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2일.



[오늘의 음악] 우연한 생각


 나는 종종 우연한 생각에 빠진다. 사실 이리저리 여유 시간이 많은 일정표를 가지고 있는지라, 가끔 벤치에 앉아 상념에 빠지는 일을 좋아한다. 지나가는 사람을 관찰하면서 생각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사실 누군가와 약속을 잡았을 때도 다른 사람이 늦는 것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라기보다는 ‘그 사람이 오기 전까지 혼자 놀고 있는다’는 느낌이랄까. 혼자 있는 시간을 피하지 않는 것도, 기다림을 싫어하지 않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거다.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독창적인 학문이 생겨나는 마을의 조건은, 오래된 마을로 그다지 크지 않고 산책할 수 있는 자연이 있는 곳이다.” 아무것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 시간 속에 흠뻑 젖어 있으면 이런 생각에 저절로 동조하게 되곤 한다.


 산책하는 시간, 홀로 있는 시간, 그냥 앉아서 지나가는 바람을 맞고 있는 시간에 떠오르는 우연한 생각은 이제까지 했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단순히 현학적이고 말만 뱅뱅 돌리는 논쟁에서 벗어나, 마음껏 상상과 생각을 펼쳐나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상에서 1km 이상 떨어진 곳의 대기는 ‘자유대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지표면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대기가 보다 자유롭게 돌아간다는 의미다. 우연히 드는 생각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세상에서 유리된 듯이 가만히 앉아있을 때 떠오르는 생각들은,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내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생각이다. 윤리의 잣대가 들어갈 이유도 없고, 누군가의 반론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정치적으로 올바를 필요도 없고, 극단적으로 편향된 생각을 펼쳐도 제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생각의 논리적 흐름이 적당한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고전할 이유도 없다. 그냥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세계다.


 드는 생각들은 아주 다양하다. 아주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답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해 방황하기도 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적으로 무엇이 올바르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나의 생각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영원의 관점에서 ‘합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면 대단히 단순한 생각들도 있다. 그때 봤었던 그 사람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지금 지나가는 저 사람은 뭐 때문에 저렇게 뛰어가는 것일까. 위시리스트에 있는 이 물건을 사야 할까, 말아야 할까. 뭐 이런저런 아주 단순한 생각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물론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남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오직 나 홀로 세상의 잣대에서 벗어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시간도 대단히 즐거운 일이다.


 산책을 할 수 있는 자연이 독창적인 학문이 생겨나는 조건이라고 했던가. 뭐 독창적인 학문까지 개발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 시간들이 나에게 독창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이 시간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오늘의 음악, YB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로 골랐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오늘의 역사] 후지무라 신이치


 2000년 10월 22일, 후지무라 신이치가 몰락했다.


 후지무라 신이치는 1950년에 태어났다. 197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후에는 화학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하지만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따로 있었다. 그는 고고학 분야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했다.


 그는 정식 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프로 고고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고학을 직접 독학했고, 직접 유물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다. 10년 정도 공부를 했던 그는 1981년, 역사적인 발견을 해낸다.


 당시 일본에서 발견된 유물은 가장 오래된 것이 3만년 정도 전의 것이었다. 그런데 정식 고고학자도 아니고 단순한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후지무라 신이치가 1981년 미야기 현에서 4만년 전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을 발견한 것이다.


 일본의 학계는 크게 고무되어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90년대 말까지 발굴을 계속했다. 발굴의 성과는 놀라웠다. 그는 일본 내 구석기시대의 연대를 계속해서 앞당겼다. 그는 70만년 전의 구석기 유물을 발견해내기까지 했다.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일본 역사학계의 큰 획을 그은 것이다. 일본은 그를 ‘신의 손’이라며 추앙하기 시작했고, 교과서에도 그의 업적이 실렸다. 일본의 구석기문화는 그로 인해 다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후지무라 신이치가 고고학계의 전설을 여전히 쓰고 있었던 2000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는 한 통의 제보가 들어온다. 후지무라 신이치의 이제까지의 업적이 모두 조작이라는 이메일이었다.


 사실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제보였지만 마이니치 신문은 그 이전부터 후지무라의 발굴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 몇 가지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워낙 후지무라를 영웅시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그를 의심하면 매국노 취급을 당했기에 쉽게 기사를 내보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2000년 8월부터 마이니치 신문은 극비리에 후지무라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9월 5일, 이들은 수상한 현장을 포착했다. 미야기 현의 한 유적지에 나타난 그가, 직접 만든 유물을 묻는 현장이 포착된 것이다. 하지만 일단 선명한 영상이 아니었기에 조사는 계속됐다.


 그리고 결국 10월 22일 아침, 마이니치 신문은 후지무라가 유적을 조작하는 정확한 영상을 포착했다. 이제까지 그가 발견한 유물은 모두 그가 며칠 전에 묻어둔 것이었고, 얼마 뒤 그 자리를 찾아가 유물을 발굴한 척 한 것이다.


▲ 마이니치 신문에 포착된, 후지무라의 유물 조작 현장



 마이니치 신문은 즉각 보도를 내지는 않았고, 11월 4일 센다이 시의 한 호텔에서 후지무라와의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를 계속하다가 취재팀장은 “보여드리고 싶은 영상이 있다”며 후지무라의 조작 현장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후지무라는 10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전부 조작한 것은 아니다. 마가 낀 것 같다.”고 답했다.


 이 영상 역시 마이니치 신문의 카메라에 담겼다. 결국 후지무라의 조작 사실을 마이니치 신문이 밝혀내고, 그가 조작을 시인하는 영상까지 마이니치 신문이 포착한 것이다. 마이니치 신문은 즉각 이 내용을 보도했다.


▲ 당시 마이니치 신문 1면 톱기사.



 일본 열도는 즉각 혼란에 휩싸였다. 후지무라가 발굴했다는 유물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가짜 유물들은 모두 지정 취소당했고, 교과서에서 후지무라에 대한 내용이 삭제되었다. 후지무라는 고고학계에서 영구 제명당했다. 후지무라의 저서는 출판사에서 모두 회수했고, 후지무라의 유물은 폐기되거나 범죄의 증거품으로 보관됐다.


 후지무라의 유물을 근거로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일본에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앞선 문명이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국가적인 자존심을 이유로 누구도 적극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의 조작 행각은 20년이나 지난 뒤에 밝혀지게 된 것이고.


▲ 사과하는 후지무라 신이치.



 사실 후지무라의 조작은 일본인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도 했었다. 당시 한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은 27만 년 정도 전의 것이었는데, 일본은 기껏해야 3만 년이었는데, 이에 대해 일본은 일정 정도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칭기즈 칸이 일본이라며 무덤을 발굴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중일전쟁 때에는 중국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인 ‘베이징 인’이 일본인이라며 그 뼈를 손에 넣으려고 하기도 했다. 이를 피하려고 중국은 전쟁 중에 이 유골을 미국으로 보냈고, 이 과정에서 유실되어 현재 베이징 인의 유골은 실종 상태에 있다.


 결국 국가주의의 홍수 속에서 실종됐던 이성은 그대로 일본 학계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20년 동안이나 사기꾼을 ‘신의 손’이라 추앙했던 일본 고고학계는 바로 다음 해인 2001년 국제 고고학 회의에는 참가 자체를 거부당했다. 2002년에는 참가 자격은 얻었지만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지금이야 위상이 많이 회복됐지만, 당시에는 유적이 발견되면 한국으로 넘겨서 연대측정을 해야만 국제 학계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던 수준이었다.


 후지무라 신이치 본인은 사건이 터지자 병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내와는 이혼하고 병원에서 만난 새 여자와 재혼했다. 다만 2003년 재혼 무렵에 흔히 ‘다중인격 장애’라고 불리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판정을 받고 정신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아마 병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스스로 손가락을 자를 정도로 정신이 심각한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자해라는 의견도 있지만. 현재는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고, 날조에 대한 기억은 기억상실 때문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일본의 고고학적 연대는 후지무라 신이치로 인해 수십만 년이 늘어났다. 그에 대해 의문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국가를 중심으로 뭉친 배타주의는 의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의 고고학계는 엄청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역사의, 아니 모든 학문의 기초는 의문이다. 의심이고 비판이다. 한 사건을 두고도 많은 의심을 하고 많은 시각을 살펴보는 것이 제대로 학문을 하는 길이다.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이야기다.


 그런데 모든 의문을 ‘수능’이라는 한 마디로 차단하려는 정권이 있다. 질문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정권이 있다. 우리도 일본과 같이, 의문을 허락하지 않는 역사를 하려는 셈인가.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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