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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가을. 5 본문

낯선 세계를 읽다/[소설] 벽

벽. 가을. 5

Widerstand365 2015.09.28 00:00




벽. 가을. 5.


by / 이창우


 



 


"무슨 청승이야? 혼자서 술을 다 마시게."  


"아, 이거? 승우가 사 왔던 건데 먹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승우가 집에 왔었다고?"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매듭 때문에 왔었대." 


"매듭? 뭔 매듭?" 


"나보러 자를래 풀래 하더라." 


"그래서 뭐라 했어? 그 매듭은 너희 문제겠지?" 


"너희라는 건 맞는 가 본대 그게 뭔지 나도 몰라."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만큼 나는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금지의 일과 사랑 이야기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가 그리 복잡한지 내가 너무 단순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내가 아니면 아니고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일들에 사람들은 너무 진을 뺀다는 생각도 든다. 금지는 웃기게도 카페 주인의 일방적인 계약해지로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렸고 엄마와의 갈등은 꼬일 대로 꼬여서 그거야말로 풀어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다른 멤버들 반응은 어때?"  


"뭐, 다들 미칠 지경이지. 날 빼고 다른 누구를 대신해도 주인이 싫다 하니까."  


"아니, 다른 멤버들이 너를 잘 알잖아. 그런데도 너를 제외하면서까지 일을 한다고?"  


"아니, 내가 그렇게 해 보라고 형한테 말했어. 그 형은 딸린 가족이 있으니까."  


"참, 기가 막힐 일이구나. 그게 뭐가 어때서 그렇다는 거지?"  


"혐오스럽대."  


"뭐라고? 레즈비언이 혐오스럽다고? 미친 인간 아니야?"  


"그렇다더라. 주인은 자신의 카페 이미지를 망쳐놨다고 벌벌 떨면서 배상 어쩌구까지 하면서 소리를 지르더라."  


"계약 파기는 지가 해놓고 니들이 배상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그럴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거지. 이럴 땐 정말 이따위 나라에서 왜 세금 내고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금지와 아침이 오도록 부어라. 마셔라 했나 보다. 요란스럽게 계속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깨고 싶지 않은 잠을 잘 수도 있었을까.    


 


"아직까지 자고 있던 거야?" 


"네, 무슨 일이세요?" 


"서운한데 이렇게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는데 별일 없지?" 


"있으면요? 어떡할 건데요?" 


"이재인. 삐졌어? 연락 안 해서? 정신 좀 차리고 두 시간 후 아인에서 보자." 


"아, 못 일어나요. 다시 잘 거야." 


"아인에서 기다릴 테니 준비되는 대로 나와. 끊는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이미 지나 있었다. 뭔 대낮부터 아인이야. 침대에 다시 누워 눈을 감는다. 머리는 무거웠고 심장은 뛰지 않았으면 싶었다. 금지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녀의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뒤로 넘겨 놓고는 가만 바라본다. 울면서 잠든 그녀가 몹시 안쓰러워졌다. 꼬옥 안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축 늘어진 그녀의 한쪽 팔을 침대 위로 조심스레 올려놓으며 손을 꼭 잡아본다. 따스하다.  


 


내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 말을 건네는 순간이 있다. 이런 시간, 깨고 싶지 않은 잠을 누군가에게 빼앗겨 아연실색하여 낯선 눈빛을 기다리는 침묵의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나는 어디 멀리 여행가고 또 다른 모습의 내가 이 공간에서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책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철학을 위한 선언, 죽음에 이르는 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초의 아나키스트, 내면 작업,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커밍아웃, 괜히 했나 봐.” 금지의 그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나는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화가 났다. 이 가을은 화로 시작해서 어디까지 치달을 것인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사회, 숨이 막힌다. 타자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자유도 있으니 그렇게 살면 될 거다. 철저하게 나를 위한 삶으로 나와 함께 할 사람들의 손을 잡고 내 세상에서 살아가면 될까.


   


왜 커밍아웃을 해야 하지? 내가 게이이건 아니건 그게 뭔 상관이지? 나를 확인하려는 행위가 화살이 되어 나를 겨냥하는 사회. 이건 문제가 심각한 거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무슨 문제인가. 그게 왜 일을 하는데 잣대가 되는 건가? 그게 왜 혐오의 대상인가. 오히려 그런 인간들이 혐오스럽다. 나는 아무래도 이놈의 말만 넘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이 고역스럽다. 왜 나를 굳이 '이런 사람'이라고 밝혀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울프와 나눈 시간에서 내가 알아차린 것은 뜻밖에 나의 중심을 채워준 힘이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이제 그녀가 내게 건넨 힘을 마주한다. 다행히도 나는 페미니즘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어. 그것을 뛰어넘어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한 작가들의 마음을 일찍부터 느낄 수 있었던 기회를 다른 여성들보다 가질 수 있었던 것, 그게 다른 점일 거야. 나는 여성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나는 한 인간일 뿐이야. 생물학적 차이의 여성이란 구분은 신체적 차이일 뿐이다. 그것은 진작 전제될 평등의 가치였어. 그렇기에 나는 금지의 입장이 얼마나 부당한지 처절하게 느낀다. 편협한 인간들이 만든 사회 시스템에 내가 왜 동조해야 한다는 거지?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그 현실에 상처를 받는 것은 에너지 소모이다. 휴대 전화를 들어 다시 재 통화 버튼을 누른다.


   


“오빠, 나 안 가요.” 


“..... 재인아.” 


 


가만 생각해 보니 너무 일방적이었어. 나는 왜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거지? 지금이 아니었다면 다른 행동으로 비껴갈 수 있었겠지. 분명한 것은 내가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알고 있다는 이유로, 알아왔다는 이유로 그의 무조건적인 호출에 응할 이유 또한 없었다.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할 마땅한 이유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래, 이젠 아닌 건 아니라고 표현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히 잡아야겠어. 내의지 대로 움직이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내야지. 오늘은 금지 옆에 있고 싶다.


 


내 목소리가 좀 높았든지 금지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한다. 


 


“왜 그래, 나 내버려두고 나가 봐. 괜찮아.” 


 


이 순간 금지의 잠이 덜 깬 입술에서 흐르는 목소리는 사랑스럽다. 너무 귀여워서 꼭 안아주고 싶어지는 곰돌이 인형 같아. 눈 화장이 엉망이 된 채 잠든 그녀는 장난치다 구정물을 온통 뒤집어쓴 장난꾸러기 곰돌이.


 


“아냐, 경연 오빤데 만나고 싶지 않아서. 더 자.” 


 


내 말을 들었던 것인지 아닌지 금지는 다시 돌아누워 꿈속으로 달려가는 중인 것 같다. 주말의 늦은 아침의 평화가 좀 더 일찍 열리게 해준 그의 전화에는 고맙긴 하군. 가을 아침의 싸늘함에 활짝 열기가 미심쩍어 창문을 절반쯤 열어 본다. 그나마 이 동네는 아침 공기가 상쾌하게 밀려온다. 도시의 회색 공기는 늦은 오후부터는 싫증이 나게 소음과 함께 밀려들겠지만, 지금은 괜찮다. 


 


내가 안 보려고 한다고 해서 보이지 않을 세상도 아니었다. 뻔뻔스러운 세상이었어. 하긴 뭐, 그다지 애써가면서 안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보이는 건 보이는 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는 대로 살고 있나 보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제멋대로였던 것 같아.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해야만 했던 것들, 굳이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을 많은 시간이 너무 억울하게 아우성친다. 


 


“이재인, 뭘 그렇게 생각하며 넋 놓고 있는 거야. 전화벨 소리 안 들려?” 


“응? 왜 못 들었지? 잠시 어디 갔다 와서 그래. 도대체 누구지?” 


 


전화기를 집어 들자마자 부재중 전화로 바뀐 화면에는 ‘사진전2’로 저장된 주혁의 것이었다. 얘도 마찬가지야. 지 필요할 때만 눌러대는 얌통머리 없는 인간인 거지. 그래, 모두 그렇지 뭐. 나도 내 필요로 전화를 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오늘은 외출하기 싫은 날이다. 차라리 안 받은 게 나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다시 전화가 움직인다. 에이. 꺼 놓을걸. 한참을 들여다본다. ‘사진전 2’ 후후. 계절이 어느새 세 번 바뀌었군.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제 잠이 다 깬 거야?” 


“인간들이 돌아가면서 일어나라고 하네. 다 잤어. 누군데 안 받아?” 


“주혁이.” 


“배가 고픈 건지 위가 쓰린 건지. 감을 못 잡겠네.” 


“너 많이 마셨잖아. 독주에 소주에 맥주까지. 좀 참아봐. 북엇국 끓여 줄게.” 


“그래그래. 역시 재인이랑 살아야 했어. 북엇국 때문에도.” 


“술 덜 마시면 내가 필요 없지.” 


“그래, 정답이다. 그놈의 술이 날 너무 좋아하는 게 문제이지.”  


 


이런 날 아침은 아니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으니 숙취 후에는 밥보다는 술술 넘어가고 입을 별로 움직이지 않아도 될 음식이 좋긴 하지. 두부를 사러 나가기 위해 머리끈을 찾아 질끈 동여매고 현관을 나선다. 현관 옆에 있는 거울에 내가 있다. 퉁퉁 부은 얼굴과 눈가의 어두운 그늘. 후유. 한밤을 지내기가 이렇게도 고달파서야. 


 


“어디가?” 


“편의점 갑니다요~” 


“으응. 알았어. 이재인 미안해. 귀찮게 해서.” 


“오늘만큼은 안 귀찮으니 미안할 것도 없으시네. 갔다 올게.”  


 


찬란한 하늘이다. 눈이 시리다. 어두운 동굴에서 나온 느낌이다. 이 하늘이 내게도 손짓하는 것이었나? 그래, 이 하늘은 모두의 하늘이잖아. 골목길을 돌아 두부 한모를 사 들고 오는 마음이 마치 세상을 다 누리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살아가는 일에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어. 가벼운 발걸음에 질질 끌리는 슬리퍼와 아스팔트의 마찰음도 정겹다. 


 


“이재인, 경연 오빤가 그 사람이 계속 문자 날리는 것 같더라.” 


“신경 쓸 것 없어. 그러다 말겠지 뭐.” 


“이재인. 넌 가끔 좀 무섭더라.” 


“잉? 내가 무섭다고? 야, 그럴 때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근데 그게 어쩌다 보이니까 더 무서운 것 같아. 언젠가 나도 너에게 이런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싶은.” 


“그럴 때도 있겠지. 그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 아니었어? 이리 와서 북엇국이나 먹자고.” 


“와, 언제나 이 냄새가 그리웠어. 술 먹은 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그러니까 이틀에 한 번은 널 그리워했다는 거지.”


 “그래, 술이 나의 존재감을 일깨워 준다는 말 같구나. 드셔요.” 


“음, 두부를 이렇게 많이 넣고 달걀로 뒤덮으니까 밥이 필요 없네?” 


“밥알 씹는 것도 힘들지 않니? 만취 후 아침엔 특히” 


“그래 그렇긴 해. 고맙다, 이재인.” 


 


금지의 마알간 눈빛이 다시 보여 내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리 엄청난 것은 아니었지. 그냥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 거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 먹고 게으름의 왕국을 게으름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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