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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가을. 8 본문

낯선 세계를 읽다/[소설] 벽

벽. 가을. 8

Widerstand365 2015.10.19 00:00



벽. 가을. 8


/by. Widerstand



 “대학에 들어와서, 사실 나는 좀 당황했었어.” 주혁이 말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주혁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나는 내가 취기가 좀 올라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 나는 내가 내 나름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거든. 수능 따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했고, 대학을 못 가도 인생은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았고, 굳이 어떤 틀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었어.”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야?” 재인이 말을 듣자마자 입을 열었다. 나는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기로 결정하고는 올라오는 말을 억지로 눌렀다.


 “변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변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까, 잘 모르겠네.” 주혁은 멋쩍게 웃었다.


 “자유롭게 사는 건 좋다고 생각해. 인생이 대학 따위로 결정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해. 무엇을 얼마나 공부하느냐는 중요하겠지만, 어디서 공부하는지는 별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 틀 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여전히 동경해.”


 “그런데?” 재인이 다시 물었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던 것 같아. 나는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틀에 갇히지 않은 삶, 나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꼬리표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삶.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당연히 확신했었어.”


 “그런데, 아니었다는 거야?” 재인이 물었다.


 “대학에 들어오니까 알 것 같더라. 막상 수능이 끝났을 때는 몰랐어. 어차피 수능이 끝나고 대학에 들어오기까지는 다들 열심히 놀기만 하는 기간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합리화가 가능했거든. 인생을 항상 효율적으로만 살 수는 없는 거잖아? 하면서.”


 주혁은 그리고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재인은 이번에는 되묻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고 나니까, 아무런 목표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 수능 따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수능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목표였던 거야. 내가 나의 꿈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 의문하기 시작했어. 내가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고.”


 다시 아무런 말도 흐르지 않았다. 금지의 기타줄 퉁기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스럽더라. 뭘 해야될 지 모르겠어서. 나만 이런 생각인건지도 궁금했고, 이런 게 진짜 문제가 되는 건지도 궁금했고, 해법이 있는지도 궁금했고, 해법이 있다면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도 궁금했어.”


 “일종의 소외감일까?” 재인이 물었다.


 주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어쩌면. 나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성공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사람도 아니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어. 하지만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모두들 자기를 규정하는 벽이 있는데, 나에게만 그게 없었어. 철옹성 사이에서 누구도 만나지 못하는 소외감이랄까.”


 나는 술잔을 들었다.


 “그래서, 아직도 당황함과 무력감 사이에 있는 중이신가?”


 나는 말을 마치고 손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그때, 짠하고 당신들이 나타났지.” 주혁이 분위기를 바꾸고 웃으며 말했다.


 금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술잔을 들었고, 재인은 “내가?”라고 반문했다. 나는 주혁이 시작한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마침 그 날 우연과 우연이 겹쳤고, 서준이 너희에게 말을 걸었지. 생각하면 할수록 재밌는 일이었어. 왜 하필 그 때, 너희들이 내 앞에 나타났을까.” 주혁의 말은 이제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철저한 개인주의자들. 너랑 나는 참 비슷해 보였는데, 너는 그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살더라. 세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세상이 없는 것처럼 살더라고.”


 주혁은 술을 한 잔 마셨다. 발음이 꼬이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모습이 역력한 것을 보니, 많이 마시긴 마신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많이 비우기는 했다. 네 명이서 벌써 몇 병째야.


 “그래서 처음에는 네가 오만하다고 생각했어. 자기가 뭔데 세상을 무시하는 거야? 지금을 즐기면서 사는 게 영원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아집만을 밀고 가겠다는 건가? 언젠가는 ‘너 얼마나 가는지 보자’ 하는 생각도 들더라니까.” 주혁은 옅게 미소지었다.


 말을 듣던 재인과 금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뭐야, 고해성사 타임이야?” 재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잠깐 말을 끊고 고해성사 타임에 동조하자면, 사실 나도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몰랐던 건 아니야.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너 그거 얼마나 가나 보자’ 하고. 그래서 더 오기로 너희들과 만났던 건지도 몰라.” 재인도 옅은 미소로 말했다. 나는 둘 사이 무언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주혁은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면, 그 싸움에서는 네가 이긴 셈이네.”


 주혁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 뒤에 주혁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뒤에 이어진 말은 나의 예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사실 뭐, 아직 정확히 답을 찾은 건 아니야. 너의 방식이 꼭 옳다고만 생각하지도 않아. 나는 여전히 세상을 향한 끈을 놓을 수 없고, 그걸 놓는 순간 망망대해 위에 뜬 뗏목 하나가 되어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은 놓을 수 없어. 그게 꼭 비현실적인 두려움도 아닌 것 같고.” 주혁은 다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나는 무언가 묻고 싶었지만 주혁이 다시 말을 이을 때까지 기다렸다. 역시나, 주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황망함과 당황스러움은 여전하지. 그런데 이제 좀 익숙해진 것뿐이지. 방황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자괴감이 들고, 뭐 이런 감정들이 이제는 익숙해져서 무뎌졌을 뿐이야.”


 “뭐야, 그럼 하나도 달라진 건 없네?” 내가 물었다. “너는 아직도 방황하고 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지만 결국 답은 찾지 못했고. 달라진 건 조금 익숙해졌다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벽과 매듭에 대한 이야기, 기억해?” 주혁이 물었다. 나는 딱히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주혁은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아직 매듭을 풀지 못했어. 벽을 쌓고 싶은 생각도 여전히 없어. 그래서 여전히 당황스럽고 소외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그런 의미에서라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주혁은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초점을 조금만 바꾸면, 중요한 건 익숙해졌다는 거 아닐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 어차피 매듭을 완벽하게 풀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누구도 넘을 수 없는 벽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그런데 다만 꽁꽁 묶인 매듭 앞에서의 당황스러움, 높다란 벽 앞에서의 황망함에 익숙해졌지. 그렇다면 이제 좀 찬찬히 앉아서 해답을 고민해볼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하는 자신감이 생긴 거야.”


 “놀라운 진보지.” 주혁은 마지막 말을 하면서 크게 웃었다.


 잠시 모두들 생각에 잠겼다.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벽은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지는 않아.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내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나의 세상을 규정짓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오지 말라고 협박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것 역시 그것대로 세상을 등지는 방법일 거야.”


 잠시 술잔을 바라보던 주혁이 나의 말을 받았다.


 “매듭을 칼로 쳐버리면 정말 쉽겠지. 그런데 그러면 우리는 반쪽짜리 줄밖에는 갖지 못하게 돼.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매듭이 저절로 풀리기를 기다릴 수는 없어.”


 “그냥, 사다리를 놓으면 되는 건 아닐까. 나의 벽을 쌓으면서도, 얼마든지 사람들이 넘어올 수 있도록 말이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벽 앞에 사다리를 놓고 사람들이 누구나 넘어올 수 있도록 하는 거야.” 나는 이 말을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는 낮은 울타리를 쌓아두면 좋겠네. 누구나 넘어와서 찔러볼 수 있는 나의 영역을 만들어야겠지.” 주혁이 나의 말을 받았다.


 “사다리, 좋네, 지금 우리처럼 말이지?” 재인이 물었다. 우리는 눈을 맞추고 웃었다.


 주혁이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아, 너무 많이 마셨나?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네.”


 우리는 이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모두들 같은 고민에 빠져 있다는 우리를 엮는 유대감에 만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세우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다면 그 경계선은 어디인가? 어디가 적절한 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모두들 그 답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섣불리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내 남은 삶 전부를 통해 그 답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같은 답을 내렸을까?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정적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재인이 입을 열었다.


 “금지야, 좋은 음악으로 한 곡만 부탁해.”


 금지는 연주를 시작했다. 음악은 좋았지만 나는 그 음악의 제목을 묻지 않았다. 어차피 좋은 음악이란 그 음율이 아니라, 지금 우리 넷이 공유하고 있는 동질감에서 만들어진 것일 테니까. 술에 취한 나는 음악에도 함께 취하며 그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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