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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읽다/[시사]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

의문하는 민주주의를 위해: 그래도 여전히, 민주주의다.

Widerstand365 2016.11.1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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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하는 민주주의를 위해

그래도 여전히,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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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하기 전에, 간단한 실험을 하나 해 보자. 질문 몇 개에 대답만 해 보면 된다. 스스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는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왜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가?”

 “왜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가?”

 “왜 법을 지켜야 하는가?”

 “왜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이변이 벌어졌다.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의 제 4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내년 초 취임식을 거치고 나면,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은 끝나고 이제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가 도래한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주요 여론조사는 하나같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당선을 예측했다. 하지만 투표장 속 민심은 달랐다.


 경합주인 오하이오, 노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등은 모두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선거인단의 과반수인 270명을 먼저 차지한 트럼프는 선거에서 승리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유권자 전체 표에서는 승리했지만, 조금이라도 이긴 사람이 한 주의 모든 선거인단을 차지하는 ‘승자독식제’ 때문에 최종적으로 낙선했다.




 트럼프는 어떤 사람인가. 당장 생각나는 몇 가지 사례만 이야기해 보자. 트럼프는 멕시코 인을 ‘강간범’에 비유했으며, 멕시코와 미국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말했고, 미군 전사자 가족을 그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비하했다.


 장애인을 조롱했으며, 성추행을 저질렀고, 그 피해를 고백한 여성들에겐 “성추행을 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부모가 멕시코인인 판사는 공정하지 않다고 말했으며, 낙태 여성은 처벌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유세장에서 상대 지지자에 대한 폭력을 조장했으며, 기후 변화는 중국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 주장했다.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았으며, 본인이 고용한 노동자의 임금을 주지 않고 위장 파산했다.


 상대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감옥에 보내겠다고 말했고, 외모를 비하했다. “더러운 여자(such a nasty woman)”라는 욕설도 대선 토론장에서 서슴지 않았다.


 그는 부끄러운 후보였다. 혐오와 증오를 가치로 내건 사람이었다. 공화당 내에서도 후보를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상당한 힘을 얻었다. 지지자들도 트럼프가 부끄러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여론조사에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조용히 투표로 말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17년 1월 20일 무리 없이 취임할 것이다. 사람들은 불편한 가치보다는, 편리한 혐오를 선택했다.


 사람들은 저 깊은 곳에서 ‘트럼프의 세상’을 원하고 있었다. 유리 천장을 부수고 ‘남성적인’ 세계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여성이 옳은 말 하는 세상을 원하지 않았다. 돈 많고 별 생각 없는 남성이 혐오발언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는 세상을 원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결정이었다.




 정치적 중립을 논하고 싶지 않다. 트럼프는 최악의 후보였다. 극단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민주주의 사회는, 그 최악의 극단을 투표로서 선출했다. 절망의 밤이었다.


 하지만 이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우리는 다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무엇이 이 극단의 시대를 만들었는가.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시대. 논리와 이성보다는 감정과 혐오가 투표를 이끄는 시대. 무엇이 이 시대를 만들었는가. 사회의 다수가 그를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도널드 트럼프는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각 주는 주민의 총의를 모아 연방정부에 전달했으며, 이를 취합해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다. 민주주의가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단순히, 투표를 한다는 사실이 민주주의는 아니다. 민주주의는 결정의 ‘방법’이지만, 그걸 넘어서 모든 유권자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공정한 투표만이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다.


 누구든지 어떤 말을 하고, 모두에게 그 말을 전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 뜻이 맞는 사람이 모여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집회의 자유. 단체를 만들어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결사의 자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그 맥락을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 원하는 말을 글로 쓸 수 있는 출판의 자유.


 약자에의 보호. 규칙의 준수. 혐오하지 않는 발언. 인권에 대한 존중. 이 모든 것들이 민주주의를 핵심적으로 구성하는 ‘과정’들이다.


 그래서 모든 민주주의 사회는 ‘투표’라는 방법을 넘어서, ‘자유’라는 과정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민주주의 역사는, 바로 이 자유를 억압하려는 이들과 쟁취하려는 이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자유를 쟁취하고 보장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자유를 ‘왜’ 쟁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의문에 명쾌한 답을 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그 답을 내리지 못했다면, 우리가 쟁취한 자유는 다시 반납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우리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질 시간이 있었는지. 우리에게 그런 고민을 허락하는 환경이 주어졌는지. 가치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졌는지. 그리고 그 질문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오만했다. 모두가 고민 없이도 그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고민 없는 가치는 몰락하기 마련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말이다.




 처음에 던졌던 질문을 상기해 보자. 우리는 이런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논리적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막연히 무언가를 옳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이 본질적 질문 앞에서 당혹감을 느끼지는 않았는가?


 왜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한 사람에 의한 통치는 필연적으로 한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체제를 낳는다.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지만, 누구보다 무능한 사람이 지도자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의 의견을 묻는다. 오류를 최소화하고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왜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가. 판단능력을 가진 인간은 모두 각자의 입장과 각자의 시각에서 사안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때, 최대한 많은 수의 시각이 모여야 그 사안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모두의 자리에서 각자가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더 정확한 판단능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는가.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의 결정에 모두가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수의 목소리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소수자에게도 그들의 논리를 펼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 주어야 한다. 누군가의 힘에 억눌리지 않은, 올바른 결론을 찾아나가는 민주주의 사회의 방법론이다.


 왜 법을 지켜야 하는가. 법은 사회 전체가 만든 규칙이다. 규칙을 어기기 시작하면 사회 전체에 신뢰가 사라지고, 사라진 신뢰는 필연적으로 비용을 발생시킨다. 상대방이 규칙을 어길 가능성을 생각하며 쓰는 비용이, 규칙을 지키기 위해 쓰는 비용보다 더 크다.


 왜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어떤 단어는 특정 집단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누구도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는 게 사회 전체를 덜 불쾌하게 만든다. 단어를 바꾸는 과정의 이질감은, 사회 전체에서 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사는 기득권 세력이 안고 가는 것이 공정하다.




 이것은 몇 가지 질문해 대해 내가 내린 답이다. 누군가는 이 답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도, 달리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가치를 가지고 고민해본 일이 있느냐는 것이다. 가치에 대해 논쟁하고, 그 가치를 지켜야 할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볼 기회가 우리에게는 있었는가. 생각의 차이를 두고, 그것을 좁히기 위해 노력할 여유가 주어졌는가.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성장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고민의 과정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권리조차 암암리에 박탈된 채 살고 있었다.




 경제는 성장했다. 우리는 과거의 인류보다 부유하다. 기술도 성장했다. 우리는 과거의 인류보다 효율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민은 성장했는가. 인류는 스스로 숭고한 가치를 추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투표장 안에서 사람들이 품고 있던 본심은 달랐다. 이성의 둑은 이미 허물어졌다.


 우리는 안이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 결정의 방법을 넘어 과정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 과정의 의미와, 그것을 수호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의문을 품을 권리를 주는 사회를 생각해야 한다. 질문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세상을 지향해야 한다.


 이것은 특정 정권, 특정 국가를 넘어선 문제다. 도널드 트럼프를 지도자로 선출한 세상에서, 이것은 적어도 혐오보다는 우애가 옳다고 생각하는 인류 모든 이들이 가진 의무다.




 민주주의는 그래서 어려운 체제다. 민주주의는 끝없는 자기 혁신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옳은 가치라도, 국민의 절반 이상을 설득시키지 못하면 몰락하고 만다. 의심받지 않는 본성은 사회에 진보보다는 퇴보를 가져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절망하지 말자. 민주주의는 현대까지의 역사를 거친 인류가 발명해 낸 최선의 체제다. 우리가 노력하는 한, 오류의 가능성이 가장 낮은 체제다. 그리고 그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체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다시 기회가 있다. 대중과 함께 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우리가 잡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는 기회가 있다. 언제든지, ‘왜’라는 질문을 꺼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사회 구성원 전부에게 확대시킬 수 있다면, 인류 전체는 다시 한 번 큰 진보의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시대가 나빠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대중은 트럼프를 선택했다. 그리고 트럼프는, 그 선택의 대가를 충분히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만큼,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 구호를 생각하게 된다. “Stronger Together.” 함께하면 더 강해질 수 있다. 이제 모두와 함께 가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원칙을 지키기 위한 질문을, 모두 함께 시작해야 한다.


 아주 어려운 싸움이 눈앞에 있다. 트럼프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우리 모두의 기저에 깔려 있는, 의심받지 않는 본성이 그를 만들었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의 몰락은 필연이다. 우리는 그 전조를 보고 있는 것뿐이다.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논리에 대해 회의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권리를, 인류 전반에 확대해야 한다. 그렇게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그 기반을, 쌓아두어야 한다. 그것이 시대의 역행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낙선 연설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했던 말을 전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자.


 “수많은 고난과 역경의 순간이 우리의 앞에 예견되어 있다. 하지만 옳은 일을 위한 싸움이라면, 그 모든 것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우리의 가치를 위해,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만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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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 프로필사진 우아아앙 2016.11.17 01:41 신고 음...우선 필스교양 잘 듣고 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먹고 살기 힘들어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유중에는 오바마의 행정력의 한계...그러니까 더 나은 삶을 제공하지 못한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전 지금 강한 강도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지만 뾰족 한 대안이 있지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주변의 사람들의 삶이라는게 딱히 나아보이지도 않지요
    여유가 있어야 토론을 할수도 있지 않을까요
    박원순 시장식의 소통형 리더쉽이 잘 먹히지 않는 이유도 삶의 피곤함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기승전 기본소득으로 끝나네요 ㅎㅎ
    그럼에도 생각해볼것이 많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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