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잡설 1 - 해피 엔딩과 열린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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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에서 V가 이비에게 영화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보고 싶냐고 물었을 때, 이비는 이렇게 되묻는다.


"Does it have happy ending?"

"해피 엔딩이에요?"


그러자 V는 이렇게 답한다.


"As only celluloid can deliver"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아! 내가 '영화 속에서 들어 본 영화에 관한 대사' 중에서 가장 공감가는 두 마디의 말이었다.

누군가가 내게 영화를 추천해주면, 나는 늘 저렇게 되묻곤 했다. 해피 엔딩이냐고. 해피 엔딩이 아니라고 하면 작품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고, 해피 엔딩이라고 하면 작품이 별로 좋지 않아도 보고 싶은 의지가 생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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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내가 왜 그렇게 해피 엔딩에 집착하는지가 궁금해졌다. 며칠간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은 내가 영화에 너무 '몰입'해서라는 결론이었다. 좋아하는 영화는 몇 번이라도 돌려서 다시 보고, 보고 또 보다가 대사까지 외워버릴 정도로 한 작품에 몰입하는 나다. 난 아직도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한 장면만 보여주면 그 다음 대사가 뭔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전 작품의 세계에서 헤엄치느라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지 못할 정도의 몰입인데, 새드 엔딩이 좋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작품이 슬프게 끝나면 내 삶조차 슬퍼질 것 같은 착각은 점점 현실처럼 엄습해오곤 했다. 소설이든, 영화든 한 작품에 빠져서 다음 작품을 얻지 못하는 아이러니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같은 맥락으로 나는 열린 결말도 싫었다. 결말이 닫혀 있으면 정해진 바다에서만 헤엄치며 놀면 되지만, 열려 있는 결말의 작품에서는 무한한 바다에서 내가 바다를 만들어내는 고통까지 감수하며 헤엄쳐야 했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이라면 독자에게 창작의 고통 따위는 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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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은 이 성향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 같다. 가끔 영화를 보다 보면 '그냥 다 죽고 끝나버렸으면'하는 생각이 들기조차 한다. 그건 아마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랬던 것 같다. '새드 앤딩'의 전형은 '죽음' 아닌가. 아, 어쩌면 나는 새드 앤딩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끝내는 이'로서의 죽음을 싫어했던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삶의 또다른 방식'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이 어휘가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이 진리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명제이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내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 생각만이 든다.) '죽음'이라는 새드 앤딩은 작품 속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또다른 방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죽음은 단지 또 하나의 길


또 하나의 가능성은 내가 작품에 '진정으로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에 진정으로 몰입한다면, 그래서 진정으로 완성된 작품을 원한다면 해피 엔딩, 새드 엔딩, 열린 결말 모두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성있는 영화를 원한다면,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암에 걸려서 투병하다 알고보니 오진. 뭐 이런 결말은 작품 전체를 망쳐놓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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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주제? 그런거 없다. 그냥 생각이 나서 한번 떠들어 본거다. '영화잡설'에서 뭔가 심오한 논리나 완성된 글을 요구하지는 말아달라. 그냥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당신을 앞에 두고 떠들고 있을 뿐이다.

왜 사냐고 내게 묻는다면 언제 그것을 묻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이다. 물론 일관된 맥은 하나 있지만, 디테일한 답은 조금씩 달라진다. 오늘 밤 당신이 내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읽을 책이 남아있고, 볼 영화가 남아있고, 쓸 글이 남아있기에 내가 남아있다."고 대답하리라.

모두 행복하게 끝나는 어릴적 동화책 같은 책도 물론 좋지만, 동화책 속에서 무슨 성장이 있을까 한다.

오늘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엔딩을 가진 작품 하나를 봐야 겠다. 그게 해피 엔딩이든, 새드 엔딩이든, 열린 결말이든. 그런 건 이제 상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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