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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더슈탄트, 세상을 읽다.

비더슈탄트, 1987년, 뜨거웠던 그 해의 여름을 말하다. 1 - 전두환이 자초한 다섯가지 이야기 본문

시간을 읽다/[역사] 뒤돌아서 오늘을 보다

비더슈탄트, 1987년, 뜨거웠던 그 해의 여름을 말하다. 1 - 전두환이 자초한 다섯가지 이야기

Widerstand365 2013.05.25 16:00

오을부터 총 세 편으로 구성된 <비더슈탄트, 1987년, 뜨거웠던 그 해의 여름을 말하다>를 연재합니다.


비더슈탄트, 1987년, 뜨거웠던 그 해의 여름을 말하다 1


역사는 왜 배우는가역사 속에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인간이 싸우고 갈등하고 서로를 비난하는 이유는 알고 보면 과거와 그리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정치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사회 전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관료제와 상명하복식 지배구조 사이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듯 하다.

 

민주화를 얘기하면 빨갱이’ 취급을 받던 때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진짜 웃긴다민주주의 공화국에서 민주화를 외치면 공산주의자라니.) 하지만 우리는 지금 너무도 당연하게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다그래서 오늘은 6월 항쟁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어떤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이렇게 보편적인당연히 최고로 인정받는 가치로 만들어 냈을까?”하는 물음에 6월 항쟁이 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그리고 그 답을 가지고 우리는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에서다시 민주주의를 사회 전반으로 확장시켜 나갈 투쟁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역사 속에서 찾아낸 실마리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 확신한다.

 

서론은 이만 하고 시작한다전두환 정권이 있었다(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소설을 쓰는 것 같다.)

 

어쨌든 그것은 사실이었다전두환은 대통령이 되었고이 나라의 권력이란 권력은 모두 한 사람의 발아래 복속하고 있었다특히 5월의 광주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난 후에는 더욱 그랬다간헐적으로 시위가 일어나긴 했지만 늘 그렇듯이 폭력적으로 진압되고그러고 나면 또 한동안 조용하다가 시위를 일으키고그냥 그런 날들이었다저 단단한 권력은 아무리 달려들어도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자만한 것일까진심일까술수일까이런 상황 속에서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을 강하게 옥죄던 정책들을 하나하나 풀어주며 어느 정도 유화책을 펴고 있었다프로야구를 만들고, 3S라는 미디어 정책을 수립한다이것은 사실 국민들의 관심을 그 방향으로 쏠리게 해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하려는 계책이었다그런데 거기다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다시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까지 한다물론 언론 통폐합을 통해서 이미 언론을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어 논 상황이었지만 말이다국민의 관심도 돌리고비판도 완화시키면서 권력은 그대로 유지하는그런 술책이었다(뭔가 처음에 질문을 던져놓고 내가 답을 다 내버린 것 같다.)

 

프로야구에 빠져 정치는 관심도 없고살짝 보더라도 통제된 언론이 내보내는 소식이니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자유롭게 해 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두환은 생각했을 것이다야권 정치인들이 가택연금 상태의 김영삼과 미국 망명 중이던 김대중의 지원을 받아 신민당을 창당했을 때에도 그래봐야 무슨 큰일이라도 나겠어?”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 1986년의 신민당 행사 사진


그런데 여기서 전두환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진다신민당의 인기가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것이다거기다 미국에 있던 김대중이 총선이 있기 4일 전인 2월 8일에 귀국하자 신민당의 인기는 절정을 달린다(전두환은 이 소식을 듣고 꽤나 당황했을 것이다김대중이 돌아올 때의 파장은 상상 이상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정부에서는 김대중에게 신변이 위험하다며 귀국하지 말기를 권유하기도 하고투옥하겠다는 협박하기까지 한다하지만 김대중은 귀국이라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다.)





▲ 김대중 귀국을 환영하는 인파



▲ 김대중의 귀국 당시 사진


▲ 김대중 대통령의 안전귀국을 대한민국 정부에 요청하는 미국 국회의원들의 편지와 서명


▲ 김대중의 안전귀국을 요청하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편지

(쪽팔린다. 우리나라 민주화 인사의 안전을 미국이 지켜줘야 하다니.)



야권의 또 다른 거목이었던 김영삼은 가택에 연금된 상태였는데정치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김영삼은 가택에 연금된 상태였으며김영삼의 정치활동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1987년 8월 8일의 일이다지금 논하는 85년엔 김대중과 김영삼을 제외한 다른 몇몇 야권 정치인의 정치활동만 자유로워진 상태이다.)에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간다단식 농성 중에 야권 정치인들이나 지인들이 자택으로 찾아오려 하자 전두환은 지인 등 70여명을 가택에 연금시켜 버리고단식을 시작한지 8일 만에 병원으로 강제 이송한다병실로의 출입을 통제해 언론에 기사가 나거나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강제 이송될 때 김영삼이 한 말은 대단히 유명하다.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게 김영삼이 먼저 한 말은 아니긴 하지만멋진 말인 건 틀림없는 듯하다.

▲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영삼의 집 앞.


▲ 단식중인 김영삼


 

(김영삼이 보름달빵을 몰래 먹다가 문익환 목사님께 걸리긴 했어도) 이 단식과 김대중의 귀국은 야권을 단단히 결집시킨다그렇게 2월 12일 총선은 다가온다다음은 당시 총선에 출마한 정당 (민주정의당신한민주당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신사당) 중 3개 정당의 결과와 총 수를 나타낸 표이다.

당명

민주정의당

신한민주당

민주한국당

지역구 ()

87

50

26

184

전국구 ()

61

17

9

92

의석수 ()

148

67

35

276

득표율 (%)

35.2

29.3

19.7

100

 

▲ 신민당의 선거 승리를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에는 고결한 역사의 흐름이 있다아주 가끔 민중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역사를 후퇴시키기도 하지만 민중은 역사를 언제나 양의 방향으로 끌어가려고 노력했다그리고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둘 때마다 역사는 한 단계씩 발전했다그리고 2월 12일 이 날에 이르러고결한 역사의 흐름은 다시 밖으로 드러나 결실을 거두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말하는 게 과대해석처럼 들릴 수 있다과반을 차지하기는커녕 민주정의당 의석의 절반도 차지하지 못한 신한민주당이니 말이다그런데 그 당시와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우선 왜곡된 선거구와 비례대표제도 (당시에는 전국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때문에 의석수가 많이 줄긴 했지만 득표율만을 보면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때와 지금을 단순 비교할 수 없는 이유는 정치 환경의 차이도 있다지금이야 정보기관의 선거개입금품수수언론 통제와 같은 것이 없지만 (이라고 말은 했지만 없다고 말은 못하겠다어쨌든 강도는 그때가 훨씬 센 것만은 사실이다.)그 당시에는 만연했던 일이었고그 척박한 토양을 딛고 29.3%의 지지율을 얻은 것은 사실 이미 국민의 마음이 기울 징조가 보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것 뿐 아니었다일부 지방에서는 무소속이나 다른 당으로 출마해 당선되면 신민당에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지금도 적지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다시 신민당에 합류하고관제야당 (야당이 없으면 이상하니 그냥 형식적으로 만들어놓은 야당)이었던 민주한국당의 몇몇 의원 등이 신민당으로 들어와 나중에는 헌정 사상 야권이 가져간 최대의 의석인 103석이라는 큰 수를 차지해 거대 야당이 되기도 했다이 거대 야당을 바탕으로 민주화 세력은 자신의 목소리를 더 힘주어 낼 수 있었다.


민주화 세력이 원했던 것은 그럼 무엇일까무엇보다 민주화다그럼 그 민주화의 선행 조건은민주 시민들은 그것을 직선제 대통령 선거로 보았다당시에는 국민이 대통령선거인단이라는 이름의 대통령을 뽑아주는 선거인을 뽑았고그 선거인이 대통령을 뽑는 제도였다물론 결국 국민이 뽑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런 질문이 내게 들어온다면 이런 식으로 대답하겠다. “전두환이 5000만 국민의 경우엔 하나하나 이름을 체크하고 누가 반대하고 누가 찬성하는지 일일이 찾아내 앞길을 가로막을 순 없다하지만 3000명 선거인단에 대해선 그럴 수 있다.”라고미국도 간접선거지만 미국과 당시 대한민국은 사정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공정한 선거와 깨끗한 마무리가 없는 선거에서 선거인단은 권력이 있는 쪽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뭐 대통령 선거인단과 그 전신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인단과 딱히 다를 것 없는 조직이었다.)의 선거 기록만 확인해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무효표 1, 2많아야 5표 말고는 전부 여당 표이며, 12대 대통령 선거는 조금 낮긴 했지만 진짜 야당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전두환이 90% 넘는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 86년에 있었던 민주화 운동. 당시 민주화 세력이 요구한 주요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103석이라는 거대한 의석을 확보한 신민당은 서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처음엔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시작했는데김영삼이 “1000만으로 하자고 제안하자 1000만으로 늘려 (통도 크시다!!) 10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인다(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거 대단히 웃기는 일이다글을 따라가 보면 알겠지만 103석이라는 거대 의석을 기반으로 신민당이 한 일은 서명운동밖에는 없다그것 말고 대보라면 이민우 구상이나 야권 분열’ 같은 뻘짓밖에는 없다그게 뭔지는 그때 가서 설명하자.)

 

그러던 중 몇 가지 사태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요약하자면 5.3 인천사태부천서성고문사건건국대 농성사건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4가지 정도가 될 수 있겠다우선 5.3 인천사태부터 시작하자신민당에서 실시한 1000만 서명운동을 위해 발족한 학생단체를 결성하는 대회였던 ‘1000만 서명운동 인천 및 경기지부 결성대회를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다조용히 있었으면 결성대회 하고시위 조금 하다가 돌아갔을 학생들을 경찰이 일부러 진압을 한 사건이 벌어진다.

 

 ▲5.3 인천사태 당시의 사진



사실 이런 사건은 비일비재했다시위하고 진압하고 시위하고 진압하는그런 일상의 일에 하나였을지 모르는 사건이었다하지만 내가 굳이 이 사건을 꺼낸 것은 후에 발생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라는 것 때문이다. ‘권인숙이라는 여성이 있었다학생운동을 하던 사람인데시위를 하다 부천경찰서로 연행된다그곳에서 취조를 받던 도중경찰서의 문귀동 경감이 이 여학생을 5.3 인천사태의 배후로 몰다가 성고문 (말이 성고문이지 그냥 강간이다.)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 당시 사건에 연루된 권인숙 씨의 현재모습. 현재는 명지대학교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다.


▲ 당시 권인숙 편에 섰던 유일한 변호사, 조영래


권인숙멋진 여자였다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하지만 그녀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이 사건을 폭로했다법정에서 당당히 사실을 밝혀내던 그녀의 모습은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다물론 정부는 운동권 여학생이 자신의 성()마저도 투쟁의 도구로 사용했다고 발표하고문귀동 경감은 불기소 처분을 받는다(6.29 선언 이후에 다시 5년 징역형을 선고받기는 한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국민은 어떤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이 사건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언론에게 보도지침을 쏟아냈다신문의 앞에 위치하는 정치면에서 뒤에 위치하는 사회면으로 기사를 옮길 것기사를 축소 보도할 것성폭력이나 성고문 등의 어휘가 아닌 성모욕(한글 문서로 쓰고 있는데이 단어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없는 단어라는 거다창조력도 대단하시다.)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도록 한다출처도 기관명도 없는 보도지침을 언론은 그대로 따른다여기서 국민이 깨달은 것이결국 언론과 정부그리고 또 다른 권력기관 모두가 정부 하에 완벽히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국민 외에는 믿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권인숙씨는 이후 여성운동가가 되어 지금까지도 여성 운동을 하고 있다.)

 

▲ 당시 성고문을 했던 부천경찰서의 문귀동


▲ '성모욕' 어휘를 사용한 경향신문 기사. 내용은 문귀동 경장은 파면과 정상참작으로 인한 기소유예 내용이며,

제목에는 '성적 모욕'이라고 사용하고, 내용에는 '성모욕'이라고 사용하는 등 '성추행','성희롱'이나 '성폭행'이란 단어는 없었다.


다음 사건은 건국대 농성사건이다. 1986년 10전국의 29개 대학 학생들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학생운동 단체를 결성하려고 하는 결성식을 여는데이 행사에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자 경찰들이 진압한 사건이다말로는 별 것 아니어 보이지만 실은 꽤나 큰 사건이었다경찰이 건국대학교 전부를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오자학생들은 건국대 내 5개 건물로 나누어 숨는다경찰이 각 건물을 포위하자 농성을 시작하고경찰은 포위 상태에서 안으로 음식도물도 반입하지 않다가 (제네바 협정에 의하면 전쟁포로한테도 이렇게는 못하게 되어 있다.)건물 내에 침입하여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는데이 과정에서 1500명이 넘게 체포되었고, 1300명 가까이가 구속되었으며총 398명이 기소 처분되었다이는 단일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 당시 경찰에 연행되는 학생들


다음 사건은 1987년 1월 14일에 발생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다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었던 박종철 군이 민주화 운동을 하던 친구 (박종운 군)의 소재를 대라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들의 요구에 불응하다가 고문을 당하고결국 사망하게 되는 사건이다이 사건은 묻힐 뻔 했지만 여러 관계자들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이 사건을 다시 덮기 위해 치안본부장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중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라고 발표하였으며같은 자리에 있던 치안본부 대공 담당 차장은 책상을 ’ 치니 박군이 하고 쓰려졌다.”는 말을 하였다(“누드사진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검색해 봤다.”던 심재철 의원이나청문회장에서 모르겠습니다.”와 ㅋㅋㅋ만 반복하다 장관이 된 윤진숙이나뭐 이런 분들보고 요즘은 창조적이라고 하던데그 정도로는 발끝도 못 따라온다이 정도는 돼야 창조적인 거다미래를 창조하겠다는 박근혜 정부는 잘 보고 배우기 바란다.)

 

이 때 박종철 군의 아버지가 장례식에서 했던 말도 꽤나 유명해졌다.

종철아잘 가그래이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가슴을 울리는 한 마디였다혁명그것은 가슴을 울리는 한 마디의 말과 한 소절의 음악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당시 물고문이 있었던 현장


▲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관련 시위


▲ 박종철 군 아버지의 말을 인용한 현수막


이 네 가지 사건 (사실은 이 외에도 더 많은 사건이 벌어지지만 주요한 것이 이 네 가지다.)으로 민주화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져 간다직선제 요구는 날을 갈수록 더해 가고전두환 정권은 어떤 특별한 조치 없이는 돌파할 수 없을 정도의 난국을 맞는다.

 

1편은 이만 마칩니다. 1편에서는 6월 항쟁의 배경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는데, 2편에서는 6월 항쟁의 경과를, 3편에서는 6월 항쟁의 의의와 그 뒤의 이야기를 다루어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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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 프로필사진 보랏빛꿈 2013.05.25 19:17 신고 본문 중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에는 고결한 역사의 흐름이 있다. 아주 가끔 민중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역사를 후퇴시키기도 하지만 민중은 역사를 언제나 양의 방향으로 끌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이 결실을 거둘 때마다 역사는 한 단계씩 발전했다.'
    ......그 노력들이 멈추지 않기를*~
  • 프로필사진 허허허 2016.09.30 19:56 신고 김대중 똘만이 문익환이가 단식하는 김영삼이가 보름달 빵을 몰래 먹었다는 거짓말을 햇다. 기왕 먹을 바에야 단식하다가 빵을 몰래 먹었겠는가 차라리 영양죽을 먹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개같은 놈들
    문익환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가? 민주화를 위해서 아것도런 한 것이 없으면서 민주화영웅 대접을 받는 대중이가 미국에 가서 놀고 있는데 영삼이가 민주화 투쟁에 깃발을 휘날리게 되면 큰일이다 싶었거든
    영삼이와 대중이가 같이 민추협을 통해 시민당을 만들어 2.12 총선 승리를 하였다고 하는데 형식은 맞는데 실상은 영삼이 인기가 높아지자 허겁지겁 귀국하여 민한당 승리를 위해 정대철 등 자기 똘만이 당선을 위해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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