보지 않은 친구를 만나는 일은 더더욱 두려웠었다. 추억 속에만 남았으면 좋겠는 애잔한 과거에 대한 기억이랄까. 그 기억이 파괴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두려움 역시 높이 쌓여 부수기보다는 돌아서 가게 되는 경향이 있더라.


 벽과 사다리. 술을 꽤나 많이 마셔서 다음날 고생을 하긴 했지만 나는 그날 승우, 재인, 그리고 금지와 나눴던 이야기만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우리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의 키워드는 남았다. 소통.


 벽 앞에 사다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죽은 사람도 포함하는 이야기다.


 한 시간의 대화가 사람의 태도를 입지전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태도를 바꾸는 것은 결코 설교가 아닌 공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았다. 그리고 나는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평소에 피하려고만 했던 과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20대인 내가 지금의 20대를 관찰하듯이 바라보는 스스로가 재미있었지만,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과에 진학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나름 재미있었다. 그것은 또 그 나름대로의 소통일 것이다.


 죽은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유명한 작가의 소설을 찾아 읽고,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람과 이야기하는 일은 의외로 재미있는 구석이 많았다. 독단에서의 해방감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서준이 나를 불렀을 때 나가겠다고 흔쾌히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람을 눈앞에 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모두 같은 자리에 있다는 유대감을 느끼고 싶었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딱 떨어지는 해답이 즐거웠다.


 어쩌면 승우도 같은 과정을 밟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끔 우연히 지나치다 내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승우를 발견하곤 했다. 약속도 하지 않은 채로 도서관 서가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오늘도 도스도예프스키의 책 앞에서 만나 서가에 한 권 남은 책을 가위바위보로 양보하고 같이 넘어오는 길이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 서준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러게, 이러다가 곧 눈 오는 거 아니야?” 내가 웃으며 말했다.


 다시 추위가 돌아오고 있다. 눈발 흩날리는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단언컨대 내 삶 속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은 언제나 눈발과 함께했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고 한가했던 그 한겨울의 이야기를 나는 결코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매일 학교에서 도망쳐 나오던 카페, 어쩌다 뛰어다니게 되었던 거리. 함께 불렀던 노래. 언젠가 문득 음악 속에서 받았던 살아있다는 감정. 그렇게 절절한 감정을 다시 한 번 느껴볼 기회가 있을까. 세상의 중심과 같았던 가로등, 깨닫는 게 늦었던 우리들. 졸업식 전날 밤, 함께 밤을 새며 앉아있었던 편의점. 마지막으로, 짤랑, 하는 카페의 종소리.


 “추워지니까 그날 생각난다. 밤새고 편의점에서 앉아 있었던 날.” 상현이 말한다.


 “그래, 무슨 치기였는지 알 수가 없지.” 서준이 말한다.


 “그러고 보면 그 뒤로 편의점에서 밤을 샌 적은 없네? 고등학교 때는 꽤나 새벽에 편의점 꽤나 자주 다녔었는데.” 내가 말한다.


 “대신, 앞에 이게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승우가 술잔을 들고 웃는다.


 고등학교 때. 그래봐야 이제 1년도 되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우리의 위치는 완전히 바뀌었고, 어느새 우리는 고등학교를 추억 속의 한 그림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학창 시절’ 어쩌고 하면서 나이든 척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의미 없는 구분인가. 2014년 12월 31일에서 2015년 1월 1일이 되는 순간 우리 자신에게 오는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다르게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가 단지 스무살이 됐다는 이유였으며, 이제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이유였고, 단지 11시 59분 59초에서 0시 0분 0초로 1초가 흘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도 그 구분에 익숙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느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하다고 치부하는 것은 왜일까. 언젠가부터 한때 나의 전부였던 것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은 왜일까.


 승우와 서준과 현승은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도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년인데, 많이 변했어.” 내가 읊조리듯 말했다.


 “1년이든, 한 달이든, 하루든, 단 1초든, 사람은 변하는 거야.” 승우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누구도 말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1년이든, 한 달이든, 하루든, 단 1초든, 사람은 그 변화를 두려워하게 되어 있는 거야.” 승우가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세상에 ‘나는 변할 거야!’라고 선언하고 변하는 사람은 없어. 그건 정치인들이 선거철에나 하는 말이지.” 서준이 말했다.


 “스스로가 어떻게 변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변화의 계기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변화라는 건 어떤 계기가 필요하기 마련인데, 세상의 모든 변인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상현이 말했다.


 “중요한 건 뒤를 돌아보는 거지. 내가 어디까지 변했나, 어떻게 변했나. 그러면서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하고, 이렇게 변하면 안 되겠다 자각도 하고, 때로는 절망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뿌듯함에 도취되기도 하고. 뭐 그런 거겠지.” 승우가 말한다.


 너와 이야기하며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변한다는 일은 일면 즐거웠다. 하지만 어쩌면 나의 내부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휩쓸려 나의 존재가 희미해 질까봐. 늘 그렇게 흘러가는 그저 그런 사람의 하나가 될까봐.


 사람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안이 세상으로 가득 차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나라는 존재가 내 안에서 사라질까 두려웠다. 순간순간 이게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은 나를 나는 억지로 찍어 눌렀다.


 세상에 솔직해지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나에게 솔직해지는 것은 두려웠다. 내 안에서 전혀 다른 답이 튀어나올까 두려웠다. 이게 아니라고, 이러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스스로가 있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 단순히, 네가 내 옆에 앉아 있다. 여전히 나는 이 자리에 살아 있다. 세상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여전히 확신도 있다. 그리고 눈앞에는 시시껄렁한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받을 수 있는 이들이 앉아 있다.


 일단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을 잊어버렸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됐다.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렸을 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했을 때, 그렇다고 말해줄 네가 옆에 있으면 됐다. 끝까지 소리칠 수 있는 내 안의 목소리가 있으면 됐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정도면 됐다.


 언젠가는 오늘의 일을 끔찍한 자기합리화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의 나는,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입 밖에 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뒤로 가지만 않는다면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여전히 너와 내가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말하며 걸어갈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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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가을. 9.


by / 이창우


 


 


“자네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수수께끼 같은 사람아. 말해 보게. 아버지, 어머니, 누이, 형제?”


“내겐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어요.”


“친구들은?”


“당신은 이날까지도 나에게 그 의미조차 미지로 남아 있는 말을 쓰시는군요.”


“조국은?”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자리 잡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미인은?”


“그야 기꺼이 사랑하겠지요. 불멸의 여신이라면.”


“황금은?”


“당신이 신을 증오하듯 나는 황금을 증오합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대관절 무엇을 사랑하는가. 이 별난 이방인아?”


“구름을 사랑하지요.... 흘러가는 구름을.... 저기.... 저.... 신기한 구름을!”


 


- 이방인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


 


 


다다. Dada. 아무것도 아니다. 허무라 표현되기 이전의 언어로 아무 것도 아니다. 아니었다. 난 이 사회를 이해할 수가 없다. 시월의 혼란에 서울의 우울함이 보들레르가 소리친 파리의 우울처럼 나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캠퍼스는 두 가지 모습의 형상으로 나뉘어있다. 손팻말을 들고 있는 무리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지나치는 무리. 그리고 나.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이슈가 이 도시를 집어 삼킨듯해도 일상은 여전히 지난다. 학교에서도 거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다른 세계 다른 사람들이 다르게 시간을 지난다. 강의실은 오늘도 변함없다. 담당 교수는 태연하게 시험지를 나누어 주고 나는 시험을 본다. 비슷한 풍경이 다시 반복되고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는 종이와 샤프펜슬이 규칙적으로 이쪽에서 저쪽에서 앞뒤로 공기를 타고 퍼진다.


 


여긴 서울이지만 서울이 아니기도 한가 싶다. 여긴 한국이지만 아니기도 하다. 나는 여기 있지만 아니기도 하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몹시 집으로 가는 길이 싫다. 훌쩍 건너뛰어 내 집 앞으로 갈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다. 사람들이 내뿜는 숨과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알 수조차 없는 역겨운 향수 냄새까지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지하 어디쯤을 걷고 있다.


 


시간을 보려다 서윤이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저녁에 집으로 갈게.’


‘동거인이 있어서 안 됩니다요~’


 


문자를 전송하기가 무섭게 전화가 온다.


 


“동거인? 이재인, 너 정말 동거 시작했어?”


“응, 왜?”


“그, 그럼 밖에서 잠깐 만날까?”


“그러지 뭐. 장소와 시간 정해서 보내줘. 나 지금 걷는 중이라 숨차거든.”


 


학교를 때려치우든지 공간 이동을 하든지 결정을 해야겠다. 그리 멀다고 생각하지 않은 학교 가는 길은 이제 아니다. 더욱이 버스를 탈 수 없게 만든 지상의 일은 나를 몰아세우며 정신없이 내게로 달려온다. 미친 나라. 넋이라곤 찾아보려야 볼 수도 없는 이 쓰레기 같은 정부의 정신 지체아들이 득실대는 나라에서 살아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이제 스물의 나이에 화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건지. 아, 나는 너무 건강해서 탈이야.


 


“얼굴빛이 왜 그래? 완전 흙빛이네. 뭔 일 있었어?”


“후유, 살아있기 힘들다.”


“아이구, 또 시작인가 보다. 너의 진지함을 위하여~”


“뭐 해 먹을까? 먹고 싶다는 욕망마저 없다면 살아있지 않아도 될 텐데. 아, 정말 싫다. 이 쓰레기장 같은 부패의 나라.”


“이재인. 정신 놓지 마. 그런 쓰레기들에 떠밀려 표류하지 않으려면. 그거 생각나?”


 


얼빠진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과 그녀가 튕기는 기타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몇 년 전 한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썩은 게 급기야 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고 하며 이 노래를 불러 주었다. 바람이 분다. 그 겨울 술집에서 누군가는 밤새 욕을 해대고 있던 그때, 우리는 어느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바람이여, 영원 하라! 슬퍼지기 위하여 밤공기를 마셔야 했던 그 여고생이 지금의 나와 너이다.


 


“나의 노래를 들어 줄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어 준다면 난 음악으로 살아날 수 있어.”


 


기억은 애써 찾아내려 할 때 드러나는 시간일까. 그때를 기억하는 매개물이 있기에 가능한 걸까. 이 노래를 들으면 그날 그 시간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여기서 태어나 유년을 보내고 서울을 고향이라 말해도 되는지 어떤지를 고민하던 십 대를 지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고향을 잃었다. 어쩌면 나의 고향은 저 구름 너머 어디쯤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서울이 싫다. 이 공간의 우울한 공기는 나를 가둔다.


 


“금지야, 나 서윤이 만나고 올 게.”


“서윤? 누구?”


“아, 경연 오빠 후배야.”


“그래그래, 이재인 주변에는 다양한 종이 있어. 그치?”


“다양하다? 에, 그렇긴 한가 보다. 집에 몇 번 쳐들어 왔었어.”


“오, 별일은 없으셨죠?”


“별일의 종류도 다양하니까 쉽게 묻지그래.”


“장난이야, 어서 다녀와. 올 때 소주 어때?”


 


겨울이 가까이 오긴 했나 보다. 밤도 더욱 짙은 빛이고 바람도 더 날카로워졌다. 골목길에 노란 가로등 빛도 더욱 진하다. 이 골목길을 돌아 나가면 다시 거리는 현란해진다. 밤을 끌어안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발가벗고 드러난다. 네온사인의 깜박임과 늘 빛을 내는 빨강 십자가와 어디선가에서 새어 나오는 고기 굽는 냄새와 소리가 거리를 채운다. 그나마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디든 자신만의 구석진 곳으로 기어들어간 탓이겠지.


 


“동거인한테 미안해서 어쩌냐?”


“흠, 내 동거인은 자비로워요. 무슨 일?”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연락을 하는 것은 아니지.”


“바쁘지 않아? 시험 기간부터 요즘 광장 앞으로 아니야?”


“그렇지. 바빠야 하지.”


“동거인이 화내겠다.”


“내 동거인에 왜 그리 신경 쓰시나? 괜찮습니다요. ”


 


실내의 불빛이라 알아차리지 못한 탓인가. 서윤은 초췌해 보인다.


 


“사람에게 시달리는 거 못할 짓이야. 소주 마실 건데 넌?”


“소주라.... 소주? 소주 좋지, 뭐.”


 


우울한 시절에는 소주가 최고라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서윤은 우울한 것이 아니라 암울해 보인다. 그 상태를 이미 지난 듯한 모습에 동조해 주지 않으면 더해질 것 같다고나 할까. 오늘은 그의 말을 듣고 있기에도 벅찰 것 같다는 생각이어서 술은 안 먹으려고 생각하는데 서윤은 벌써 몇 잔을 들이 켜는 중이다.


 


“안 마셔? 자, 첫 잔은 내가 따랐으니까.”


“그래, 알아서 마시자구.”


“오늘 학교에서 한 교수가 말하더라.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학점 못 맞아서 나중에 후회해 봤자 되돌릴 수 없는 거라고.”


 


그런 말은 늘 듣는 말이라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데 그는 꽤 신경이 거슬렸나 보다. 하기는 역사학도로서 화가 날만도 하겠지 싶어 가만 듣고 있었다. 그는 너무 빨리 술을 삼킨다. 언젠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날을 샜던 시간이 떠오르면서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 걱정 마. 이재인 지난번처럼 신세 지지 않을 게.”


“그래? 지금 나도 그날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묘하네?”


“그때와는 좀 다르지. 술이 나를 먹어치우는 일에 이력이 붙어서.”


“그래, 뭐 아무러면 어때.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욕이 막 나오려고 하는데 니 앞에서 참 말하기가 힘드네. 아, 정말 썩었어. 이 나라는.”


“이제야 그 썩은 내를 맡으신 거는 아니실 테고 새삼스럽지 않아? 이미 정도가 넘치는 거 같은데.”


“넌 참 신기한 인간이야. 세상에 없는 듯 살아는 있으니.”


“이 말을 또 듣는군. 어쨌거나 뭐, 살아있는 건 맞지. 현 존재로 니 앞에 있잖아?”


“누가 또 그런 말을 했어? 흠, 그도 꽤 감각이 있군. 아니,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는 소린가? 그러면 나만큼이나 오래 만나 왔단 말인가?”


“김서윤. 엉뚱한 소리 그만하고 하고 싶은 말이나 꺼내시지.”


“그래, 그래. 교수부터 저 모양이니 내가 학교에 가고 싶겠냐고. 주변이 모두 앞만 보고 걸어가는데 혹시라도 누군가 나를 불러 세울까 봐 겁이 나는 거 알어?”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슷한 감정에 휘둘려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는 게 아닌지 되묻고 있던 나는 그 앞에서 어떤 말도 행위도 할 수 없었다. 서윤은 그저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그 앞에 있으면 될 뿐이었다. 그의 신념은 형체 없이 휘청거리고 있기에 그는 지금 이 시각 확신에 찬 한마디가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허공을 향해 던지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나를 불렀을지도 모르지.


 


“이재인. 너는 왜 사냐? 널 보면 세상에 걱정근심은 없고 태평해 보이는데 그 비결 좀 알려주라.”


“내가 그렇게 보여? 다행이네. 술 더 마실 거야?”


“응.”


 


아, 이 집 이름이 ‘양은냄비’였다. 70년대를 추억하는 공간이 컨셉인지 이 안은 과거 그 어느 시간에 멈춰있다. 빛 바란 나무로 엉거주춤 엮어놓아 아슬아슬 무너질 것만 같은 의자와 둥근 알루미늄으로 만든 탁자, 가운데를 뚫어 가스레인지가 숨어있도록 한 장치, 주방의 낡은 무명천 가리개, 이 풍경이 지금 이 나라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코스프레. 시간의 멈춤. 서윤은 옆으로 고개를 떨어뜨린 채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늦으면 소주는 자기가 사다 마시고 있겠다는 금지의 메시지. 그래, 그래야 할 것 같아. 잠시 그에게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양은냄비의 주인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남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미안한 마음에 안주도 하나 더 시키고 아무래도 위험천만하게 잠든 서윤의 옆으로 의자를 옮겨 앉는다. 내 팔자하고는 참 기구하구나 싶은 마음에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내 곁에 이렇게 있는 너를 바라보며 나는 잘살아내고 싶어진다. 너의 꼿꼿한 마음이 언젠가는 빛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너의 곁에 나는 지금처럼 있을 것 같다. 시간이 거꾸로 가지만 않는다면 나는 이렇게라도 버티어낼 것 같다. 그리고 세 사람이 발그레한 얼굴빛에 드리운 작은 웃음으로 음악과 물소리와 한밤의 정적을 안고 내게로 온다. 보들레르의 그 우울함이 이 시대를 꿰뚫고 있어도 나는 어떻게든 살아야 할 것 같다. 아, 소주가 달짝지근하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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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가을. 8


/by. Widerstand



 “대학에 들어와서, 사실 나는 좀 당황했었어.” 주혁이 말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주혁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나는 내가 취기가 좀 올라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 나는 내가 내 나름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거든. 수능 따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했고, 대학을 못 가도 인생은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았고, 굳이 어떤 틀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었어.”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야?” 재인이 말을 듣자마자 입을 열었다. 나는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기로 결정하고는 올라오는 말을 억지로 눌렀다.


 “변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변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까, 잘 모르겠네.” 주혁은 멋쩍게 웃었다.


 “자유롭게 사는 건 좋다고 생각해. 인생이 대학 따위로 결정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해. 무엇을 얼마나 공부하느냐는 중요하겠지만, 어디서 공부하는지는 별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 틀 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여전히 동경해.”


 “그런데?” 재인이 다시 물었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던 것 같아. 나는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틀에 갇히지 않은 삶, 나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꼬리표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삶.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당연히 확신했었어.”


 “그런데, 아니었다는 거야?” 재인이 물었다.


 “대학에 들어오니까 알 것 같더라. 막상 수능이 끝났을 때는 몰랐어. 어차피 수능이 끝나고 대학에 들어오기까지는 다들 열심히 놀기만 하는 기간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합리화가 가능했거든. 인생을 항상 효율적으로만 살 수는 없는 거잖아? 하면서.”


 주혁은 그리고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재인은 이번에는 되묻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고 나니까, 아무런 목표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 수능 따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수능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목표였던 거야. 내가 나의 꿈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 의문하기 시작했어. 내가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고.”


 다시 아무런 말도 흐르지 않았다. 금지의 기타줄 퉁기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스럽더라. 뭘 해야될 지 모르겠어서. 나만 이런 생각인건지도 궁금했고, 이런 게 진짜 문제가 되는 건지도 궁금했고, 해법이 있는지도 궁금했고, 해법이 있다면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도 궁금했어.”


 “일종의 소외감일까?” 재인이 물었다.


 주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어쩌면. 나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성공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사람도 아니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어. 하지만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모두들 자기를 규정하는 벽이 있는데, 나에게만 그게 없었어. 철옹성 사이에서 누구도 만나지 못하는 소외감이랄까.”


 나는 술잔을 들었다.


 “그래서, 아직도 당황함과 무력감 사이에 있는 중이신가?”


 나는 말을 마치고 손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그때, 짠하고 당신들이 나타났지.” 주혁이 분위기를 바꾸고 웃으며 말했다.


 금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술잔을 들었고, 재인은 “내가?”라고 반문했다. 나는 주혁이 시작한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마침 그 날 우연과 우연이 겹쳤고, 서준이 너희에게 말을 걸었지. 생각하면 할수록 재밌는 일이었어. 왜 하필 그 때, 너희들이 내 앞에 나타났을까.” 주혁의 말은 이제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철저한 개인주의자들. 너랑 나는 참 비슷해 보였는데, 너는 그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살더라. 세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세상이 없는 것처럼 살더라고.”


 주혁은 술을 한 잔 마셨다. 발음이 꼬이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모습이 역력한 것을 보니, 많이 마시긴 마신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많이 비우기는 했다. 네 명이서 벌써 몇 병째야.


 “그래서 처음에는 네가 오만하다고 생각했어. 자기가 뭔데 세상을 무시하는 거야? 지금을 즐기면서 사는 게 영원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아집만을 밀고 가겠다는 건가? 언젠가는 ‘너 얼마나 가는지 보자’ 하는 생각도 들더라니까.” 주혁은 옅게 미소지었다.


 말을 듣던 재인과 금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뭐야, 고해성사 타임이야?” 재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잠깐 말을 끊고 고해성사 타임에 동조하자면, 사실 나도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몰랐던 건 아니야.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너 그거 얼마나 가나 보자’ 하고. 그래서 더 오기로 너희들과 만났던 건지도 몰라.” 재인도 옅은 미소로 말했다. 나는 둘 사이 무언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주혁은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면, 그 싸움에서는 네가 이긴 셈이네.”


 주혁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 뒤에 주혁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뒤에 이어진 말은 나의 예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사실 뭐, 아직 정확히 답을 찾은 건 아니야. 너의 방식이 꼭 옳다고만 생각하지도 않아. 나는 여전히 세상을 향한 끈을 놓을 수 없고, 그걸 놓는 순간 망망대해 위에 뜬 뗏목 하나가 되어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은 놓을 수 없어. 그게 꼭 비현실적인 두려움도 아닌 것 같고.” 주혁은 다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나는 무언가 묻고 싶었지만 주혁이 다시 말을 이을 때까지 기다렸다. 역시나, 주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황망함과 당황스러움은 여전하지. 그런데 이제 좀 익숙해진 것뿐이지. 방황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자괴감이 들고, 뭐 이런 감정들이 이제는 익숙해져서 무뎌졌을 뿐이야.”


 “뭐야, 그럼 하나도 달라진 건 없네?” 내가 물었다. “너는 아직도 방황하고 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지만 결국 답은 찾지 못했고. 달라진 건 조금 익숙해졌다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벽과 매듭에 대한 이야기, 기억해?” 주혁이 물었다. 나는 딱히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주혁은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아직 매듭을 풀지 못했어. 벽을 쌓고 싶은 생각도 여전히 없어. 그래서 여전히 당황스럽고 소외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그런 의미에서라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주혁은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초점을 조금만 바꾸면, 중요한 건 익숙해졌다는 거 아닐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 어차피 매듭을 완벽하게 풀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누구도 넘을 수 없는 벽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그런데 다만 꽁꽁 묶인 매듭 앞에서의 당황스러움, 높다란 벽 앞에서의 황망함에 익숙해졌지. 그렇다면 이제 좀 찬찬히 앉아서 해답을 고민해볼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하는 자신감이 생긴 거야.”


 “놀라운 진보지.” 주혁은 마지막 말을 하면서 크게 웃었다.


 잠시 모두들 생각에 잠겼다.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벽은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지는 않아.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내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나의 세상을 규정짓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오지 말라고 협박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것 역시 그것대로 세상을 등지는 방법일 거야.”


 잠시 술잔을 바라보던 주혁이 나의 말을 받았다.


 “매듭을 칼로 쳐버리면 정말 쉽겠지. 그런데 그러면 우리는 반쪽짜리 줄밖에는 갖지 못하게 돼.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매듭이 저절로 풀리기를 기다릴 수는 없어.”


 “그냥, 사다리를 놓으면 되는 건 아닐까. 나의 벽을 쌓으면서도, 얼마든지 사람들이 넘어올 수 있도록 말이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벽 앞에 사다리를 놓고 사람들이 누구나 넘어올 수 있도록 하는 거야.” 나는 이 말을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는 낮은 울타리를 쌓아두면 좋겠네. 누구나 넘어와서 찔러볼 수 있는 나의 영역을 만들어야겠지.” 주혁이 나의 말을 받았다.


 “사다리, 좋네, 지금 우리처럼 말이지?” 재인이 물었다. 우리는 눈을 맞추고 웃었다.


 주혁이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아, 너무 많이 마셨나?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네.”


 우리는 이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모두들 같은 고민에 빠져 있다는 우리를 엮는 유대감에 만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세우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다면 그 경계선은 어디인가? 어디가 적절한 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모두들 그 답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섣불리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내 남은 삶 전부를 통해 그 답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같은 답을 내렸을까?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정적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재인이 입을 열었다.


 “금지야, 좋은 음악으로 한 곡만 부탁해.”


 금지는 연주를 시작했다. 음악은 좋았지만 나는 그 음악의 제목을 묻지 않았다. 어차피 좋은 음악이란 그 음율이 아니라, 지금 우리 넷이 공유하고 있는 동질감에서 만들어진 것일 테니까. 술에 취한 나는 음악에도 함께 취하며 그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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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7.


by / 이창우


 


하늘이 너무 맑다. 구름을 사랑하는 헤세의 페터가 떠오른다. 그래, 알프스 산이라면 그의 구름 사랑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어느 산이든 오르면 페터의 구름을 만날 수 있을까.


 


“오늘 교수님 사정으로 휴강이랍니다.”


 


강의실이 웅성거림으로 난리군. 그래, 나 같아도 연휴 뒤끝에 학교에 나오고 싶지는 않지. 이렇게 모여든다는 게 멍청한 일인 거였어. 오늘 아침 늑장 부리며 그래도, 그래도... 가 보자 했던 나를 제대로 한 방 먹이는 교수. 평소에 꼬장꼬장할 만큼 칼 같던 교수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런 그의 모습이 외려 조금은 인간적이야.


 


인문대를 막 벗어나려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뭐야.


 


“얼굴 보니 잘 지냈던 거 같은데.”


“아, 네. 웬일이세요? 여기까지.”


“가자. 수업 없지? 차 갖고 왔어.”


“어딜 가요?”


“바람 좀 쐬자고.”


 


학교 주차장으로 가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느낌이 들면서 온갖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라 그런가, 캠퍼스가 휘날리는군. 니네 학교 뜻밖에 고풍스럽구나.”


“처음이세요?”


“그렇지. 이 구석까지 올 이유가 지금까진 없었으니.”


“이 구석까지 오길 왜 와? 누가 오랬나 ...”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을 멈추기에는 너무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뒤돌아 보는 그의 얼굴에 피로감이 역력했다.


 


“이재인. 그렇게 말하니까 이럴 땐 어린애 같네.”


“오빠, 나 안 가고 싶은데.”


“나 좀 봐 주라. 오래 고민하고 온 건데 너한테 할 말도 있고 그래서 말이야.”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간다. 오늘은 뭔가 일이 꼬이는 데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작동하는 기분이다. 의지를 발휘해 나왔더니 휴강이고 생각하지도 못한 인물이 떡하니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강의 휴강될 거 알고 왔어요?”


“아니.”


“근데 뭐 이렇게 잘 맞아 떨어지는 거야.”


“운명이라고 하면 웃기나? 그냥 줄창 너 볼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는데.”


“오빠가 그런 사람였어요? 뜻밖이네.”


“나? 아무한테나 그러진 않지. 잊었구나.”


“뭘?”


“고등학교 때 너 만나려고 학교 앞에서 4시간 기다렸는데.”


“언제?”


“어쨌든 한 방에 날 밀어버린 주인공이 기억 조차 못하니 서운하긴 하다.”


“그랬나,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네. 인간의 이성 타령만 하더니.”


“최근에 알았어. 이성보다 감성의 힘이 세다는 거. 어서 타. 지난번 작은 사고가 있어서 오늘 부득이 대장 차 갖고 왔어.”


“술 먹고 운전했겠지 뭐.”


“그렇겠지. 대낮부터 들이붓게 한 사람이라 잘도 알아맞히네.” 


 


한 방향으로 치닫는 사람의 마음이란 순간적인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 순간이 지나면 자신을 스스로 기만한 또 다른 자기를 만나게 되곤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의 수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내가 바라보는 주변의 대상에게서는 그랬던 것 같다. 꽤 오랫동안 나는 그런 상태에 놓이고는 했고 그런 상처를 하나씩 딱지가 앉아 저 스스로 떨어져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었나 보다. 경연 오빠의 갑작스러운 행동과 말에는 적잖은 고뇌가 느껴졌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거절?”


“너 같으면 어쩌겠어. 생각해 볼 여지나 있어?”


“그래도 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숙고할 필요는 있잖아. 나쁘진 않은데.”


“뭘 숙고해?”


“구혼한 것도 아니고 유학같이 가서 잘해보자는 건데, 그것도 유학 자금 다 대주고 기회라면 기회 아니니?”


“박금지. 너 그렇게 생각이 짧아? 결혼이 전제라 해도 상대에게 빌붙어 유학 생활을 하는데 그게 가능하냐?”


“돈이 있으니 그런 제의도 할 수 있는 거고, 선의잖아. 그 오빠 사상이 괜찮다며 부르주아치고는.”


“아니, 지가 유학 가면 가는 거지. 왜 날 끌어들여.”


“그 사람에게는 가능성을 위한 투자이지 뭐.”


“그럴 가능성을 품었다면 더더욱 거절이지. 박금지 그 예긴 그만두자. 끝난 일이야.”


“어휴, 난 또 영화 한 편 만들어지길 바랐는데. 아, 우리 재인이 인기 좋구나.”


“인기문제가 아니거든.”


“나 같으면 다 빼먹고 튀겠는데......”


 


놀랍게도 평소 냉소적인 그가 건네는 진심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빠졌다. 나는 경연 오빠를 단 한 번도 남자라거나 사랑의 대상으로 마주한 적이 없다는 것을 못 알아차린 점이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반드시 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니까. 그와 나의 세상은 다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라보며 만나는 감정도 너무 다르다. 다름을 인정은 하겠지만 그를 공감할 수는 없으니까. 그에게서는 쇠 냄새가 난다.


 


“여기서 자고 갈까?”


“노래 불러주라.”


“특히 듣고 싶으신 것은?”


“니 맘에 떠오르는 거로.”


 


그녀가 존 레넌의 ‘imagine'을 선택한다. 이런 순간이 좋다. 아주 짧지만 내 마음을 그저 느껴주는 한 사람이 있는 이 순간이면 그다지 바랄 것이 없는데 말이지. 아마도 그녀는 음악이 없었다면 살아내기 힘든 존재였을 거야. 아, 나도 노래 잘하고 싶다.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살아가는 게 견딜 만 할 것 같아.


 


“재인아, 우리 밖으로 나갈까? 두 남자도 부르고 길에서 진탕 놀아볼까?”


“지금 이대로도 좋은데요.”


“아니, 나 갑자기 승우가 보고 싶어졌어. 왜 그 녀석 진지한 얼굴 보면 세상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막 들거든. 이상하지?”


“그럼 니가 불러내.”


“그때 두 남자를 처음 만났던 곳으로 가는 거야. 계절이 벌써 세 번 바뀌었어. 오늘은 너희를 위해 내가 기꺼이 거리에서 공연하마. 한강이 내 노래에 코러스를 담당하겠지?”


 


 


가을 한가운데이긴 하구나. 어둠이 내리고 있는 거리의 바람이 차갑게 다가온다. 두둑한 후드티를 걸친 게 좋은 선택이었네. 그들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가로등이 비추는 이 길은 이제 너무 익숙하게 드러나 있다. 어둠 속의 한강은 도시의 야경을 더 빛나게 한다. 물 위로 흔들리는 노란빛의 무리가 물결에 따라 제 각기 춤을 춘다. 도시의 소음이 이렇게 정겹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은 어둠이 있기에 가능한 거겠지.


 


“요즘, 이 그룹에 빠졌거든? 나의 부족한 역량에 연주만 들려줄게.”


 


NIGHT WISH. Bye Bye Beautiful.


 


세상에 넘치는 말보다 이 음악이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금지의 마음이 함께 다가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둘러 리듬에 맡긴다. 힐끗 옆으로 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이 왜 이리도 아프게 찌르는지 모르겠다.


 


“아, 나 아무래도 여기로 다시 돌아와야겠어.”


“어머니하고 안 좋구나.”


“노력하고는 있는데 백수가 되고 나서는 더 고역스러워서 요즘 어떻게 알았는지 나의 정체성을 들먹이며 퍼붓고 있거든.”


“편할 대로 해. 넉넉한 공간인데 뭐가 문제래? 언제든 들어와.”


“좋았어. 이재인 때미 내가 살고 싶어진다. 너를 위해 이 노래를.” 


 


Rod Stewart. I don't wanna talk about it - .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데.”


“언제 왔어?”


“우리? 진작 와 있었지. 노래 듣느라 그림자로 있었구.”


 


주혁의 뾰족해진 얼굴이 웃는다. 그 곁에 있는 창백한 승우도 그리 나빠 보이진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밤이기 때문이려나.


 


“여기서 술 마시는 건 처음 아닌가? 음악이 있으니 맥주도.”


 


내 옆엔 주혁이가 앉더니 금지 옆엔 승우가 자리를 잡는다.


 


“재인아, 유리잔이 없어서 종이컵으로 챙겼어.”


“와, 주혁이가 재인이 맥주 먹는 방식까지 기억하네?”


“내 주변에 특이한 취향들이 많다 보니. 알루미늄 캔이 입술에 닿는 느낌이 싫다는 사람, 또 있으려나?”


 


웃는 건지 웃음을 참는건지 알 수 없는 모습의 승우가 맥주 캔을 따 금지에게 건네며 말한다.


 


“신청곡 가능?”


 


서태지. 너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을 보낸다.


 


“서태지가 들으면 기절하겠지만. 뭐, 우리끼리니까. 재인아, 괜찮지?”


“왜 내게 물어?”


“서태지는 재인이가 즐겨 듣는 거라 혹시나 걱정돼서.”


 


도시의 한쪽에서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넷이 아무 말도 없이 흐르는 강물과 기타 소리와 가금씩 지나치는 발자국. 날카롭게 고요함을 깨는 맥주 캔 따는 소리. 그게 다였다. 흐르는 강물 앞에서 넷이 나눈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음악과 도시의 야경에서 번지는 잠시의 환상들과 소리 없는 아우성이 언제나처럼 그렇게 있는 듯하다.


 


“너희에게도 넘어야 할 벽이 있니?”


 


주혁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내 생각을 순간 멈추게 했다.


 


“벽? 있다면 넘어야지. 넘을 수 없다면 깨버리든가. 시간이 흐르면 해결된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거든. ”


 


언제 연주를 멈추었는지 금지가 한마디 툭 던진다.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절반은 가려진 승우가 나지막이 말한다.


 


“벽은 자신이 만드는 거 아닐까..... .”


 


승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혁은 내게 다시 물었다.


 


“이재인, 너는?”


 


주혁이가 원하는 답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답은 주혁이가 했을 때야 가능하지 않을까. 난 그가 느끼는 벽이 어떤 벽인지 어느 정도 높은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승우는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해. 그것 또한 그의 답일 뿐이고. 여기에서 논리가 필요할까? 매사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는 그 어떤 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자기 안에 가득 찬 마음에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닐까. 벽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 마주하지 않는다면 벽은 영원히 그대로 있을 뿐이다. 난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그 말을 무척 싫어한다. 시간은 해결해 주지 않았다. 내가 미루어 놓는 것이다.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 누군가에게 나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는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의 흐름이었던 것 같다.


 


“주혁아, 네 맘이 시키는 대로 해.”


 


참으로 무책임한 말 같기도 했다. 어찌 보면 무관심인 것 같고 나와 상관없다는 투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그동안의 나를 느낄 수 있었다면 나의 말이 잘 전달되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가을 한가운데 흔들리는 가로등 빛을 벗 삼아 네 영혼이 부대끼며 서로를 조금은 느껴줄 수 있겠지.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를 그대로 바라봐 줄 수 있으니까. 네가 원한다면 그 벽을 꼭 넘어야 할 이유도 없을걸. 네가 넘었다고 해서 그 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벽을 의식하고 그 벽과 싸우는 거니. 나는 겨우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말들을 다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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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가을. 6


/by. Widerstand



 “시간이, 시간이 가지고 있을 거야.” 내가 말했었다.


 시간, 시간이 정답을 가지고 있을까. 너도 나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시간만 흐른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했다. 해답은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는 똑같은 시간이 주어져 있다. 하루는 24시간이다. 누구에게도, 단 1초도 더 주어지는 일은 없다. 특별히 큰 일이 없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균수명 언저리를 살다가 떠난다.


 만화 <데스 노트>에는 ‘사신의 눈’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의 남은 수명을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눈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설정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 차이를 두고 떠나니까.


 요컨대,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딱 오늘 하루라는 시간을 놓고 보면, 모든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똑같은 시간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하루 안에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기 좋게 날려버리기도 한다. 어차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게 되어 있으니까.


 “시간이 답을 가지고 있다”는 내가 한 말이지만 사실 말이 되지 않는 명제다. 우리끼리 풀어야 할 매듭의 해답을 시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 우리가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다.


 하지만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이라도, 어떤 사람은 그 안에 엄청난 변화를 겪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런 변화를 겪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뜰 때와 밤에 눈을 감을 때의 위치가 완전히 변해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침이나 밤이나 시계가 아니라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사람도 있다.


 해답은 변한 우리가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모두는 변할 것이다. 누군가는 지금의 과거를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화려하게 변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과거에 얽매이며 여전히 훌쩍이고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어디선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먼 미래를 생각하니 왜인지 불안해졌다.


 나는 궁금했다. 너는 그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우리의 매듭은 언제쯤 풀릴 수 있는지. 그래서 나는 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울리는 전화음이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나중에는 안도감으로 가득찼다. 왠지 모르게 안심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재인이 전화를 받지 않기를 기다렸다. 너는 내 바람대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이 나오자 나는 잽싸게 전화를 끊었다.


 왜인지 그녀는 그녀의 자리에서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 재인의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가득찬 재인의 언어는 모호한 무언가를 남겼다. 나는 그녀가 독단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재인의 나름의 자리에서 종단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매듭이 끊기는 자리를 불안해하는 것은 오히려 나였다. 나는 선택을 했다고 자부했지만 그것이 진짜 선택인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재인을 향해 서서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있는 것은 나였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막상 네가 전화를 받는다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말이든 던져도 너는 어떤 대답이든 하겠지만, 그래서 더더욱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에게 답을 원하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질문의 대상이 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질문의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그리고 네가 변한다는 것. 재인은 원래 그랬듯 그의 자리에 있었다.


 다음은 승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무언가 생각할 틈도 없이, 승우는 몇 번 벨이 울리지도 않았는데도 빨리 전화를 받았다.


 “왠일이야? 이 시간에?” 승우가 물었다.


 “벌써 열두 시 넘었거든?” 내가 답했다.


 “너 원래 주말 이 시간이면 푹 잠에 빠져 있을 시간 아닌가?” 승우가 물었다.


 “오늘은 그냥 눈이 떠지던데?” 내가 말한다.


 “그래서, 왜 전화했는데?” 잠깐의 침묵 뒤에 승우가 다시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궁금해서.” 내가 말을 던진다.


 승우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 승우가 대답 대신 물었다.


 “어디 있는데?” 대답을 피한 승우에게 내가 퉁명스럽게 묻는다.


 “카페에 있어. 우리 그 때 만났던.” 승우가 대답했다.


 우리는 그 카페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냥 ‘그 카페’라는 수식어만으로도 우리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그곳’이라는 말만으로도 알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순간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것도 아니였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기의 세상 속에서만 헤엄치던 사람들. 누구도 흐려놓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바로 그 카페, 미술관, 경복궁. 사람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에 우리는 인연을 만났다. 그동안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고, 서로의 세계를 공유했고, 지독하게 미워하기도 했다. 때로는 아슬아슬한 선을 타기도 했고, 서로의 선택을 강요하기도 했고, 결국 모든 문제의 귀결점을 찾아 헤메기도 했다. 봄에 만나 여름을 지났던 우리는 이제 가을에 서 있다.


 벽. 그리고 매듭.


 “시간, 많이 흘렀지?” 승우의 물음에 퍼뜩 깨어났다.


 승우가 대답을 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승우는 누구보다 적절한 대답을 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여전히 짧다고 생각해?” 승우가 다시 물었다.


 나는 애써 감정을 감추며 말했다. “그래봐야 몇 달이나 됐어? 1년도 안 된 거 가지고 무슨.”


 승우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안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가 중요하지. 숫자로는 1년도 안 된 일이지만, 우린 10년도 더 걸릴 감정을 그 안에 다 느꼈잖아?”


 승우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대답하고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나는 전화를 끊었다. 왠지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서 지하철에 올랐다. 2호선 신촌역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아인. 왜인지 지금 보고 싶었다. 신촌역 밖으로 나올 때에서야 아직 대낮이라 문을 열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앞에서 서성이다 와도 좋을 것 같았다.


 Ein. 간판 앞에 섰다. 오랜만에 가는 길이지만 어딘지 찾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 라니. 너무 독선적이잖아? 오직 나의 생각만 맞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역겹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아. 다른 사람의 생각은 이해하기 싫다는 듯이.”


 승우가 그날 했던 말이 다시 들리는 듯했다. 나를 향한 말이었다.


 “또 너무 무식하기도 해. 사회적으로 정해진 길이 하나 있으면 그걸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지. 오직 그 길만이 진짜인줄 알고 가. 사실 그 길 말고도 달릴 수 있는 길은 무한한데도 말이야. 오직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 안쓰럽기까지 하지.”


 서준을 향한 말이었다. 같은 학교라 자주 마주치기도 하고, 가끔 함께 밥을 먹기도 하는 그는 여전히 바쁜 모습의 그대로였다. 술 한 잔 하자는 약속은 빼놓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같이 술을 마신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서도 거의 매일 밤 술에 취해 전화를 하는 것은 무슨 심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나. 이 간판은 변하지 않았지만, 문득 승우가 다시 이 간판 앞에 선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졌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문을 열었다. 당연히 잠겨있을 줄 알았는데 슥 열리는 문에 손이 놀란다. 안의 모습은 밤과 다를 바가 없다. 손님이 단 한 명이라는 것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괜히 앉아 있는 유일한 손님으로부터 떨어진 자리에 앉는다. 낮이지만 아주 가벼운 건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가벼운 술 하나를 시킨다. 멀찍이 앉아 있는 남성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저 사람은 묶여있던 매듭을 푼 것일까, 아니면 더 복잡하게 꼬여버린 매듭 앞에서 좌절해버린 것일까. 우리의 매듭에 내가 내린 해법은 시간이었다. 우리 누구도 해답을 갖지 않고 있다는 선택이었고, 우리 모두가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선택이었다.


 주문한 술이 나온다. 한 잔을 홀짝이면서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나는 최대한 긴 시간이 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와, 최대한 짧은 시간이 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스스로 사이에서 갈등한다.


 다시 벽, 그리고 매듭.


 내가 갈등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나도 함께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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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가을. 5.


by / 이창우


 



 


"무슨 청승이야? 혼자서 술을 다 마시게."  


"아, 이거? 승우가 사 왔던 건데 먹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승우가 집에 왔었다고?"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매듭 때문에 왔었대." 


"매듭? 뭔 매듭?" 


"나보러 자를래 풀래 하더라." 


"그래서 뭐라 했어? 그 매듭은 너희 문제겠지?" 


"너희라는 건 맞는 가 본대 그게 뭔지 나도 몰라."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만큼 나는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금지의 일과 사랑 이야기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가 그리 복잡한지 내가 너무 단순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내가 아니면 아니고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일들에 사람들은 너무 진을 뺀다는 생각도 든다. 금지는 웃기게도 카페 주인의 일방적인 계약해지로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렸고 엄마와의 갈등은 꼬일 대로 꼬여서 그거야말로 풀어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다른 멤버들 반응은 어때?"  


"뭐, 다들 미칠 지경이지. 날 빼고 다른 누구를 대신해도 주인이 싫다 하니까."  


"아니, 다른 멤버들이 너를 잘 알잖아. 그런데도 너를 제외하면서까지 일을 한다고?"  


"아니, 내가 그렇게 해 보라고 형한테 말했어. 그 형은 딸린 가족이 있으니까."  


"참, 기가 막힐 일이구나. 그게 뭐가 어때서 그렇다는 거지?"  


"혐오스럽대."  


"뭐라고? 레즈비언이 혐오스럽다고? 미친 인간 아니야?"  


"그렇다더라. 주인은 자신의 카페 이미지를 망쳐놨다고 벌벌 떨면서 배상 어쩌구까지 하면서 소리를 지르더라."  


"계약 파기는 지가 해놓고 니들이 배상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그럴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거지. 이럴 땐 정말 이따위 나라에서 왜 세금 내고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금지와 아침이 오도록 부어라. 마셔라 했나 보다. 요란스럽게 계속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깨고 싶지 않은 잠을 잘 수도 있었을까.    


 


"아직까지 자고 있던 거야?" 


"네, 무슨 일이세요?" 


"서운한데 이렇게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는데 별일 없지?" 


"있으면요? 어떡할 건데요?" 


"이재인. 삐졌어? 연락 안 해서? 정신 좀 차리고 두 시간 후 아인에서 보자." 


"아, 못 일어나요. 다시 잘 거야." 


"아인에서 기다릴 테니 준비되는 대로 나와. 끊는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이미 지나 있었다. 뭔 대낮부터 아인이야. 침대에 다시 누워 눈을 감는다. 머리는 무거웠고 심장은 뛰지 않았으면 싶었다. 금지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녀의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뒤로 넘겨 놓고는 가만 바라본다. 울면서 잠든 그녀가 몹시 안쓰러워졌다. 꼬옥 안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축 늘어진 그녀의 한쪽 팔을 침대 위로 조심스레 올려놓으며 손을 꼭 잡아본다. 따스하다.  


 


내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 말을 건네는 순간이 있다. 이런 시간, 깨고 싶지 않은 잠을 누군가에게 빼앗겨 아연실색하여 낯선 눈빛을 기다리는 침묵의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나는 어디 멀리 여행가고 또 다른 모습의 내가 이 공간에서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책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철학을 위한 선언, 죽음에 이르는 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초의 아나키스트, 내면 작업,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커밍아웃, 괜히 했나 봐.” 금지의 그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나는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화가 났다. 이 가을은 화로 시작해서 어디까지 치달을 것인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사회, 숨이 막힌다. 타자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자유도 있으니 그렇게 살면 될 거다. 철저하게 나를 위한 삶으로 나와 함께 할 사람들의 손을 잡고 내 세상에서 살아가면 될까.


   


왜 커밍아웃을 해야 하지? 내가 게이이건 아니건 그게 뭔 상관이지? 나를 확인하려는 행위가 화살이 되어 나를 겨냥하는 사회. 이건 문제가 심각한 거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무슨 문제인가. 그게 왜 일을 하는데 잣대가 되는 건가? 그게 왜 혐오의 대상인가. 오히려 그런 인간들이 혐오스럽다. 나는 아무래도 이놈의 말만 넘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이 고역스럽다. 왜 나를 굳이 '이런 사람'이라고 밝혀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울프와 나눈 시간에서 내가 알아차린 것은 뜻밖에 나의 중심을 채워준 힘이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이제 그녀가 내게 건넨 힘을 마주한다. 다행히도 나는 페미니즘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어. 그것을 뛰어넘어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한 작가들의 마음을 일찍부터 느낄 수 있었던 기회를 다른 여성들보다 가질 수 있었던 것, 그게 다른 점일 거야. 나는 여성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나는 한 인간일 뿐이야. 생물학적 차이의 여성이란 구분은 신체적 차이일 뿐이다. 그것은 진작 전제될 평등의 가치였어. 그렇기에 나는 금지의 입장이 얼마나 부당한지 처절하게 느낀다. 편협한 인간들이 만든 사회 시스템에 내가 왜 동조해야 한다는 거지?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그 현실에 상처를 받는 것은 에너지 소모이다. 휴대 전화를 들어 다시 재 통화 버튼을 누른다.


   


“오빠, 나 안 가요.” 


“..... 재인아.” 


 


가만 생각해 보니 너무 일방적이었어. 나는 왜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거지? 지금이 아니었다면 다른 행동으로 비껴갈 수 있었겠지. 분명한 것은 내가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알고 있다는 이유로, 알아왔다는 이유로 그의 무조건적인 호출에 응할 이유 또한 없었다.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할 마땅한 이유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래, 이젠 아닌 건 아니라고 표현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히 잡아야겠어. 내의지 대로 움직이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내야지. 오늘은 금지 옆에 있고 싶다.


 


내 목소리가 좀 높았든지 금지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한다. 


 


“왜 그래, 나 내버려두고 나가 봐. 괜찮아.” 


 


이 순간 금지의 잠이 덜 깬 입술에서 흐르는 목소리는 사랑스럽다. 너무 귀여워서 꼭 안아주고 싶어지는 곰돌이 인형 같아. 눈 화장이 엉망이 된 채 잠든 그녀는 장난치다 구정물을 온통 뒤집어쓴 장난꾸러기 곰돌이.


 


“아냐, 경연 오빤데 만나고 싶지 않아서. 더 자.” 


 


내 말을 들었던 것인지 아닌지 금지는 다시 돌아누워 꿈속으로 달려가는 중인 것 같다. 주말의 늦은 아침의 평화가 좀 더 일찍 열리게 해준 그의 전화에는 고맙긴 하군. 가을 아침의 싸늘함에 활짝 열기가 미심쩍어 창문을 절반쯤 열어 본다. 그나마 이 동네는 아침 공기가 상쾌하게 밀려온다. 도시의 회색 공기는 늦은 오후부터는 싫증이 나게 소음과 함께 밀려들겠지만, 지금은 괜찮다. 


 


내가 안 보려고 한다고 해서 보이지 않을 세상도 아니었다. 뻔뻔스러운 세상이었어. 하긴 뭐, 그다지 애써가면서 안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보이는 건 보이는 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는 대로 살고 있나 보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제멋대로였던 것 같아.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해야만 했던 것들, 굳이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을 많은 시간이 너무 억울하게 아우성친다. 


 


“이재인, 뭘 그렇게 생각하며 넋 놓고 있는 거야. 전화벨 소리 안 들려?” 


“응? 왜 못 들었지? 잠시 어디 갔다 와서 그래. 도대체 누구지?” 


 


전화기를 집어 들자마자 부재중 전화로 바뀐 화면에는 ‘사진전2’로 저장된 주혁의 것이었다. 얘도 마찬가지야. 지 필요할 때만 눌러대는 얌통머리 없는 인간인 거지. 그래, 모두 그렇지 뭐. 나도 내 필요로 전화를 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오늘은 외출하기 싫은 날이다. 차라리 안 받은 게 나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다시 전화가 움직인다. 에이. 꺼 놓을걸. 한참을 들여다본다. ‘사진전 2’ 후후. 계절이 어느새 세 번 바뀌었군.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제 잠이 다 깬 거야?” 


“인간들이 돌아가면서 일어나라고 하네. 다 잤어. 누군데 안 받아?” 


“주혁이.” 


“배가 고픈 건지 위가 쓰린 건지. 감을 못 잡겠네.” 


“너 많이 마셨잖아. 독주에 소주에 맥주까지. 좀 참아봐. 북엇국 끓여 줄게.” 


“그래그래. 역시 재인이랑 살아야 했어. 북엇국 때문에도.” 


“술 덜 마시면 내가 필요 없지.” 


“그래, 정답이다. 그놈의 술이 날 너무 좋아하는 게 문제이지.”  


 


이런 날 아침은 아니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으니 숙취 후에는 밥보다는 술술 넘어가고 입을 별로 움직이지 않아도 될 음식이 좋긴 하지. 두부를 사러 나가기 위해 머리끈을 찾아 질끈 동여매고 현관을 나선다. 현관 옆에 있는 거울에 내가 있다. 퉁퉁 부은 얼굴과 눈가의 어두운 그늘. 후유. 한밤을 지내기가 이렇게도 고달파서야. 


 


“어디가?” 


“편의점 갑니다요~” 


“으응. 알았어. 이재인 미안해. 귀찮게 해서.” 


“오늘만큼은 안 귀찮으니 미안할 것도 없으시네. 갔다 올게.”  


 


찬란한 하늘이다. 눈이 시리다. 어두운 동굴에서 나온 느낌이다. 이 하늘이 내게도 손짓하는 것이었나? 그래, 이 하늘은 모두의 하늘이잖아. 골목길을 돌아 두부 한모를 사 들고 오는 마음이 마치 세상을 다 누리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살아가는 일에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어. 가벼운 발걸음에 질질 끌리는 슬리퍼와 아스팔트의 마찰음도 정겹다. 


 


“이재인, 경연 오빤가 그 사람이 계속 문자 날리는 것 같더라.” 


“신경 쓸 것 없어. 그러다 말겠지 뭐.” 


“이재인. 넌 가끔 좀 무섭더라.” 


“잉? 내가 무섭다고? 야, 그럴 때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근데 그게 어쩌다 보이니까 더 무서운 것 같아. 언젠가 나도 너에게 이런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싶은.” 


“그럴 때도 있겠지. 그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 아니었어? 이리 와서 북엇국이나 먹자고.” 


“와, 언제나 이 냄새가 그리웠어. 술 먹은 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그러니까 이틀에 한 번은 널 그리워했다는 거지.”


 “그래, 술이 나의 존재감을 일깨워 준다는 말 같구나. 드셔요.” 


“음, 두부를 이렇게 많이 넣고 달걀로 뒤덮으니까 밥이 필요 없네?” 


“밥알 씹는 것도 힘들지 않니? 만취 후 아침엔 특히” 


“그래 그렇긴 해. 고맙다, 이재인.” 


 


금지의 마알간 눈빛이 다시 보여 내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리 엄청난 것은 아니었지. 그냥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 거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 먹고 게으름의 왕국을 게으름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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